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종당
1. 개요
청나라의 정치인, 군인이다. 이홍장, 증국번과 함께 양무운동의 실질적 지도자. 군사적 역량을 보면 청나라 최후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다.
2. 초기이력
1812년 후난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공부는 엄청나게 잘했던지 16세에 현에서 치뤄지는 부시에 합격했다. 밀덕후였던지 과거 본시를 위한 공부중에서도 여러 군사서적이나 병서를 즐겨 읽었다.
하지만 본시에 거듭 탈락한 후,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26세부터는 고향의 녹강서원에서 훈장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때 양강총독 도주와 알게 되어 그 아들의 가정교사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도주의 인맥을 이용해 37세에 흠차대신 임칙서와 알게 되었다. 임칙서는 당시 65세의 대정치인이었으나, 좌종당을 만나보고는 그의 안목에 경탄하여 자신이 모은 서역에 관한 자료를 모두 넘겨주었다. 임칙서는 중앙아시아 방면과 극동 방면으로 팽창하던 러시아 제국을 매우 우려해왔는데,[2] 바로 자신의 안보관을 계승할 이로 좌종당을 손에 꼽은 것이다. 이를 통해 좌종당은 평생 러시아를 경계하며 북방의 안보를 중시하였다.
3. 태평천국의 난
1850년부터 홍수전이 세운 태평천국이 장강 이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마침 이때 도광제는 붕어하고 함풍제가 즉위했다. 흠차대신 임칙서는 어명을 받아 이의 토벌을 위해 남방으로 이동하는 도중 사망하고 만다.
1852년 그동안 밀덕질로 유명해진 좌종당은 천거를 받아 호남순무(호남성의 군사책임자) 장량기 휘하에서 종군했고, 서생에서 갑자기 군인이 된 그는 엄격한 훈련을 실시하고 건실한 병참을 조직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군공으로 과거에 번번히 떨어지던 그는 같은 호남성 출신인 증국번의 천거로 4품관직인 경당에 올랐고, 이런 직위를 이용해 5000여명의 의병을 모아서 태평천국 토벌전에 가담했다. 관군이 너무 털려서 빡친 나머지 장수를 발로 차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
이후 애로호 사건(또는 제2차 아편전쟁)이 터지자, 자신의 병력을 끌고 서양열강들의 군대와 대결하였으나 그들의 압도적인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여 패배한다.
이후 프랑스 해군 장교인 오귀스트 프로테의 지원으로 상첩군을 창설해 태평천국 세력에 맞서게 된다.
태평천국의 진압에서 상첩군을 이끌고 세운 공로로 과거에 번번히 떨어지던 밀덕후는 일약 중앙정계에 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비슷한 배경[3] 의 이홍장과 함께 조정의 신진세력이 된다. 이들은 중체서용(중국의 체제에 서양의 기술을 접목시키자)의 양무운동을 개시하였고,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1860년대부터 각종 근대적(서양식) 무기공장이 세워진다.
4. 회민 반란 진압
좌종당은 1866년 섬감(섬서성-감숙성) 총독에 임명되어, 이곳에서 봉기를 일으킨 회족들을 진압하려 했다.[4] 그러나 중원에서는 다시 반청운동인 염군이 발생하여 혼란에 빠졌고, 좌종당군은 일단 변경의 회민 반란은 제쳐두고 중원으로 와서 염군을 진압하였다.
1868년 이홍장 등과 함께 염군을 완전 진압한후, 다시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회민 반란을 진압하였다. 회족들은 몇년간을 끈질기게 저항했고, 좌종당은 부장 유송산이 전사하는 등 큰 고전을 했으나, 결국 반란군의 정신적 지도자인 마화룡을 체포해 처형하고 난을 진압했다. 이후 계속 반란군의 잔당을 토벌하면서 1873년에는 난주(란저우)까지 진주했다. 이때 마점열, 마해안 등 여러 회족 지도자들이 투항하여 벼슬을 받게 되는데 이들의 부하들과 그 후손들이 훗날 민국시대까지 청해, 감숙, 영하를 지배하게 되는 마치(1869), 마린(1873), 마부팡, 마훙쿠이, 마훙빈, 마중잉 일족이다. 이들의 서북 지배는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나서야 끝장난다.
