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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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봉기군의 구성
4. 봉기 발발
4.1. 시작
4.2. 진행
4.3. 독일군의 진압
4.4. 9월의 상황
4.5. 종지부
4.6. 소련군의 역할에 대한 의문
5. 피해
6. 영향
7. 여담
8. 대중매체에서의 바르샤바 봉기


1. 개요


이봐, 친구들아, 총검으로 무장하자
(Hej, chłopcy, bagnet na broń)

기나긴, 머나먼 길로, 뜨거운 가슴에
(Długa droga, daleka przed nami, mocne serca)

손에 카빈소총을 들고, 총검을 들고 포탄 속으로 가자
(A w ręku karabin, Granaty w dłoniach i bagnet na broni)

여명이 밝아온다, 바람이 불어온다
(Jasny świt się roztoczy, wiatr owieje nam oczy)

폐가 펌프질하고, 피가 뜨거워진다
(I odetchnąć da płucom i rozgrzać do krwi).

노래가 우리사이로 퍼져나간다
(I piosenkę, jak ręczę, nad nami roztoczy)

앞으로 전진 하는 행군 속에. 하나, 둘, 셋
(W równym rytmie marsza: raz, dwa, trzy)

(머리 위로)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Ciemna noc się nad nami roziskrzyła gwiazdami)

긴 밤과 낮 동안, 흰 견장은 먼지 길 위에 있다
(Białe wstęgi dróg w pyle, długie noc i dni)

새로운 폴란드의 승리가 우리에게 달려있다
(Nowa Polska Zwycięska jest w nas i przed nami)

앞으로 전진하는 행군속에. 하나, 둘, 셋
(W równym rytmie marsza: raz, dwa, trzy)

이봐, 친구들...
(Hej, chłop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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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봉기 당시 봉기군이 불렀던 노래
''''이봐, 친구들아, 총검으로 무장하자(Hej, chłopcy, bagnet na broń)''''
폴란드어 원문 및 노래(Media Player 필요)

'''언어별 명칭'''
폴란드어
Powstanie warszawskie
독일어
Warschauer Aufstand
영어
Warsaw Uprising
바르샤바 봉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8월 1일부터 동년 10월 2일까지 나치 독일 치하 폴란드 총독부의 도시 바르샤바에서 63일 동안 일어난 무장 봉기이다.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지시한 '폭풍'작전의 일환으로, 소련군이 당도하기 전에 나치 점령하의 바르샤바를 자력으로 탈환하기 위해 일어난 봉기이다.

2. 배경


1942년 여름, 이미 92,000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 중 26만명이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남아있던 약 10만의 유대인들은 곧 자신들의 운명을 깨닫고 학살당하기보단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일으켰으나 약 한달 만에 진압당하고 남은 유대인들은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 점령 폴란드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봉기였지만, 이 봉기는 연합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런 사실에 비통해하던 폴란드 망명정부의 유대인 관료였던 슈물 지기엘보임(Szmul Zygielbojm)이 자살하기까지 했다.
약 1년이 지나, 소련군에 의해 6월 22일 시작된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과는 매우 눈부셨다. 소련군의 진격에 독일군은 궤멸당했고 엄청난 크기의 지역이 다시 소련의 통제하로 들어갔다. 소련군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어서 곧 폴란드 영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작전이 끝나갈 즈음엔 바르샤바 함락도 목전이었다. 바르샤바 시내에선 소련군의 포성이 들릴 정도였다.
한편,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1942년 말부터 '폭풍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내부의 무장봉기를 통해 나치를 몰아내고 자력 독립하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이를 실행할 단체로 폴란드 지하국가(Polskie Państwo Podziemne, 속칭 PPP)를 지원하고 있었다. 1943년 중순부터 계획은 소규모로 실행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나치의 지배가 강력했기에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폴란드 이동의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소련군에 의한 폴란드 점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스탈린이 폴란드의 독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폴란드 지하국가에게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켜 소련군이 폴란드로 진격하기 전에 폴란드 각지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르부프, 루블린, 크라쿠프, 비아위스토크, 우치 등 폴란드 주요 도시에서 7월 말부터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남부의 주요 도시 르부프가 해방되었고 이 밖에 폴란드 각지에서 작은 도시들이 다시 탈환되는 등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가 잇달아 나오고 있었다.[2] 이런 성과들에 힘입어 폴란드인의 수도 바르샤바에서도 가장 대규모의 봉기가 준비되고 있었고 PPP의 주력인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AK)을 중심으로 1944년 8월 1일 17시(W-Hour)[3]를 기해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었다.

3. 봉기군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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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코모로프스키의 사진
폴란드 국내군과 민족주의 성향의 민족방위군(Narodowe Siły Zbrojne), 공산주의 성향의 폴란드 인민군(Armia Ludowa)이 힘을 합쳐서 20,000-45,000여 명의 대규모 봉기군을 편성하였다. 그들 중 2,000-3,500여 명은 민족방위군 소속이었고 수십여 명은 인민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8월 중반부터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해방된 유대인들도 봉기에 참여했다. 이미 가톨릭 폴란드계로 구성된 유대인 구출조직 제고타(Zegota)가 전쟁 기간 동안 약 6만여 명의 유대계 시민들을 구출한 전력이 있었다.
봉기군이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리라는 상당히 낙관적인 희망을 가진 것은 그 동안 소련의 반응을 보고 판단한 것이었다. 실제로 모스크바에 위치한 폴란드 방송국에서는 폴란드 국내군에게 계속 봉기를 선동하는 방송을 하였으며, 외곽에서는 소련군이 거의 바르샤바 시내로 곧 진입할 것처럼 빠르게 진격해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7월 31일, 봉기 지도자들이 바르샤바에 모여 회합을 가졌고, 그들은 다음 날 8월 1일 오후 5시에 봉기를 개시하기로 하였다. 이는 실책이었음이 드러났는데, 봉기군은 그 때까지 충분한 양의 무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봉기 직전 바르샤바 곳곳에서 파열음이 튀어나와서 독일군과 이따금씩 소규모 교전들을 벌였다. 봉기의 최고 지도자는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Tadeusz Bór-Komorowski, 1895년 6월 1일 ~ 1966년 8월 24일)였는데 그는 국내군 최고 지도자이기도 했다. 부르코모로프스키는 폴란드 왕국 시기부터 이어진 군인 귀족 출신이었다. 이 봉기가 실패하고 사로잡혀 복역한 그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반공 투쟁에 나섰으나 끝내 런던에서 사망했고 폴란드가 민주화된 1994년에서야 조국에 묻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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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봉기 발발



