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

 

[image]
'''Niccolò Machiavelli
Niccolò di Bernardo dei Machiavelli
'''
'''본명'''
'''니콜로 마키아벨리'''
'''출생'''
1469년 5월 3일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사망'''
1527년 6월 21일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국적'''
피렌체 공화국
'''직업'''
외교관, 정치학자, 사상가
'''학파'''
르네상스 인문주의,현실주의, 고전적 공화주의
1. 개요
2. 생애
3. 사상
3.1. 사상에 대한 평가
3.2. 고전 공화주의의 거장
4.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오해: 결과(또는 목적)가 수단을 정당화한다
5. 군주론의 헌정
6. 군사 분야
6.1. 군사기술에 대한 무지
6.2. 시민병제 주장의 허실
7. 대중 매체에서
8. 이모저모


1. 개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외교관, 정치학자, 저술가. 근대 정치학의 기틀을 만든 사상가이자 고전 공화주의의 거장이다. 정치의 문제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이 이야기하는 도덕/윤리학적인 이상주의, 원칙론의 영역에서 분리시키고, 현실 세계로 가지고 내려옴으로써, 근대 정치학을 탄생시킨 원류로 평가받고 있다.[1]
번뜩이는 재기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현실적인 '통치학'(statecraft)을 제시했지만 전문적인 학자는 아니었고, 그 자신도 그러한 방향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현실 정치학을 체계적으로 학문화시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닥치고 유능한 악당이 킹왕짱임!"이라는 사상가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그는 도덕과 정치가 별개의 작동 원리를 가졌음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열정적으로 공화정을 옹호한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대표적 공화주의 저술가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그의 저작은 다양한 정치철학 이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저서로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참고하여 작성한 공화정 논고인 《로마사 논고》,[2] 《전술론》,[3] 《피렌체사》 등의 역사서와 희곡 《만드라골라》 등이 있지만, 이 사람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저술은 바로 군주정에 대한 마키아벨리 자신의 정치론을 당시까지의 유럽 역사를 인용하여 증명한 《'''군주론'''》이다. 하지만 학계는 그의 저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근대 공화주의 이론의 체계를 성립한 <로마사 논고>라고 평가한다. 그의 저술은 항상 과거 역사를 이용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주로 로마의 역사를 인용했지만, 오스만 제국이나 페르시아, 이집트 등도 써먹은 바 있다. 《만드라골라》는 호평과 인기를 모두 모았고 마키아벨리의 가계에 상당한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2. 생애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변호사 아버지 밑에서 2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족은 아니지만 피렌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상류 시민이었다. 아버지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인문학을 좋아했기에 마키아벨리도 영향을 받아 인문학을 좋아했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인문학을 전공했다.
피렌체의 실제 통치 권력이던 메디치家가 추방되고 난 후 29살에 피렌체 공화정의 외교관으로 발탁된다. 이후 뛰어난 외교 능력으로 다양한 실적을 올리며 당시의 명사들을 만날 기회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이후 다시 메디치家가 복귀하면서 그는 반메디치 인물로 낙인찍히게 되고 결국 15년간 있었던 공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직후 메디치家 암살 모의에 휘말려 투옥되어서 날개꺾기 고문[4]을 여섯 번이나 당했다. 그나마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면서 버텼고 교황 레오 10세가 특사를 보내 마키아벨리의 사면을 부탁하여 덕분에 가까스로 풀려났으나 재산의 대부분을 몰수당하고 만다.
다행히 아버지가 물려주었던 멀리 피렌체가 보이는 산트 안드레아의 작은 농장이 있어 그곳에 가족과 함께 은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과된 벌금을 갚아야 하고[5]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때문에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생계를 위해 농장 일은 물론 귀족 자제들의 강사 일과 인근 도시의 대리수금 일을 했다. 특히 문필가로서의 명성이 알려져 나중에는 피렌체 정부와 귀족들의 집필 일로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럼에도 피렌체를 위하여 공직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그는, 메디치家의 군주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 군주론을 저술하여 바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돌아온것은 성벽을 관리하는 위원회의 미관 말직인 성벽 보강 책임자에 불과했고[6], 결국 그가 원하던 고위 공직에 복귀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그는 하급 공무원으로 일하는 동안 루첼라이 가문에서 주최하는 지식인 모임인 오르티 오리첼라리에 참여하며 코시모 루첼라이, 차노비 부온델몬티, 필리포 스트로치 등 젊은 지식인들과 교제하였다. 로마사 논고, 만드라골라, 전술론 등의 명저들을 저술하였던 때도 이때이다.
이후 피렌체에서 메디치가 쫓겨나고 다시 공화정에 복귀하자, 마키아벨리는 다시 공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원하던 제2 서기관 선거에 도전하였지만 실패한다. 그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知의 사람보다는 忠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라고 한다. 그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선 권력자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주의였지만 바로 그러한 점이 권력자의 호의를 사지 못했던 것.[7]
희망이 무너진 그는 얼마 못 가 곧 수명을 다하고 만다. 그래서 1527년에 마키아벨리는 58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가족으로는 아내 마리에타 코르시니와 4남 1녀가 있다. 이탈리아 전쟁의 복판에 휘말렸던 피렌체의 공화정은 결국 얼마 못 버티고 1533년 알레산드로 디 메디치 아래 메디치가의 공국으로 변하게 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가 공직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열흘 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의지가 수명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8][9] 그러나 그가 선거 결과에 대하여 알지 못한 채로 열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서술되어 있는 책도 있다. 어느 쪽이 진짜로 맞는지는 확실치 않은 것 같다.

