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1. 개요
2. 선사 시대(3백만 년 전~기원전 3000년경)
2.1. 인류의 출현, 진화, 확산
2.2. 도구의 발달
2.3. 신석기 혁명
3. 고대 시대(기원전 3000년경~서기 500년경)
3.1. 고도화된 사회와 문화
3.2. 주요 고대 문명
3.3. 철학과 종교의 발달
3.4. 제국들의 출현과 흥망성쇠
4. 고전후 시대(500년경~1500년경)
4.1.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4.2. 유럽
4.3. 남아시아
4.4. 동아시아
4.5. 동남아시아
4.6.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4.7. 아메리카
4.8. 오세아니아
5. 근대 시대(1500년경~1945년)
5.1. 근세 서양 세계의 변화와 확장
5.2. '신세계'와 '구세계'
5.3. 이슬람 세계의 변화
5.4.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
5.5.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세계의 변화
5.6. 혁명의 시대
5.7. 새로운 사회상과 제국주의 침탈
5.8. 두번의 세계대전
6. 현대 시대(1945년~현재)
6.1. 냉전
6.2. 탈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6.3. 현대 사회의 형성
6.4. 21세기 인류의 분쟁과 과제
7. 관련 문서


1. 개요



[1][2]

"지난 3,000년을 설명할 수 없는 이는 하루하루를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되리라."[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저 점을 다시 보세요. 저것이 여기입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저것이 우리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 당신이 이름을 알고 들어 보았을 모든 사람,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저곳에서 삶을 영위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괴로움, 우리가 굳게 믿는 모든 종교, 이념, 경제 체제,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겁쟁이, 모든 문명의 창시자와 파괴자, 모든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모든 젊은 연인,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 희망에 찬 모든 아이, 모든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의 교사, 모든 부패한 정치가, 모든 "슈퍼스타", 모든 "영도자", 모든 성인과 죄인이 저곳 - 햇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입니다.[4]

칼 세이건, 보이저 호가 찍어서 보낸 지구(''창백한 푸른 점'')의 사진을 보고

세계사(世界史)는 단어 그대로 '''세계역사'''로, 전 인류의 역사에 관한 정보를 사학, 인류학, 고고학, 언어학, 사회학, 민속학 등의 관점을 통해 수집, 종합, 분석, 추리, 연구, 정리한 역사이며, 역사를 전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동향을 일컫는다.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후대에 알리고자 하는 습성은 인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 역사가들은 과거의 일을 계속해서 후대에 전해 내려왔는데, 그 형태는 글이 있는 문화권이라면 문자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남았고, 없는 곳이라면 신화, 전설, 구전 문학, 동화 등의 구전 역사의 모습으로 남았다. 그러나 지리적, 정보적 한계로 인해 그러한 움직임은 지역 역사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인류 전체의 동향을 한 흐름으로 보아 정리한 인류사라는 분야는 전근대 사회에서도 14세기 이슬람 역사가인 이븐 칼둔 등이 시도한 바가 있으나 역시나 당시 시대상의 한계에 부딪혔다. 이후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로 문화권 사이의 접근과 국제적인 교류가 쉬워지며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민족이나 국가적 단위를 뛰어넘는 역사적 사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볼테르, 헤겔, 마르크스, 토인비 등의 근현대 인물들이 세계사적 사고의 기틀을 제안하였다.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 세계화정보화가 급격히 가속화됨에 따라 학문으로서의 세계사는 폭발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현재까지도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세계라는 것은 그 규모가 커 세계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연표적인 개념의 시간의 흐름을 무작정 정리하는 것보다는 큰 주제를 통해 인류의 동향을 연구하는 편이다. 전쟁, 외교, 경제, 문화, 무역, 종교, 질병, 젠더, 예술, 음식, 사상 등의 테마들이 그러한 주제의 일부이다. 공통적으로는 인류의 생활 양식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흔히 유럽사의 시대 구분법인 '고대-중세-근세-근대'가 세계사에 대입되어 사용되고는 하지만, 이러한 시대구분법은 공통점을 찾아내서 분류하는 것에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많고 실제로도 역사가마다 그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아주 논쟁적인 주제이다.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약 3백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발현했을 때부터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정착할 때까지 인류는 석기를 사용해 수렵과 채집을 통해 오랜 시간 생활했다. 환경에 따라 이러한 수렵채집사회를 그대로 유지한 경우도 있었으나, 기원전 8000~5000년경 큰 강 유역을 중심으로 농업과 동물들의 가축화가 폭발적으로 시작되어(신석기 혁명) 문명이 탄생하였고, 문자회계가 발명되었다. 곧 큰 규모의 섬세한 문명이 지구 곳곳에서 번성하였으며, 인류는 다양한 왕국제국의 흥망성쇠를 목격하게 된다. 다양한 문명들은 무역이나 문화를 통해 서로 교류하였으며 이로 인해 지역세계들은 독창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고, 동시에 영토, 종교, 민족 등의 이유로 수많은 전쟁 또한 거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교류는 문명의 초창기부터 현대 시대까지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러 기술적, 문화적 번성을 이끌어내기도 했으나, 페스트, 천연두, 스페인 독감, 에이즈와 같은 전염병이 인류 사이에 쉽게 도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호모 사피엔스가 약 3만년 전 아메리카베링 해협을 통해 건너간 이후 빙하기가 끝나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은 물리적으로 단절되었으나, 15세기를 기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면서 서로의 문물이 교환됨과 동시에 학살전염병으로 인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90% 가량이 몰살당하여 아메리카의 문명들이 붕괴하였다. 이후 제국주의산업화를 거치며 인류 사이의 분쟁, 탄압, 착취는 절정에 달했고 기술력의 발달이 폭발적인 속도로 이루어졌다. 두번의 세계 대전냉전을 거치며 인류의 생활 양식은 송두리채 뒤바뀌었고, 냉전 중 일어난 우주 경쟁으로 인해 인류는 최초로 우주 공간에 자발적으로 진출한 지구 생물[5]이자 에 도착한 지구 생물이 되었다. 이후 교통·통신 수단의 발전과 정보 혁명을 거치며 현대 사회의 모습이 완성되었으며, 현재 인류는 기후변화·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점으로 인해 하나의 지구 공동체로서 이를 해소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아래부터는 인류의 발흥부터 현재 2024-04-18 19:54:14까지의 세계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중세'의 개념이 유럽중심적이며 다른 문화권에 대치하기 힘든 경우가 많음을 감안, 해당 문서에서는 영어 위키백과와 유사한 선사, 고대, 고전후, 근대, 현대의 분류를 따랐다. 이러한 구분법은 큰 흐름의 변화를 구별하기 위한 편의상의 구분이고, 실제 세계사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역사를 같은 기준으로 칼로 자르듯 엄밀하게 구분하기는 힘들다는 점을 일러둔다. 지역별, 민족별, 언어별, 종교별 등의 구분은 세계사/분류 문서를 참고 바람.

2. 선사 시대(3백만 년 전~기원전 3000년경)


선사 시대는 대개 '문자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의 시대를 일컬으며, 본 문서에서는 인류의 직계 조상이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인류가 문자를 처음으로 발명한 기원전 3000년경 까지를 선사 시대로 놓는다. 선사 시대는 현재까지의 인류의 역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시대는 인류의 출현, 인류의 진화 및 확산, 석기의 사용, 의 발견, 음악미술 등 인류 문화의 발전, 종교의 태동, 주 사용 도구의 변화, 농업의 발전, 문명의 시작 등의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

2.1. 인류의 출현, 진화, 확산


[image]
인류의 이동 경로
첫 인류이자 처음으로 직립 보행을 시작한 현 인류의 직계조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약 400~60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발현했으며,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약 180만 년 전인 호모 에렉투스 때부터 완전히 직립보행을 시작 했으며 불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음성 언어를 사용했으며, 약 4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등장하였다. 현생 인류라 볼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가 약 20만 년 전쯤 아프리카에서 등장했으며, 10만 년 이후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아프리카를 빠져나온 시점에서 당시에 생존해있던 네안데르탈인과 접촉해 혼혈이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아프리카 외부의 현생 인류[6]인 호모 사피엔스 유전자에는 네안데르탈인으로부터 발원된 유전자가 1~4%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곧 유라시아로 퍼져나갔고, 약 3만년 전에 빙하기로 인해 연결되어 있던 베링 해협을 통해 미대륙까지 진출했다.

2.2. 도구의 발달


현 인류의 직계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시절부터 인류는 석기를 사용했으며, 석기 시대 시작된 약 3백만 년 전부터 선사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석기 시대는 대체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인류의 출현부터 약 1만년 전까지 지속되었던 구석기 시대는 세계사의 아주 긴 부분을 차지한다. 어느 정도냐면, 인간이 살았던 시기를 100으로 본다면 구석기 시대는 98.8 정도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가 24시간이라면 15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주먹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 시대의 인류는 주먹도끼, 찌르개 등의 뗀석기를 사용했으며, 동굴이나 막집을 이동하며 사는 이동 생활을 했다. 수렵과 채집을 통해 자원을 획득하였으며, 동굴 벽화 등의 미술 활동을 남겼다.
일부 학자들은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의 짧은 전환점 사이를 중석기 시대로 정의하기도 하는데 이 시대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작고 날랜 동물들이 많이 나오면서 이에 맞춰 활이 개발되었다. 또한 작은 동물 및 물고기를 잡거나(화살, 작살, 작은 투창 등) 해체하기 위하여 조각이 작은 잔석기가 많이 쓰였다. 다만 이는 유럽 및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대륙에 따른 구분법으로, 지역에 따라 중석기 시대의 구분이 굉장히 모호한 지역도 있기에 학자들의 통일된 견해는 아니다.

2.3. 신석기 혁명


약 1만 2천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며 인류는 약 1만 년 전부터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의 인류는 돌도끼, 돌낫, 갈돌과 갈판 등 간석기, 그리고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됨에 따라 소위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 혁명''''이 시작된다. 이는 수렵채집경제로부터 생산경제로 옮겨가는, 인간의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인류사에 있어 아주 극적인 변화로, 식량을 수렵/채집하는 단계에서 생산 단계로 발전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였다.
농업은 중동에서는 기원전 10,000년경, 지금의 중국에서는 기원전 7000년경, 인더스 계곡과 유럽 대륙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기원전 4000년경 즈음에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곡물의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는 보리를 재배하고 염소가 길들여진 기원전 8500년경 중동지역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인더스 계곡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 를 가축화하여 모내기를 했다. 중국의 황하 인근에서는 기원전 7000년경에 , , 수수 등의 서곡(黍穀)을 재배했지만, 장강 인근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에 농사를 시작해 을 주식으로 삼았다. 아메리카 전반에서는 해바라기가 기원전 4000년경 재배되었고, 기원전 3500년에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이 재배되었다. 남아메리카안데스 산맥에서는 감자가 처음으로 재배되었으며 라마알파카도 가축화되었다.
다만 이 시대에 농경이 등장한 것은 맞지만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수렵과 채집을 기본으로 하며 생활하였다.
이 당시에는 관개기술이나 파종법 등 농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석기 후기에 들어서도 농경은 조악한 형태와 소규모로 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농경(벼농사)은 아무래도 철제 농기구 사용과 관개수로 정비에 노동력 동원이 가능한 계급제와 국가 제도가 정비된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래도 탄수화물(섭취 후 당으로 변환되며 지방으로 축적됨) 섭취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성인병과 비만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또한 이 시기부터 인류는 동굴천막을 버리고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을 짓기 시작하며, 이나 과 같이 본격적으로 돌을 이용한 건축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초기형 물레와 베틀은 이 시기에 이미 존재. 즉 이 시기부터 직물이 생산되고, 천옷이 존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류가 '노동'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때부터다. 흔히 '도구와 기술이 발달하면 삶의 질도 향상한다'라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농경이 시작되자 수렵 채집을 하던 시절보다 여가 시간과 영양 수준이 '''오히려 줄었다'''.[7] 7만 년 전 인간이 살았던 아프리카 동부 해안 유적에서 조개 껍질을 갈아 만든 목걸이 따위가 나올 정도로, 구석기 시대에조차 인류의 정신 문화는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농업이 시작되면서 유물의 질적 수준은 급격하게 하락한다. 채집 시절에 근사하게 목걸이도 만들고 절구도 모양 좋게 다듬어서 썼지만, 농사 짓기 시작하면서 바빠서 그런 건 없다가 되어버렸다. #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정신 문화의 상실'은 잉여 자원과 이로 인한 '재산' 개념의 생성,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시작된 계급사회와 '사치'의 개념이 도입되고 나서야 원래대로 회복한다. 쉽게 말해 농업이 인류 전체의 문화를 일시적으로 앗아간 셈인 것이다.
유골의 경우도 채집 시절에는 영양 상태가 고르고 키도 컸지만, 농경 시대에 들면서 키도 작아지고 관절의 마모도 심해졌다. 그러고도 식량이 모자라 다툼이 잦았는지, 이 시대에 발견되는 유골의 상당수에서는 전투로 인한 타박상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는 대체적으로 농업이 불러온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현상의 원인이라고 지목되고 있다. 아무리 조악한들 농사는 농사고 농업과 채집, 수렵의 병행은 인류로 하여금 '정착생활'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 전쟁약탈 행위가 벌어지고 그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원시적인 초기의 농경으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고, 특히 일시적인 기상 변동 등 국지적인 자연적 압력에도 취약했던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급작스런 인구 밀도 증가와 무엇보다 가축 사육이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전염병 등으로 공동체가 와해되는 시기를 겪기도 하는 등 농경사회의 정착은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이뤄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신석기 시대 문서 참조.


