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

 



  • 이름: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 (Oskar Paul Dirlewanger)[1]
  • 생몰년 : 1895년 9월 26일 - 1945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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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보
2.1. 개전 이전
2.2. 특별한 인연, 그리고...
2.3. 2차대전 당시
2.4.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2.5. 바르샤바 봉기
3. 종전 이후 죽음
4. 기타
5. 유사 인물


1. 개요


나치 독일무장친위대 상급대령[2]으로서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3]와 더불어 바르샤바의 살인귀이자 강간범이다. 전쟁 이전부터 민간인을 강간한 화려한 전과를 가졌으며, 수많은 전쟁터에서 무자비한 학살과 민간인 강간을 지시했다.
나치 독일의 잔인한 전쟁범죄에서는 반드시 디를레방어의 이름이 나오며, 제2차 세계대전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디를레방어는 최악으로 꼽히며 "사디스트이자 시체 애호가"로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학자 크리스 주교는 "디를레방어는 SS 중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내렸고, 티모시 스나이더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서 가장 잔인하며 잔인성으로 경쟁할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다.
오죽하면 폴란드에서는 요제프 멩겔레, 한스 프랑크 같은 악마들이나 하인리히 힘러,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히틀러 같은 마왕들보다 디를레방어를 더더욱 증오하는 사람들도 많다. 게다가 마약까지도 손을 댔으며, 알코올 의존증이 심했고, 이로 인해 굉장히 정신적으로 불안했고 성격이 아주 고약하고 잔인했다고 한다. 종전 후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2. 행보


뵐츠부르크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육군 제123척탄병연대기관총 사수로 입대한 디를레방어는 이후 육군 보병장교로 임관하여 2급,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했다. 전후 자유군단에 들어가 루르 지방 및 슐레지엔에서 공산 세력과 싸운 디를레방어는 이때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을 틈틈히 공부하여 1922년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3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디를레방어는 자신이 취직한 회사에서 돈을 횡령하여 당에서 축출당했지만, 1년 후 재입당해 무장친위대에 들어갔다.

2.1. 개전 이전


그 사이에 은행원과 교사 등의 직업을 전전했던 디를레방어는 1934년에 독일여성동맹의 대원이던 13세 소녀를 성폭행한 혐의와 불법 무기 소지 및 횡령에 대한 유죄 판결로 2년 금고형의 판결을 받고 직위와 박사 학위를 상실했다. 재판에서 "왜 성폭행을 했냐"라고 묻자 "술에 취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해댔고, ''그 여자아이는 그렇게 좋은 아이가 아니다'' 라며 피해자의 단점을 부각시켰고, 결국 그것이 인정되어서 2년형 판결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풀려난 뒤 '''또 강간 미수로 이번에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4]

2.2. 특별한 인연, 그리고...


그러나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디를레방어는 강제수용소에서 고틀로프 베르거를 만나서 친구가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스페인 내전에서 의용병으로 참가해 전투에서 3번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이 부상으로 명예회복을 한 디를레방어는 나치당의 지지를 얻어 다시 박사 학위도 회복했다.

2.3. 2차대전 당시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장친위대에서 박사 학위를 소지했던 디를레방어는 친위대 중위로 임명되었는데, 나치 친위대에서 친구가 된 베르거의 추천으로 1940년 6월 24일에 무장친위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디를레방어는 자신의 부대를 지휘하여 1942년 5월 24일에 2급 철십자 훈장, 1942년 9월 16일에 1급 철십자 훈장, 1943년 12월 5일에 독일황금십자장을 수상하는 화려한 전과를 기록했고, 몇 번의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2.4.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디를레방어는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에 개입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디를레방어는 사람들을 축사에 강제로 쑤셔넣고서 그 축사에 불을 지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여기서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퍼부어서 빠져나가려던 사람은 가루가 되어 버렸다.[5] 게다가 유대인들을 강간했고 젊은 여성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것을 '''즐기면서''' 수행했는데, 이러한 디를레방어의 악행으로 3만명이 학살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살해당한 사람의 숫자는 200여 개의 마을에서 '''약 12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2.5. 바르샤바 봉기