3. 사상



'''나는 내 나라(피렌체)를 내 영혼보다 더 사랑한다'''[10]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이득을 가져온다고 믿는 일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에 이끌려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 그러한 작업은 적어도 더 많은 활력, 신중함 및 판단력을 갖춘 자들에게 나의 이러한 의도를 더욱 잘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의도로 인해 '''내가 칭찬은 받지 못할지언정,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사 논고 中

다른 사람에게 그가 장악한 권한을 유산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인간은 선보다는 악에 기울기 십상이므로 그의 후계자는 그가 고귀한 목적에 따라 사용한 것을 자신의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의 건국(과 개혁)에는 한 인물이 적합하다 해도, 일단 조직된 정부는 그것을 유지하는 부담이 단지 한 사람의 어깨에만 걸려 있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로마사 논고 中

군주는 짐승의 방법을 교묘히 사용할 필요가 있으며, 야수 중에서도 여우와 사자의 본을 따야 한다. 그것은 사자는 올가미를 눈치채지 못하고, 여우는 늑대로부터 자기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가미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여우일 필요가 있고 늑대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는 사자일 필요가 있다.'''

-군주론 中

군주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요새는 인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요새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민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그 요새는 당신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주론 中

나는 모든 사람이 군주에게서 선하다고 평가되는 모든 자질을 갖추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 세상이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파괴할지도 모를 악덕의 경우 그 오명을 피할 방법을 알아야 하고, 정치적으로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은 악덕이라도 가급적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군주론 XVIII

역사를 이용하여 주장을 펴는 성향을 가지고 저술한 '''《군주론》은 권력과 도덕을 분리'''시켜 생각한 책이다. 결코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 책이 아니다.'''[11]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의 미덕은 권력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개념이다. 아주 뚜렷하고 명확하며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될 경우 어느 정도는 절대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좋은 목적을 가졌을 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가벼운 도덕적 가치부터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단지 권력을 획득하고 싶으면 '냉철'해져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간에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즉, 권력 획득이라는 것은 하나로 분리시켜 본 것일 뿐 부도덕한 시점에서 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정치인이 부도덕한 수단을 남용하면, 그는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종교적 의미에서) 영광은 얻을 수 없다고 봤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정치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큰 목표가 영광이라고 봤다.''' 그러므로 부도덕한 수단을 남용하여 영광을 얻지 못한 권력자는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게 마키아벨리적 시선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도덕에 대해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얻는 것은 선악과는 별개이며, 그렇다고 정치인이 권력만 차지하면 성공한 인생은 아니다'''라는 것에 가깝다.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종교적)영광이였다. 강한 힘(권력)을 통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당연하지만[12], 만약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그나마 가벼운 도덕적 가치부터 포기해야 한다는 것. 즉 마키아벨리는 엄밀히 말해 정치와 도덕을 분리했다기보다는, 권력과 도덕을 분리한 것이다. 문제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현대의 세속적인 정치인들은 "영광? 그게 뭐임?"이라는 태도로 나올 수밖에 없고, 권력과 도덕의 분리에만 눈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의 또 하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탈리아 통일'''에 굉장히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군주론》의 말미에서도 지금이 바로 기회니 메디치 가문이 나서라고 종용하며, 《로마사 논고》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교황청의 행태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그의 모습은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일단 통일만 한다면 군주정도 용인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체사레 보르자가 이탈리아 통일에 상당한 야심을 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키아벨리가 체사레에게 우호적이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이탈리아 통일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이유는... 당시 분열 상태였던 이탈리아의 소국들이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영토형 대국의 정치적, 군사적 압력에 심하게 휘둘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듯.
그가 정치가의 모델로 삼은 사람은 체사레 보르자. 자신과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자신도 외교관으로서 직접 이 사람을 만나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이 인물의 철저히 냉철한 행동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그는 이후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의 정치적 성공을 일종의 모범적 예시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보르자의 과단성을 높게 평가했을 뿐이며, 마키아벨리의 궁극적 모델이 체사레 보르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군주론에서는 체사레의 몰락을 군주가 정치적 비르투(''virtu'')를 상실했을 때 신흥 군주국이 직면하는 불안정성을 잘 보여주는 주요 사례로 다루고 있다. 군주론에서 이 부분을 읽어보면 마키아벨리가 체사레의 흥망을 단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아주 흥미로운 케이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3.1. 사상에 대한 평가


긍정적인 평과 부정적인 평이 존재한다.

정치학의 모든 스승 가운데 가장 훌륭한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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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 (긍정적)[13]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비체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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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달 (부정적)