4.1. 시작


8월 1일 오후 4시 30분에는 최고 수위의 경계령이 독일군 진영에 하달되었고, 30분 후인 5시, 바르샤바에서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봉기가 일어나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각 건물에서 독일군을 향해 봉기군의 총알이 빗발치듯이 쏟아졌다. 독일군은 봉기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매우 당황하였다. 폴란드군은 독일군의 기관총 세례를 감내하면서 계속 공격해 나갔다. 그 날 바르샤바의 상당 부분이 폴란드군에 의해 해방, 8월 2일부터 봉기군의 신문배부가 시작되었고, 8일부터는 자체 라디오 방송인 '섬광'을 수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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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당시 봉기군의 점령지)

4.2. 진행


"저런, 대포도 없고 탱크도 없고 비행기도 없다니... 현대전에서 이런게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게요'''."

-이오시프 스탈린, 41년 8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Stanisław Mikołajczyk)[4]

에게[출처]

하지만 바르샤바 봉기는 시작부터 잘 풀려나가지 않았다. 바르샤바 내의 독일군은 7월 말의 병력 증원을 통해 15,000여 명에서 30,000여 명으로 불어난 상황이었고, 외곽에도 90,000여 명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30,000여의 병력은 봉기가 시작되자마자 증원되었다.
봉기군 사령관 중 한 명인 안토니 흐루시치엘(Antoni Chruściel)은 국내군이 장악한 영역을 8개 구역으로 구분하였다. 8개 구역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졌다.
'''구역'''
'''지역명'''
제1구역
도심(Warszawa-Śródmiescie), 구시가지(Warszawa Stare Miasto)
제2구역
졸리보시(Zoliborz), 마리몬트(Marymont), 비엘라니(Bielany)
제3구역
볼라(Wola)
제4구역
오호타(Ochota)
제5구역
모코투프(Mokotów)
제6구역
프라가(Praga)
제7구역
바르샤바 자치구역(Warsaw County)
제8구역
오켕치에(Okęcie)
기습적으로 독일군을 공격해서 바르샤바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으나, 바르샤바의 독일군 대부분은 전력을 보존한 채로 방어태세를 갖추는데 성공했고, 무엇보다 무기고 탈취에 거의 실패했기 때문에 봉기군의 무장상태는 극히 열악했다. 충분한 탄약과 무기를 갖춘 봉기군은 20,000-45,000여의 봉기군 중 2,5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봉기군의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은 1,000여 정, 권총은 1,750여 정, 중기관총은 7정, 대전차포는 20문에 불과했다. 기관권총은 300여 정이었고, 25,000여 발의 수류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관단총은 60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폴란드군은 브위스카비차(Błyskawica) 기관단총이라는 스텐 기관단총의 폴란드 자체 카피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중화기는 커녕 소화기와 탄약의 자체 생산능력조차 처음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기 보유 상태는 이후 시민들이 수류탄, 화염병, 각종 총과 시보레 밴에 철판을 붙인 간이 장갑차량인 장갑차 쿠부시, 박격포 등을 제작한 덕분에 계속 보강되었다. 봉기 기간 동안 하늘에서 연합군이 투하한 보급품도 도움이 되었다. 이외에도 폴란드군은 나치 친위대의 군복 저장고를 점령하여 쓰기도 했다. 그러나 봉기 당시 봉기군의 무장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게다가 무기고 탈취가 실패하였고, 따라서 외부의 도움 없이는 오래 지속하기 힘든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대의 전투차량이 폴란드군에 노획되어서 전투에 쓰였고 심지어는 5호 전차 판터 2량까지 노획하였다. 한편 봉기군이 노획한 2대의 판터는 각각 Pudel(혹은 Magda), Felek이라는 이름이 붙여 봉기군의 몇없는 기갑세력으로 쓰였지만, 이후 Felek은 배터리 고장을 일으켜 폐기되고 남은 탄약을 Pudel에게로 옮겼으며 Pudel은 4호 전차 H형, 헤처 등과 교전하는 등 몇 번의 전투를 겪고 반궤도 장갑차 1대를 격파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8월 11일 전투 중 큰 손상을 입고 폐기되었다.[5] 기록에 따르면 6호 전차 티거 1량을 노획했지만 노획한 당일에 손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도 봉기군은 다수의 독일군 기갑장비를 노획하여 사용하였다. 기타 차량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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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군복을 착용한 조시카 대대원의 모습. 어깨에 동여매어 착용한 폴란드 국기가 인상적이다.
반대로 독일군은 본토에서 재편성한 쌩쌩한 부대들이 반격에 나섰고, 소련의 포위를 탈출한 중앙집단군이 바르샤바 근교에서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또한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교량은 철저하게 파괴되거나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14일 비스와 강을 가로지르는 4개의 대교가 모두 파괴되었다. 그리고 친위대 제국지도자인 하인리히 힘러가 봉기 진압군의 총사령관으로 나섰고, 실제 지휘는 빨치산 진압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SS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6] 장군이 맡았다.
게다가 폴란드 국내군이 애당초 봉기를 일으켜 폴란드를 장악할 능력 자체가 부족했다. 당시 폴란드 국내군은 무기가 부족했던 탓에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군사적 요충지에 별로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연합군이나 연합군의 요청에 마지못해 출격한 소련군이 투하한 공중 보급품 중 30%만이 봉기군 점령지로 투하되었으며 나머지는 독일군의 손에 들어갔다. 더군다나 소련군은 낙하산도 없이 보급품들을 투하하여 대다수가 파손되었기 때문에 공수된 물자의 대부분이 사실상 사용불능 상태였으며, 그나마 온전한 탄약이나 총기류들도 소련제였기 때문에(...) 독일제 장비를 노획하여 사용하던 봉기군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스탈린이 바르샤바 봉기군에 대한 공수 지원이나 공수 지원에 대한 협력을 거부한 것도 어쨌든 명분은 있었다. 바르샤바 교외 라지민(Radzymin)에서 소련군이 입은 피해가 장난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호환가능한 소련제 장비를 보급해줘도 모자랄 판에 소련군은 보급품이 아니라 삐라(!)를 살포하기도 했는데, 소련군이 삐라를 뿌린 대상은 독일군이 아니라 봉기군이었다. 게다가 그 삐라의 내용이란 것도 용기를 복돋아주는 내용이 아니라 '''무모한 모험을 중단하고 항복하라'''고 종용하는 아스트랄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비록 카틴 학살이 폭로되어 이에 경악한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소련과 단교를 하기도 했지만, 폴란드는 엄연히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즉 같은 연합국을 상대로 저런 짓거리를 자행한 셈이다.
소련도 독일군의 파쇄공격에 당한 후에는 당분간 공세를 펴기에는 여력이 부족했고, 굳이 바르샤바 봉기군을 구하기 위해 무리할 생각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기가 계속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4.3. 독일군의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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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뎀 바흐
