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디화 정변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진수런의 축출
3.2. 마중잉과의 전투
3.3. 성스차이의 2차 정변
3.4. 성스차이의 집권
4. 결과
5. 참고문헌


1. 개요


1933년 4월 12일, 신강성을 지배하던 군벌 진수런의 부하 천중 등이 반란을 일으켜 신강성 독판 진수런을 축출하고 신강성을 장악한 사건이다. 하지만 신강육군군관학교 교장 겸 독판공서 참모주임 성스차이의 반격으로 신강성의 지배자 자리는 성스차이에게로 돌아간다. 디화우루무치의 옛 이름이다.

2. 배경


1928년 이전에 신강성을 지배하던 군벌 양쩡신은 과거 좌종당이 대거 박탈했던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회족 등 무슬림 토착민들의 자치권을 복구했으며, 위구르인 봉기군에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여 진압하고, 러시아 적백 내전 시기에 몰려온 백군 난민 수만명이 신장에 들어올 때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등 10여년 동안 안정적으로 신강성을 다스렸다. 그러나 양쩡신은 국민당의 사주로 1928년 7.7 사건으로 살해되었으며 1928년 새로 집권한 진수런은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을 탄압하고 일방적인 한족 일방주의 정책으로 전환했다. 진수런은 위구르인 관리들을 해고하고 한족 관리로 교체했으며 위구르인 농민들의 농토를 무상으로 약탈해 한족 빈농들에게 분배했다. 심지어 위구르인 유력자들의 메카 성지 순례를 금지하고 위구르족의 왕공족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부족자치를 폐지했다. 이에 위구르족은 무장봉기를 일으켜 진수런의 폭정에 맞섰으며 위구르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진수런이 세금을 올리고 화폐를 남발하여 위구르족의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1931년, 하미와 투르판에서 율바르스 칸과 호자 니야즈가 진수런에 맞선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감숙성과 청해성을 기반으로 하는 신예 군벌 마중잉이 가세하여 신강성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한편 진수런은 양쩡신을 배신하고 집권했다는 한계 때문에 초기부터 신강성에서의 기반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중잉의 공격으로 계속해서 패하던 진수런은 비서 노효조(魯效祖)를 난징에 파견하여 군 전문가를 초빙하고자 했다. 이때 초빙된 인물이 국민혁명군 상교참모로 일하고 있었던 성스차이였다. 친공 성향 때문에 군부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던 성스차이는 교육 쪽에서 승진하려던 마지막 로비가 실패하자 진수런의 제안을 수락하여 신강성 독판공서 참모주임 겸 신강육군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육군군관학교에 대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진수런은 신강성에 기반이 없던 성스차이를 신임했고 신강성에서 가장 현대 군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성스차이는 신강성의 생도들을 휘어잡으며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3. 전개



3.1. 진수런의 축출


1933년 4월, 진수런은 마중잉을 토벌하기 위해 전병력을 신강성의 성도 디화로 집결시키라고 지령했다. 이때 성스차이는 동로 초비 총지휘에 임명되어 마중잉을 토벌하기 위한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장청에서 진수런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백계 러시아군으로 구성된 귀화군이 진수런에게 먼저 병사들의 안가비, 즉 정착비용을 요구하는 바람에 임금 협상을 두고 분규가 일어났고 성스차이는 먼저 자신의 휘하의 부대들을 이끌고 디화를 떠나 우라보로 출정했다.
그런데 4월 12일, 변방독판공서참모 진중(陳中), 디화 성방지휘관 백수지(白受之), 항공학교 교장 이소천(李笑天), 디화현장 도명월(陶明樾) 등이 소련에서 유입된 귀화군과 만주에서 건너온 동북의용군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진수런은 진중 등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난징으로 도주했고 장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1931년에 국민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소련과 신강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한 것이 걸리는 바람에 도움을 받기는커녕 법정에서 유죄가 선고되어 투옥되었다.
4월 12일, 이소천이 직접 경비행기를 타고 우라보의 성스차이에게 와서 디화의 상태가 매우 혼란스러우며 디화와 우라보를 잇는 도로가 이미 마비되었으니 2,3일 후에 디화에 올 것이며 귀화군과 교전하는 것을 피하라고 전했으나 성스차이는 이소천의 말이 시간을 벌기 위한 흉계라 여겨 즉각 모든 병력을 이끌고 디화에 입성하였다. 당시 성스차이는 신강 군부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인물이었으므로 그가 군대를 이끌고 디화로 들어오자 쿠데타 세력은 성스차이를 신강성 임시독판에 추대했다. 성스차이는 이를 수락하여 쿠데타 세력과 합작하였고 진중 등에 의해 임시 성정부 주석으로 추대된 유문룡은 성스차이를 임시독판에 임명했다. 이들은 10대 강령을 제정하여 신강성의 행정을 개혁할 것과 국민정부에 복종하겠다고 선언했다.