여러 가지로 말이 많은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의 명쾌한 문장력 하나만은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이견이 있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마키아벨리의 글에 호불호가 있을지는 몰라도 옳냐 그르냐에는 이견이 적다. 본인은 고전 문헌들을 탐독하였지만 고전들에서 볼 법한 만연체와 모호한 표현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저술을 하였다고 군주론에서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말들은 여기에 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대한 해석은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플라톤의 정치사상에 대한 해석에 버금갈 정도로, 굉장히 다면적으로 나타난다.
  • 장 자크 루소는 그를 공화주의자의 친구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져 자코뱅의 사상적 근원이 되었다.
  • 헤겔은 군주론을 "대단히 위대하고 고결한 심정을 갖춘 참으로 정치적인 두뇌의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하고 진실로 가득 찬 착상"이라고 평가했다.
  • 무솔리니는 마키아벨리를 “정치학의 모든 스승 가운데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격찬했다.
  • 안토니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를 <옥중수고>에서 많이 언급하며, 그를 중요한 인물로 보고 있다.
  • 리콴유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대해 "국민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될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될지 사이에서 나는 늘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믿었다"라고 했다.
  • 한나 아렌트는 "근대적 의미에서 혁명의 정신적 아버지"로 평가했다.
  • 프로이센의 계몽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는 스스로 <반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여, 군림하는 군주가 아닌 봉사하는 군주의 소임을 강조했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위에 오른 후 유럽은 그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쑥대밭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를 통해 프로이센의 국력은 크게 신장되었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현대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명이 되었다.
  • 레오 스트라우스는 그를 "악의 교사"(teacher of evil)이라고 평하였다.
  • 로버트 달은 군주론을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비체계적인 책으로 평했다.("extremely one-sided and unsystematic")
  • 헨리 키신저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거나 활용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란 실제로 매우 드물다"고 평하였다.

3.2. 고전 공화주의의 거장


로마 인을 연구하는 사람은 4백 년 동안 로마 인이 왕이라는 호칭을 아주 싫어했고 고향 도시의 영광과 안녕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로마의 역사에서 로마 인들이 이 두 가지(왕정에 대한 증오와 공화정에 대한 사랑)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많은 사례들을 발견한다. 만약 누군가가 로마 군중이 스키피오에게 내보인 배은망덕에 대해서 거론한다면, 나는 이 주제에 관련하여 위에서 개진한 논증을 가지고 답변을 삼으려 한다. 나는 위에서 군중은 군주보다 덜 배은망덕하다고 누누이 말했던 것이다. 또 신중함과 안정성에 대해서도, 인민이 군주보다 더 신중하고, 더 안정적이고, 더 잘 판단을 내린다고 말하고 싶다. '''인민의 목소리를 하느님의 목소리에 비유하는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다. 인민의 의견은 그 예측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그래서 인민은 어떤 신비한 힘의 지원을 받아 그 자신의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을 미리 예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판단을 내리는 데에도 인민은 탁월하다. 그들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연설자가 서로 다른 편을 위해 찬반 연설을 하는 것을 들으면, 거의 언제나 그중에서 제일 좋은 의견을 선택하며 또 그들이 듣는 연설의 진실을 곧바로 알아본다. 인민이 이렇게 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물론 진정한 용기와 외면적 유용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민도 실수를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군주는 그의 흥분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에 인민들에 비하여 실수의 빈도가 훨씬 높다. 행정관을 선출하는 데에도 인민은 군주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한다. '''타락한 습관을 가진 악명 높은 인사를 공직에 추천할 때, 인민은 결코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반면에 군주는 아주 손쉽게 그것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그런 부패한 인사의 임명에 동의한다.''' 인민은 어떤 것을 싫어하면 몇 백 년이 흘러가도 동일한 의견을 유지하는 데 비하여 군주는 그렇지가 못하다. 이 두 가지 사항에 대하여 로마인들은 아주 훌륭한 증인이다. 4백 년 동안 4백 번에 달하는 집정관과 호민관의 선거가 있었지만 로마 인들이 나중에 후회한 선택은 불과 네 번 미만이다.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로마 인은 왕이라는 직위를 너무나 싫어했다. 그래서 어떤 시민이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그걸 빌미로 왕위에 오르려 하는 자에게는 정당한 징벌을 내렸다. 이외에도 인민이 권력을 잡고 있는 도시들은 엄청난 정벌전을 재빨리 감행할 수 있으며 늘 군주의 통치 아래 있었던 도시들보다 더 위대한 정복전을 성사시킬 수 있다. 가령 왕들을 쫓아낸 후의 로마와, 페이시스트라토스로부터 자유롭게 된 아테네가 그러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인민에 의한 정부가 군주에 의한 정부보다 훨씬 좋기 때문이다.''' 위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인용된 역사가들의 논평을 가지고 나의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삼지 말기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민들 치하의 무질서와 군주 치하의 무질서, 인민들 치하의 영광과 군주 치하의 영광을 모두 검토해 본다면, 선량함에선 인민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중략)

사악한 군주는 말로 설득하기가 어렵고, 그를 제거하는 데에는 칼 아니고는 다른 대응책이 없다. 이로 미루어 우리는 인민과 군주의 사악함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민의 질병은 말로써 고칠 수가 있지만 군주의 병은 칼을 써야 고칠 수가 있다. 따라서 말이 아니라 칼을 써야 고칠 수 있는 질병이 훨씬 더 위중한 상태라는 것은 누구나 미루어 판단할 수 있다.

