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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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전후 세대 출신의 첫 번째 대통령이며,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시어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에 이어 3번째로 젊은 46세의 나이에 대통령직에 취임한 인물이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이후 50년 가까이 이어져왔던 직업 군인 출신 대통령의 전통이 이 사람 대에서 멈췄다.[2]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로 평가되는 1990년대를 이끈 대통령이며, 클린턴 대통령 재임 당시의 경제 호황은 닷컴 버블로 일컬어지는 거품 경제였다는 평가가 일부 있기는 하나, 소련 해체 이후 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미국을 꽤나 안정적으로 통치했기에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높은 퇴임 지지율'''[3] 을 기록한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
부인은 그 유명한 '''힐러리 클린턴'''.[4]
2. 생애
1946년 8월 19일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William Jefferson Blythe III)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중장비 운전기사였던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2세는 클린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 미주리주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숨지게 된다. 블라이드가 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버지니아 캐시디(Virginia Cassidy)는 로저 클린턴 시니어(Roger Clinton Sr.)와 재혼하고, 블라이드가 15살이 되던 해에 성을 계부의 성인 클린턴으로 바꾸게 된다. 정식 이름은 윌리엄[5] 인데, 그보다 애칭인 빌이 더 유명해 대개 '빌 클린턴'이라고 불린다.[6]
계부는 술에 취하면 아내와 아들을 폭행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이부동생을 보호해야 했던 클린턴은 나이에 비해 조숙하게 자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상당수를 범죄와 폭력이 들끓는 핫스프링스에서 불우하게 보냈고, 끼니를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로 때웠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시절엔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약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첫 번째 대선 운동 시절 비치료용 약물[7] 을 해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 들어왔을 때의 대답이 압권이다. 클린턴은 "'''연방'''이나 '''주'''의 마약 금지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 마리화나를 피워본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8]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의 대표적인 예로, 영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웠으니 미국의 마약금지법을 어기지 않은 것은 맞다. 이 발언은 후술하는 '부적절한 관계'와 더불어 그의 교묘한 화술을 이야기할 때 필수적으로 인용된다. 당연히 마리화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고 계속 이어졌다. 이에 빌 클린턴은 '''입에 물긴 했지만 몸에 맞지 않아서 빨지는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의 경쟁자였던 제리 브라운마저도 그저 사소한 문제라며 이 부분만큼은 클린턴을 감쌌으나, 마리화나 문제는 한동안 빌 클린턴의 '자질' 문제를 제기하며 들썩였다.
어찌 보면 아메리칸 드림, 계층적으로 볼 땐 개천에서 용난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가난한 어머니와, 폭력적인 의붓 아버지 슬하, 그리고 우범지대 '핫 스프링스'에서 자라 비싼 미국 대학교 학비를 낼 수 없는 환경이었으나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조지타운대학교 외교정치학과, 옥스퍼드대학교, 예일대학교 로스쿨을 꾸준히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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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절 모습.
조지타운 대학교를 다니고 로즈 장학생[9] 으로 선발되어 옥스퍼드 대학교 유학을 거쳐서[10] 예일 대학교의 로스쿨을 졸업했다.[11] 예일대 로스쿨 재학 시절 힐러리 로댐을 만나 1975년에 결혼하고 1980년에 딸 첼시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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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75년 11월 촬영된 빌과 힐러리의 신혼 시절이다. 신혼답게 서로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게 압권.
이들을 엮어준 것은 베트남 전쟁으로, 힐러리는 그 전까지만 해도 린든 B. 존슨에 대항한 공화당 소속 배리 골드워터의 지지자였다.
조지타운 대학교 재학 중에는 아칸소 상원의원실에서 서기를 지냈고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후 아칸소로 돌아와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 교수를 지냈다.
2.1. 정치 입문
1974년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아칸소 연방 하원 선거에 출마해 현직인 존 폴 해머슈미츠와 맞붙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다소 유리해진 정세에도 불구하고 4% 가량 차이로 낙선하였다.