좌종당은 현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식량지원과 회족에 대한 보복금지 등 여러 원호책을 펼쳐 회족들을 다시 청의 신민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회족들은 오늘날의 닝샤후이족자치구를 중심으로 재정착했다. 적지 않은 수의 회족들은 청나라의 손이 닿지 않는 러시아 제국의 투르케스탄 영토로 도피하였다. 이들은 둥간족이라고 하는데, 후에 소련의 소수민족이 된다. 이들의 언어인 둥간어는 거의 중국어와 같은데, 단지 키릴문자로 표기 될 뿐이다.
5. 신장 재정복
섬서성-감숙성의 회민반란은 진압되었으나, 그보다 더 서북쪽의 신강지역, 특히 그중 타림분지 지역은 중앙아시아 출신 야쿱 벡이라는 야심가가 스스로 에미르를 자처하며 점거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원래 건륭제 때 대대적인 준가르 정벌로 청나라에 복속된 지역이어서, 신강(新疆, 새로운 강역)[5] 이라고 불렸는데, 이 정벌로 청나라는 우즈베키스탄 동부와 타지키스탄 일대의 코칸드 칸국과 인접하고 있었다. 코칸트는 청나라와 접경하면서 조공을 바치다가 이후 청나라를 호자들로 괴롭힌 결과 코칸트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을 맺는 등 한동안 전성기를 누렸는데, 청나라가 약화되자, 코칸트의 장군이었던 야쿱 벡은 처음엔 코칸트왕국의 사신으로 파견이 되었다가 나중에 코칸트 칸국이 막장이 되자 신강 지역에서 막장화된 코칸트 칸국의 군대를 불러와서 당시 타림분지의 쿠차 반란 이후의 여러 무슬림 세력들을 모두 점령했다.
좌종당은 이를 격퇴하기 위해 출진하려 하지만, 이홍장과 유명한 해방새방(海防塞防) 논쟁을 벌이게 된다. 좌종당은 러시아를 경계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북방의 방비를 주장했고, 이홍장은 영국 세력을 경계했기 때문에 해안지대의 방비를 주장한 것이다. 이리하여 태평천국에서 전우였던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심하게 다투어 원수지간이 된다. 이홍장은 신강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하고 그 도움을 받아 해군을 확충하여 영국에 맞설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출진을 앞둔 좌종당과는 타협이 불가능했다. 결국 광서제가 나서서[6] 1875년 두 방침 모두 행하기로 결정되었고, 좌종당은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12만 병력을 이끌고 신강으로 출진했다.
사실 이 원정은 무리가 따르는 것이었다. 신강은 남한의 16배에 가까운 면적을 가지고 있는데다가[7] 야쿱 벡은 청을 약화시키려는 오스만 투르크-러시아-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편전쟁-태평천국-애로우호사건을 거쳐 참패를 거듭한 청나라군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고, 충원도 받기가 힘든데다가, 중원으로부터의 보급로는 수천킬로에 이르다보니 사실상 원정이 불가능했다.[8] 이들 외세는 야쿱 벡이 청나라 원정군을 이길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좌종당은 야쿱 벡과 대립하는 사이였던 신장의 하미(쿠물) 술탄의 도움을 받아 하미 일대에서 둔전을 실시하면서 엄격한 훈련과 병참 및 보급 확충에 힘을 기울여, 중앙정부로부터의 보급이 어려운 변경지역에서 전투를 대비했다.