(봉기 진압 사령관)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
(디를레방어 사단장)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카민스키 여단장)
나치의 인간백정 3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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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를레방어 사단
독일군은 첫 날부터 강력한 진압에 나섰다. 얼마 후 파견된 디를레방어 사단, 카민스키 여단, 아제르바이잔 보병 대대 등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진격을 개시했는데, 이들 병력 모두 인간백정들로 구성된 병력이었다. 디를레방어 사단의 경우 그 사단장인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Oskar Dirlewanger)부터 미성년자 성폭행 전과가 있었다. 게다가 이들 부대들이 실제로 거둔 전과는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민간인만 학살하는 상황에 국방군은 물론 다른 '''무장친위대 부대들마저 기겁'''하면서 카민스키 여단장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는 상부로부터 습격으로 위장한 암살을 당하고 디를레방어 여단장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는 보직 해임되었다. 참고로 디를레방어의 진격속도는 하루에 1.6km도 못갔다. 왜냐면 죽이고 강간해야되니까... 그나마 카민스키 여단은 디를레방어보단 덜 죽이고 다녔는데 그 이유인즉슨 그들의 진격로에 보드카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
이들 부대가 바르샤바로 투입된 첫날에만 38,000여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사망했고 볼라 지구의 세인트 라차루스 병원에선 1,360 명 이상의 환자와 병원 직원들이 처형당해서 봉기 초기에 총 65,000여 명 넘는 바르샤바의 시민들이 죽었다. 뒤이어 한스 랄너(Hans Lallner) 휘하 제 19기갑사단이 봉기 진압을 위해 바르샤바로 차출되었다. 독일군은 2개 그룹으로 나뉘어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해 나갔다. 독일군은 보급로 개방을 위해 오호타(Ochota) 지구를 공격했다. 집집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등 바르샤바는 스탈린그라드의 재현판이 되었다.
봉기 개시 2주 후, 독일군은 도심에서 기갑병력을 동원, 봉기군을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폴란드군은 뒤이어 반격했으나 독일군이 장갑열차를 동원하는 바람에 반격은 실패했다.
9일부터 18일까지, 독일군은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에 대규모의 공격을 가했다. 폴란드군이 곳곳에서 반격을 가했지만, 독일군은 공중 폭격과 대포의 포격으로 응답했고, 이윽고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폴란드군은 대공 방어력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군의 무자비한 폭격에 제대로 대응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독일군은 부상당한 폴란드군이 모인 병원에까지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로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일부 병원에서는 심지어 분살까지 일삼았다. 더군다나 볼라 지구의 세인트 라차루스 병원에선 1,360명 이상의 환자와 병원 직원들이 집단으로 처형당했다.[7]
8월 14일에는 계속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구시가지가 독일군에 함락당했다. 이곳에서 봉기군은 7,500여 명이 사상했고, 독일군도 4,000여 명이 사상했으며, 시민도 30,000여 명이 사망하고 7,000여 명이 부상당하고 37,000여 명(부상자 포함)만이 살아남아 바르샤바 시내로 도피했다. 독일군은 구시가지를 점령하면서 그 안에 남아있던 '''폴란드 민간인들을 싸그리 죽여버렸다.'''[8] 구시가지에서의 폴란드 군의 영웅적인 항전은 후에 폴란드인들의 뇌리 속에 깊이 뿌리박혔다. 9월 2일 경에 폴란드 봉기군은 구시가지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구시가지가 독일에 점령된 후 뒤이어 바르샤바 수력발전소가 독일군에 함락되었고, 8월 17일 무렵 독일은 600mm 자주박격포 칼[9]과 '''800mm K(E)''',[10] 원격 조종 대전차폭탄 골리아트 등을 투입시켰다. 18일까지 봉기군과 구시가지의 시민들은 도심으로 쫓겨 들어갔다. 바르샤바 곳곳에서 매우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하인리히 힘러는 이 전투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견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폴란드 봉기군은 곳곳에서 공격해 오는 독일군들을 막아내는가 하면, 폴란드군에 포위된 소규모 독일군들을 힘들여 분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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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를 향해 발포하는 칼 자주박격포[11]와 그 포탄에 맞아 터지는 푸르덴셜 빌딩. 독일군은 이런 식으로 바르샤바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폴란드 봉기군은 볼라 지구 함락 이후 좀 더 증강되었다. 폴란드 봉기군 소속 조시카(Zośka) 대대와 바체크(Wacek) 대대가 필사적인 전투 끝에 1943년에 이미 폐허가 되었던 바르샤바 게토를 점령했고, 겡시우프카(Gęsiówka)에 살고 있던 350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였다. 이후 이 유대인들도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바르샤바의 봉기군은 계속 저항했지만 독일군의 공격에 저항선은 차례차례 무너져 갔다. 심지어 독일군은 아이들과 여자들을 독일군의 전차 앞에 묶고서 저항군을 공격했는데, 이는 저항군이 전차에 총을 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아이들과 여자를 인간방패로 이용한 것이다. 8월의 뜨거운 날씨에[12] 방치된 시체들이 썩어나갔고, 수도와 전기가 끊긴 바르샤바에는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식량 사정이 상당히 심각했는데, 이는 봉기 사령부가 '''"소련군이 도와주겠지?"'''하고 대책을 세워놓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봉기 발발 후 소련군은 강건너 불구경 자세를 취했다. 사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 애초에 소련의 폴란드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봉기한 것이고 소련도 그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어느 지도자가 자기 국익을 깎아먹으려고 인력과 물자를 낭비하겠는가? 결과적으로 바르샤바는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게 되었다. 소빈스키(Sowiński) 대대는 바르샤바 내의 맥주 양조장을 점령하였다. 그 맥주 양조장에 저장된 보리는 도시 중앙으로 배달되었고, 시민들은 그 보리를 물과 함께 죽으로 끓여 먹었다. 소빈스키 대대는 결사적으로 맥주 양조장을 쥐고 있었고, 봉기 종료 시까지 양조장은 소빈스키 대대가 점령했다.
국내군은 봉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뉴스 영화도 제작했다. 안토니 보흐지에비치(Antoni Bohdziewicz)가 이끌던 선전팀은 각종 뉴스영화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8월 13일, 첫 뉴스영화가 제작되어 황금의 거리(Złota Street)의 팔라디움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각종 신문과 잡지들도 제작되어 시민들에게 봉기에 관한 소식과 정보를 제공하였다.

