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유럽사

 

AP European History
미국 고등학생 대상 대학과목 선이수제인 AP에서 제공하는 과목 중 하나. '''인문의 최종보스'''이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면서 이렇게 다양한 암기거리, 읽을 것, 쓸 것, 말할 것이 많은 과목은 정말이지 전무후무하다.
AP 미국사가 250년을 다루면서도 암기해야 할 것이 많은 것에 반해[1] AP 유럽사는 조금 더 학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즉 암기가 전부가 아니다.
AP 유럽사에서 배우는 주요한 주제는 다음과 같다.
  • 중세 후기 사회
  • 르네상스
  • 종교 개혁
  • 과학의 발전과 계몽주의
  • 제국주의와 중상주의
  • 17세기 근대 국가의 부상[2]
  •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
  •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 자유주의와 국가주의(Nationalism)
  • 양차 대전
  • 냉전시기
이중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에서 아시아도 다루기는 하지만 에세이 주제로 나온 경우는 거의 없다. 애초에 유럽사인데 아시아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는 게 당연하다. 세계사 과목에선 당연히 잘만 나온다. 안 그래도 그나마 가르치는 학교에서도 분량 과다로 인하여 학기 말 1차 세계 대전 이후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자~ 이 부분은 뭐 영화나 그런 것도 많고 하니깐 다 알지? 대충 지나간다~"하고 후딱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시아까지 배울 여력이 어디 있나. 그래도 오스만 제국 같이 이슬람권에서 유럽과 워낙 교류가 많았던 부분은 어느 정도 다룬다.
이 과목은 암기를 바탕으로 한 학술적인 이해를 중점으로 둔다. 정말로 원인과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고 차근차근 분석을 해가면서 풀어나가기 때문에 대법원 판례 외우고 대통령 목록 외워서 풀어나가는 미국사와는 다르다. 특히나 유럽사 아니랄까봐 각국의 군주와 그들의 행적도 꽤 외워가야 한다는 것도 문제. 그래서 어느 AP 과목들보다도 5점 나오는 비율이 적고, 5점이 나오면 정말로 대단한거다. 한다하는 미국의 너드(역덕후)들도 이 과목에선 혀를 내두르면서 피를 본다.[3]
위의 주제들의 목차를 봐도 알 수 있겠지만, AP 유럽사 과정이 추구하는건 결국 르네상스->종교개혁->계몽주의->쌍두혁명[4]->모더니즘으로 이루는 유럽 역사를 형성한 지식사적 거대 조류의 형성과 발달을 추적하는 것이며, 이는 즉 서양사 전체를 꿰뚫는 질문인 '''근대성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커리큘럼 짠 교수들이나 생각했을 법한 거대 담론은 집어 치우고, 이게 실제 수업에서 뭘 의미하느냐면 다른 게 아니라 '''미칠듯한 분량의 1차 사료 탐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위에 열거된 굵직한 역사적 사상 체계의 대표작 모두 한 번쯤은 들여다 보고, 그에 대한 바닥 없이 깊은 분석과 해설, 주석을 달아야 한다. 좋은 의미로는 이 수업을 제대로 들었다면 15세기 이후 서양 고전의 대부분은 상당수 들여다 보게 된다는 뜻이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고교 시절 일년을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애덤 스미스 같은 양반들과 씨름하며 보내게 된다는거다. 그러니까 한국 고등학교 과정에 비유하자면 '윤리와 사상×세계사×경제에다가 윤사에 나온 유명 학자들의 책'을 죄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다 때려치고 초인적인 암기로 어느정도 커버할 수 있는 다른 인문-사회과 과목들과는 급을 달리한다. 역사적 조류 하나 하나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그 전후의 사건들과의 철저한 인과 관계 형성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인문학적 테제 형성 능력이 중요한데, 이런 능력은 보통 대학 가서 학부 때 기초를 쌓고 대학원에서 완성하는 거다.