3. 고대 시대(기원전 3000년경~서기 500년경)


고대 시대는 최초의 문자인 쐐기 문자의 등장 시점, 즉, 인간이 문자를 발명함에 따라 문자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된다. 이 고대 시대가 언제 끝나는지는 애매한 부분인데[8], 본 문서에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했을 때 즈음인 서기 500년을 고대의 끝으로 잡는다.
이 시대는 문자의 발명, 고도화된 문명의 출현, 제국의 탄생 및 확장, 전세계적인 학문의 발달 등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3.1. 고도화된 사회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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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질하고 씨를 뿌리는 농부 부부
고대 이집트, 기원전 1200년경
농업은 훨씬 더 밀집된 인구를 허용했고, 이는 곧 국가로 조직되었다. 농업은 또한 식량 생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직종에 종사할 수 있게 할 수 있게 만들어,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농업의 발달로 최초의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도시들은 무역, 제조업, 정치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기원전 6000년경 제리코나 차탈회윅과 같은 초기 형태의 도시가 출현했다. 이는 농업의 발전으로 인해 조직적인 행정과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는 가설이 정설이었으나, 최근에는 기원전 9600년 무렵에 발전한 것으로 추측되는 괴베클리 테페가 등장하면서 아직 농경 문화에 들어서기 전인 수렵 채집민들도 이미 조직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흔히 서양권에서 '문명의 요람'이라고 부르는 비옥한 초승달 대지 지역, 즉 이집트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3000년경 문명이 맨 처음으로 탄생했으며, 이러한 문화는 바퀴, 다양한 청동기, 선박, 직물, 건축물, 그리고 문자회계의 발명 등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문명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문자를 발명한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원전 3400~3100년경), 고대 이집트(기원전 3250년경), 중국 문명(기원전 2000년경), 그리고 메소아메리카 문명(기원전 650년경)이 있다.

3.2. 주요 고대 문명


많은 사회가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며 세계적으로 도시국가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 이집트나일 강, 인도 반도인더스 강, 중국양쯔강황하 인근, 그리고 현재 페루의 노르테치코 지역의 포르탈레자 강, 파티빌카 강, 수페 강 인근 등 '''큰 강 유역'''에 집중되었다[9]. 큰 강의 유역이 문명의 요람이 된 이유는 수로를 통한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이라고 불리는 수메르 문명에서 기원전 4000년 경에 우루크 등 다수의 발달된 도시국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3000년경에 쐐기 문자가 발명되었다.
한편 고대를 시작으로 지중해를 인근으로 큰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유럽아프리카, 아시아의 경계를 잇는 지리적 특성상 지중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주 중요한 바다로 평가되곤 하는데, 이는 상업의 발달, 그리고 사상과 과학기술의 교환으로 이어졌다. 또한 기마술과 전차가 발달했으며 이는 군사 기술이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발전은 수많은 국가들, 특히 제국들의 탄생과 확장으로 이어졌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많은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교류와 분쟁이 이어졌고, 이집트에서는 상, 하 이집트의 두 왕국이 존재했으며 왕국 안에는 30여 개의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성벽을 두르며 사실상의 자치를 누리며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3100년 경 상 이집트의 왕이었던 나르메르가 이를 통일함에 따라 이집트 왕조가 시작된다. 크레타 섬에서는 기원전 2700년 경부터 미노스 문명이 발현했으며, 이는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간주된다. 기원전 25~21세기에는 사르곤 대왕 치하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다스린 아카드 제국, 그리고 아카드가 멸망한 뒤엔 수메르 제국의 다양한 왕조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평정했다.
다음 천 년 동안, 문명은 전 세계에 걸쳐 발전했다. 중요한 자원에 접근하거나 중요한 무역 루트를 통제하는 국가들이 우위에 오르면서 무역은 점점 힘의 원천이 되었다. 기원전 17세기 부터 시작된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5세기 경에 전성기를 맞았다. 《일리아스》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소아시아에 위치했던 강력한 도시국가 트로이와 적대 관계였고 이후 두 번이나 패퇴시켰다고 하는데, 트로이 전쟁의 실체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전쟁이 실제로 발발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원전 12~11세기 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인도에서는 기원전 15세기 경에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인들에 의해 베다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대는 베다가 쓰여지며 초기 인도 사회의 힌두교와 다른 문화적 측면의 근간을 마련했다. 기원전 550년경부터 인도 반도 전역으로 십육대국이 세워지며 베다 시대는 끝을 맞는다.
중국에서는 최초의 왕조 국가인 하나라가 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고학적 단서가 부족해 국가로서의 그 존재는 확실치 않다. 존재가 확실한 상나라는 기원전 17세기부터 기원전 11세기 무렵까지 번성했으며 청동기가 발달했고 갑골문자과 무덤 유적 등을 남겼다. 주나라는 상이 멸망하고 기원전 11세기 무렵에서 기원전 256년까지 존재한 나라로,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시대에 집단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주문왕의 시기에 국(國)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주무왕목야대전(牧野大戰)에서 상나라를 패퇴시키고 당시 중국의 패권을 차지했으나, 기원전 770년 경 주나라가 견융의 공격을 받아 천도 한 뒤(동주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 중원에는 수많은 나라가 등장하여 오백 년 넘게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진 혼란의 시대가 이어졌고, 결국 진(秦)나라진시황에 의해 통일되며 비로소 '통일된 국체로서의 중국' 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러나 진시황의 무리한 수로 공사나 대외 정벌 정책 등으로 민중의 지지는 급속도로 떨어졌고, 결국 진시황 사후 제국은 붕괴한다. 이후 중원의 빈자리를 두고 항우유방다툰 끝에 유방이 승리하여 한나라를 세운다. 같은 시기 한반도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나라가 수립되고, 일본에도 야마토라는 원시적 국체가 등장한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은 비교적 다양한 지역 문화로 분열되어 있었다. 북아메리카는 전통적인 수렵채집 형태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문화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메소아메리카남아메리카에선 기원전 1500년부터 서기 500년 사이에 올멕, 마야, 사포텍, 모체, 나스카 문명 등 보다 복잡하고 중앙집권적인 문명이 출현했다. 올멕 문명은 석조 거대 두상 등의 유물을 남겼고, 마야 문명역법, 천문학, 철학 등에서 높은 수준의 학문적 발달을 경험했으며, 나스카와 인근 문명들은 나스카 지상화를 남기는 등 여러 부분에서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3.3. 철학과 종교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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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기원전 480? ~ 400?)
공자
(기원전 551 ~ 479)
소크라테스
(기원전 469 ~ 399)
고대 시대의 인류는 전세계적인 철학종교의 동시다발적 발달을 목격했다. 독일의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1949년의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 시대를 거시적이고 역사철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하였고, 기원전 80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 사이를 ''''축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이 시대에는 유라시아 전역, 정확히는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직접적 문화교류 없이 독자적으로 철학적, 종교적 발달이 나타났는데, 중국에서 출현한 유교, 인도에서 출현한 불교자이나교, 고대 그리스의 철학 사조, 페르시아에서 출현한 조로아스터교와 레반트에서 출현한 유대교 등의 유일신교 등이 전부 기원전 800년을 기해 600년 경에 특히 발달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대에 정립된 철학과 종교들이 발달, 확산, 교류되며 세계 각각의 문명의 역사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고, 더 나아가 현재까지의 역사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전세계의 인류가 이 시대의 산물의 종교적, 철학적 사상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되었다.[10]
동아시아에 특히 영향을 끼친 것은 중국의 동주시대에 쏟아져 나온 제자백가 사상으로, 춘추전국시대를 겪으며 제후국들이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던 배경 속에서 다양한 사상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공자, 맹자, 순자 등이 주장한 가족 윤리를 중시하여 중국 주류 사상을 수립한 유가, 노자, 장자 등이 주장한 자연의 순리를 따를 것을 주장하여 중국인들의 자연관, 예술관에 영향을 끼친 도가, 그리고 한비자가 집대성 한 엄벌주의를 통한 사회 질서 유지를 주장한 법가 등의 사상들이 탄생해 중국사에 큰 정치적, 철학적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유교는 이후로도 20세기까지 정치, 제도, 철학, 종교 등에 넓게 걸쳐 동아시아 세계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남아시아에서는 기원전 7세기경에 우파니샤드 철학이 등장하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이나교, 힌두교불교 교리의 이론적·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우파니샤드는 현대의 대중에게 친숙한 (業), 윤회(samsara) 등의 개념을 맨 처음으로 언급하였으며, 종교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 철학의 기본적 근간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기원전 6세기경 마하비라가 아주 엄격한 계율과 고행을 통해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인 자이나교를 창시했다. 또한 유사한 시기에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침에 따라 불교가 탄생했고, 평등과 윤리적 실천을 통한 해탈이라는 개념이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기원전 4세기경 북부 인도를 통일하고 마우리아 왕조를 수립하여 아소카 대왕 시기에 전성기를 이룩했는데, 신실한 불자였던 아소카 대왕의 치하 아래 불교 철학, 문학, 예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상좌부 불교가 발달하여 동남아시아 세계로 전파된다. 한편 1세기 무렵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 시기에 새로운 형태의 불교이자 대중의 구제를 강조하는 대승 불교가 출현하였는데, 대승 불교는 중국에 전파되고 곧 삼국시대의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도 전파되게 되어 동아시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7세기 송첸감포 왕 때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지고 8세기 티송데첸 왕이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티베트에 불교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는데, 대승 불교가 번성하였던 북인도,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티벳에서는 인도로부터 유입된 정통 대승불교가 흥성할 수 있었고, 밀교에 영향을 받으며 곧 티베트 불교라는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서아시아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게 된다. 다신교 사회였던 고대 페르시아에서 그는 선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는 유일신교를 창시하였고, 세상이 선과 악의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 천국과 지옥의 개념, 그리고 구세주의 개념과 같은 세계관을 창시했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고,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미트라 등 하위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으나, 사산 왕조가 등장하며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 한 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종교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고, 반대로 유대교, 기독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서기 3세기에 마니교라는 종교도 생겼으나 사산 왕조에게 이단으로 취급받아 탄압을 당했다.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데, 탈레스를 시작으로 소피스트들의 출현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에 의해 서양 철학의 기틀이 잡히게 된다. 최초의 서양 철학은 '이 세계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탈레스는 처음으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뒤를 잇는 철학자들 역시 답을 찾기 위해 생각하고 생각하게 되면서 서양 철학이 시작된다. 아테네 민주정의 발달로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선 말솜씨가 뛰어나야만 했고, 이런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변론술과 수사학 등을 돈을 받고 가르치는 "지혜로운 자들", 즉 소피스트들이 등장했다. 소피스트들은 진리의 상대성, 주관성을 강조했는데, 이를 비판한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절대적 진리를 강조했고, 변증술을 처음으로 고안했으며, 또한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화두이면서도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을 제시했다.[11] 그의 직계 제자인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을 비롯한 이전 철학자들을 계승하여 앎, 우주, 그리고 인간 등에 관하여 방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겼고, 교육기관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하여 자신의 철학을 기록했다.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에서 나와 플라톤과는 사뭇 다른 방향의 철학적 탐구를 개진해나갔다. 예컨대 실제 자연에 대한 탐구를 보다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문학 등 그야말로 다양한 학문 분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윤리학에서 현대까지 계승되는 주요한 관점들을 제시하였다. 자세한 것은 철학사/서양 문서의 '고대 철학' 소문단 참고. 이 철학자들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팽창하며 유럽 전역과 중동으로도 뻗어나가게 된다.
한편 이러한 흐름에 해당하지 않았던 대다수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지역의 사람들도 근대 시대에 접어들고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축의 시대 종교/철학의 영향력 아래 놓여지게 된다.