3.2. 마중잉과의 전투


일단 성스차이 정권의 초기 과제는 신강성의 안보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1933년, 호자 니야즈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 헌법을 제정하여 난징 국민정부와 국제연맹에 자신들을 독립국가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여기에 1934년 1월, 마중잉이 부대를 이끌고 디화에 대한 공세를 수차례 감행했다. 성스차이는 마중잉을 격퇴하기 위해 소련 전권대표 겸 디화 총영사 가레긴 아프레소프와 협상, 그를 자택으로 초대하여 자본론, 공산주의 선언, 레닌주의문제 등의 공산주의 저작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공산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내세우며 소련군 8단 5천명과 200만 루블 어치의 군사원조를 받기로 협의하였다. 소련군 8단은 비행기, 장갑차를 동원, 디화를 포위한 마중잉 부대를 격퇴하여 마중잉의 포위를 풀었다. 여기에 소련은 만주사변 이후 소련에 망명한 동북의용군 2천명을 성스차이에게 지원하여 마중잉을 공격하게 했다.
소련이 성스차이를 도와 마중잉을 제압한 것은 중국 내부의 회족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마중잉을 확보함으로 중국 내부 회족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한 것, 마중잉과 만몽 지역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일본 제국의 결탁을 방지하기 위한 것 등이 이유였다. 당시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마중잉을 부추겨 일본과 합작하게 했으며 일본이 마중잉에게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라고 부추기기 위해 무기를 지원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성스차이 역시 마중잉이 정말로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지 않을까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소련과 성스차이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게 됨에 따라 성스차이는 소련의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마중잉을 계속 공격했고 1934년,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멸망시키고 6월에 교전을 벌여 마중잉을 신강성 남쪽으로 거세게 밀어붙혔다. 이 전투에서 마중잉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쓰러졌으며 위구르족들은 마중잉에게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여겨를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이에 소련은 마중잉을 확보하기 위해 마중잉에게 소련에 망명할 것을 권했고 마중잉은 이를 수락하여 소련으로 떠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수년간 신강성을 혼란스럽게 했던 마중잉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3.3. 성스차이의 2차 정변


마중잉을 격퇴한 직후인 1934년 6월 15일, 성스차이는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이 신강성 독판에 올랐음과 마중잉을 토벌했음을 보고했다.
이전에 이미 급하게 보고한 이후, 서북 변강에서 군사작전을 하고 각게의 공민들에게 추천을 받아 일시적으로 독판의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고 맡은 임무가 막중함을 잘 알고 있으나, 부득이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진 전주석이 퇴직할 때 그를 반대한 각 민족대표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신장의 인민들이 안정을 찾아가며 평화를 기대할 만합니다.
하지만 마중잉 비적떼가 중앙의 명령을 위반하면서 그의 부대를 이끌고 신장 내 폭동을 도와주며 하미에 근거지를 삼아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살육하는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마중잉 세력을 전체 몰아내고자 하고 있습니다. 먼저 전보를 전달하여 위원장께 보고하고 시기를 지시받으려 합니다.
이는 신강성의 지배권을 인정해달라는 의도도 있었으나 6월 20일, 장제스는 성스차이가 신강을 잘 정리했다고 칭찬하면서도 선위사 황모송의 지시를 받으라고 하면서 국민정부의 종주권을 강조하였다.
군관학교 팽소현(彭昭賢) 동지가 성스차이에게 전달한다. 신강의 정치개혁은 당신의 노력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전보를 보고 마음이 흡족하였다. 마중잉이 명령을 위반하고 서쪽을 침공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군대를 이끌어 그를 공격한 것은 그에게 큰 타격을 가하는 일이며, 당신의 올바른 지휘로 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인 것이다. 역시 잘하였다. 더 노력하여 확실하게 복속시키도록 하라. 마중잉을 본보기로 삼아서 변강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모든 신강의 선후문제는 황모송 선위사를 따르면서, 게으르지 않고 오만하지 않게 같이 서북 변강을 건설하여 잘 성장시키도록 하라. 이것은 우리의 바람이다.
며칠 후 중앙이 파견한 선위사 황모송이 신강 민중의 환영을 받으며 디화에 도착했다. 성스차이는 장제스가 자신의 정권을 승인할 생각이 없이 신강의 위기를 틈타 신강성을 장악하려는 것임을 간파하고 1934년 6월 27일, 소련군을 등에 업고 2차 정변을 일으켜 독판공서에서 성 부비서장 도명월, 행영참모장 진중, 항공청장 이소천을 처형하였다. 황모송도 더 손 쓸 수가 없어서 다시 난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어 1935년 4월까지, 성스차이는 자신의 정권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1934년 9월, 소련과 신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밀약을 체결하여 신강성은 사실상 국민정부가 아니라 소련에 종속되게 되었다.
  • 1. 신강 측은 무슬림 등의 폭동 진압에 필요하다면 소련 붉은 군대의 도움을 받아, 무기를 빌리고 공산주의를 실시한다.
  • 2. 행정, 경제 건설에 소련인 고문이나 기술자의 지도자를 받는다.
  • 3. 국민정부와의 관계를 포함하여 대외중대사나 인사에 관해 소련의 총영사, 전권대표의 의견이나 동의를 구한다.
  • 4. 소련은 500만 루블의 차관을 제공한다.
이후 붉은 군대 8단의 신강 주둔이 공식화되어 1943년까지 주둔하게 된다.