-<로마사 논고>, I, 58

흔히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쓴 전제군주정의 지지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지만, 고전적 공화주의의 거장으로 인식되기도 한다.[14]
그의 저작들의 공통적인 관점을 통해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라고 인식할 수가 있다. <로마사 논고>나 군주론 그리고 전술론으로 이어지는 저작들의 내용[15]을 탐구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그의 역사적 관점 중에 하나인 순환역사론에 대비해 이해를 한다면 공화주의자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퀜틴 스키너는 자신의 저서 <근대정치사상의 토대>에서 이탈리아의 공화주의자들의 구성과 그들의 관직진출까지의 공통점들을 들어 마키아벨리 또한 이러한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가 있었던 시기는 메디치 가문의 힘이 사그라든 시기로 그나마 궁극적인 공화제가 유지되고 있던 시기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마키아벨리가 그들의 입맛에 맞아 등용되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화주의의 거장이라는 사람이 전제군주를 옹호하는 것처럼 읽히는 <군주론>을 썼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시대 때 공화주의는 사라져가는 고대의 미덕이자 이상적인 목표였지만, 당장 피렌체는 사실상 군주정의 상태로 돌입한 상태였다. 즉 공화주의는 이상이지만 군주정은 현실이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취업을 위해 군주의 입맛에 맞게 이력서(<군주론>)를 적었다고 해서 그가 군주정의 옹호자라고 단정할 순 없다.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을 가장 좋은 정부 형태로 보았지만, 군주정 역시도 좋은 정부 형태로 보았다. 따라서 <군주론>의 서술이 신념을 굽힌 비굴한 행위라는 평가 역시도 부당해진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체제가 순환적인 변화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라, 그는 세상에는 여섯 가지의 정부 형태가 있다고 했다. 이들 정부 형태는 발전과 쇠퇴의 패턴에 따라 군주정->참주정->귀족정->과두정->민주정->중우정->군주정의 순서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마키아벨리는 봤으며, 이들 중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은 좋은 체제이고 참주정, 과두정, 중우정은 나쁜 형태라고 봤다. 풀어 쓰자면 이렇게 된다.

1. 군주정이 성립. 이때 사람들은 정의롭고 선한 사람을 군주로 뽑을 가능성이 큼.

2. 그러나 군주 자리가 세습되면서, 점점 나쁜 군주들이 출현하게 되고 참주정으로 타락함.

3. 참주는 결국 몰락하고, 귀족정이 시작됨. 처음에는 독재를 의식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공공선이 추구됨.

4. 그러나 세대와 세대를 거듭하면서 귀족들이 타락하게 됨. 이를 과두정이라 함.

5. 결국 귀족들도 몰락하게 되고,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민주정을 수립함.

6. 그러나 결국 민주정마저도 폭주하여 중우정으로 타락함.

7. 다시 군주정이 출현함.

고전적 공화주의는 고전적 민주주의와는 다른 사상이다. 공화주의자들은 민주정이 수립되면 중우정치로 타락하고, 군주 한 명에게 정치를 맡기면 참주정으로 폭주한다고 봤다. 때문에 공화주의자들은 좋은 정부형태인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을 섞어야 한다고 봤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의 권력을 세분화해서 하나는 군주정으로, 하나는 귀족정으로, 하나는 민주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봤다.[16] 그렇게 하면 개인에 의해 폭주하지도 않고, 다수에 의해 타락하지도 않는 좋은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봤다.
마키아벨리가 용병이 아닌 시민군을 옹호한 것도 바로 공화주의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공화주의자들은 '간섭의 부재'가 아닌 '예속의 부재'를 자유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착한 주인을 만나서 간섭받지 않는 노예가 있다고 한들, 그 노예는 결코 자유인이 아니라는 게 마키아벨리식 자유관이다. 사람은 예속되어 있는 순간 그저 노예일 뿐, 착한 주인을 만났냐 나쁜 주인을 만났냐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것을 '국가의 자유'에도 적용시키는데, 바로 이 때문에 동맹군과 용병에 의존하는 국방체계를 비판했다. 물론 동맹군이나 용병에 의존한다고 해도, 그들이 착한 사람들이라면 배신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국가는 동맹군이나 용병의 '선의'에 예속되어 있을 뿐이고, 이는 착한 주인을 만난 노예와 다를 바가 없다. 주인(동맹군, 용병)이 어느 날 흥분한다든가 마음이 돌변한다면 노예(국가)는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국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서, 다른 국가나 용병에게 예속되지 않아야 자유롭다고 봤다. 그리고 이왕 군대를 가진다면, 시민군의 형태가 되어야 시민들이 국가 안에 있는 누군가의 노예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에, 그는 시민군을 주장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화주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을 가지는 것이 좋다.
군주론의 서술 때문에 군주제의 옹호자로 보일 수 있지만 실상 세습군주국이 아닌 신흥 군주를 원한 그의 모습을 본다면 나라를 세우는 데는 적격이지만 유지하는 데는 무리라는 생각까지 나온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국가를 세우는 데에는 필요하지만 유지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 설립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는 《로마사 논고》를 읽어보아야한다.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도 좋은 국가이지만, 공화정을 더더욱 좋은 국가로 본 그의 사상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그가 공화주의자라는 것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마키아벨리의 바람대로 역사가 흘러갔다면, 메디치 가문 역시도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훌륭한 광대'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 광대인 메디치 가문은 시민에게 권력을 되돌려주고 공화국이 출현했을 테니까.