야쿱 벡이 발포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을 틈타 1876년 5월, 좌종당의 선봉은 우루무치 근교에서 야쿱 벡군을 격파하고 우루무치를 탈환했다. 야쿱 벡이 발포 중지 명령을 미처 철회하지 못한 상황에서 1877년 5월에는 투르판이 함락되고, 야쿱 벡이 화병으로 죽으면서 대세는 결판났다. 그리하여 11월까지는 신강 전역이 청나라군의 손에 떨어지고, 좌종당은 과거 이곳의 행정 단위였던 준가르부와 회부를 통합한 행정 단위인 신장성을 설치하게 된다. 야쿱 벡은 마화룡의 회민 반란군과는 달리 서양에서 수입한 신무기로 군인들을 무장시켰으나,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서 지역에서 신망을 잃고 있었던데다가, 탈레반식으로 샤리아법을 지배지역에서 실시했기 때문에 세속적인 투르크계 주민들의 인심을 잃었다. 그리하여 원거리에서 원정 온 청나라군은 여러 불리함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런 민심이반을 이용하여 위구르인들을 청의 편으로 만들어 쉽게 야쿱 벡의 왕국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야쿱 벡의 성년 자손들은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졌고, 미성년자 자손들은 궁형에 처해져 내시가 되었다.
6. 말년
좌종당은 1880년 7월에 조정의 호출을 받아 개선했고, 이후 대러시아 매파로서 청나라 조정에서 활약하며 1881년 신강지역에서 러시아와의 국경을 확정한 일리조약의 체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군기대신, 양강총독 겸 남양대신, 동각대학사의 요직을 전전하다가 1885년 청불전쟁이 벌어지자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다시 전쟁터인 복건성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지병이 발병해 72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7. 평가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9] 는 중국전토의 1/6을 차지하는 거대한 영토로서, 건륭제가 청나라로 복속시킨 곳이긴 하지만, '''좌종당이 이곳을 평정하지 않았다면, 이곳은 영영 중국의 영토로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홍장의 제안처럼 러시아에 할양했거나 혹은 야쿱 벡 왕국을 그대로 두었다면 이곳은 후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계 공화국처럼 소련의 영토가 되어 소련 해체기인 20세기 후반기에 동투르키스탄 혹은 위구리스탄으로 독립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좌종당의 군사적 역량으로 이 곳은 청나라에 수복되었고,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이 곳을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인기가 매우 높다. 북방중시파였기 때문에 조선과의 관계는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홍장이 주로 관여했기 때문에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심지어 좌종당이 진압했던 후이족들 사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 굳이 좌종당이 나서서 후이족의 투항을 관용하지 않았다면 태평천국의 경우처럼 서북 지역의 회족들 전체가 제노사이드로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다.[10] 신장의 위구르인들에게 서당에서 유교 경전을 교육시킨 정책은 의도와 결과 모두 좋게 평가하기 힘들지만, 비슷한 시기 베트남에서는 무슬림 참족들에게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이고 힌두교도 참족들에게는 소고기를 강제로 먹이고 창씨개명까지 시키던 상황이었다.
다만 성격은 매우 거칠고 직설적이어서 주위 사람들과는 사이가 나쁜 경우가 많았다. 호림익(胡林翼)은 일찌기 좌종당을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강렬이근어교격(剛烈而近於矯激), 면절인과(面折人過), 불소관가(不少寬假)". 즉, 너(좌종당)는 자주 다른 사람을 면전에서 비판하는데, 조금도 봐주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사람들이 너를 원망할 것이다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또한 좌종당이 아직 보통막료로 있을 때, 한번은 호남순무 장량기(張亮基)를 따라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정식 군사회의에서 그는 영주진총병(永州鎭總兵) 번섭(樊燮)과 말다툼을 벌였다. 쌍방은 갈수록 말싸움이 격렬해지고 말은 점점 더 세졌다. 결국 마지막에 죄종당은 화가 난 나머지 자리에서 튀어 올라, 번섭에게 발길질을 한번 날린다. 그리하여 번법은 그 자리에 뻗어버린다. 이제 좌종당은 큰 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번섭이 어찌 이런 일을 당하고 가만히 있겠는가. 그는 신속히 일어나서, 칼을 뽑아들고 싸울 준비를 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두 사람을 떼어놓아야 했다. 모두 싸움을 말리는 동안 좌종당은 비록 한번 발길질로 우세를 점했으면서도 말로도 지지 않았다. 그는 번섭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왕빠단[11] , 꺼져라!!" 이 말로 번섭과 좌종당 간에는 원한은 확실하게 맺어지게 된다. 출처
8. 여담
중화요리 중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름 붙인 요리가 있는데, 좌종당계라고 한다. 미국에선 좌종당의 이름에서 따온 '제너럴 쏘 치킨으로 불린다. 한국인 유학생들이 제너럴 쏘 치킨을 먹으며 도대체 이 쏘 장군이 누구인가? 하고 품는 의문의 답 되시는 분(...)이기도 하다. 좌종당의 중국어 발음은 '쭤쭝탕'에 가까운데, 이게 로마자 표기를 거치면서 '제너럴 쏘'로 와전된 것이다.