1944년 8월에는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자 디를레방어는 제36 SS 무장척탄병 사단을 이끌고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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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방사기로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독일군
바르샤바 봉기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토록 범죄에 관대한 지휘관의 지휘 아래 봉기 초기에만 6만 5,000여 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이 죽어나갔고, 심지어 이들 중에 일부는 '''봉기에 가담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학살과 강간을 저질렀다.'''[6]
9일부터 18일까지, 독일군은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에 대규모의 공격을 가했다. 폴란드군이 곳곳에서 반격을 가했지만, 독일군은 폭격과 포격으로 응답했고, 이윽고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폴란드군은 대공 방어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군의 미칠 듯한 폭격에 제대로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 독일군은 부상당한 폴란드군이 모인 병원에까지 슈투카 급강하폭격기로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일부 병원에서는 심지어 분살[7]까지 일삼았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음악에 맞춰서 사람들을 채찍질해대거나, 고문하거나, 강간하는가 하면, 사람들을 끌어낸 다음에 화염방사기로 사람을 태워죽이는가 하면[8] 산 채로 사람에게 가솔린을 부은 다음에 분살시키는 짓을 자행했다. 심지어 아이를 칼로 찔러서 죽여버리기도 했으며, 그 아이가 죽자 그냥 그대로 태워버렸다. 게다가 병원 창문과 발코니에 여성들을 걸어놓은 다음에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또한 여자와 어린이를 산 채로 전차에 묶어 돌진시켜 여자와 어린이들을 봉기군 손에 죽이도록 만드는 짓을 자행했다. 즉, 인간방패라 보면 된다.
'''사람들을 죽이고 겁탈하느라 디를레방어 사단은 하루에 1.6km도 진격하지 못했다.'''

3. 종전 이후 죽음


디를레방어는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가 '''군기를 위반하는 행위'''를 몇 번이나 무시하여 친위대 법무본부에 몇 번이나 이름이 올랐지만, 친구였던 베르거의 개입으로 무마되었다.[9] 어쨌든 이러한 화려한 공로(?)와 1944년 9월 30일 빨치산 토벌의 공로로써 기사 십자장을 받았다. 그러던 중에 1945년 2월 중순에 오델 강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던 디를레방어는 도중에 흉부에 총상을 입고 후송되면서 자신의 부대와 떨어지게 되었다. 나치의 파멸이 코 앞까지 온 4월 22일, 디를레방어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몸을 숨겼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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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당시의 디를레방어
종전 후인 6월 1일, 독일 남부의 소도시 알트샤우젠에서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자유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었다. 자유프랑스군(Free French forces)에 체포된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는 미치광이 살인마(psychopathic killer) 아동 성추행범(child molester)이였으며 범죄자들로 구성된 악명 높은 디를레방어 여단의 지휘관이였기 때문에 같은 친위대 장성들조차 그의 좌천과 투옥을 원했을 정도로 평판이 나빴다.
6월 7일 디를레방어는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으로 사망했는데, 디를레방어의 감방동기 중 한 명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디를레방어가 폴란드인 교도관에게 맞아 죽었다고 했으며, 다른 기록에 의하면 알츠하우젠(Altshausen)에서 폴란드군 병사들(Polish soldiers)에게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디를레방어는 공식적으로 6월 17일 매장되어 사라졌다.

4. 기타


오토 슈코르체니와는 정말로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디를레방어가 계급빨로 눌러댔지만 독일 상층부에서 디를레방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친구인 고틀릅 베르거를 제외하면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디를레방어가 저지른 악행의 주 무대였던 폴란드, 벨라루스에서는 언급조차 금기시되는 볼드모트이다. 당연히 친위대, 국방군, 나치당원들을 비롯한 원조 나치들도 디를레방어를 싫어하였고 심지어 네오 나치들도 디를레방어는 '''사람 취급을 안한다.'''
그래도 비슷한 부류의 인물이었던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보다는 눈치가 있었던 듯 하다. 전쟁 말기로 갈수록 두 놈 모두 노답짓만 계속 하는 바람에 열 받은 자기 상관들이 언제 자신들을 해임해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이었고, 여기서 디를레방어보다 고위층 앞에서 더 나댔던 카민스키는 결국 까마득한 조직 선배이자 상관인 SS 국가지도자인 힘러와 직속 상관이었던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의 중요한 명령을 무시했다가[10]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살해된 반면 디를레방어는 상관의 말을 따르며 조용히 종전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저자세로 굽힐 줄 알았는 듯.[11] 그렇다고 디를레방어와 부대원들이 저지를 전쟁 범죄를 절대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12]

