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ía Márquez'''
[image]
[image]'''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가브리엘 호세 데 라 콘코르디아 가르시아 마르케스
스페인어: Gabriel José de la Concordia García Márquez
'''국적'''
콜롬비아 [image]
'''출생'''
1927년 3월 6일, 콜롬비아 마그달레나 주 아라카타카
'''사망'''
2014년 4월 7일 (87세), 멕시코 멕시코시티
'''직업'''
소설가, 저널리스트, 정치 운동가
1. 생애


1. 생애


1927년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콜롬비아 보고타 대학교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하지만 정치적 혼란 속에서[1] 학교를 중퇴하고 자유파 계열 신문인 《엘 에스펙타도르》의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54년 특파원으로 로마에 파견된 그는 본국의 정치적 부패와 혼란을 비판하는 칼럼을 쓴 것을 계기로 파리, 뉴욕 등을 떠돌게 된다. 그 후 마르케스는 정치적 성향이 뚜렷해 1955년 공산당에 입당,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50년대 이후 남미가 혁명과 폭력으로 혼란을 겪자, 좌익단체 산디니스타를 지원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정치적으로도 명성이 드높았던 인물이었던지라 콜롬비아 자유당 및 콜롬비아 내 여러 좌파정당들에게서 정계진출을 제의받은 적도 있지만 마르케스는 이를 시원하게 거절했고, 소설가 및 시사평론가로 남았다.
마르케스는 남미의 역사, 토착신화, 마술, 미신, 민담 등을 소설의 주요 모티브로 삼으며 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마술적 리얼리즘)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첫 소설 <낙엽>은 집필 7년 후인 1955년 출간됐으며, 퇴역 대령인 외할아버지를 모델로 쓴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1961)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67년 대표작인 <백년의 고독>을 발표했다. 198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 <미로 속의 장군> 등이 있다.
생전에 피델 카스트로와 매우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그 때문에 공석에서 카스트로에 대한 비판을 일축하면서까지 옹호했기 때문에 카스트로의 딸랑이나 피델의 입이라는 야유섞인 반응을 들었고, 여타 소설가들이나 예술인들에게도 독재정권을 옹호한다느니 피델의 궁전작가 아니냐는식의 비판이나 비아냥도 많이 들었다. 사실 이런 경력만 본다면 일방적으로 카스트로를 추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카스트로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도 쿠바 체제에 대해서 비판할 것은 비판하거나 쿠바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 수시로 조언도 해주었다고 한다. 카스트로는 비록 마르케스의 조언을 다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일부는 받아들이기는 받아들여서 정치범을 석방시키거나 개혁의 제스쳐로 계급장 없는 옷을 벗고 양복과 과야베라를 입고 공식석상에 올라오게 만든다거나 했다. 즉, 알게 모르게 쿠바 체제의 경직성을 완화시켜준 일을 맡은 것이다. 반대로 마르케스가 작품 초고를 낼 때마다 피델이 초고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면들을 비평해주면서 고쳐쓸 건 고쳐쓰게 만들었다. 피델도 문화적인 소양은 대단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마르케스의 소설에 대해 이렇쿵저러쿵 비평을 해주면서 교정시켜주는 일을 맡기에는 딱이었기도 했다 즉, 절친은 절친이었지만 잘못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감싸안기보다는 서로에게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생산적인 관계였다는 것, 여하간 이로 인해서 빌 클린턴 집권 이전까지 미국행 비자를 받지 못해서 미국에 방문하지 못했다가 빌 클린턴 때 와서야 비자를 받고 미국에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는 후일담도 있다.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았든 간에 콜롬비아에서 대문호로 손꼽히는 인물인 만큼 마르케스 사후인 2016년에 5만 콜롬비아 페소 지폐의 인물이 되었다.

[1] 당시 콜롬비아는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였던 호르헤 가이탄에 대한 암살사건의 여파로 내전이 터지는 격동의 시기였고, 이 여파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