3.4. 제국들의 출현과 흥망성쇠



4. 고전후 시대(500년경~1500년경)


고전후 시대(Postclassical Period)는 고대와 근대 사이를 일컫는다. 보통 이 시기는 흔히 중세로 불리고는 하지만, 이 중세라는 것이 참 유럽중심적이면서도 정의하기도 애매하고 민감한 것이기에... 당장 중세라는 개념이 나온 유럽사 내에서만 해도 중세를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끝나는 것으로 봐야하는지에 대한 사학자들의 토론이 아직까지도 이어진다. 그러니 이를 세계사에 대입하고자 하면 혼란이 일어나는 당연한 것이다. 그 예로 한국사만 봐도 중세가 남북국시대에 시작되는지 고려시대에 시작되는지 애매하고, 러시아사의 경우 중세라는 표현을 아예 피하고 표트르 대제를 기준으로 그 전을 고대 러시아라고 부르며,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의 경우 전고전기-고전기-후고전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을 피해 현재 세계사에 한해 학계는 고대와 근대의 사이 시대를 '고전후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추세가 되었으며(예: 영어 위키백과Post-classical history 문서[12]), 이 문서도 같은 표기를 사용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러한 시기는 단순 편의를 위한 구분법이며 절대적인 기준점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하자.
이 시대는 세계 문명의 지리적 확장, 문명 간의 교류 네트워크 발달, 세계 주요 종교들(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의 영향력 확장, 몽골 제국의 팽창,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흑사병 발병,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정치경제적 판도 변화 등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4.1.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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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제국의 영토 확장
* 진한 갈색: 무함마드 지배 시기의 영토(622~632)
* 황토색: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
* 노란색: 우마이야 시대(661~750)
중동과 그 근역은 7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사산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7세기에 접어들자 아랍 지역에서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이 발흥하였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반도의 분열되어 있던 아랍 부족들을 이슬람의 기치(旗幟) 하에 통합하였다. 동로마로부터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중동 대부분 지역이 아랍-이슬람 문화권이 되었다[13].
정통 칼리파 시대의 이슬람 제국은 급격한 팽창과 성장을 이루었다. 정통 칼리파 시대가 끝날 무렵 이슬람 제국의 영토는 이미 아라비아 반도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레반트, 리비아를 아우를 정도로 성장했으며, 이들 영토는 후의 우마이야 왕조가 추가로 확장을 한 이후에도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로서 기능하였다. 여기에 맞먹을 정도의 팽창을 이룬 중동의 제국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오스만 제국 정도를 빼면 전무하며, 후대의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영토까지 합치면 중동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마이야 왕조는 두 번째 이슬람 칼리파 시대로써, 현재 시리아에 있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이슬람 제국을 통치하였다. 우마이야 왕조는 정통 칼리파 시대의 정복을 이어받아 마그레브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신드 지역 등을 정복하였다. 전성기인 아브드 알 말리크 대에는 예루살렘에 현재도 남아있는 바위의 돔을 건설하였으며,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등 기존 로마 건축을 받아들인 건물을 각지에 남겼다. 이 시기 이슬람은 그 세를 크게 확장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이란 고원에서 북아프리카까지 넓은 영역을 관할하였다. 4대 칼리파인 알리가 암살당하고 난 후, 정통 칼리파 시대는 끝나고 무아위야 1세에 의해 첫 세습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가 통치하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인도 북서부까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718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실패한 후 쇠퇴하였으며, 740년경부터 호라산에서 아바스 가문이 대두할 때에 마침 시리아 일대는 내전에 시달렸다. 또한, 아랍인들이 새로운 이슬람 개종자인 마왈리(대부분 페르시아인)에 대한 차별을 일삼아 결국 시아파와 마왈리의 지지를 받은 아바스 혁명군에게 패해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가 살해되며 750년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우마이야 일족은 잔치에 초대된 후 방심한 틈을 타 모조리 숙청되는데, 히샴의 손자가 살아남아 서쪽으로 도주하여 알 안달루스(이슬람 지배기의 이베리아 반도)에 세운 국가가 바로 후우마이야 왕조이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 이후 성립된 아바스 왕조는 동아시아 근방까지 진출하여 탈라스 전투(751)에서 당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중앙아시아의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중국이슬람 제국의 분쟁이며, 중국의 서역팽창 저지와 중국이 독점하고 있던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인 제지술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파되어 유럽까지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당나라가 완벽하게 패배함으로써 실크로드 교역로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이슬람 세력권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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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제국 도서관의 학자들〉
1237년 야햐 알와시티 作.
아랍인들은 정복지의 제도와 문화적 유산들을 빠르게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8~11세기 동안 중동 지역은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통틀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는데, 이를 이슬람 황금기라고 부른다. 그 예시 중 하나가 9세기 경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이 현재의 바그다드에 건립한 지혜의 집으로, 지혜의 집은 중세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 중세 중동의 문학, 사학, 철학, 종교학과 같은 인문학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알 가잘리와 같은 철학자도 등장하여 중세 이슬람 철학의 기반을 닦았다. 건축학, 의학, 약학, 공학 등의 과학기술도 발전했는데, 특히 의학 기술이 당대의 다른 지방에 비해 비약적인 발달을 겪었다.[14] 실제로 당나라 시기에 이슬람 제국을 방문한 중국인의 기록에서, 구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시리아 출신의 의사들이 이슬람 제국에서 크게 활약했음을 알 수 있고, 사산조 역시 동로마에서 박해받고 찾아온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의 고전 그리스-로마 문화를 잘 흡수했으며, 뿐만 아니라 동쪽에서 인도 세계의 의학적 지식까지 흡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압바스 왕조의 통제력이 약해져 지방 세력들이 난립하고, 용병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유목민 튀르크인들이 아대규모로 이주해 오기 시작하면서 중동 지역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 상황에 빠졌다. 이에 더해 11세기 말에는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13세기 초에는 몽골이 쳐들어오는 외우내환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 십자군 세력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통일성을 되찾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격퇴되었으나, 이란을 중심으로 한 동부 이슬람 세계는 튀르크인 도래 이후의 오랜 정치적 혼란에 뒤이은 몽골의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중동 지역 대부분은 사막 혹은 건조 기후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농경지로 쓸 만한 땅이 많지 않았는데,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관개 시스템 역시 수천 년에 이르는 집약적 농업으로 인한 토양의 염화와 관개 시설의 파괴, 사막화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13세기 이후 중동 지역은 인구-생산력 측면에서 유럽 지역에 비해 열세에 놓이기 시작했고, 곧 문화-기술적 측면도 유럽 지역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따라잡히게 되었다. 그나마 비단길, 바닷길을 이용한 아시아-유럽 간 중계 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았지만, 이 역시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시대의 시작으로 막히게 되었다. 또 중동권 역시 흑사병에 의해 유럽 못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4.2.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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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1세
(482~565)
476년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스스로 '가톨릭의 보호자'를 칭하며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등에 업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배권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또한 가톨릭의 보호자로 나서면서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496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15]가 가톨릭 교도로 개종[16]하여 강성해지고,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아리우스파 게르만 왕국들을 공격하여 약화 쇠멸시키자, 남은 게르만족 왕국들도 상쟁하다가 멸망하거나, 국가안정을 위해 동로마인과의 융합을 도모하며 결국 가톨릭으로 전향하면서, 아리우스파는 사라진다. 그리고 두 개의 정통파 교회인 가톨릭정교회는 처음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으나, 신학적·정치적·문화적인 다양한 문제로 인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총대주교구를 중심으로 세력이 나뉘면서 7세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후에는 서로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의 교황이 갖고 있던 정치·사회적인 권위는 강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여전히 강성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수호자로 남아 지원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권력에 있어서 더 우위에 있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에 남아있었고, 535년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동로마에 수복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로마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시기도 꽤 길었다.[17]
그래도 로마 교회는 이전부터 총대주교구들 중 첫 번째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방에서의 교황권 강화를 계기로 삼아 로마 교황이 전체 기독교 교회를 지배한다고 천명했고, 동로마 황제가 비호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18]에서는 로마 교황이 단지 다섯 총대주교 중 1명일 뿐이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칭호에 '전 기독교 세계의 총대주교'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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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년의 유럽
하지만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성상파괴령을 내리자 양 교회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성상파괴령을 단호히 거부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 한 세기가 넘은 내전 끝에 843년에는 성상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의 결합은 요원해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포티우스 분열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특히, 동로마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는 중이던 서기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대제[19], 즉 샤를마뉴를 서방의 새로운 황제(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시킴으로써 두 교회 중심지의 골은 이제 메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 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고 만다. 카롤루스 대제까지는 프랑크의 세속군주가 가톨릭의 교황보다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사후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 상속[20] 받으며 제국은 한 세대 만에 분열되었고, 이후 북쪽에서부터 바이킹이 침공해와 정착하며, 서유럽은 봉건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동시에 교황령 또한 크게 늘어나게 됐다.
845년에는 마자르족아르파드가 동유럽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정복활동을 벌인 후, 정착해 나라를 세운다. 이후 그의 손자와 증손자에 의해 10세기 초 가톨릭으로 귀의한 뒤 대공의 지위를 얻으면서 헝가리 대공국이 된다.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이탈리아 왕국을 병합하고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되면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되었다. 헝가리 대공국의 군주 이슈트반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으며 1000년에 헝가리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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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1077)
하인리히 4세(中)가 클뤼니 수도원장 후고(左)와 마틸데 여백작(右)에게 간청하는 것을 그린 12세기의 삽화이다.[21]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사상·종교·사회·정치에 있어서 교황은 막대한 권위와 권력을 지니게 됐다. 특히 교황의 권한이 세속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커졌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1077년의 하인리히 4세를 굴복시킨 카노사의 굴욕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을 굴복시킨 존 왕에 대한 파문 사건(1209년) 등이 있다. 당시 교황의 힘은 단지 종교계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영적 권력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이탈리아의 노른자위 땅+각국의 교회에서 걷히는 세금을 바탕으로 한 세속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황이 황제나 왕과 직접 군사력으로 맞서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당시 황제나 왕들도 자국 내에 자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왕 못지않게 강력한 대영주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눈치를 계속해서 봐야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황제나 왕의 관을 씌워줄 권한'''이 있었고, 현직 황제나 왕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의 이들을 지원해 줄 '''군대와 돈'''이 있었기에 이렇게 강력한 교황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교황과 황제의 대립 과정에서 황제들이 옹립한 대립교황들의 존재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이 이런 목적에서 세운 대립왕(Contrarex, 다른 번역명으로는 반왕)들도 많았다. 카를 4세가 교황이 세운 대립황제가 황제가 된 대표적 예이며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3세 등도 유명한 대립황제 출신 황제들이다. 이렇게 교황의 지원을 받은 황제들은 당연히 교황의 눈치를 잔뜩 볼 수밖에 없었고 성직 임명권, 교회 과세권 등을 넘겨주며 교황권을 강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종교의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올라가자 한때 교황들이 유럽의 왕이나 황제보다도 강력한 실존하는 권력을 뽐낸 적도 있다. 1305년부터 1978년까지 모든 교황은 삼중관이라는 관을 썼는데 왕관 3개가 쌓여 있는 형태이다. 이 삼중관은 서유럽, 더 나아가 전체 가톨릭 세계의 왕과 황제, 대통령, 총리 등의 세속 지도자들보다도 교황의 권위와 권세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였다. 그러다 결국 막강해진 교황권에 의해 십자군 전쟁(1069년-1291년)이 시작된다. 이 종교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4차(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이르렀을 때에는,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은커녕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해 버림으로써, 정교회와의 연을 끊어버리는 등, 사실상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왔고, 결정적으로 1350년대에 유럽을 덮친 흑사병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면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22] 몽골의 지배 하에 있던 중앙아시아 평원 지대에서 시작되어 동유럽의 해상 교역로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진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은 7,500만명~2억 명의 인구, 즉 당시의 유럽 인구의 최소 30%에서 50%, 지역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몰살하는 대재앙을 겪었다. 이로써,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 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 경제와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가 탄생할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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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1412~1431)
유럽의 중세 말기에 중요한 사건 하나는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으로,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다. 기사도가 최대 정점을 찍음과 동시에 쇠퇴기에 들어간 시기이며, 당사국인 영국프랑스 양국은 물론 서유럽의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두 나라의 국민정체성을 싹트게 했다. -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오스만 베이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유럽의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를 누리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넘어(1453) 유럽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헝가리 왕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들이 최선을 다 했으나, 결국 헝가리 왕국모하치 전투(1526) 이후, 나라가 분열되고, 왈라키아 공국(1522)과 몰다비아 공국(1476)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다.