4.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오해: 결과(또는 목적)가 수단을 정당화한다


모든 인간, 특히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는 군주의 행동에 대하여 민중은 그 결과로써 그 수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18장 중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과감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며,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17]"는 식으로 해석해버린 이후로,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스트'''라는 단어까지 나오게 됐다. 이후 그는 유능한 악당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다. 'XX의 마키아벨리' 식으로 쓰인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즘은 '''이기적이며 교활하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는 관념 체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엇보다 공익이야말로 목표이며, 나머지 사항에 대해서는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도덕적인 수단도 목표나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고려한다는 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목표는 공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추구하는 목표는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확대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 물론 그러한 권력의 목적은 공익이라고 보았지만, 권력이 공익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나 장치에 대해서 논한 바는 없다. 이러한 보장을 위해서는 군주의 권력 행사에 일정한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 없는데, 군주론의 내용은 오히려 그러한 제한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공익이 궁극적 목표라는 것은 피상적인 선언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부도덕한 수단을 권력 그 자체를 위한 도구로 얼마든지 사용해도 된다는 사상으로 간주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공익을 논하기는 했지만 그 공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도덕과 종교를 권력의 수단으로 간주하면서도 어떤 새로운 도덕 기준을 제시한 것도 아닌 이상, 부국강병 이상의 궁극적 목표를 설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당시의 가치관으로나 현대적 기준으로나 부국강병은 다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배제한 권모술수를 공개적으로 강권하고, 그 수단이 탈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닥치고 결과지상주의인 데다 그 결과를 평가할 기준도 없었으므로 마키아벨리를 오직 "군주론"에 한정해서 읽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혹은 오독의 문제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오직 "군주론"만을 읽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군주론이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이며, 정치가 윤리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권력이라는 고유한 작동원리를 갖고 있다는 그의 주장을 가장 명징하게 (그리고 때로는 가장 충격적으로) 드러낸 저작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가장 주목받는 저서인 "로마사 논고"를 천천히 읽어보면 그가 현실 정치에서 윤리의 문제에 완전히 무관심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열정적으로 '''공화주의를 옹호'''했으며, 이는 단순히 공화주의가 조국에 부와 힘, 명예를 가져다 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민들에게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윤리적 차원에서의 공화주의에 대한 지지다.[18] 마키아벨리가 정치와 윤리가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영역이라고 주장했으며 정치적 영역의 자율성을 강조했음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윤리적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5. 군주론의 헌정


군주론을 메디치 가에 바친 이유가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을 옹호했기 때문에 '이걸 실행해서 시민의 반발에 부딪쳐 좌초해라'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정작 메디치 가는 군주론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마키아벨리는 공화정 복귀 후 군주론을 쓴 악한에 메디치가를 옹호한 자로 낙인찍혀 복귀하지 못했으므로…. 그러나 군주론은 현대까지도 널리 읽히는 서적이며, 군주론이 "이대로 실행하면 망하겠지" 라는 의미로 저술된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군주론이 왜 메디치 가에 헌정되었는가는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원래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책을 메디치 가에 헌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가 피렌체로 복귀한 이후에 공화정에서의 그의 행적은 큰 문제가 되었고, 위에 서술했다시피 고문을 당하기도 하는 등, 사실상 정계에서 추방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주론까지 출간했다가는 메디치 가에 제대로 밉보여 죽을 수도 있었기에 군주론을 억지로 헌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솔직한 설명인지 공화주의자인 자기 친구들에게 변명하는 말인지는 해석이 갈릴 수 있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정계에서 추방된 이후 지속적으로 복귀를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 이미 찍힐 대로 찍힌 시점에서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의 환심을 다시 사기 위해 헌정했다는 관점 또한 미국의 학계를 중심으로 대두되고 있다. 즉,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군주론이 일종의 이력서로서 활용할 계획이었다는 것. 헌정사 마지막에 "동시에 잠시라도 그 높은 곳에서 제가 머물고 있는 이 낮은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제가 그간 크고 지속적인 운으로 인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는지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쓴 것이나 26장에서 "당신네 고귀한 가문"이라고 쓴 것을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메디치 가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무너졌고,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6. 군사 분야


<전술론>이라는 저서를 썼고, 군사 문제에 대해 여러 견해를 제시하기는 했지만, 군사정책이나 당대 전투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분히 정치적-사상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했고, 실전적인 측면의 이해는 상당히 부족했다. 사열한 군대 앞에 나오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전형적인 책상물림. 유명한 용병대장 조반니 메디치[19]가 그에게 병력을 주면서 지휘해보라고 기회를 주자 뻘뻘대며 물러나왔고, 조반니는 금세 병사들을 지휘한 일화가 있다.

6.1. 군사기술에 대한 무지


마키아벨리는 로마군, 그중에서도 시민군의 이상에 심취해서 전 병력의 2/3를 로마 군단방식의 소드 앤 버클러 병종으로 채울 것을 제시했고, 파이크병은 1/4 이하, 투사무기(활과 화승총 포함)를 다루는 병력은 1/9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는 화승총과 파이크가 대세가 되어가는 당대의 군사 현실을 역행하는 주장이었다.
한 보기로 1422년에 있었던 아르베도 전투에서 밀라노 기병대는 말에서 내려서 랜스를 파이크(꼬챙이처럼 생긴 긴 창)처럼 사용하는 방식으로 할버드로 무장한 스위스군을 격파한 일이 있다. 스위스군은 이 전투의 교훈을 검토해서 파이크를 도입함으로써 이후 전술 형태가 완전히 변하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전투 양상이나 이후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무시했으며 밀라노군이 승리한 이유는 갑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0]
다만, 마키아벨리가 검방보병을 선호한 것은 단지 로마 군단병 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 딴에는 전술적인 활용도를 고민한 결과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파이크나 화승총에 비해 검과 방패는 다루기 편하고 활용도가 높으며 따라서 검방보병은 상황에 대한 적응성이 뛰어나고 백병전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게 되는 것에 주목했다는 것. 결국 마키아벨리는 생각없이 검방보병을 군대의 주류로 만들자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파이크와 화승총의 보급으로 당대의 전장에서 피아가 뒤섞여 싸우는 백병전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사실 화승총의 경우 당대의 예상보다 보급이 상당히 빨랐는데, 화승총에 쓰는 흑색화약의 원료인 초석유황신대륙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
쉽게 말해, 당대에는 창검과 활에서 파이크와 총으로, 근접 전투 → 원거리 전투로 변하는 과도기 시점이었는데 마키아벨리는 이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활동하던 16세기 초는 당대의 군사 문화, 제도 혁신의 최첨단에 있었던 스페인 제국마저도 여전히 파이크로 통일하는 게 효율적이란 점을 인식하기 전 로델레로란 검방보병을 엄연히 정규 편제로 굴리던 시대였다. 사실 16세기 자체가 스페인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경우 장궁,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같은 켈트계 국가들은 전통적인 레드솅크 같은 전사 집단의 클레이모어와 배틀액스 같은 중형 냉병기, 프랑스는 중갑 기사단,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필두로 한 동유럽 국가들은 후사르 등 '''여전히 해당 나라의 풍토와 지형에 맞는 중세적 전술과 병종''' 또한 여전히 남아서 활동하던 시기였다. 이런 면에서 검방보병의 활용을 주장했다고 해서 마키아벨리의 군사적 식견이 딱히 동시대적 기준에서 크게 떨어지는 건 아니고, 다만 정치학이란 분야에서 남긴 영향에 비해 군사사상가로선 한계가 있었다 정도로 평할 수 있다.