4.4. 9월의 상황


9월 10일에 이르면 봉기는 암울한 운명에 빠져들게 된다. 폴란드 봉기군은 봉기 내내 보급품과 무기가 부족했는데, 무기 상황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심히 암울했다. 많은 역사가들이 봉기 실패 이유로 가장 큰 것을 '보급품 부족'과 '무기 고갈'로 꼽는다. 만일 폴란드 봉기군이 좀 더 시간을 기다려서, 좀 더 많은 무기와 대공화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폴란드 봉기군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두들겨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13]
밀려오는 독일군을 피하기 위해 봉기군은 미로처럼 얽힌 바르샤바의 하수도로 숨어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계속 밀려들어왔고, 이제는 하수도 안에서도 수류탄이 터지고 독일군의 화염방사기로 인해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9월 말이 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시민들이 너무도 굶주렸고 시민들 잡아먹을만한 쥐조차 남지 않았으며, 봉기군의 무기와 탄약도 거의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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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9일부터 10일간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Erich von dem Bach-Zelewski)[14]는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도시를 떠나라는 권유문을 살포하였고, 폴란드 적십자가 독일군과 협상을 하여 2시간 동안 포격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15] 이후 독일군은 도시 북부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시민들은 도시 남쪽으로 도망쳤다. 11일에는 소련군이 다시 공세를 개시, 독일군을 비스와 강 서안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연합군 공군 소속으로 공수 지원에 참여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윌리엄 페얼리(William Fairly)는 1982년 이렇게 증언한다.

"바르샤바를 찾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그곳은 100km 밖에서도 보였다. 그 도시에는 화염 속에 잠겨 있었고 수많은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그곳에서는 곳곳에서 피어나오는 연기로 인해 타격할 물체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9월 중순,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폴란드 인민군은 국내군과의 이념의 차이를 넘어선 동포애로 어떻게든 바르샤바와의 교통을 연결하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지만, 이들의 포위망 돌파 공세조차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은 바르샤바를 포기하였다. 9월 14일에 지그문트 베링이 지휘한 공산 폴란드군은 비스와 강 동안 지구를 점령하였고, 15일부터 17일까지 1,200여 공산 폴란드군이 체르니아쿠프(Czerniaków)와 포비실레(Powisle) 등에 상륙, 투입되었지만 결국 패배, 23일까지 살아남은 병사들은 강을 도하하여 소련군 진영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영국미국도 더 이상 소련에게 압박을 넣지 못했다. 9월 18일에 미국이 대규모의 공수지원을 실시하였으나 봉기군 수중에 떨어진 보급품은 2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독일이 죄다 먹어치워 버렸다. 봉기 기간 동안 영국과 미국은 총 합계 200회에 걸쳐 공수지원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이 공수 지원으로 34기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의외로 소련군도 바르샤바 공수보급에 참여했으며 보급이 진행되던 기간 동안 2000소티로 연합군 최대의 출격횟수를 올렸다. 허나 보급에 투입된 항공기가 무려 Po-2 였기 때문에, 아담한 화물 적재량은 둘째치고 낙하산 없이 투하한 물품들 대다수가 소련제였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후에는 봉기군에게 투항을 종용하는 삐라를 살포하는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저질렀다.
치열한 전투 끝에 폴란드군이 보유한 영역은 조금씩 줄어들어, 20일에 이르면 원래 8개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던 폴란드군의 전투구역은 다시 3개 지역으로 개편되어야 했다.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의 『Rising '44』의 내용에 따르면

'''1944년 9월 18일 미군의 공수 보급을 바라본 두 시선'''

폴란드 국내군 사령관 부르코모로프스키의 회고:

그 날은 날씨도 좋고 햇살 가득한 날이었다. 청명한 하늘.