4.3. 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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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보디 사원
5세기경 현재의 모습으로 축조되었다.
이란사산 왕조에게 쿠샨 왕조가 망한 뒤 북인도에는 굽타 왕조(320~550)가 들어섰는데, 이때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힌두교가 성립하는 등 인도 고전 문화의 기틀이 섰다. 그리스계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브라흐마 - 비슈누 - 시바의 3신 신앙이 이때 본격화되었으며, 왕은 힌두교의 화신('라자')으로서 권위를 누렸다.
굽타 왕조는 사무드라 굽타, 찬드라 굽타 2세, 쿠마라 굽타 등으로 이어지며 한 세기 넘는 기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다. 2대 사무드라 굽타는 북인도의 여러 왕국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합병했고 남인도의 여러 왕국을 굴복시켜 영향권에 두었으며, 3대 찬드라 굽타 2세는 사카 왕조를 무너뜨려 북인도의 서부 해안 지대를 확보하는 일련의 군사적 성공을 과시했다. (한편으로는 찬드라 굽타 2세가 지금의 아무 다리아 일대까지 원정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 또한 중국인 여행자 법현이 저술한 불국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의 인도는 국민은 평화를 누렸으며 각종 복지 시설이 잘 구비되고 치안이 원활하게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였다고 한다.
이전부터 전래되던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전승이 문헌으로 정리되었으며, 칼리다사 등의 시인이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힌두교의 등장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으나 학문적 연구와 미술적 발전은 계속되었고, 0의 개념과 십진법을 기반으로 한 아라비아 숫자[23]가 처음으로 만들어 지는 등 특히나 수학이 크게 발달했다. 이외에 지전설, 지구 구형설 등의 과학 발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5세기경 굽타 왕조는 훈족 계통의 유목민족 에프탈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약화되었고 결국 이들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혼란 속에서 바르다나 왕조가 북인도를 한 차례 통일하였으나 순식간에 멸망하고, 인도는 다시 분열 시대에 들어간다. 흔히 굽타 왕조의 몰락을 인도 고대사의 끝으로 본다.
굽타 왕조의 붕괴 이후, 인도에서는 중소 국가들의 투쟁사가 전개된다. 이 시기부터 무굴제국의 등장까지를 흔히 인도사의 중세로 본다. 북방에서는 바르다나 왕조 이후 프라티하라 왕조로 대표되는 구자라트계 왕조(740~1018), 팔라 왕조(750~1174)의 양대 왕조가 흥성하였고, 데칸 고원의 라슈트라쿠타 왕조(753~982)와 8~10세기에 걸쳐 카나우지에서 삼각 구도를 이루었다. 이 중 프라티하라 왕조는 미히라 보자와 마헨드라팔라의 재위를 거치면서 북인도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고, 300년 동안 이슬람의 인도 침입을 저지한 북인도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는 남방 지역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힌두 왕국인 팔라바 왕국(3~9세기), 남인도 왕조로서 유일하게 갠지스강까지 진출한 촐라 왕국(9~13세기), 찰루키아 왕국(6~13세기), 비자야나가르 왕국(14~17세기) 등이 동남아시아 및 이슬람권과 교역을 활발히 해나갔다.
또한 굽타 왕조가 국가 재정비를 위해 불교 대신 계급 위주의 힌두교를 후원한 이래 불교는 급속히 쇠퇴하여 갔으나, 8~9세기경까지 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계와 직접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24]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하층민들은 신분제의 틀이 엄격했던 힌두교 대신 평등 사상이 담긴 이슬람교를 많이 택했는데, 이 때문에 평등 사상에 힘입어 세력을 이어가던 불교는 다시 한 번 치명타를 입게 된다. 당시 인도의 불교계는 상좌부/대승 불교로의 분열 이후 수많은 부파로 갈라져 이들 간의 소모적인 교학 논쟁에 집중되어 대중에 대한 관심이 많이 약해지고 오랫동안 주류 위치를 차지하면서 평등 사상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는 데다가 힌두교를 흡수하기 위해 신격과 주술, 의례를 받아들여 불교화한 밀교가 등장한 상태였는데 이 밀교가 이슬람이 유입되는 상황에서 되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이에 힘입어 이 시기는 샹카라, 라마누자 등 뛰어난 힌두교 이론가들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불교 철학을 논박하며 특히 아트만(자아, '나')과 브라흐만(우주와 그 통일적 질서)의 일체화(범아일여)를 중시하였으며, 베단타 학파를 융성하게 했다.
한편 8세기를 넘어 북부 인도에 이슬람 세력이 유입되면서 인도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게 된다. 이슬람 세력의 동진은 10세기 이후 본격화되어, 이슬람 계통의 가즈니 왕조(962~1186), 고르 왕조(1117~1215)는 아프가니스탄투르크 왕조로서 인도로 침투하다가 마침내 델리를 점령하여 인도 이슬람교의 본격적 발걸음을 떼게 된다. 한편 잘랄 웃 딘과 같은 호라즘 제국의 잔당세력이 인더스 강 너머로 도피한 경우도 있었다.
고르 왕조는 대정복자였던 무함마드 고리의 죽음(1206)으로 군벌들이 분립하면서 멸망하고, 델리 술탄 왕조(1206~1526)는 이 지역에서 토착화하여 완전히 북인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완전히 확립되지는 못해, 델리 술탄 왕조 내에서 순서대로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라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의 5개의 왕조가 교체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델리에 자리 잡은 술탄국들은 어찌되었건 점차 힘을 강화하여 점차 남방으로 진출하였고, 무굴 제국의 건설에서 전초 역할을 하게 된다.
남방 지역에도 데칸 고원에 이슬람 왕조(데칸 술탄국, 1490~1596)가 자리 잡았던 반면, 힌두교를 믿는 왕조인 라지푸트('라자'에서 나온 말로, 힌두계 왕조를 지칭) 왕조들도 계속 존속하고 있었다. 힌두계 왕조로서 장기 지속된 왕조로는 건축의 발달과 교역의 흥성 등으로 유명한 비자야나가르 왕국(1336~1649) 등이 있다.
비자야나가르 왕국 역시 델리 술탄 왕국처럼 여러 왕조가 교체되었으며(상가마 - 살루바 - 툴루바 - 아라비두), 이 중 상가마 왕조의 데바 라야 2세와 툴루바 왕조의 크리슈나 데바 라야 시기에 그 국력이 정점에 달하여 인도 아대륙 내에서 제일의 세력을 자랑했다. 데바 라야 2세의 시기에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스리랑카와 미얀마에게서까지 조공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1565년, 이슬람 연합군에게 탈리코타 전투에서 패배하고 수도까지 빼앗기며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4.4. 동아시아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부정부패와 민란 등으로 썩어들어가 결국 멸망하고, 그 빈자리를 두고 여러 군벌들이 다투다 유비촉나라, 조조위나라, 손권오나라천하를 삼분한다. 이후 조조의 가신이었던 사마의가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손자 사마염진나라를 건국, 다른 나라들도 모두 정복하여 다시금 천하를 통일하나 곧 멸망해 버렸다. 이후 이 땅에는 300년 동안 통일 왕조가 등장하지 못하고 크고 작은 수많은 나라들이 성립되고 몰락하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혼돈의 위진남북조시대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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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태자묘의 벽화 <예빈도(禮賓圖)>
당나라를 방문한 외국 사신들을 그린 벽화로, 그림의 당나라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오른쪽에서부터 각각 북방 유목민, 고구려(혹은 신라)인, 그리고 동로마인이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 약 300년이 흐르고 나서부터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서로 동맹도 맺고 배신도 때리면서 한반도의 주인 자리를 놓고 다툰다. 589년에는 수나라가 재차 중원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패배한다. 이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나며 수나라는 건국 40년만에 몰락해 버리고, 그 자리에 당나라가 들어서서 다시금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당나라 - 신라 동맹, 고구려 - 백제 - 일본의 동맹 구도가 형성되어 한반도를 두고 삼국통일전쟁이 펼쳐진다. 여기서 당나라와 신라가 승리하여 676년,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당나라가 대동강 북쪽 땅을 취하게 된다. 당나라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신라를 공격해 한반도 전역 정복이라는 야욕을 펼쳤지만, 삼국의 유민이 힘을 모은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패배함으로써 신라는 단단한 통일 국가인 통일신라로 거듭나고,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은 멈추게 된다. 이후 한반도 북부 만주에는 대조영을 필두로 한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를 정신적으로 계승한 발해를 건국한다(698). 발해는 200년 동안 만주 일대의 넓은 땅을 호령하며 융성했지만 거란의 공격 등 원인으로 갑작스레 멸망하게 된다(926).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의 개혁과 다이카 개신(646) 등으로 부족 연합체였던 야마토가 중앙집권제 국가로 거듭나고,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확립한다. 또한 이때 쇼토쿠 태자가 불교도 수입한다. 이후 당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며 문화적으로 융성하게 발전한다. 천황 중심의 국가가 운영되었으나 지방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여 성장한 무사 계급이 성장하여 결국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하고 천황은 허수아비 신세가 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건국된다.(960) 그 근처인 만주에는 발해가 멸망한 자리에 거란족요나라를 세운다.(916) 한반도에는 오랜 역사 끝에 신라가 쇠퇴하고 고려가 들어선다.(918) 고려는 거란, 여진 등과 싸우며 옛 고구려 영토들을 되찾아 나간다. 한편 여진족금나라를 건설하고(1115) 곧 무섭게 성장하여 송나라, 요나라와 대치하기에 이른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고(1125), 곧 송나라도 멸망시키고(1127), 고려에게는 군신 관계를 요구한다. 송나라 왕실은 중원의 남쪽으로 피난 가 남송을 세운다. 그렇게 금나라의 영향 아래 동아시아 지역이 안정되는 듯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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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확장[25]
그러나 칭기즈 칸이 치하하는 몽골 민족이 송나라, 금나라 등 주변국들을 닥치는대로 멸망시키며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몽골 제국을 수립한다(1206). 고려는 몽골 제국에게 끈질기게 항쟁하였으나 패배는 불가피해 보였고 결국 당시 태자쿠빌라이 세자를 찾아가 그 앞에 무릎꿇었으나 이것이 당시 몽케 칸의 후계 문제로 아리크부카와 정통성을 겨루던 그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이에 쿠빌라이 칸 즉위 후 그는 딸 제국대장공주충렬왕에게 시집보냈고 고려는 속국화된 다른 나라들과 달리 부마국의 지위를 얻어 멸망의 위기를 면한다(1259). 이 시기에 몽골 제국은 최전성기를 누리는데, 그를 시초로 중국에는 원나라 왕조가 들어서고, 이때 일본 원정도 꾀했으나 태풍으로 인하여 무산된다. 이 무렵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를 탐방하여 유럽에 동아시아 세계를 알리게 된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곧 분열되었고, 각 지역은 고유의 국권을 되찾는다. 이후 중국에는 주원장이 원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운다.(1368) 원나라는 중원 북쪽에서 북원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유지했으나 1388년 명나라의 영락제에게 멸망한다. 고려 또한 쇠퇴하여 이성계조선을 건국한다. 그동안 외부 세계와 크게 영향을 주고 받지 않았던 일본에서는 내부적으로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전국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4.5. 동남아시아