2년 후 민주당 소속으로 아칸소 검찰총장에 수월하게 선출되였고 1978년에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었다.[12] 주지사 때는 교육정책과 여성, 흑인 등용 정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빌 클린턴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한 것이, 그가 맨 처음 주지사로 선출됐을 때가 32살이었다. 그는 당시 미국 주지사 중 가장 어린 주지사였으며 역사상 어린 나이에 주지사가 된 인물 중 한 명이다.[13] 아칸소는 미국에서 작은 주이기 때문에 1992년까지도 클린턴의 인지도는 대단히 낮았다. 그러나 경선 당시 1988년도의 지루한 대선 지지 연설의 이미지를 일신한 클린턴은 컴백 키드(Comeback Kid, 돌아온 꼬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미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클린턴을 유력한 대선 후보로 점찍었고, 1992년 대선에 그가 출마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주지사 임기를 채우겠다는 공약을 했고, 걸프전 승리로 엄청나게 치솟은 부시의 인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추었다. 아칸소 주에서 그의 출마를 지지하는 여론은 39%에 지나지 않았고 부시가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다는 여론은 52%에 달했다. 그를 주지사로 뽑은 아칸소 주가 그 정도였으니 클린턴이 출마를 망설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백악관의 로저 포터와의 통화에서 포터가 클린턴에게 "만약 당신이 출마한다면, 당신이 현재 민주당에서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수인 고로 당신을 (마이클 듀카키스에게 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파멸시키지 않을 수 없다.'''"라며 위협했고, 그때까지 출마를 망설이던 클린턴은 격노하여 '''"충고 고맙다. 덕분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로저 포터는 "만약 당신이 1996년 대선에 나온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겠지만 이번 대선에 나온다면 파멸할 것이고 정치 생명도 끝날 것이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결국 클린턴은 힐러리와 논의한 끝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아이오와 상원의원인 팀 하킨 등을 제치고 승리하여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가 영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다는 사실 등이 지적되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병역 문제였는데, 그가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다는 것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도피성 유학을 했다는 혐의가 가해지면서 미국의 퇴역군인을 비롯한 보수층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렸고 부시는 "내가 태평양 전쟁에서 총알을 물고 있을 동안 클린턴은 영국에서 손톱을 물고 있었다!"라며 맹공을 펼쳤다.[14] 거기에 제시 잭슨 같은 급진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도 클린턴을 위협했고[15] "컴백 키드"는 그렇게 잠시 위기에 몰렸다. 말년의 리처드 닉슨은 의기양양하게 '부시가 재선할 것이고 로스 페로가 2위쯤 할 것이며 클린턴이 참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여론은 제법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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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다 발생시킨 불경기로 당황하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역사에 남을 선거 문구를 내세워 370명의 선거인단을 휩쓸며 43%의 득표율을 올려 4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여하간 이 문구의 가장 대단한 점은 ''''냉전의 시대는 가고 경제 전쟁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단 네 단어로 압축했다는 점이다.[16][17] 클린턴은 12년 만에 공화당 집권을 저지하고 여유있게 승리했다.
로스 페로는 불출마를 번복하여 양당 후보의 뒤통수를 쳤고, 민주당 경선 과정도 초반에는 클린턴이 겨우 3위를 할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정공법과 꼼수를 모두 적절히 활용해 가며 이를 돌파했다. 여기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멍청한 부통령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댄 퀘일[18] 과 반대로 '미국 역사상 가장 똑똑한 부통령 후보'라는 이야기가 돌았던 앨 고어라는 부통령 후보들의 격차도 작용했다. 실제로 앨 고어를 부통령으로 올린 다음에 지지율이 꽤 많이 상승했고, 차라리 앨 고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낫지 않냐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게다가 부시가 1988년 선거에서 답습했던 네거티브 위주의 선거를 치러 유권자들을 질리게 하기도 했다. 어쨌든 클린턴은 매우 힘겹게 선거에서 이겼다.[19]
2.2. 대통령 당선 이후
당선되자 마자 '''미국 경제의 악의 축'''이었던 쌍둥이 적자, 즉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개시했다. 우선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기관의 상당 부분을 전자화해 공무원 30만 명을 해고했다. 또 레이건 정부 이후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감세정책을 폐기하고 누진세를 확대해 재정 수입을 늘렸다. 빌 클린턴의 첫번째 재정 법안은 민주당이 다수당이던 1기 전반기에도 하원에서 218:216, 상원에서 50:50으로 갈렸다가 앨 고어가 찬성표를 행사해 가까스로 통과했다. 그 결과 1980년대 말 록펠러 센터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사들이며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던 일본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유일한 초강대국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또한 재임 직후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부시 행정부 때 폐기되었던 미국 통상법 301조(속칭 슈퍼 301조)를 부활시켜 거의 모든 국가의 무역, 관세장벽을 무너뜨리고, 우루과이 라운드 체제를 통해 농산물, 서비스, 엔터테인먼트 사업 부분의 시장개방을 강제해 미국 산업의 시장 확대를 통한 무역적자 해소를 꾀했다. 또 미래산업으로서 IT, 금융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주도의 IT 산업,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오락산업 등 첨단산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앨런 그린스펀 위원장을 필두로 한 연방준비제도 주도의 경제개혁도 성과를 보여 정부 재정이 흑자로 전환되고 미국 국내 경기가 클린턴의 임기 내내 호황을 이어갔으나 갑작스런 시장개방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아야 했던 여타 국가들(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반미감정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내 힐러리의 주도하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대형 프로젝트인 국민의료보험 도입이 결국 좌초하고[20] 인기가 곤두박질쳐, 1994년 중간선거에서 대패해 상하원을 공화당에게 전부 내주게 된다.[21] 뒤이어 벌어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사건을 신속히 해결하면서 인기를 회복했지만 그 뒤로도 여러가지 스캔들 때문에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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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첫번째 임기 당시 클린턴은 높은 경제적 성과를 토대로 47,401,185표(49.2%), 선거인단 수 379명을 얻으면서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73세 고령의 밥 돌 상원의원에 압승을 거두고 1996년 연임에 성공했다. 화이트워터 사를 통한 부동산 투기 의혹(일명 '화이트게이트')으로 공화당이 공격하고 있었고, 지퍼게이트 외에도 주지사 시절의 여자 관계 의혹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다. 참고로 르윈스키 스캔들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98년 1월로, 클린턴이 이미 연임에 성공한 뒤다.