6.2. 시민병제 주장의 허실


마키아벨리가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 횡행한 용병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시민병제를 주장한 것도 이와 비슷하다. 마키아벨리의 시민병을 현대의 징병제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시민병제는 사실상 유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대의 전쟁은 이미 범위가 넓어지고 장기화된 상태였는데, 농민이건 상인이건 수십 킬로미터라도 떨어진 곳에서 장기간 복무해야 한다면 당연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속적으로 순환 복무를 시키는 것도 전근대적인 행정기구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마우리츠 이후의 근대적인 군사훈련이 자리잡기 이전에는 시민군은 전쟁 경험 면에서 크게 부족했다. 게다가 이 당시 시민군이라는 것은 그리스나 로마에서처럼 자기 돈을 들여서 복무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시민병제의 경우 금전적 동기에 의해 배신할 수 있고, 배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굳이 고용주를 위해 목숨까지 걸고 싸울 동기까지는 없는 용병[21]에 비해 자신이 국가 공동체에 소속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자기 삶의 터전과 가족을 지키려고 하는 시민병을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본 점에 대해서는 현대의 국민개병제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시민병은 대부분의 경우 용병에 비해 유지비가 저렴하다는 점에서, 같은 비용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장점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근대 이후 국민개병제에 의해 징병된 시민병들이 직업적 용병을 밀어내고 군사력의 주축을 차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살던 당시에는 시민병을 유지하기 위한 물적 기반이 크게 모자랐다는 것이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따져 본다면...
  • 시민병의 본격적 사용은 총기의 대량 보급 이후의 일
창이나 칼 등의 근접전 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활과 같은 투사병기라고 하더라도 냉병기의 위력을 결정하는 것은 근력과 운동능력이고, 그 사용에는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시민병이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거나, 전투 경험이 많은 직업적 군인을 상대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뭐, 마키아벨리 시대에도 화승총은 사용했지만 비싼 가격과 낮은 신뢰성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총으로 무장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후 총이 대중화되어 군대의 주된 개인무장이 되면서 소수의 용병보다 다수의 시민병이 더 뛰어난 전력을 갖추게 된 것. 일단 총은 최소한의 근력만 있으면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고, 조작 방법도 냉병기에 비해 훨씬 간편하니까. 물론, 명사수가 되려면 검술이나 창술의 달인이 돼야 하는 것 이상의 고된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전쟁터에는 명사수 있으면 유리하겠지만 없어도 된다. 왜냐면 명사수가 백발백중으로 10명 맞히는 사이에 병사 100명은 백발십중으로도 100명 맞힌다.[22] 더구나, 적과 거리를 두고 싸울 수 있다는 특성상 조직력 유지도 훨씬 쉽다. 즉, 소수의 정예병력이 다수의 잡병들에 대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서 시민병의 활용도가 높아졌다는 것.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게, 마키아벨리 본인이 총의 위력과 잠재력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무척 경시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장 동시대인들도 수십 년간 훈련하고 무예를 쌓은 기사를 어린 아이가 한방에 죽일 수 있게 한다라고 평하며 총기란 병기 자체에 내포된 폭력의 민주성을 인식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이런 사상적 고찰과는 별개로 16세기 초반의 물질적 현실에서 총기는 여전히 다른 무기들 못지 않은 전문성과 훈련을 필요로 했다. 당장 최소한의 신뢰성, 안전성이 보장되는 양질의 화승총은 뭔 동네 대장간에서 뚝딱뚝딱 하고 뽑아내는 게 아니라 조만간 전문적인 총기 제작자로 아예 업종을 갈아탄 숙련된 대장장이와 목공, 화약 주조인들의 협업을 통해야 만들수 있었고, 훗날의 국민개병제 체제의 대규모 정규군처럼 막 뿌려대기엔 총기 자체나, 화약이나 만만치 않게 비싼 물건이었다. 사용하는 측 입장에서는 배우고 수련하는 데 시간이 훨씬 짦은 총기가 활이나 냉병기에 비해 민주주의적 죽창으로서 가능성이 컸다 하더라도 생산자 입장에선 오히려 반대였다. 게다가 화승총이 활에 비해 다루기 쉽다는 것도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16세기 초반 기술력으로는 당장 오작동으로 인해 생기는 사용자의 위험 부담도 총기가 훨씬 더 컸고, 가혹한 전장의 환경에서 그 복잡한 재장전 과정을 거치는 것도 다른 병과 못지 않게 투철하게 훈련된 병사가 아니면 오히려 활보다도 더 효율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23] 이런 면에서 마키아벨리의 국민개병제 논리는 200년 앞은 내다 봤어도 당장 5년 앞은 못 내다본 식견에 가깝다.
  • 시민병제를 위한 생산력과 행정력 미비
일단, 시민 중에서 병사를 모집하면 그 사람들은 노동력으로써의 생산성을 상실하게 된다, 더구나 병사들도 먹어야 하니 이들을 부양하기 위한 생산력이 더 필요하기까지 한 셈. 더구나 시민병은 용병보다 싸고, 그만큼 더 많이 모을 수 있으므로 부양비용이 급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시민병 제도는 사회의 생산력(특히 식량 생산력)이 충분히 향상되기 전에는 실현이 불가능했던 셈. 더구나, 방어전도 아니고 장거리 원정이라도 나가려면 이 비용은 더욱 급증할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찬양했던 고대 로마의 시민병 역시... 시민병의 형태로 운용된 것은 주로 방어전이 중심이던 초기였고, 후기에는 사실상 직업군인이 되었다.
어쨌든 마키아벨리가 조직한 피렌체의 국민병은 지지부진하던 피사 원정을 점령으로 종결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군사행정가로서의 능력은 어느 정도 입증하였다. 그러나 채 국민병제도가 자리잡기도 전에 프랑스의 대군이 피렌체로 진격해왔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국민병 실험은 지속되지 못했다.
다만 군사적 기술의 발전과 변화에 대한 몰이해와는 별개로 용병에 대한 거부감 자체는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소규모 국가들이 난립한 당시 북부 이탈리아의 정세에서 용병들은 단지 고용된 병력이라기 보다는 용병대장이 군주 자리를 찬탈하거나, 소국의 군주가 직접 용병대장으로 나서는 일도 제법 자주 발생했을 정도로 독자적인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이익을 추구하는 주체였던 것. 피사 원정이 지지부진했던 것 역시 해당 지역의 정치적 구성단위였던 용병들이 피렌체의 지나친 성장을 꺼려서 의도적으로 불성실하게 임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 즉,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용병은 고용주의 요구에 충실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고,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집단에게 군사력의 주축을 맞길 수 있느냐는 지적 자체는 충분히 의미있다. 뭐... 그래서 마땅한 대안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지만.[24]