베트남 북부에서는 오래 전에 월(越)족이 국가를 세웠으나 한나라에 정복당한(111) 이후 800년 동안 중국의 여러 왕조에게 돌아가며 지배를 받았고 문화적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되었다. 쯩 자매조씨정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 또한 계속해서 등장하며 끊임없이 중국에게 저항했다. 907년 중원에서 당나라가 멸망하고 960년에 다음 통일 왕조인 송나라가 세워지기까지의 오대십국시대의 공백기 동안 중국의 지배력이 약해진 기회를 노려 응오꾸옌이 중국군을 몰아내고 최초의 베트남 독립 왕조인 응오 왕조를 세웠다(938). 그러나 왕조 수립 후 30년 후 12명의 장군이 자기 세력권에서 일제히 난을 일으켜 십이 사군 시대(965~967)에 들었고, 그중 한 명이었던 쩐람의 후계자 딘보린이 다른 장군들을 모두 복속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어 새 나라인 대월을 세웠다(968).
베트남 남부에서는 월(越)족과 민족적으로 다른 참족이 살았는데, 월족이 한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이들은 참파라는 독립 국가를 세웠다(192). 한자를 사용하고 유교, 불교,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중화 문화에 속해있던 베트남 북부와 다르게 참족은 민족적, 문화적으로 판이했고 이후 대월이 수립되고 나서 월족은 끊임없이 남쪽으로 국토를 확장해 나가며 참족과 대치했다. 참파포 비나수오르, 베트남어로는 쩨봉응아(制蓬峨, 제봉아)가 참파의 국왕으로 있었던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는 1360년 즉위하자마자 베트남에 사절을 파견하여 베트남이 빼앗아간 옛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고, 1361년~1390년에 걸쳐서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당시 베트남의 쩐 왕조를 공격하여 베트남을 크게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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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12세기 축조
캄보디아 지역에는 1세기부터 프놈(부남) 왕국이 존속하다가 6세기에 스리위자야 왕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때 프놈 왕국의 속국이었던 쩬라(전랍) 왕국이 독립하여 9세기에 크메르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크메르 제국은 태국, 라오스, 베트남 등으로 영토를 넓히며 동남아시아 지역의 절대적 강자로 군림했다. 수도였던 앙코르는 문화적 발전을 이룩했으며 그 상징이 바로 앙코르 와트였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태국 지역의 아유타야 왕국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점차 쇠퇴했으며, 속국이었던 란쌍도 자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수도 앙코르를 버리고 천도하여 동남아시아의 패자(覇者) 자리를 내려놓는다. 이때 자립한 란쌍 왕국은 훗날 삼국 분열과 식민 지배를 거쳐 오늘날의 라오스가 되었다.
태국 지역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그중 몬족은 동남아시아에 가장 먼저 자리잡은 민족 중 하나로 동남아 각지에 드바라바티, 스리 고타푸라, 하리푼차이, 타톤 등 여러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크메르 제국의 성립과 타이족의 도래 이후로 점점 영토를 잃고 밀려나 오늘날 태국미얀마의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타이족은 본디 중국 남부에 살던 민족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8세기 당나라 때에 안사의 난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여 일부는 중국 남부에 남고 나머지는 버마족과 함께 동남아시아로 내려오게 되었다. 라오족은 이 타이족의 일파로 라오스 지역에 정착했고, 나머지 타이족은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태국 일대에 터를 잡게 된다. 이중 미얀마의 샨 고원에 자리잡은 타이족은 샨족이라 하며, 오늘날 미얀마의 소수 민족이다. 중국 남부 지역에 남은 타이족은 대리국의 지배를 받다가 12세기에 쳉훙왕국을 건설하여 13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나, 이후 주변국에 공물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하여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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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캄행
(1239? ~ 1298?)
몬족을 몰아내고 태국 지역에 자리잡은 타이족은 크메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수코타이, 란나, 파야오의 세 왕국을 세운다. 수코타이 왕국의 람캄행 대왕태국 문자를 창제하는 등 학문적인 발달을 이끌었고, 타이족 3국 동맹을 맺어 크메르 왕국에 맞선다. 그러나 곧 파야오 왕국은 란나 왕국에 흡수되고 만다. 이 무렵 쿠빌라이 칸의 강성한 정복 활동으로 잠시 원나라의 영향 아래 놓이기도 했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대왕 사후 쇠퇴기에 접어들어 결국 남쪽에서 일어난 아유타야 왕국에게 정복당한다. 이후 아유타야 왕국은 크메르 제국을 능가하는 동남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한다.
미얀마 지역에는 몬족과 퓨족 등이 살고 있었다. 9세기에 중국의 남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고, 그 즈음 타이족과 버마족이 중국 남부로부터 남하하여 버마족과 상술한 샨족이 이 땅에 터를 잡게 된다. 11세기 이 지역에는 버마족의 버간(파간) 왕국이 존재했다. 이 왕국은 몬족 등 주변 민족들의 땅을 빼앗으며 성장했으며, 이에 몬족은 끈질기게 대항한다. 1254년 당시 버간의 무능한 왕이었던 우즈나가 사망하자 실권자 야자티잔은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장자 타히투 대신 서자 나라티하파티를 즉위시킨다. 그러나 야자티잔과 나라티하파티 간에 충돌이 있었고 결국 나라티하파티는 야자티잔을 살해하나 왕권이 땅에 떨어진다. 이 즈음 원나라가 미얀마를 침략해 복속시키고, 항복을 타진하러 가던 나라티하파티가 타히투에게 살해되며 버간 왕국은 멸망한다.
북부 지방이 원나라에 복속되어 있는 동안 남부에서는 몬족이 한타와디라는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고, 북부에서도 샨족이 원을 몰아내고 샨족과 버마족으로 이뤄진 잉와(아바) 왕국을 세운다. 그보다 북부에도 다른 샨족의 왕국들이 여럿 들어서 잉와 왕국과 끊임없이 싸운다. 15세기에 이 북부의 샨족들이 운남을 선공하자 명나라는 역공을 가해 잉와까지 초토화시키고 속국으로 삼은 후에야 물러갔다. 그럼에도 북부의 샨족들은 존속하여 1527년에 잉와 왕국을 멸망시킨다. 이때 잉와의 속국이었던 따웅우가 독립하고, 곧 제국으로 성장하여 미얀마 전역을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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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부두르
8세기 중축
자바 섬에는 화산의 계단식 논을 통한 농업 시스템이 발달해 있었다. 자바 섬은 모내기 농법의 발명과 화산성 토양의 비옥함 덕분에 농업이 발달해 있었는데, 이러한 논들에 물을 대기 위한 관개를 통제하기 위해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출현하게 된다. 자바 섬의 역사에서 최초로 당대 문자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4세기 자바 섬 서부에 존재한 타루마 왕국이다. 타루마 왕국과 칼리만탄 지역의 쿠타이 왕국의 고대 비문은 남인도의 팔라와 문자로 적힌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인도 문화의 짙은 영향을 받은 당시 해당 지역의 상황을 보여준다. 7세기에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이 타루마 왕국을 계승하게 되었고 오랜 기간동안 공존하게 되었다. 자바 섬 동부는 서부와 달리 수많은 왕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이중에는 순다 왕국의 산자야 왕이 세운 마타람(므당) 왕국이 있었다. 마타람 왕국은 발달한 농업을 등에 업고 많은 수의 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인력은 정복이나 건축 사업 등지에 동원되었다.
이 시대의 마타람 왕국의 주요 건축물로는 보로부두르가 있는데, 발굴된 유물이나 비문으로 추정하였을 때 중부 자바에 있던 마타람 왕국의 사일렌드라 왕조가 번성하던 약 8세기 무렵, 750~840년 사이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가장 큰 불교 건축물로 남아 있는 보로부두르불교를 숭상하던 마타람의 사일렌드라 왕조의 야심이 엿보이며, 시각적 디자인에서는 당시 자바 섬의 종교적, 문화적 특색이 묻어나오는데, 만다라를 상징하는 수많은 층계와 더불어 전통 토착 종교, 힌두교, 불교의 세계관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말레이 반도수마트라 섬에서는 믈라유(말레이) 왕국이 존재했는데, 7세기에 스리위자야 왕국이 등장하여 믈라유 왕국을 속국화, 이후 11세기에 완전 흡수하여 강력한 제해권을 가진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말라카 해협를 장악하고 있던 스리위자야는 상인들은 배를 이용하여 황금, 녹나무 수지, , 백단향, 그리고 육두구와 같은 향신료 등을 중국인도 지역에 수출하여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이렇게 지역간 교류가 활발해지며 힌두교불교가 유입되었으며 스리위자야에는 전통 신앙, 힌두교, 불교가 융합된 독특한 종교 문화가 형성되었다. 스리위자야의 해안 도시들은 다양한한 문화가 혼합되며 중국인, 말레이인, 토착 원주민, 그리고 동남아 타 지역의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며 교류했다. 11세기 초에 들어서는 스리위자야가 사실상 도서부 동남아시아 인구의 대부분이 밀집된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를 모두 통제하는 패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스리위자야 왕국은 자바 섬을 정복하고, 이때 정복당한 마타람 왕국 마지막 왕의 조카이자 발리의 왕자인 아이를랑가가 카후리판 왕국을 세워 스리위자야 왕국을 몰아내고 동부 자바 지역을 돌려받는다. 그는 두 아들에게 왕국을 장갈라와 크디리의 둘로 나눠 물려주고 자신은 속세를 떠나 수도승 생활을 한다. 이중 크디리가 장갈라를 흡수하고, 크디리 내부에서 왕권과 종교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던 사이 1222년 종교 세력의 지지를 받은 지방 영주 켄 아록이 혁명을 일으켜 크디리 중앙군을 물리치고 싱하사리 왕국을 세운다. 싱하사리 왕국은 스리위자야 왕국과 대등하게 성장해서 이내 수마트라 섬 영토를 넘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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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덴 위자야
(? ~ 1309)
한편 스리위자야 왕국은 외부적으로는 촐라 왕국의 침략과 싱하사리 왕국의 압박에, 내부적으로는 믈라유 왕국 세력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결국 회복 불가할 정도로 쇠약해지고, 수마트라 섬에는 믈라유 왕국을 계승하여 다르마스라야 왕국이 성립되었다. 1290년 싱하사리 왕국은 다르마스라야 왕국을 정복하여 인도네시아 군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이 즈음 중원을 장악한 쿠빌라이 칸은 1280년, 1281년, 1289년에 싱하사리 왕국에게 제후국이 되라고 사신들을 보내 명령했으나 새로운 강대국 싱하사리 왕국이 이제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라고 판단한 케르타네가라 왕은 세번 다 거절했다. 특히 마지막으로 명령을 가져온 사신의 경우 사신의 얼굴에 낙인을 찍어 돌려보내며 거절했고 이에 원나라는 격노해 자바 섬을 정벌하기 위해 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1292년 원나라 군대가 자바 섬에 도착했을 때 싱하사리 왕국은 이미 자야캇왕 왕 치하의 크디리(글랑글랑) 왕국의 반란에 의해 3년 전 병합되어 버린 상태였다. 원나라의 목적은 싱하사리 왕국 정벌이 아닌 단순한 '자바 섬 정벌'이었기에 크디리 왕국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싱하사리 왕국의 죽은 왕의 양자였던 라덴 위자야는 기지를 발휘해 원나라에게 크디리 왕국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돕는다면 제후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몽골군은 라덴 위자야와 동맹을 맺어 크디리 왕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라덴 위자야는 이어서 몽골군마저 게릴라 기습 공격으로 타격을 입혀 원나라를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몰아냈고 그렇게 라덴 위자야는 마자파힛 제국을 건국하게 되었다(1293).

자바, 순다, 그리고 발리가믈란
가믈란 음악은 8세기경 자바 섬에서 처음으로 등장해 마자파힛 제국 시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14세기 트리부와나 황제, 그리고 그와 그의 남편 투마펠 공 차크라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하얌 우룩 황제 시대의 마자파힛 제국은 세력을 크게 확대하고 경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는다. 재상 가자 마다가 총지휘하고 제독 음푸 날라가 이끄는 대규모 해상원정으로 마자파힛 세력은 자바섬뿐 아니라 말레이 반도부터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 술라웨시섬, 말루쿠 제도, 소순다 열도를 비롯, 뉴기니섬의 서해안 지역까지 이르러, 현대 인도네시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확대되었으며 인도네시아 제도에서의 통일된 국체로서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14세기 황금기에 마자파힛 제국은 원나라-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튀르크-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교역 루트의 한 축을 장악하고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마자파힛의 궁정어인 자바어로는 수많은 시와 연대기가 쓰였으며, 자바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막대한 양의 토기, 두상, 반신상, 부조는 이 제국의 영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주로 수도 마자파힛(트로울란) 근처를 중심으로 하여 동부 자바 전역에서 발굴되는 수많은 힌두-불교 사원 건축물 또한 많은 경우 마자파힛 시대의 것이다.
마자파힛 시대 자바 섬의 대표적인 건축 유적으로는 파나타란 사원이 있는데, 파나타란 사원은 12세기부터 조성되어 14~15세기 중반까지 주로 증축된 대규모 사원으로, 자바식 힌두-불교에 영향을 받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부조가 특징이다. 또한 음악으로는 자바 섬에서 비롯된 가믈란 음악이 다양한 섬들로 유입되어 각 섬의 음악적 문화에 맞게 발달하였고, 금속 재질의 타악기들이 사용되기 시작해 특유의 청아하고 몽환적인 음색이 만들어져 현재까지 가믈란 음악은 이러한 모습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4.6.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순자타 대서사시〉
13세기경부터 구전됨
그리오(griot)들은 서아프리카의 전통적인 구전 역사가이자 음유시인이다. 이 서사시는 말리 제국을 건국한 순자타 케이타의 일대기와 활약상을 다룬다.
서아프리카 일대에서는 가나 제국(와가두)이 강한 경제력을 이용해 주변 왕국들을 거느리고 오랫동안 패권을 쥐고 있었다. 현재의 말리모리타니 국경 사이에 위치했던 가나 제국은 북아프리카사헬 지대 남쪽을 왕복하며 횡단하며 황금과 소금을 주로 거래하여 사하라 종단 대상(隊商)들, 그리고 영토 내의 수많은 금광들 덕분에 아주 부유해 질 수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기록한 문자 기록은 적기 때문에 가나 제국이 정확히 언제 발흥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6세기경에 국체가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나 제국의 존재는 서아프리카의 구전 역사가이자 음유시인인 그리오들, 그리고 서기 8세기 아랍인들이 글로 기록함으로서 그 실체가 확인된다. 9세기경 저술가 알야쿠비는 "가나는 매우 강력한 왕이 있으며 주변의 왕국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포함한 서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황금들이 나온다", "주변의 왕국들은 카우카우, 카넴, 말렐 등이 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가나 제국이 아우다고스트에 있는 남부 산하자의 무역 거점을 정복(1054)하면서 산하자족의 반발이 생겼고, 이는 가나의 연방제 내부의 마찰과 분열 및 무라비트 왕조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가나 제국은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정치적 붕괴로 인하여 11세기 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다 내전과 가뭄으로 인해 크게 쇠퇴하였고, 이에 작은 도시국가들로 분열되어 있던 서아프리카 일대를 만딩고족의 지도자 순자타 케이타가 통합하였다. 이때 서아프리카 일대는 주술사 왕 소우마우로 칸테가 통치하는 소쏘족의 나라 소쏘 제국이 패권을 쥐고 있었다. 〈순자타 대서사시〉에 따르면 소우마우로는 잔인한 폭군이었다고 하는데, 이에 케이타의 군대는 소우마우로의 폭정에 맞서 싸웠고, 키리나 전투(1235?)에서 소쏘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며 순자타 케이타는 말리 제국을 건국하였으며 황제의 칭호인 '만사'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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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 무사
(1280? ~ 1337)
말리 제국가나 제국이 그랬듯 압도적인 금 생산량으로 곧 서아프리카 경제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제9대 군주인 만사 무사는 본인이 독실한 무슬림인 것과 더불어, 사회 전반적으로 당시 선진적인 이슬람 세계에 밀착하기 위해 전국적인 이슬람 교육을 장려해 팀북투 등을 비롯한 도시들이 서아프리카의 학문적 허브가 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발달과 더불어 계속되는 사하라 종단 무역 덕분에 말리 제국은 문화적 황금기를 맞았는데, 때문에 "금은 북쪽에서, 소금은 남쪽에서, 지식은 팀북투에서 난다"는 당시 말리 제국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보여주는 서아프리카 속담이 전해져오기도 한다. 또한 기병대를 운영하여 세력권을 확대시켜 말리 제국은 니제르 강 근방에 위치해 무역하기 좋은 도시들인 가오와 젠네 등을 영토 내에 넣었다.
만사 무사는 또한 말리 제국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메카로 호화로운 성지순례를 벌였는데(1324), 그는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금화를 뿌렸고, 순례 중 카이로에서 멈춰 쇼핑을 즐겼다. 그러나 이때 황금을 시장에 너무 많이 풀어버리는 바람에 카이로에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지역 경제를 마비시키기도 했다. 만사 무사 본인은 현지의 대금업자들에게 일부로 고리로 돈과 황금을 빌려서 이러한 사태를 무마하려고 하긴 했지만, 카이로의 황금의 가치가 제자리를 찾는데는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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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네 모스크
12~13세기경 건축