물론 바르샤바 주민들은 구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 비행기들이 도시 상공 머리 위로 날아가는 예상치 못했던 모습은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자아냈다. 폭격기들은 매우 높은 고도를 비행했고, 그들 뒤에는 하얀 반점들의 자국이 남았다. 낙하산들이었다.

독일군은 대공포화를 날려 대었으나, 비행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바르샤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정의 순간들을 헤쳐왔다. 병자와 부상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지하실에서 뛰쳐나왔다. 은신처에서 나온 사람들이 거리와 뜰을 메웠다. 그들은 이게 폴란드 공수여단의 도착이라고 믿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한 병사는 쌍안경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고함쳤다:

'이럴 수가, 독일군이 저들을 쏴대고 있어!'

한 장교가 그를 진정시키며, 그들은 공수부대원이 아니라 무기와 보급품을 담은 컨테이너에 불과하다고 설명해줬다.

'하지만 쌍안경으로 하늘에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다리를 볼 수 있다니까요!'

병사는 계속 주장했다.

그래도 독일군들도 자기 부대들에게 비상을 거는 것을 보니 똑같이 판단 착오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독일군 수송부대 병사 H. 슈트렉바르트의 일기:

우리는 오늘 지휘소에서 대부분이 뉴스필름에서나 보아오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13시 55분 경 미군과 영국군 비행기들이 약 1,000미터 상공에 처음 2~3대씩 짝지어 나타났다. 대략 50~60대는 되어 보였다(나는 54대까지 세다 포기했다). 거대한 새 무리가 날아오르듯 많은 수의 비행기가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뭔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것을 알아챘고, 그것들은 우리들 바로 상공에 있어 보였다. 낙하산이 펴진다! 경보가 내려지고 포화가 울려대었다. 몇몇은 사람과, 관절과, 손을 목격했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서부에서처럼 여기도 마침내 공수부대가 투입되는 것인가? 여기에 그럴리는 없는데. 낙하산이 내려오면서 나는 까만색, 초록색, 노란색, 흰색 등 갖가지 색깔의 낙하산을 목격했다. 오, 저것들은 보급품 용기들이다![16]

…다른 용기들 안에는 독일 탄약이 있었다. 오, 이렇게 예의바를 수가. 미군들은 우리가 황급히 서부에 버려두고 온 보급품들을 갖다주고 있었다. 그것도 비행기로 바르샤바에 있는 우리한테까지 배달해주다니![17]

사실상 당시 폴란드의 외적, 내적 상황으로는 이 봉기는 성공하지 못할 운명이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려 2달에 걸쳐 우세한 독일군에 맞서 싸운 폴란드 봉기군과 시민들의 투지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봉기군 작전처장이었던 레오폴트 오쿨리츠키(Leopold Okulicki) 대령의 경우는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수류탄과 함께 돌진하는 등의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했다. 전후에 오쿨리츠키 대령은 소련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4.5. 종지부


'''이 도시는 지구에서 사라져야 한다. 단지 국방군을 위한 열차역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 한조각 남기지 마라! 모든 건물은 기초까지 없애라!!'''

-SS 친위대 지휘관 회의에서 하인리히 힘러가 한 발언

'''바르샤바는 평온해져야 한다!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결국 바르샤바의 봉기는 우세한 화력과 기갑 전력을 보유한 독일군에 의해 진압당하기 시작했다. 9월 24일 모코투프를 공격한 독일군은 27일 모코투프를 점령했고, 29일에는 졸리보쉬가 공격을 받아 30일 함락되었다.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는 항복하면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 포로 대우를 해 줄 것이라는 선전방송을 하였다.[18] 봉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봉기군은 각 지역으로 분해되어 와해되었다.
10월 2일, 오후 8시를 기하여 바르샤바 모든 지역에서 전투가 중지되었다. 10월 4일, 바르샤바 공과대학 뒤의 광장에서 국내군에 소속된 대대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윽고 광장에서는 폴란드 국가인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르카'가 울려퍼졌고, 그걸로 봉기는 끝났다. 같은 날에 봉기군 신문라디오 방송도 중단되었다. 폴란드 봉기군은 세심하게도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들에게 위조신분증을 배부하여 살게 해 주었다. 독일군은 특수공병대대를 바르샤바 시내에 투입, 바르샤바 전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동유럽파리'''라는 명성을 듣던 바르샤바는 무참히 파괴당했다. 아직 살아남은 봉기군 중 일부는 항복을 거부하고 도시 곳곳에서 계속 절망적인 항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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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방사기로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독일군.
봉기 진압 후 히틀러는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해 없애버릴 것을 명했다. 히틀러는 1939년 6월 20일 전쟁 전에 이미 뷔르츠부르크의 독일 건설부를 방문해 바르샤바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독일식으로 재건할 팝스트 계획(Pabst Plan)을 세워두었는데 전황이 기울어 도시를 독일식으로 재건할 수 없자 히틀러는 이 도시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먼저 나치는 65만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을 프루슈코프(Pruszków)의 난민 수용소로 보내버렸다.[19] 시민들을 추방한 뒤 나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이미 절반 가까이 파괴되어 있던 바르샤바의 남은 건물들을 모조리 폭파했다. 폴란드의 상징이자 얼굴인 왕궁도 벽 한장 남지 않고 폭파되어 가루가 되었다.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있었던 2달간의 대혈전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봉기 기간 동안 바르샤바의 25%가 파괴되었고, 봉기 진압 후 독일군의 조직적인 파괴 때문에 35%가 더 파괴되었다. 1939년의 공습, 1943년 게토 철거,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도시의 85%가 완파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볼라 지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바르샤바 중심부의 신세계 거리(Nowy Swiat)의 경우 71채의 건물 중 65채가 파괴되었다. 인명피해 또한 엄청나서 봉기 기간 동안 16,000명의 봉기군 전사자를 포함해 최대 추산 20만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1945년 1월 7일, 소련군은 바르샤바를 '''"해방"'''시켰다. 이 실패는 영국의 폴란드 망명 정부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폴란드는 결국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고 망명 정부는 사실상 생명이 끝나 버렸다. 다만, 망명 정부 자체는 영국에서 계속 존속했다. 공식적으로 해체한 것은 1990년 폴란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로 이때 바웬사에게 헌법 전문과 폴란드 정부의 상징물 등을 증여했다.
구글 어스로 1945년 바르샤바의 처참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35년 사진과 비교해볼 때 건물들 대부분이 지붕이 사라져 있고, 다리들이 끊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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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바르샤바 볼라 지역 중 일부.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이 위치한 곳 주변부.
영상
1945년 바르샤바의 모습을 재현한 영상도 있다. 전쟁의 처참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4.6. 소련군의 역할에 대한 의문