5. 유사 인물


  • 탁성록
  • 최덕신
  • 김창룡
  • 김종원
  • 기무라 헤이타로
  •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 인물이 아닌 단체이지만, 디를레방어의 정신적 후배들로 가득 차 있다.
  •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 이 놈은 상술한 인간들과 달리(물론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는 제외.) 디를레방어와 동 시기에 같은 전쟁에서 싸웠는 데다가[13] 무엇보다 이 놈도 디를레방어처럼 하급 장성이[14][15] 지휘하는 야전부대[16]를 지휘한 지휘관인 데다가 결정적으로 그들이 지휘한 부대는 전투력은 바닥이지만 전쟁범죄를 전투력에 지장을 줄 정도로 할 정도였다는 점이 똑같다.
[1] 독일어의 표기법상 디를레방거라고 써야 하겠지만, 연음이 되지 않는 독일어의 특성을 감안하면 디를레방어가 맞다고 볼 수 있다.[2] Oberführer는 초기에는 독일 국방군 육군소장과 동급이었으나, 무장친위대의 정식 편제 이후 상급대령으로 격하된다. 나름 한 사단의 지휘자였던 디를레방어의 계급이 이 꼴인 것은 디를레방어 사단이 실제로 여단 규모였던 것도 있지만, 학살에만 특화되어 있었을 뿐 실질적인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던 쓰레기 부대였던 이유도 있다. 애초에 형벌부대에서도 가장 답이 안 나오는 자들을 모아놓은 부대였으며, SS 상층부에서도 이 부대는 정식 SS가 아닌 단지 우리 지휘하에 있는 부대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3] 카민스키나 바흐-첼레프스키도 악랄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디를레방어는 최악이다. 다만 전체적인 악행으로 보면 바흐-첼레프스키가 제일 악질인데, 카민스키와 디를레방어와 달리 SS 대장까지 진급한 고위직 인물이었고(심지어 훈련병부터 올라온 인물이다), 동부전선의 파르티잔 초토화 작전을 총괄하였고, 저 두 사람도 바흐-첼레프스키의 부하에 불과했다. 그리고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지만 전후 재판에서 비열한 행각을 벌여 살아남았다.[4]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이었다.'''[5] 영화 컴 앤 씨에도 적나라하게 등장한다.[6] 물론 "드디어 이 더럽고 사악한 도시를 지구상에서 아주 없애 버릴 기회가 왔다. 전투원이건 비전투원이건 상관없다. 바르샤바에서 눈에 띄는 폴란드인은 다 죽여라" 라고 하인리히 힘러가 지시하기는 했다.[7] 쉽게 말해 불타(태워) 죽는 것을 의미한다.[8] 저 위의 사진에 있는 화염방사기를 민간인들에게 사용해서 분살(焚殺)했다는 이야기다.[9] 그 당시 나치 독일은 학살이나 강간을 종용하거나 묵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나치 독일마저 '''군기를 위반하는 행위'''라고 했다.[10] 사건의 발단은 1944년 8월, 카민스키의 상관이었던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는 여성, 어린이에 대한 학살을 중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이들에게 자비를 줄 목적이 아니라 프루슈쿠프(Pruszków)에 소재한 수용소로 이송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카민스키 여단은 이 명령을 씹고 이송되어야 할 대상자들에게 학살을 지속했던 것. 허나 카민스키는 자신의 부대를 전혀 통제할 수도, 아니 통제할 의지 자체가 없었고, 결국 카민스키는 무장친위대에게 폴란드 우치(당시엔 1차대전 때 독일 보병대장까지 오른 인물이자 전후 나치당원이었던 카를 리츠만의 이름을 따서 리츠만슈타트라고 불렀다.)에서 살해당했다. 살해 명령을 내린 것은 바흐-첼레프스키라고 추정된다. 참고로 바흐-첼레프스키는 상술했듯이 카민스키의 상관이었으나, 카민스키는 본인과 휘하 부하들이 힘러의 직접 지휘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바흐를 계속 무시했었고, 결국 참았던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자기의 부하인 카민스키를 죽이고 바르샤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는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폴란드계이다.''' 다시 말해 나치 독일 관점에서는 바흐나 카민스키나 열등한 슬라브족이었던 것.