"나는 흑인들의 왕도인 말리에 도착하였다. 말리의 왕은 만사 술레이만이었다. 만사는 술탄이라는 뜻이고, 술레이만은 그의 본래 이름이다. [...] 흑인들의 선행으로는 부정이 적은 것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부정을 가장 적게 저지르는 사람들로서 술탄은 그 누구도 추호의 부정이라도 저지르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그들의 선행으로는 전역에 안전이 보편화되어 있다. 여행자건 상주자건 도둑이나 약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예배를 끈질기게 하는 것도 그들의 선행 중 하나이다. 그들은 꼭 집단예배를 근행하며 자식들을 그렇게 하도록 교육하고 있다. 끝으로 그들의 선행으로는 거룩한 쿠란 암송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자식들이 쿠란을 제대로 암송하지 못하면 쇠고랑을 채웠다가 암송해야 풀어준다. 어느날 나는 한 젊은이 곁을 지나갔다. 준수한 용모에 멋진 옷을 입은 젊은이인데,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동행자에게 '저 사람은 무슨 짓을 했습니까? 사람을 죽였습니까?'하고 물었다. 그 젊은이는 내 을 알아듣고 픽 웃었다. 그 옆의 사람이 나에게 '쿠란을 암송하라고 족쇄를 채운 겁니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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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바투타 - 《여행기(리흘라)》[26]

中 (1355)''

이러한 일화로 인해 황금, 소금, 옷감, 노예들을 거래하려는 상인들과 이슬람 학자들 등의 방문객들이 말리 제국을 찾았다. 위에 언급된 이븐 바투타도 그중 하나로, 그의 기록은 말리 사람들의 생활상과 말리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다. 다만 그는 신실한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말리 제국을 기대했고 실제로도 위 기록처럼 그러하긴 했으나 정작 당도하고 보니 기대와는 영 다르다고 적었는데, 그는 여행기에 "'이교도'의 가면 축제가 수도의 궁 내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으며, 남편이 있는 여성이 머리카락을 가리지도 않고 외간 남자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그리고 궁 내에서 젊은 여성들이 가슴을 가리지 않고 활보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러한 기록은 말리 제국이 이슬람교와 토속 신앙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며 말리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여성이 어느 정도 자주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말리 제국은 이슬람 국가를 표방했고 실제로 지도 계층이나 상인들은 이슬람을 믿고 있었지만, 일반 민중들은 여전히 아프리카 토속 신앙을 믿는 경우가 많았으며, 말리 제국의 지도자들 역시 굳이 이슬람을 강요하지 않았다.
15세기부터 말리 제국이 투아레그와 투클로르, 월로프의 반란 등을 겪으면서 차츰 쇠퇴해 갈 무렵 1464년에 손니 알리가 건국한 송가이 제국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해 큰 영토를 차지했으며, 말리를 밀어내고 팀북투, 젠네, 가오 등을 비롯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했던 도시를 탈환하며 지역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아스키아 왕조의 치세 동안 송가이는 전성기를 누려 이슬람교가 전파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으며, 아스키아 왕조 초대 황제인 아스키아 무함마드는 중동의 이슬람 세계와 외교 관계를 곤고히 하여 국제 세계에서 무슬림 국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16세기 말 송가이 제국은 내부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워졌으며, 이후 모로코 사드 왕조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1591). 핵심적인 영토를 빼앗긴 채 변방으로 밀렸지만 근근히 약소국으로라도 살아있던 말리 제국은 모로코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하여 막아내는데 어떻게든 성공하지만, 결국 또 다시 일어난 내전과 대서양 노예 무역으로 인한 인력의 급격한 손실 등으로 인해 쇠락하여 멸망하고 만다(1670).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사하라 사막 전반으로 카넴-보르누 제국 또한 해당 지역에서 정치경제적으로 핵심적인 강대국으로 자리했다. 기원전 600년경에 카누리족에 의해 건국된 보르누 제국은 오늘날의 리비아 남부와 니제르 동부, 나이지리아 북동부, 카메룬 북부, 차드의 차드 호 유역까지의 영토를 가졌으며, 15세기경 카넴 제국을 합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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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넹 제국 여왕의 청동상
15~16세기 제작 추정
한편 서아프리카 내의 사헬 지대의 남쪽으로는 요루바족, 이보족, 에도족, 아칸족 등이 지금의 나이지리아, 토고, 가나[27]에 해당하는 지역 근방으로 문명을 이루고 살아왔다. 위에서 언급한 사하라 횡단 대상들과 무역 등 교류를 하며 경제적 생활을 한 이들의 문명에서 또한 수많은 수의 왕국, 제국들이 탄생하고 사라졌다. 1160년에 요루바인들이 건국한 오요 제국, 1180년에 에도인들이 건국한 베닌 제국 등이 주변 도시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11세기에 건국된 아칸족의 국가 보노만은 사하라 횡단 대상들과의 황금 거래를 통해 지역에서의 경제적 패권을 쥐었으며, 이후 다양한 아칸족 계열 국가들인 만케심, 덴키랴, 아콈, 아콰무 등의 국가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예술 문화에 있어 큰 발전을 겪었는데, 특히 베닌 제국은 조각술과 주조술이 발달해 아주 정교한 형태의 청동상 작품을 남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베닌 제국의 궁궐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베닌 청동상(Benin Bronze)의 정교함과 예술성은 이후 식민화 당시 유럽인들을 매혹시켰으며, 현재 다수의 베닌 청동상들은 약탈되어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현재 나이지리아 정부에서 계속 반환을 요청 중이다. 또한 아샨티 제국과 보노만의 아칸족 사람들은 화려한 색깔의 옷감인 '켄테(Kente)'를 제작하여 입었으며, 이는 아프리카 외의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범아프리카주의적 상징으로 사용되고는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서아프리카의 예술 작품들은 이후 약탈 등을 통해 유럽으로 수입되어 파블로 피카소 등의 모더니즘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게 된다.
동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기원전에 이미 악숨 왕국이 건설되어 로마, 이집트, 인도 등과 활발히 무역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정립되었다. 에티오피아 문명에서 기독교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으며 악숨의 셰바 여왕과 이스라엘의 솔로몬 대왕의 이야기는 에티오피아사(史) 전반에서 정통성을 따지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악숨 왕국은 예멘 지역에도 진출하여 홍해 무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이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성장하여 악숨 왕국과 마찰이 지속되었고 악숨 왕국은 해상 무역의 장악력을 잃게 되며 쇠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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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리벨라 암굴교회
13세기 설립
10세기에 악숨 왕국이 완전히 멸망한 후 한동안 이 지역에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는 혼란기가 지속되었는데, 자그위 왕조가 이를 종식하며 에티오피아의 새 주인으로 떠올랐다(1137). 자그위 왕조의 혈통은 솔로몬 대왕 및 셰바 여왕과 이어져 있다고 한다. 이 시기의 기록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여 학자들은 이 왕조의 왕이 총 몇 명이었냐를 두고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이 즈음 아프리카의 뿔의 이슬람화로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국가로서는 고립되었다. 그러나 카이로의 기독교인들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에티오피아 정교회 교인들의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 랄리벨라 암굴교회의 설립, 그리고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 지역에 세워진 여러 십자군 국가들과 교류한 정황 등 유럽과 서아시아의 기독교 문화권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에티오피아계 용병들이 십자군 측에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도 에티오피아계 기독교도들의 귀환을 장려했으며 에티오피아 출신 성지순례자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14세기 초 자그위 왕조의 웨뎀 아라드 황제가 서른 명의 대사를 유럽에 파견하여 교황과 대립교황을 만나고, 유럽의 여러 국가를 돌며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의 위협에 맞서 기독교 국가들과의 연대를 쌓고자 했다. 프랑스 왕과의 만남에서는 아예 이집트를 침공하는 계획까지도 거론이 되었지만 무산되었다.
1270년 즈음, 솔로몬 대왕과 셰바 여왕의 직계 후손을 자처한 예쿠노 암라크의 봉기로 자그위 왕조가 무너지고 솔로몬 왕조가 들어선다. 솔로몬 왕조는 대대적인 군사적 개편과 영토 확장으로 아프리카의 뿔 전역을 차지한다. 포르투갈에 의해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전설에 나오는 전설의 왕국으로 알려지며 교류하게 된다.[28][29] 이후 아달 술탄국[30]에게 정복당하여 14년 동안 통치를 받으나 포르투갈의 도움으로 국권을 회복한다. 그러나 이 침략과 주변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위협, 오로모인 등 여러 이민족의 이동으로 솔로몬 왕조는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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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짐바브웨 유적
9~15세기경 점진적 건축

음비라를 연주하는 짐바브웨인 음악가
동아프리카 해안으로는 인도양을 통한 유라시아 전역의 바닷길 무역이 이어져 황금, 상아, 목재 등의 무역을 통해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해안으로 다양한 도시들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인도양 바닷길 무역으로 발달한 도시들로는 모가디슈, 말린디, 몸바사, 잔지바르, 킬와, 모잠비크, 소팔라 등이 있다. 마다가스카르 섬의 주민들 또한 인도양 무역 상인들과 접촉하며 교류하였다. 특히 스와힐리 문화권을 형성한 느슨한 민족군을 일컫는 스와힐리족 사이에서 그러한 무역이 특히나 활황을 누렸으며, 아랍 상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해당 지역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다. 해당 지역의 언어인 스와힐리어가 이때 당시 무역 공용어로 사용되며 아랍어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이 과정에서 동아프리카 지역에 이슬람 또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9세기부터 13세기에는 모가디슈를 중심으로 한 모가디슈 술탄국이 있었다. 당시 모가디슈는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과 페르시아를 연결하는 주요 도시이자, 동아프리카 황금 및 상아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성하였다. 또한 13세기 이후로는 아주란 술탄국이 출현하여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앙아프리카남아프리카 내륙에서는 반투족 민족들이 점진적으로 팽창하며 다양한 문화권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렵 채집 민족들이나 유목민들을 밀어낸 반투족 민족들은 공통적으로 발달한 농업, 철기 기술, 석조 건축 등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중심으로 1375년경에 콩고 왕국이 이룩되었다. 콩고 왕국의 원래 국체는 음바타 왕국과 엠팡바카시 왕국이었는데 이들 국가는 14세기 말 경에 결혼 동맹을 통해 합병되어 콩고 왕국으로 거듭났으며 그 시기는 대략 14세기 말 정도로 추정된다. 콩고 왕국은 빠른 속도로 주변 부족들을 군사적, 외교적으로 평정해나가며 세를 확장했으며 15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중앙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콩고 왕국은 '뭬네콩고'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일종의 연방제를 구성하고 있었고, 왕국에 속하지 않은 주변의 국가들인 응오요, 카콩고, 로앙고, 은동고, 마탐바 등의 국가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남아프리카에서는 9세기경 림포푸 협곡을 주위로 해 칼랑가어족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들에 의해 마풍구브웨 왕국이 수립되어 다양한 석조 유적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1세기 가뭄과 인력 부족으로 마풍구브웨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에 마풍구브웨 왕국이 멸망하자 쇼나족에 의해 짐바브웨 왕국이 세워졌다. 짐바브웨 왕국은 아랍 상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융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그레이트 짐바브웨라고 알려진 대규모 도시 유적을 남겼다. 쇼나족은 또한 발달한 철기 제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철기 유적을 남겼으며, 또한 그들의 전통 악기인 음비라는 가느다란 철판을 이용하여 만드는 등, 발달한 제철 기술은 문화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짐바브웨 왕국은 또한 정교한 석상 유적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 왕권을 상징하는 새(鳥) 조각상은 현재 짐바브웨 국기에도 그려져 있다. 이후 짐바브웨가 쇠퇴하자 냐심바 무토타가 왕의 칭호인 '므웨네'를 칭하며 무타파 제국이 건국되었고(1350) 짐바브웨 왕국 영토의 대부분을 계승하였다.