소련군은 봉기 기간 동안 바르샤바 봉기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폴란드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미 폴란드의 공산 정권을 만들 인사들을 모아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소련군 군용열차를 타고 들어온 이 폴란드 공산당을 두고 서방에서는 "화물 열차 정권"이라 비웃었다. 스탈린은 연합군의 수송기가 봉기군을 지원하도록 소련 영토에 이착륙하는 것을 거부했다. 스탈린에게 있어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당한 전리품을 빼앗는 일'''이었다. 더구나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폴란드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소련과 직접 맞닿아있지도 않은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와는 비교하기 어렵다. 다만 이런 스탈린의 태도와 별개로 소련 공군이 봉기군에게 물자는 지원했고, 소티는 많았지만(2,000소티) 봉기군에게 직접 전달된 물건은 얼마 없었다.
한편 냉전이 끝나고 공개된 문서들에 의해서 실제로는 당시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진격하는 것이 '''군사적으로도 무리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소련군이 언제든지 바르샤바를 들이칠 수 있을 것처럼 압도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상당부분 스탈린의 허세였고, 실제로는 스탈린은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소련군에 바르샤바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재편성된 독일군의 파쇄공격[20]에 오히려 격파당했음이 드러났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된 지 약 1달 정도 지난 1944년 7월 22일 시점에서 바르샤바 방면의 선봉인 소련 제2 전차군은 810량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2 전차군은 적어도 7월 27일 시점에는 바르샤바를 향해 급속히 전진하여 바르샤바에서 북동쪽으로 고작 25km 정도 떨어진 오쿠니에프(Okuniew)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8월 1일 경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모델 원수가 끌어다 모은 4개 기갑사단을 직접 지휘하여 바르샤바 전면에서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사투 끝에 제2 전차군은 포위섬멸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어 263량의 전차만이 남았고 8월 5일에 전선에서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처럼 바르샤바 초입에서 대규모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련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도시 점령을 늦췄다 볼 근거가 빈약하기는 하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이끄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거리를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쳤고 그러다보니 전력 재정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21] 보급도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어느정도로 심각했냐 하면 '''전차가 철갑탄이 없어서 적 기갑차량을 고폭탄으로 상대해야 했을 정도이며 그 반대의 경우로 고폭탄이 없어 동축기관총 하나로 적 벙커를 부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에 연이은 공세의 마지막에 바르샤바라는 무리한 목표가 하달되어 공세종말점을 지나치게 되었고, 그 결과 독일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수십km를 밀려나 방어에 급급한 상태에 몰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봉기군에게 지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소련이 다음 공세인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봉기가 끝나고도 3달 이상 지난 후였다.[22]
즉 결론을 내리면 소련군에게 바르샤바 봉기군을 도와줄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 공교롭게도 마침 개입할 의지가 약했던 스탈린의 의도와 맞아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23]
봉기 시점에서 소련군의 바르샤바 해방 가능 여부 또는 스탈린나 의사와 결정에 관한 의문은 러시아 측 자료로 명백한 답을 내릴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완전한 접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진 중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과 별개로 바그라티온 작전 종결 단계에서 스탈린과 소련군의 작전 지휘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작전 마무리 단계에서 스탈린은 하나의 방면에 병력을 집중하기 보다는 폴란드 북부의 비스와 강 하구와 발트 해 방면, 중부의 바르샤바 방면, 남부의 리보프 및 루블린 방면으로 공세를 분산시켰고,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했음에도 독일군 전선을 완전히 붕괴시키지 못해 중부집단군이 전선을 다시 안정화시키는 것을 허용했다는 비판이다. 이 같은 견해에 따르면 소련군의 바르샤바 방면의 진격은 너무 늦게 이뤄졌고, 동원 가능한 병력 중에서도 일부만이[24] 동원됐다고 비판한다.

5. 피해


  • 폴란드 국내군
    • 병력: 45,000여 명
    • 피해: 16,000여 명 전사 또는 실종, 15,000여 명 포로
    • 민간인 200,000여 명 사망, 바르샤바의 85% 이상 파괴
  • 나치 독일
    • 병력: 39,000여 명
    • 피해: 3,000명 전사, 9,000명 부상[25]