3.4. 성스차이의 집권


1935년, 성스차이는 4.12 8대 선언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은 조항을 선언했다.
  • 1. 민족평등을 실행할 것.
  • 2.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것.
  • 3. 농촌을 구제할 것.
  • 4. 재정을 정리할 것.
  • 5. 관리의 품행을 단정히 할 것.
  • 6. 교육을 확충할 것.
  • 7. 자치를 추진할 것.
  • 8. 사법을 개량할 것.
이는 1933년 제정된 10대 강령의 재탕이었으나 국민정부의 외교 노선에 복종한다, 당화교육을 시행한다는 내용이 빠져 신강성의 독립노선이 강화되었다. 신강 사람들은 이것이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어록을 베낀 것과 같다고 평했다. 소련 총영사 아프레소프는 분명한 정치적 노선이 보이지 않으며 반제친소와도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고 신강학원 원장 두중옌이 정치상임시 방편에 불과하다고 논평하자 성스차이는 비판을 의식하고 다시 <9항 신임무>를 발표했다.
  • 1. 철저하고 엄격하게 청렴함을 유지할 것.
  • 2. 경제를 발전시키고 문화를 향상시킬 것.
  • 3.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것.
  • 4. 성 전체 인민들은 경작에 노력할 것.
  • 5. 교통을 편리하게 할 것.
  • 6. 신장을 중국의 영토로 영구히 보호할 것.
  • 7.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반대하고 중소 친선관계를 유지할 것.
  • 8. 새로운 신장을 건설할 것.
  • 9. 각 민족의 왕공, 이맘, 라마 등의 지위와 권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할 것.
성스차이의 부하들은 이에 대해 8대 선언의 내용이 발전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소련 역시 만족하였다.

4. 결과


이후 성스차이는 1944년까지 신강성을 공고하게 지배했다.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중국 공산당의 여러 고문들을 초빙하여 정치교육을 실시하기까지 했는데, 독소전쟁 이후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처형하는 등 소련을 버리고 다시 국민정부에 접근하려 했다. 그런데 소련군이 반격에 성공하자 다시 소련에 접근하려 하지만, 소련은 그를 장제스에게 넘겨버린다. 성스차이가 충칭으로 끌려가면서 신강성은 다시 국민정부의 지배를 받게 된다.

5. 참고문헌


  • 코민테른과 중국혁명관계사, 향청, 고려원.
  • 중일전쟁시기의 중소관계 : 성세재의 역할을 중심으로, 정형아, 중국근현대사연구 3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위구르족의 정체성과 중국 국민통합의 괴리, 송한용, 역사학연구 51호, 호남사학회.
  • 盛世才의 新疆지배와 성격, 이선희, 전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중국 신쟝 위구르 자치구 분리독립운동의 변화, 서윤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