전장에서 피로에 찌든 부하들을 위해 좌종당이 손수 만든 요리가 기원이라는데, 영화 북경반점에 나오는 조리법에 의하면 약한 불에서 온도를 높인 기름이 담긴 웍에 계란물과 녹말이나 밀가루를 적절히 배합한 튀김옷에 담근 닭고기 조각들을 넣고는 서서히 온도를 높여사면서 높이며 익힌 다음, 새콤달콤매콤한 소스를 끼얹는 요리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닭고기를 익히면 개구리 뒷다리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쫄깃쫄깃한 식감이 일품이라고 한다. 그 점으로 인해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는 치킨집 사장으로 비유가 된다.
하지만 이건 그냥 유명한 민담에 가깝고, 실제로는 이 요리와 좌종당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다. 좌종당의 고향이었던 호남성(후난성)의 한 요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유명해진 것인데,[12] 그의 자손들은 자신들은 그런 요리를 본 적도 없다고 했다고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칭기즈 칸과 아무 상관 없지만, 그의 이름이 붙은 일본식 전골요리 징기스칸과 비슷한 유래를 가진 듯.
고향 후난성 창사에 묘가 조성되어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묘를 화약으로 폭파하고 유해를 꺼내 부관참시되고 남은 유골은 버려졌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인 1986년 복원되고 유적지로 조성되었으나, 시신이 없는 공묘이다.
[1] 간체자로는 左宗棠[병음] Zuǒ Zōngtáng, 쭤쭝탕[2] 실제로 러시아는 청나라의 세력권이었던 위구르와 몽골, 투바 인민 공화국의 독립을 적극 후원하였으며, 심지어 청나라의 성지인 만주를 차지하려고도 하였으나 이는 러일전쟁 패배로 좌절되었다.[3] 하지만 이홍장은 공부를 더 잘했던지, 당당한 과거 합격자이다.[4] 이른바 회민 반란. 태평천국의 난의 여파로 한족 농민들이 총기로 무장하고 훈련하는 것을 보고 평소 한족들과 사이가 나빴던 감숙, 섬서성의 회족들도 화기를 구입하다가 유혈 폭력 사태가 점점 심해져 1862년 결국 수피즘 지도자 마화룡이 이끄는 봉기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감숙, 섬서성에 각각 백만명 정도 되던 회족들은 거의 다 죽거나 난민이 되어 흩어졌다.[5] 중국어로 하면 신장(xinjiang)이라고 읽힌다.[6] 광서제는 당시 동아시아식 세는 나이로 겨우 다섯 살 꼬꼬마였으니 섭정하던 서태후의 의지라고 봐야한다.[7] 남한 약 10만평방킬로. 신강 약 160만[8] 현재도 이곳에 가려면 베이징에서 열차로 3일이 걸린다.[9] 중화민국은 소수민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치구가 아니라 그냥 신장성이라고 했다.[10] 무려 6백만명에 달하던 섬서성의 후이족은 한족의 제노사이드로 전멸했다.[11] 王八蛋, "새끼" 정도의 욕이다.[12] 참고로 후난성 지역은 이 좌종당계 외에도 닭을 튀겨 소스와 함께 먹는 요리가 많다고 한다. 그 전에 중국 요리 자체가 닭을 튀겨 소스와 함께 먹거나 튀긴 다음 또 쪄서(!) 양념이 된 육수나 소스 등과 함께 먹는 요리가 많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