6. 영향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발생한 봉기 중 가장 대규모의 봉기이자 가장 중요한 봉기로 평가된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대규모로 일어나 나치의 폭압을 물리치고 자신의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후 폴란드인들은 이 봉기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공산화 시기에는 폴란드 본토에선 주목받을 계기가 없었다. 봉기가 실패하고 1944년 말에 소련군이 독일로 향할 때 폴란드의 국내군 조직은 독일군에 의해 거의 궤멸 지경에 이르렀고, 바르샤바를 "해방"한 소련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 서방 폴란드군이 아닌 자국의 지원을 받아 조직된 동방 폴란드군만이 존재했다고 조작하였다.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 소련의 붉은 군대가 행진했고, '''해방자''' 붉은 군대는 아직 남아있던 국내군 소속 병사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보내버렸다.
훗날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의해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정보들은 검열을 거쳐 폐기되었으며 폴란드 국내군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1989년에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해체되고 폴란드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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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봉기를 기념하는 기념비
오늘날 바르샤바에는 바르샤바 봉기 기념비(Pomnik Powstania Warszawskiego)가 세워져 있다. 이 봉기 기념비에는 바르샤바 봉기 당시의 봉기군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념비는 바르샤바 봉기 45주년을 기념하여 1989년 8월에 세워졌다. 또한 매년 8월 1일에는 이날을 되새기기위해 1분간 사이렌이 울린다. 이때는 시민들, 자동차 할것 없이 모두 잠시 정지해서 1분 동안 침묵을 지키며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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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봉기 60주년을 맞아 경례를 하는 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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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앞에 선 슈뢰더 총리.
바르샤바 봉기 60주년인 2004년 8월 1일에는 독일 총리인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추모식 기념비에 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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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한국에서의 친일논쟁처럼 폴란드 기득권들은 대부분 공산정권 때에 잘나갔던 사람들이나 그 자손들인지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들도 전체 폴란드인 중에서는 소수이다 보니 바르샤바 봉기를 대놓고 격하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애초에 바르샤바 봉기 자체가 나치 독일과의 싸움이었지 소련과의 싸움은 아니었기 때문에 폴란드 내 친러 세력의 입장에서도 굳이 안 좋게 평가할 이유가 없다. 폴란드에서 친서방파와 친러파,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가 일치단결로 의견을 내는 게 독일의 폴란드 침략에 대한 비판이다.
2014년 9월 말, 얀 코마사(Jan Komasa) 감독, 유제프 파브워프스키(Jozef Pawłowski), 조피아 비흐와치(Zofia Wichłacz) 주연의 바르샤바 봉기 70주년 기념작 영화 <Miasto 44>가 폴란드에서 개봉되었다. 제작 기간 8년, 제작 비용 8백만 달러에 달하는 대작으로 개봉 2주 만에 관람객 100만 명을 돌파하며 일약 폴란드 국민 영화로 떠올랐다. 봉기의 주축이 되었던 민간인 소년 소녀 지원병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바르샤바 봉기의 여러 군상들을 심리 묘사에서 상황 묘사에 이르기까지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는데, 위 본문에서도 언급된 봉기 직전의 불완전한 준비상황, 처절한 시가전, 독일군의 진압 과정과 사용된 무기 등에 대한 묘사가 치밀하다. 국내에는 2014년 10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플래시 포워드 부문에 바르샤바 1944라는 제목으로 초청되어 최초 상영, 소개되면서 호평을 받았다.
바르샤바 봉기 초반의 희망적 분위기와 봉기 후반의 절망적 분위기를 잘 나타냈으며 봉기군의 안습한 무장 상태 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연애 파트가 다소 진부하고 후반부의 전개가 늘어지는 면이 있다. 지나친 신파 요소를 제외하고 담담하게 그려냈더라면 바르샤바 봉기와 폴란드 국내군에 대한 공감대가 없는 외국인들도 즐길 수 있었겠지만 폴란드 국내용 영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7. 여담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수도가 된 바르샤바를 복구할 때 소련은 어차피 거의 파괴된 도시이기에 아예 새롭게 공산주의 스타일로 재건하려 했다. 하지만 그 소식이 알려진다음 날 수많은 시민들이 시청으로 몰려와 전쟁 전 바르샤바를 그린 그림과 사진을 보여주며 완벽하게 복구시킬 수 있다면서 항의했고 결국 시민들의 의견대로 다시 원래 모습대로 재건하기로 결정하였다. 단 3년만에 900여개의 건물을 비롯하여 전쟁 전의 바르샤바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건하기는 했지만 건축적으로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고, 바르샤바는 세계유산에도 등재되었지만 이는 바르샤바 봉기 때 침묵했던 서방 열강들의 사과 비슷한 것에 불과하다.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완전히 파괴한 탓에 전후 소련의 개입으로 수립된 폴란드 공산정부는 바르샤바를 재건하기 전까지 3년 동안(1945~1948) 우치에 임시정부를 두었다.[26] 지금의 바르샤바는 옛 모습을 참고해 완전히 새로 지은 도시로서, 복원된 2차대전 이전 건물과 소련 스타일 건물(문화과학궁전 등), 현대식 건물이 섞였고 난개발이 매우 심하다. 폴란드에서 중세 및 근세 때부터 이어진 오래된 건축물은 고도 크라쿠프처럼 파괴가 덜한 도시에나 있다. 폴란드 영토가 아니었던 말보르크나 브로츠와프[27]의 독일 유적을 폴란드 것이라고 우기고는 있는데, 이는 다들 흑발인 집안에서 금발머리 아이를 내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웃픈 현실이다.
잘 안알려진 사실이지만, 외국인들도 이 봉기에 각각 진압군, 봉기군 양쪽에 참여했다고 한다. 바르샤바에 거주하던 흑인도 봉기군에서 싸웠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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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군에서 쓴 800mm 철갑탄 한 발이 폴란드 육군 박물관에 전시중이다.