7. 대중 매체에서



8. 이모저모


  • 동성애자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성애 행위는 젊은 시절에 할 수 있는 일탈 아니겠느냐" 하는 식의 내용이 있어 그렇게 추정하는 것뿐이지, 외국 사이트를 뒤져봐도 마키아벨리가 동성애자라는 합당한 주장은 없다. 동성애에 혐오가 없다고 동성애자라는 건 아니다.[25]
  •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창녀검열삭제를 하려다가 너무 못생겨서 토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시오노 나나미가 좋아하는 사상가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및 <마키아벨리 어록>을 출판한 바 있다.
  •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이지만 모든 야망이 좌절된 이후, 피렌체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하급공무원으로 삶의 후반기를 지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당대의 천재이자 야망가에게 이러한 삶은 모진 고문보다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텐데 마키아벨리는 독특한 방법으로 이를 극복했다. 일을 하러 출근할 때는 대충 옷을 입고 일을 하였으나 퇴근하고 밤이 깔리기 시작하면 세안을 깨끗이 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은 후에 서재로 가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을 읽었다. 겸허하게 과거의 대가들을 만나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 시간에 대한 즐거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친구였던 프란체스코 베트리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있다. 식음에 대한 생각을 잊고 모든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잊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 그는 조국 피렌체에 대한 애국심이 무척 강했는데, 수입의 네 배를 벌 수 있는 용병 대장의 비서 직책을 피렌체를 떠나기 싫어서 거절했다고 한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도 등장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참조.
  • 창세기전에서도 등장한다. 마키아벨리 참조.
  • 투팍의 별칭 중 하나가 마키아벨리에서 따온 마카벨리(Makaveli)다. 이는 투팍이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심취해서 마키아벨리를 소리가 비슷한 마카벨리로 바꾼 것이다.
  • 마키아벨리의 외교 및 정치관(觀)을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구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심리학계에서는 이것을 성격의 하나로 보고 마키아벨리적 성격(Machiavellianism)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어둠의 삼원 문서를 참고.
  • 대항해시대5의 이벤트에서 교역능력치가 높은 SR급 항해사로 잠깐 나온 적이 있다. 멜빵모자를 쓴 젊은 꽃미남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벤트 당시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메인 퀘스트에서 등장한 적은 없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포가튼의 스포르차 캠페인의 화자로도 등장했다. 마지막에서야 그의 본명과 그가 쓰고 있던 것이 군주론이었음이 밝혀진다. 결정판에서는 다른 화자로 바뀐다.