[11] 하지만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디를레방어는 친위대 시절 내내 자기 친구이자 무장친위대 장성인 고틀롭 베르거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도 기억해야 한다 여담으로 디를레방어에 대한 비난과 카민스키의 처형을 상부에 건의한 이가 바로 몰락의 등장인물이자 밈으로 유명한 헤르만 페겔라인 무장친위대 중장이다. 참고로 이자는 양심이 있는 선인이 아니라 다른 국방군의 군인들이나 친위대원들처럼 독소전쟁 초기인 1941년에 벨라루스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전범이다. 게다가 페겔라인은 일선 부대 지휘관직에서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 잔혹 행위를 여러 차례 저질러서 문제를 일으켰다.(다만 그를 총애하던 힘러가 비호해 주는 바람에 이런 문제들로 문책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승진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국방군 장성들, 심지어는 무장친위대 내의 다른 장군들에게도 평가가 좋지 않았다. 이는 영화 몰락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그(그리고 페겔라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국방군과 친위대 장성들 모두)조차 경악해서 디를레방어에 대한 비난을 히틀러 면전에서 말할 정도면 얼마나 이 놈이 답이 없는지 잘 알수 있다.[12] 오히려 디를레방어는 동기 자체만 보면 카민스키보다 악질인데, 카민스키는 소련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가 된 무리한 집단농장화 를 비난하다가 잡혀서 정치범이 된 상태로 고역을 겪다가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에게 해방되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증오는 3자 입장에서도 납득이 갈 만했고, 무엇보다 수감 전까지는 평범한 시민이었다.[13] 특히 바르샤바 봉기.[14] 단, 디를레방어는 사단장임에도 불구하고 친위대 상급대령에서 커리어가 끝났다. 그 이유는 그가 지휘하는 부대의 구성원의 질이 창설 초기부터 영 좋지 않았는 데다가 전쟁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친위대 내에서도 정말로 노답인 병사와 장교들만 모였고, 실제로도 전투만 치렀다 하면 부대 손실률만 미친 듯이 높은 노답 행보를 보여주였기 때문. 따라서 친위대 상부에서도 이 부대를 정말 싫어해서 정말로 자기들 휘하 부대로 인정하기는 커넝 편제상 이리 짜졌기 때문에 억지로 데리고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게다가 전쟁 초반부에나 상급대령이 국방군의 소장급(서방 군대의 준장급) 취급을 받았지, 디를레방어가 사단장이 된 시기이도 한 후반부에는 대령급으로 격하되었으나, 그래도 사단장이었던지라 순수 영관으로 둘 수는 없었으니 장성 계급에 가까웠던 상급대령을 던져준 것. 애당초 상급지도자 계급도 자세히 보면 'der Reserve'란 말이 달려있는데, 이거 우리나라 말론 예비역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상급대령도 원래 상황에서는 달아주기도 싫은데, 전쟁 말기에 상황도 개판이니 진급이라도 시켜준다는 의미였다.[15] 반면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는 한 단계 낮은 여단인데도 불구하고 소장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학우인 콘스탄틴 보스코보이니크(Konstantin Voskoboinik)와 함께 독소전쟁 초장기부터 독일에 부역한 데다가 자기 친구가 암살된 1942년에는 로코트 자치국의 두 번째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 국민해방군(러시아어 : Русская освободительная народная армия, РОНА)이라는 일종의 자경단이자 민병대의 대장이 되어 1943년까지 자기가 지배하는 구역에서 아무런 도움 없이 파르티잔을 거의 몰아내어 독일군을 도왔던 공적이 있었고, 나중에 독일로 후퇴한 44년 이후에도 친위내 상부는 그것을 잊지 않고 그에게 소장 계급과 1급 철십자 훈장을 주었기 때문이다.[16] 디를레방어는 (나중에야 그렇게 되지만) 사단을, 카민스키는 여단을 지휘했고, 거기서 친위대 커리어가 끝난 반면 상술한 바흐는 이들이 각각 순수 영관급과 조잡한 민병대 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당시에는 이미 집단지도자(독일 국방군의 중장에 대응되는 계급이며, 한국군 기준으로는 소장에 해당한다.)였던데다가 이미 독소전쟁 초반 시점부터 파르티잔 토벌 총책임자 등을 맡았기 때문에 절대로 같은 급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