게다가 글쓰기의 난이도가 미친듯이 어렵다. 미친듯이 글을 쓰게 된다. AP 유럽사 시험 자체가 두 편의 에세이에 지대한 초점을 두니, 새로운 주제를 배울 때마다 그에 대한 분량 긴 레포트를 써야 된다. 대학교도 아니고 우리나라로 치면 고2에 밤세워 꼬박 꼬박 사료 인용해 가며 겨우 쓴 폰트 크기 12에 더블스페이스한 A4 용지 열몇 장짜리 레포트가 교사의 빨간펜 죽죽 그인 걸레로 돌아왔을 때의 참담한 기분은 겪어 본 사람만 안다.
한국 교과과정에서 조지 워싱턴과 링컨밖에 가르치지 않은 미국사보다야 훨씬 비중이 높으니 문제지를 착실히 읽고 책을 들고 파면 최소한 3점 아래로 떨어질 일은 없다.[5] 작문 능력만 제외하면 말이다. 미국 문과에서는 아직도 유럽식 전통 그대로 역사학을 하든 경제학을 하든 '문장력' 자체를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학문적 소양으로 평가하며 이를 엄하게 평가하는데 제대로 된 작문 교육은 대학교에 가서야, 그것도 특정 전공에서만 배우는[6] 한국인 학생들에게는 극악의 헬이라는 소리다. 다시 말하지만 이 과목을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라면 절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사건만 나열 하고 끝나지 않는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막상 깊이로는 별로 AP 미국사에 비해 얕지도 않은데[7] 다루는 범위가 갑자기 500~600년으로 팍 늘어났고, 지역적으로나 내용으로나 훨씬 더 다양해졌다고 생각 해보자. 다행히 AP 유럽사의 경우 학생들의 수요나 능숙히 가르칠 자격이 되는 교사들의 수나 충분하지 않아 가르치는 학교가 많지 않고, 그나마 있는 학교에서도 수강생 수가 10명을 겨우 웃도는 수준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서부의 아시안의 비율이 높은 지역에 AP 유럽사를 제공하는 학교에는 10학년들의 과반수가 이걸 듣는다고 한다. 뒤쳐지기 싫어서 이딴걸 고2 때 들으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애초에 초인적인 노가다로 암기라도 하면 역사학적 안목이 없이도 어느 정도 커버 가능한 AP 미국사와 달리 AP 유럽사는 체계적인 학술적 분석 능력이 없으면 아예 다 배우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이라서 그런지 미국 교사들은 유럽사에 대해 잘 모른다.
어찌 됐건 이 과목에서 5점을 받았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서구 문명, 나아가 서구 문명을 토대로 한 현대 문명의 큰 흐름과 기반을 탄탄하게 이해하고 이를 해석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바로 그 능력으로 대학교 역사학과를 가서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이 과목을 수료하면서 얻은 풍부한 교양과 통찰, 분석 능력은 다른 일을 하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장 이 과정 자체가 추구 하는 것이 '''인문학적 사고 방식의 확립과 그에 기반한 작문 능력의 숙달'''이니 요즘 여기 저기서 많이 듣는 인문학의 중요성이니 필요성이니 하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어깨 쭉 펴고 뿌듯한 기분을 느낄 자격이 충분히 있다.
[1] 이것은 미국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AP 미국사는 굉장히 조그마한 사건도 과대포장하여 당당히 역사에 집어넣는다.[2] 영국의 청교도 혁명, 종교 전쟁, 네덜란드 독립 전쟁, 프랑스 절대주의의 확립, 동유럽-지중해의 몰락과 북유럽-대서양의 부상 등[3] AP 유럽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전반적인 지식이다. 즉 틀없이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특정시대 특정분야에 정통한 역덕후들로서는 보통사람들보다는 적성면이나 기본 소양은 낫겠지만 AP란 제도권에 들어오는 순간 헬인 건 마찬가지다. 자신이 아는 분량은 한정되어있는데 시험 범위는 광범위하니까.[4] 프랑스 혁명과 영국의 산업 혁명[5] 근데 진짜로 3점 맞으면 안 보는 것만 못하다. 어차피 본인이 선택에서 시작한 거니 일 년만 고생해서 4점 이상 맞자. [6] 그나마 요즘은 1학년 필수교양으로 글쓰기를 지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정도로는 어림없다.[7]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 플러스 미국사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