4.7.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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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 푸에블로 주택 유적
9~13세기경 건축
북아메리카 전역으로는 다양한 문화권들이 존재했으며, 일반인들은 이들을 소위 '인디언'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칭하고는 하지만 북미 지역의 수많은 문화권들을 하나로 묶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 중 일부는 전통적인 수렵채집사회를 이루고 살았고, 일부는 발달한 문화를 이루기도 했다. 현 미국의 중서부, 동부 및 남동부에서 출현한 미시시피 문화(Mississipi Cultures)는 북미 대륙에서 가장 번성하고 발달한 문화 중 하나로, 서기 800년경 부터 1600년까지 존속했다. 군집된 촌락들이 교류와 무역을 통한 공동체로 이루어진 미시시피 문화는 카호키아(Cahokia)라는 도시유적을 남겼는데, 12~13세기에 최전성기를 이룬 카호키아는 당시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현재의 호피족과 주니족의 조상인 선대 푸에블로인들의 문명도 9~13세기 동안 번성하여 절벽은 깎아만든 독특한 공동주택 유적을 남겼다. 선대 푸에블로인들은 주택 뿐 아니라 발달한 도자기 등 화려한 예술 문화를 남겼지만 후에 가뭄으로 쇠퇴하게 된다.
수렵채집사회를 이룬 북미의 다른 원주민들도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일구었다. 자연환경에 따라 이들의 생활 양식은 달랐는데, 그 예로 서부 해안의 원주민들은 농업과 더불어 어업을 통해 물고기조개 등 바다 생물을 주로 먹고 살았고, 평원 인디언들은 유목 생활을 하며 들소를 사냥했다. 이러한 부족들 사이에서는 종종 정치경제적 연합이 이루어지고는 했는데, 그 예시 중 하나로 12세기경에 온타리오 호수를 주변으로 하여 결성된 이로쿼이 연맹(호데노쇼니)이 있다. 이로쿼이 연맹은 현재의 미국 북동부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 사이에 걸쳐져 있었으며, 히아와타를 비롯하여 데가나위다, 지곤사세 등의 평화주의적 정치 지도자들 아래 결성되어 방언연속체로 묶이는 모호크족, 오네이다족, 오논다가족, 카유가족, 그리고 세네카족으로 이뤄진 연합부족의 형태였다. 이들은 전쟁에 시달리는 다섯 부족이 형제애 아래 살아야 한다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며 연합을 이뤄냈고, 전쟁을 통한 공포 정치를 하던 모하크족의 지도자 타도다호까지 외교를 통해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쿼이 연맹은 '대평화율법'을 선포함에 따라 다섯 부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으며, 이들의 세련된 민주주의와 의회는 후에 미국 헌법의 제정에도 일부분 영향력을 미쳤다.
한편 아이슬란드그린란드를 발견하고 정착하던 바이킹 탐험가들은 이 과정에서 북아메리카에 당도하게 되었다. 1000년경 레이프 에이릭손이 오늘날의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발견한 목초지에 빈란드(Vinland)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제 이 곳에 위치한 랑스 오 매도(L'Anse aux Meadow)라는 어촌에서 아이슬란드그린란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스칸디나비아식의 구조물 흔적이 발견되었고 바이킹의 문화로 보이는 동제 핀과 물레가락으로 감은 실타래, 대장간의 흔적 등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원주민들과의 갈등 등의 이유로 지속적인 정착 및 식민지화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4.8. 오세아니아



5. 근대 시대(1500년경~1945년)


근대 시대는 고전후 시대가 끝난 16세기 경 이후의 시대를 의미한다. 근대는 다시 전기 근대(early modern period)와 후기 근대(late modern period)로 나뉘는데, 전기 근대는 근세로 번역되기도 한다. 전기 근대는 주로 르네상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후기 근대는 산업 혁명프랑스 혁명을 즈음하여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종종 근대 안에 현대를 넣어 근대를 전기 근대-후기 근대(근세)-현대의 셋으로 분류하기도 하며 근대와 현대를 분리하는 경우 대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를 현대로 본다. 이 문서에서는 근대와 현대를 분리하고 전대, 후기 근대를 '근대'로 한데 묶어 설명한다.
이 시대는 르네상스, 대항해시대, 이른바 '화약 제국'이라 불리는 이슬람 권역의 확대, '신대륙' 문명의 붕괴 및 유럽의 착취, 대서양 무역, 계몽주의, 시민 혁명, 산업 혁명, 모더니즘, 식민주의, 제국주의, 국민국가, 민족주의, 두번의 세계대전 등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5.1. 근세 서양 세계의 변화와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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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543)
오스만 제국군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는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그린 그림이다.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이 1000년 가량 존속하던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동유럽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앞까지 진출해 서유럽 국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동로마 제국에는 고대 그리스 문헌을 연구하던 학자 등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스만 제국의 손이 닿지 않는 이탈리아 등지로 진출해 르네상스의 발단에 일조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 학자들이 이탈리아 등지로 이주하고, 특히 메디치 가문같은 재력가들이 문화의 발전에 투자함으로써,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서는 르네상스가 태동하게 된다. 중세의 유럽인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수학과 자연과학 등이 아랍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들어와, 유럽은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점차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중요시하게 된다. 유클리드, 아리스토텔레스 등 이집트와 마케도니아 헬레니즘 학자들의 저서들도 대거 들어와서 철학과 수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미술을 발전시켰으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학의 기틀을 쌓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보다 북쪽으로도 확산되었다. 따라서 르네 데카르트, 데이비드 흄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중심설을 주장하며 당시 유럽 학계의 정설과 대립하였고, 요하네스 케플러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활약으로 천동설 세계관이 뒤집히게 되었다. 당시 유럽은 곳곳에서 대학교들이 세워졌으며, 라틴어그리스어를 가르쳤다.
또한 프랜시스 베이컨으로 대표되는 근대 경험주의 철학은 과학 혁명의 사상적 근간이 된다. 르네 데카르트의 이성주의 철학도 계속해서 발전했고, 이와 같은 사상의 발전은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등에 의해 근대적 정치철학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 자유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는데, 당시 유럽 경제는 은본위제를 근간으로 했기에 기축 통화량의 증가로 앞으로 등장할 자본주의 사회의 발판이 마련되었다[32]. 무역과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한 계급이 등장했으며 대규모의 무역을 수행하는 회사들이 생겨났고 이들의 경제 활동을 뒷받침할 주식도 발달했으며 국가가 회사의 활동을 지원하며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변화들과 함께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전세계로 확장되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 중국 등지와 교류가 활발해졌는데, 이로 인해 송나라에서 만들어진 화약나침반이 시간이 흐른 후 유럽에 들어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게 된다.

5.2. '신세계'와 '구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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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50~1506)
아메리고 베스푸치
(1454?~1512)
에르난 코르테스
(1485?~1547)
프란시스코 피사로
(1478~1541)
고대 로마 시대부터 향신료의 거래는 동서양 무역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인도동남아 등지에서 생산된 향신료들은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 이집트의 시장에 등장했고 다시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들어왔다. 이 운송 과정에는 무수한 시간과 자원이 투입되었고 각종 자연 재해와 도적, 해적 떼의 위험도 늘 도사렸다. 그 탓에 향신료는 유럽에서 매우 고가의 사치품으로 소비되었는데, 경제학에서 말하는 사치재가 단순히 비싸기 때문에 소비되기도 하듯이 이 때문에 오히려 유럽 귀족들은 후추와 같은 향신료에 더욱 열광했다.
그러다가 오스만 제국이 팽창하여 이집트와 그리스 등 동지중해의 무역 거점을 모두 차지하고 쇄국 정책을 피면서 인도-이슬람-유럽 무역이 끊기게 되었다. 이에 향신료와 다른 인도의 사치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유럽인들은 인도로 가는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곧 현지의 인도인들 및 아랍인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캘리컷 항을 일방적으로 약탈하게 된다. 그와 다르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지구를 서쪽으로 돌아 아시아에 닿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콜럼버스는 통일 이후 해상 무역에 뛰어든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서쪽으로 항해했고, 이윽고 1492년 카리브 제도에 도착하며 레이프 에이릭손 이후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유럽인이 된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믿은 콜롬버스는 그가 '발견'한 대륙이 아시아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신대륙임을 최초로 유럽에 알린 사람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고, 이에 그 대륙은 그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 불리게 되었다. 한편 존 캐벗은 위도가 높을수록 항해 거리가 짧다는 점을 이용해 1497년 북아메리카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이었던 아프로유라시아의 '구세계'와 대비되는 아메리카 대륙의 '신세계'가 유럽인들의 세계관에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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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고원 원주민의 인구 변화
유럽인들의 전염병, 학살, 플랜테이션 강제 노동 등의 착취로 의해 15세기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신대륙에는 금과 은이 널렸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인생역전을 위해 아메리카로 떠나는 콩키스타도르들이 등장한다. 그중 에르난 코르테스와 그의 군대는 몬테수마 2세가 다스리던 아즈텍 제국을 침략하며 정복하게 되었다(1521).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와 망코 잉카가 다스리던 잉카 제국을 정복한다(1532). 스페인 제국은 이후 중남미에서 수많은 금은보화와 역사적 유물을 약탈했으며, 이 과정에서는 원주민들을 향한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졌고 또한 유럽에서 전해진 천연두로 인해 원주민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하게 되었다. 한편 바스코 다 가마의 뒤를 이어 인도로 항해하던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잘못 항해하여 실수로 브라질 땅에 이른 일이 있었는데(1500), 이 덕에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영토 경계를 두고 다투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경 43도선을 기준으로 서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전부 스페인이, 동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전부 포르투갈이 가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게 되었다.[33]
17세기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도 신세계 개척에 뛰어들어 곧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패권국으로 등극한다. 이들은 당연히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무시했지만 남아메리카는 이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북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 개발에 중점을 둔다. 잉글랜드장미 전쟁을 마친 이후 튜더 왕조헨리 8세 치하에서 웨일즈아일랜드를 복속시키고 해군력을 서서히 키워나갔고,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는 스페인과 남미를 오가는 배들을 약탈하던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등용하여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꺾고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1607년에는 북아메리카에 제임스타운이라는 최초의 식민지를 세웠으나 정착에는 실패했고 1620년 오늘날 메사추세츠 플리머스 지역에 정착한 것이 미국사의 시작이다.
네덜란드는 14세기에 이미 청어잡이로 상업과 해상 무역이 발달해 있었고,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6세기 스페인의 지배에 맞서 독립 전쟁을 벌였다. 1609년 양국이 12년 간의 휴전 조약을 맺으며 여유가 생긴 네덜란드는 1613년부터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에 '뉴네덜란드(Nieuw Nederland)'라는 식민지를 세운다. 1626년 뉴네덜란드는 수도를 '뉴암스테르담'으로 했는데, 이곳은 북아메리카 무역의 주요한 항구가 되었으며 훗날 뉴욕으로 이름을 바꾼다. 네덜란드는 비슷한 시기에 북아메리카 외에도 골드코스트, 코로만델, 동인도 제도 등 세계 각지의 무역 거점에 교역소나 회사를 세웠고, 이는 식민지로 발전한다. 이러한 식민지 건설은 1948년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며 더욱 활발해졌고, 17세기 내내 식민지를 두고 포르투갈과 싸운다.
프랑스는 1534년 자크 카르티에가 북아메리카를 탐험하고 캐나다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본격적으로 식민지 '누벨프랑스(Nouvelle-France)'를 건설한 것은 위그노 전쟁이 끝난 17세기부터이다. 이는 오늘날 퀘벡에 해당한다. 프랑스는 이후 30년 전쟁에서 승리하고 루이 14세가 즉위하며 강대국으로 성장한다. 이 즈음 영국과 네덜란드가 제해권을 두고 세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에 프랑스가 한번은 네덜란드 편에서, 한 번은 영국 편에서 참전하게 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네덜란드는 열강에서 탈락하게 되고, 영국과 프랑스는 곧 도래할 제국주의 시대의 주역이 된다.
'신세계'와 '구세계'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물품들이 교환되었으며 이는 유럽인들과 아메리카인들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를 콜럼버스의 교환이라고 칭한다. 아메리카로부터 아프로유라시아로는 감자, 고구마, 토마토, 고추, 옥수수, 카사바 등이, 아프로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로는 , , 보리 등의 작물들이 수입되었다. 또한 동물로는 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입되어 북아메리카 평원 원주민들의 유목 방식을 바꾸어 많은 원주민들이 기마민족으로 탈바꿈 했다. 그러나 질병 또한 교환되었고, 아메리카로는 천연두, 홍역, 수두가 들여지게 되어 원주민들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아프로유라시아로는 매독이 유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생산성 높은 작물들로 인구가 늘어난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에서 가져온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대다수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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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무역
노예선에 '적재'된 아프리카인들의 삽화
또한 플랜테이션 등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누린 유럽인들은 현지의 원주민들을 강제노동에 이용하여 그 노동력을 충당하고는 했는데, 그 예로 스페인 제국은 남아메리카에서 우앙카벨리카 산 등의 광산에 원주민들을 투입해 수은을 채취하도록 하였으며, 수은 중독과 고된 노동으로 인해 수많은 원주민들이 사망하여 심지어 몇몇 부모들은 자식이 어릴때 일부로 다리를 불구로 만들어 광산 노동에 끌려가지 않도록 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그러나 원주민만으로는 노동력이 충당이 되지 않자 유럽인 상인들은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들을 매매 및 납치하여 아메리카 대륙 플랜테이션 노동에 투입시키게 되었고, 이를 대서양 노예 무역이라고 칭한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다양한 왕국들의 지도자들에게 유럽의 공산품들을 대가로 농노들이나 전쟁 포로들을 구매했고, 때로는 직접 마을들을 습격하여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해오기도 했다. 이로 인해 1500년경부터 1880년경까지 약 1000~1200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졌으며, 노예선에 '적재'된 15% 이상의 사람들은 매우 고되고 비인간적인 노예선에서의 처후로 인하여 사망했다. 아프리카인 노예들의 48%는 카리브 제도, 41%는 브라질, 5%는 미국으로 들어가 사탕수수, 담배, 커피, 목화 농장 등에 투입되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예제로 남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우생학백인우월주의 등의 인종차별로 정당화되었다. 그러한 만큼 대서양 노예 무역이 현대 사회에도 끼치는 영향과 피해는 아직까지도 크다.