[1] 이러한 그의 정치관은 군주론의 15장에 나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당위)와 '어떻게 사는가'(현상)는 너무도 다르다"라는 문장에서 잘 요약된다.[2] 한길사 판은 로마사 논고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다. 반면 동서문화사 판은 일본의 한 출판사의 번역명을 따라해서 '정략론'이라는 이름으로 군주론과 합본으로 발간되어 있다.[3] 제목대로 당시의 군사전술과 군대 운용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후술하겠지만 마키이벨리의 지식은 주로 역사, 정치 등에 집중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군사 부문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실전적 측면의 이해는 부족했다. 때문에 이 책은 로마사 논고와 군주론 등 그의 다른 저서들보다는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래도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이야말로 평화의 소중함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이라는 문장은 종종 인용되는 편이다.[4] 문화대혁명 문서에 서술된 '제트기 형벌'의 업그레이드 버전. 아니 시기를 생각하면 제트기 형벌이 이것의 열화 카피라고 봐도 될 듯하다.[5] 마키아벨리가 공직에 있었을 때의 봉급 10년치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다행히 친구들의 탄원과 보증으로 유예되어 벌금을 천천히 납부하여 나중에는 다 갚았다.[6] 특히 이 직책을 맡았을때 그의 나이가 51세였다.[7] 기본적으로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을 원한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권력자들 입장에선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기회주의로 받아들여져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8] 마키아벨리가 한 말 중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굶주림도 병도 아닌 삶에 대한 권태이다."라는 말이 있다. 삶에 대한 권태를 느끼며 죽어갔으니 진정한 언행일치의 사례로 볼 수 있다.[9] 한국어위키피디아에서는 당대에 돌았던 황당무계한 풍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병으로 죽었던 마키아벨리가 '''죽은 지 하루 만에 일시적으로 부활했다가 다시 죽었다'''는 게 그 얘기다(...). 평지풍파가 많았던 생애와는 별개로, 그가 당대인들에게 대단히 범상치않은 사람으로 보였다는 소리다.[10] 그야말로 공화주의적 애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이다. 언뜻 보자면 개인을 말살하는 전체주의적 표현으로 오인될 수 있으나, 원문에서 마키아벨리는 '나라'를 patria라고 표현한 게 중요하다. 그는 그냥 지역을 뜻하는 국가는 nazione라고 쓰고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자유를 추구하는 나라'라는 의미에선 patria를 사용했다. 즉, 마키아벨리의 시각에서는 시민의 이익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최적의 체제가 공화주의정이었던 것이며 이는 체제 그 자체나 지도자에 대한 충성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마키아벨리는 시민들의 자유를 어느 것보다도 더 사랑했다는 의미가 되며, 그는 이런 의미의 애국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최고의 영광을 (세속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약속해 준다고 믿었다.[11] 후술되어있지만,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정치인은 권력만 얻으면 끝인 자리가 결코 아니다. 부도덕한 방법은 정치인에게 권력을 줄 수는 있어도, 영광을 주지는 못한다고 봤다.[12] 군주론 내내 나오는 말이다. 선한 방식은 분명히 악한 방식보다 나은 것이고 할 수 있다면 그리 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다.[13] 참고로 무솔리니는 군주론을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다.[14] 프린스턴 대학 정치학과 교수 모리치오 비롤리는 그의 저서 <공화주의>에서 마키아벨리를 공화주의 거장으로 소개한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공화주의 관련 마키아벨리 논문은 수가 많고 책도 많으니 확인해서 참고해보는 게 좋다.[15] <로마사 논고>의 집필을 하다 군주론을 저술했다.[16] 이는 고대 로마의 공화정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로마에서는 군주정 성격의 집정관, 귀족정 성격의 원로원, 민주정 성격의 민회가 각각 견제하며 권력의 균형을 이루었다.[17] 라틴어로는 Exitus acta probat.[18] 물론 인민의 자유가 국가의 부강함과 명예를 고양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을 공화주의가 최상의 정치체인 이유로 들었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19] 여걸로 유명한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아들이고, 조반니의 아들이 초대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이다.[20] 승기의 원인을 무기의 변화가 아니라 방어구의 변화라고 잘못 짚은 것이다. 파이크의 사용으로 사거리가 길어져 맞을 일이 없어 이긴 것이라 봐야한다.[21] 물론 동시기 가장 유명했던 용병인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흐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용병이라고 배신을 밥먹듯 하거나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었다.[22] 물론 현대의 스나이퍼가 그러하고, 미국 독립 혁명남북전쟁 시기에 실제 일어났듯 명사수가 쏘아 맞추는 10명이 지휘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유럽에선 귀족 장교의 존재가 이를 상당기간 억제했다.[23] 기계적 신뢰성의 문제다. 활은 웬만하면 오작동 해도 최악의 경우가 사수 손가락 혼자서 날려 먹는 거지만, 화승총의 경우 항목에 나와 있는 복잡하기 그지 없는 준비, 장전, 조준, 사격 동작을 철저하게 집단적으로 맞추어 몸에 익히지 않으면 장전 과정 중 자기 몸뚱이는 물론이고, 옆의 전우까지 태워 먹을 가능성이 농후했다[24] 이탈리아 도시국가 중 최강국이던 베네치아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규모 대량 고용보다는 소규모 용병단을 장기로 고용하고 지휘권은 철저히 국가의 아래 두어서 이런 폐단을 어느 정도 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25] 다만 마키아벨리가 살았을 적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동성애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사람들의 인식 역시 마키아벨리 본인이 표현하였듯이 젊은 시절(대체로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누구나 한 번 쯤은 해보는 가벼운 일탈 행위였다. 따라서 마키아벨리 역시 젊은 시절에 동성애 문화를 접해보았을 확률 자체는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