8. 대중매체에서의 바르샤바 봉기



sabaton의 Uprising은 바르샤바 봉기를 기리는 곡이다.
[1] 위의 병사가 들고 있는 총은 M3 기관단총이다.[2] 하지만 이 도시들은 곧 소련군에게 점령되었다. 봉기의 주축이던 국내군들은 소련군 지휘하의 폴란드군에 편입될 것을 강요받았고, NKVD는 이를 거부한 국내군들을 체포하여 굴라그로 보냈다. 전쟁이 끝나가도 동유럽에 해피엔딩은 없었다.[3] Godzina W. 폴란드어로 폭발을 뜻하는 wybuch에서 따왔다.[4] 당시 폴란드 망명정부 대표.[출처]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원제 : Russia's war), p.334[5] Pudel은 월드 오브 탱크에 첫 번째로 구현된 폴란드 전차다.[6] 조상이 포메른에 정착한 폴란드계 지주귀족이었다. 원래 성은 폰 첼레프스키로 1930년대에 폰 뎀 바흐로 공식 개성하였다. 그러니까 '''봉기군과 진압군 지휘관이 모두 같은 민족이었다'''는 아이러니가 된 것.[7] 출처:2차 대전의 마이너리그[8] 당시 독일군의 진압 목표부터 바르샤바를 철저한 본보기 삼아 밞는것이였기에 초기 볼라 지구와 오호타 지구 점령시점부터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고 최종적으로 약 한달간 20만명에 이르는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9] 정확히는 1941년형 540mm 포신 탑재형이다. 그러나 이것도 충분히 강력한 대포다.[10] 이 녀석은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모든 무기 중에 단순 화력만 치자면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현재까지 나온 모든 대포들 중에 아토믹 애니2B1 오카를 제외하면 이 녀석만큼 강력한 것은 전무후무했으며 강력한 만큼 엄청나게 비싸서 단 1문만 만들고 2호기는 공사하다 중단했으며, 포탄 운동에너지 18억 줄에 진지구축작업만 3주가 걸리고 세바스토폴에서 실전을 겪었을 때는 세바스토폴 시가지에 높이 12m, 넓이 12m의 크레이터(...)까지 생길 정도의, 무장한 적들을 향해 쏴도 돈 아까운 무기의 포구를 '''바르샤바의 비무장 시민들''' 쪽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여담으로, 당시 쓰인 800mm 철갑탄 한발이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육군 박물관에 현재 전시되어 있다.[11] 사진에 찍힌 차량은 "치우(Ziu)"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 실물을 쿠빈카 전차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12] 폴란드에게 닥친 1944년의 여름은 유난히 덥고 뜨거웠다고 한다. 너무나도 뜨거워서 도로의 아스팔트가 물렁물렁해질 정도였다고.[13] 그런데 봉기를 연기했다면 국내군은 어떻게 힘도 써 보지 못하고 그대로 소련군의 손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14] 첼레프스키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폴란드계였다.[15] 사실 독일군도 이미 26,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상태여서 소련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바르샤바에서 전투를 계속한다는 것이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16] 바로 그 폴란드 공수여단의 바르샤바 공수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검토되고 있었으며 폴란드 공수부대원들의 간절한 숙원이기도 했다. 허나 폴란드 공수여단의 바르샤바 공수는 무산되었고, 바르샤바 대신 투입된 곳이 바로 마켓 가든 작전이었다. 폴란드 공수부대가 마켓 가든 작전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문서에 잘 기술되어 있다. 여담으로 폴란드 공수부대가 마켓 가든에 강하하던 바로 그 시각에 바르샤바에서는 공수 보급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바르샤바의 봉기군들과 독일군 모두 이를 폴란드 공수여단의 투입이라고 착각하는 비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17] 연합군이 독일제 탄약을 공수한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당시 폴란드 국내군의 주요 무장은 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독일제 화기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당연히 독일제 탄약이 필요했다. 문제는, 국내군 점령지역이 매우 좁은 상태이다 보니 이 독일제 탄약이 대부분 독일군 측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18] 힘러는 바르샤바 봉기군을 포로로 잡지 말고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폰 뎀 바흐가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이 자는 자신이 내건 협정 조건을 모두 내다버린 후 바르샤바 내의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명령하고, 항복한 6만여 명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 볼라 학살(Wola Massacre)의 주범이다. 바르샤바에서뿐만 아니라 폰 뎀 바흐는 폴란드 침공 후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약탈하여 현지에 독일인들을 정착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친위대 장교로 파르티잔과 민간인들을 가리지 않고 도살했으며(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민간인 희생자를 파르티잔 희생자 수에 편입시켰다'''), 1943년 7월에는 라트비아 리가에서 3만 5천, 벨라루스, 폴란드 동부에서 20만 이상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괴물'''이다. '''진짜, 인간이 아니다.'''[19] 이들 중 약 55,000명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중 13,000명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20] 기동방어의 일종으로, 적군이 공격준비를 마치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격파함으로써 적군의 공세역량을 분쇄하는 것이다.[21] 심지어는 병력의 대부분이 정원수에 못미쳤고, 증원 병력의 대부분은 전투 도중 소련군이 '해방'한 지역에서 충원되었다.[22] 소련의 목표가 애초에 폴란드 공산정권 수립이었기 때문에 봉기군과 소련군이 양동으로 독일 식민지역 사령부를 파쇄하더라도 소련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공산당 지지자였다면 지역 정치장교 세력으로 키웠을지언정 절대 독자정부 수립은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처럼 바르샤바가 처참하게 박살나고 시민들이 학살당하지는 않았을테니 그나마 상황이 양호하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템페스트 작전 당시 실제로 전쟁 전 폴란드 제 3의 도시였던 르부프, 즉 현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는 폴란드 국내군이 구상한 그대로 내부 봉기에 의한 선 해방->소련군 진주로 독일군 축출이란 이상적인 과정을 통해 해방되었지만 남은 폴란드 국내군은 싸그리 적성 세력 취급받아 굴라그로 끌려 가거나 반소 게릴라로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23] 2차 세계대전 재조명이라는 다큐에서는 이 당시 스탈린의 의도를 극명하게 표현했다. '''독일군은 독일군대로 피해를 입고 친서방 폴란드 봉기군은 진압 및 괴멸당할테니 결과적으로 스탈린만 이득을 얻는 싸움이었다고. '''[24] 즉 바르샤바 공격에 800대의 전차가 아니라 8천대 이상의 동원이 가능했다 추산한다. 지나치게 결과론적이다는 견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도 공세를 분산시킨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25] 출처. 독일군 17,000여 명 전사 또는 실종이라는 설도 있지만, 사실 그만큼 피해를 입히기는 어려웠을 것이 확실하다.[26] 소련군이 폴란드에 들어오기 전에는 공산 정부가 루블린에 머물렀다.[27] 1945년까지 독일 영토였고 독일식 이름인 브레슬라우로 불렸다. 독일이 패망한 후 폴란드에 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