5.3. 이슬람 세계의 변화



5.4.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



5.5.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세계의 변화



5.6. 혁명의 시대



5.7. 새로운 사회상과 제국주의 침탈



5.8. 두번의 세계대전



6. 현대 시대(1945년~현재)


현대 시대근대의 다음 시대이자 바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대이다. 세계사적인 시점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1945년) 이후 지금까지를 일컫는다. '현대'라는 개념은 근대에 포함되거나 ‘근현대사’ 등의 표현으로 묶이고는 하지만, 과학 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한 인류의 생활 방식의 변화, 그리고 여러 세계사적 비극을 겪고 스스로를 더욱 객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함에 따른 인류의 사고 방식의 변화를 고려하여 근대와 현대는 다른 시대로 분류되고는 한다. 아무래도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의 역사인 만큼 더욱 신중하고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는 냉전, 포스트모더니즘, 비식민지화, 인권민주화 운동, 우주 개척의 시작, 인터넷, 환경오염기후변화, 세계화 등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6.1. 냉전



6.2. 탈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6.3. 현대 사회의 형성



6.4. 21세기 인류의 분쟁과 과제



7. 관련 문서



[1] 자잘한 오류가 조금 있으니 시청 시 유의할 것.[2] 최근에 후반부 배경음악에 오류가 생기고 마지막 배경음악이었던 인셉션의 dream is collapsing은 아예 사라졌다.[3] "Wer nicht von dreitausend Jahren sich weiß Rechenschaft zu geben, bleib im Dunkeln unerfahren, mag von Tag zu Tage leben."[4] Look again at that dot. That's here. That's home. That's us. On it everyone you love, everyone you know, everyone you ever heard of, every human being who ever was, lived out their lives. The aggregate of our joy and suffering, thousands of confident religions, ideologies, and economic doctrines, every hunter and forager, every hero and coward, every creator and destroyer of civilization, every king and peasant, every young couple in love, every mother and father, hopeful child, inventor and explorer, every teacher of morals, every corrupt politician, every "superstar," every "supreme leader," every saint and sinner in the history of our species lived there - on a mote of dust suspended in a sunbeam.[5] 다만 유리 가가린이 1961년 우주 공간에 진출하기 전 비자발적으로 우주로 쏘아 올려진 동물들이 있기에 인간은 '최초로 우주에 진출한 지구 생물'은 아니다. 그 영광은 1947년의 초파리(...)가 가지게 되었다. 포유류 최초는 1949년 앨버트 2세라는 이름의 원숭이로 복귀 중 낙하산 고장으로 추락사했다. 1957년에 우주로 떠나 영원히 별이 된 최초의 우주견 라이카도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이곳 참고.[6] 대부분의 유라시아인 및 아메리카 원주민.[7] 여담으로 이보다 더한 일이 산업 사회에서 일어났다. 할 수만 있다면 24시간 일을 시켜도 생산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으므로 노동 시간을 한없이 올릴 수 있다. 실제로 바로 그런 이유로 증기기관이 발명되자마자 19세기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과 강도가 미친 듯이 높아진다. 때문에 노동자들의 인권 착취가 극심해지고 심지어는 아동노동까지도 동원되게 되었으며, 이는 공산주의가 탄생하고 민중들 사이에서 공산주의가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이 된다.[8] 고대-중세-근대라는 구분법이 유럽 역사 이론에서 비롯된 시대 구분의 하나. 시대 구분 자체는 르네상스 시대에 자신들과 중세를 구별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단계 이론이 나온 후, 경제적 발달 수준에 따라서 구별하는 추세가 우세하다. 자세한 사항은 고대 문서 참조.[9] 한국에서 흔히 세계 4대 문명이라고 꼽히는 문명들이 바로 이들이지만, 그 척도가 불분명하기에 학계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최근에는 언급한 남미 대륙의 노르테치코 문명을 포함시키기도 한다.[10]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불교유교의 영향력이 아직까지도 한국인의 생활에 진하게 남아있으며, 다수의 한국인이 믿는 기독교 또한 축의 시대 즈음에 중동에서 비약적인 발달을 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자 유일신교이다. 현대세계 4대 종교로 손꼽히는 기독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의 경우, 전자의 2개의 경우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며 후자의 2개의 경우 축의 시대의 인도에서 출현, 발전하였다.[11]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경우가 없으며, 책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언제나 미궁(aporia)의 상태에 빠지면서 끝난다. 이 미궁은 인간이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그 해답은 주어질 수 없는 난제들로, 현대 철학에서까지 이른바 '실존의 부조리'로 언급되고 있다.[12] 중세(Middle ages)의 경우 유럽의 중세만 설명하며 해당 시기의 세계사는 Post-classical history 문서를 참조하라는 주석이 붙어있다.[13] 이슬람 발흥 전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지역은 기독교 문화권, 이란은 조로아스터 문화권이었다.[14] 내외과적인 치료법은 물론 정신과적인 질병을 의학적인 측면으로 접근한 것은 아랍 문화권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는데, 현 시리아 알레포의 아르군 병원에서 정신병 환자들에게 햇볓 쬐기,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요양하기, 그리고 음악 듣기를 처방한 것이 기록으로 남았다.[15] 갈리아의 투르네 지방에 정착한 클로비스 1세(466년 ~ 511년). 메로빙거 왕조를 세움.[16] 클로비스는 보통 게르만의 전통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여겨지지만, 아리우스파로 개종도 고려했거나,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다.[17] 사실 이 시기는 동로마 제국이 랑고바르드족 등 적대적 이민족들로부터 군사적으로 로마를 지켜주던 시기라 황제의 권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18] 물론 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항상 같은 편이었던 것은 아니고, 로마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 교황을 끌어오는 경우도 있었다.[19] 궁재 출신의 카롤링거 가문이 메로빙거 가문의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후, 카롤루스 대제(768년 ~ 814년) 때 전성기를 맞이함.[20]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21] 하단에 라틴어로 "Rex rogat abbatem / Mathildim supplicat atque"(국왕이 아빠쓰에게 부탁하다. 또한 마틸데에게 탄원하다)라고 적혀 있다.[22] 이때 아비뇽 유수도 발생한다.[23] 아랍을 통해 유럽에 해당 숫자가 알려지며 '아라비아 숫자'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 원산지는 인도다.[24] 혜초왕오천축국전을 보면 이러한 불교의 쇠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제목에서도 5개의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인도의 세태를 알 수 있다.[25] 빨간색: 몽골 제국. 1294년 쿠빌라이 칸 사후 4분할 이후로 보라색: 원나라, 연두색: 킵차크 칸국, 진한 초록색: 차가타이 칸국, 연한 초록색: 일 칸국 [26] 정수일의 한국어 완역본에서 발췌. 다만 일반 독자들에게 조금 더 친숙한 표기법으로 수정했으며(예: 쑬퇀 -> 술탄), 일부 생략 및 접속사 추가 등의 수정이 있음.[27] 위에서 언급한 가나 제국 떄문에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가나 공화국가나 제국이 역사적 관련이 있다고 오해하고는 하지만 사실 두 나라는 큰 연관성은 없다. 그러나 아샨티족이 다수이긴 하지만 유럽 열강이 멋대로 나눈 국경선 때문에 영토 안에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게 되어 '아샨티'라는 이름을 국명으로 삼기 어려워진 것과 더불어, 탈식민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에 영향을 받아 아프리카인의 자긍심을 돋우는 의미로 '전사의 왕'이란 뜻의 '가나'가 현재의 국명이 되었다.[28] 포르투갈은 이 나라를 찾기 위해 바르툴루메우 디아스를 시켜 아예 아프리카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게 했다. 운 나쁘게도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것을 모르고 중도 포기했지만 대신에 희망봉을 발견하였다.[29] 분명 바로 위의 문단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와 직접 교류까지 했는데 어떻게 전설 속 왕국으로 여겨질 수 있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당시 에리트레아와 지부티 지역이 반란으로 에티오피아로부터 떨어져나가 홍해로 통하는 교역로가 끊어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세월이 흐르며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기 때문이다.[30] 당시는 하라르를 수도로 하여 특히 '하라르 술탄국'이라고 한다[31] 재미있게도 이들 오로모인은 오늘날 에티오피아 인종 구성에서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으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32] 자본주의 자체는 늘 있어왔지만 17세기에 봉건제를 밀어내고 주된 경제 체제로 자리잡는다[33]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이 조약에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조약인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두 나라만 조약에 참여했다는 본질적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지구는 둥글어서 동서(東西)는 결국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둘이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어 있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는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이뤄졌다. 조약 체결 후 얼마 안 가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자신들이 신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음에도 이 땅이 포르투갈의 동인도 제도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땅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아직 은광이나 플랜테이션 농장 등이 개발되지 않던 시기였다. 이에 카를로스 5세는 마젤란을 지원해 아메리카 동쪽으로 항해해서 얻을 만한 땅이 없는지 찾아보게 한다. 비록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죽지만 이 일을 계기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새로 사라고사 조약을 맺어 동경 142선에 경계를 새로 긋는다. 그러나 158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베리아 연합으로 합쳐진 후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유명무실해졌고, 연합 해체 이후에도 오늘날 브라질의 영토를 보면 알 수 있듯 극한의 오지인 아마존 땅에서 막을 사람도 없던 포르투갈 개척자들은 서경 43도선 서쪽으로 시원시원하게 깃발을 꽂아 나갔다.[34] 다만, 고대 동양사는 별로 정확하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