두번째 임기 막판에는 동생 로저 클린턴과 마크 리치로 대표되는 자신의 후원자들을 사면하여 의회에서 퇴임 이후 청문회가 벌어지는 등 그렇게 깨끗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임기를 보냈다. # 이 때문에 비교적 괜찮고 좋은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란 준수한 이미지의 조지 부시의 당선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미국인들은 그뒤 이미지와 유능함이 무조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2000년대 내내 한숨을 푹푹 쉬어야 했다. 아예 캐나다로 도망간 사람도 있을 정도.
2.3. 퇴임 후
퇴임을 몇달 앞둔 2000년 백악관 공식만찬 행사에서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상을 상영했는데, 제목이 '''Bill Clinton - The Final Days'''.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호평을 받았다. 중간에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케빈 스페이시가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거울 앞에서 수상소감을 읊어보는 대통령의 손에서 트로피를 뺏어가고, 힐러리가 클린턴이 챙겨준 점심까지 쌩까고 차타고 가버리는 장면과 휴 셸튼 당시 '''합참의장'''이 백악관 '''전쟁상황실'''에서 배틀쉽 보드게임을 하던 중 대통령이 셸튼 합참의장의 전함을 침몰시키자 셸튼 합참의장이 대통령에게 '''"You sunk my battleship!"''' 드립을 치는 장면이 백미다.
퇴임 후에는 잘생긴 얼굴과 임기 중 얻었던 인기를 발판삼아 인기 강사, 연설가로 뛰고 있다. 사실 화술의 달인이기도 하다. 클린턴과 만나 10분만 이야기해보면 그를 까던 사람도 팬이 돼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라는 평가도 있다(특히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 '''은퇴를 해도 만 54세였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 본인도 대통령을 너무 일찍 그만둔 게 아쉬웠는지 '''국민들이 원하고 능력이 있으면 2회의 임기를 마친 뒤에도 어느 정도 시간을 거쳐 대통령을 다시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헌법 개정 과정이 험난하기로는 최고인 미국인지라 자신 대신에 아내인 힐러리를 대통령으로 밀어줬다.
미국 내부에서의 평가들도 너무나 젊은 나이에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30살'''에 아칸소 주의 검사총장이 되고, '''32살'''에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고 나서 '''사실상 30대와 40대'''를 주지사로 지내다가 '''40대 중반'''에 바로 미국 대통령이 되어서 '''55살에 퇴임'''했으니 이건 무슨 일반 회사원이 회사 다니다가 정년 퇴직한 것도 아니고(...). 50대에 정계 진출하는 사람들도 많은데[22] '''이 사람은 50대에 이미 모든 정치 활동을 끝냈다.'''[23]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들을 위로하러 방문했을 때도 현직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보다 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퇴임 후에도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보수 쪽 미디어에서 비아냥거리는 논조로 '''MTV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 때 정치자금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부지런히 여러 강연에 나가기도 하며 활동한 덕에, 빚 수백만 불을 고작 5년 만인 2013년 초에 다 갚았다. 이쯤 되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실감이 나서 무서울 수준.[24]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존 케리를 지지하는 영상. 당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인기와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연설이다.
클린턴 재단이라는 자선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9월에 첫 모임을 열었는데, 적대적 세계보다는 협력의 세계를 만들고 세계적 상호의존의 부담을 줄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자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 실제로 2006년에 버진 그룹[25] 의 수익 30억 달러를 지구 온난화 문제에 쓴다는 약속[26] 을 비롯한 73억 규모의 215개 약속을 이끈 바 있으며,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연구원 로스코프는 현시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집단이라고 평가했다.[27]
2009년 8월 자국의 여성 기자의 석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을 직접 방문하여 기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또한 북한에게 현대아산 직원과 연안호 선원들의 조속한 석방을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미국 정부와는 무관한, 자연인 클린턴으로서의 개인적인 활동으로 되어 있으나,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당시 국무부 장관이었으며, 그 자신이 전직 대통령임을 감안하면 단순히 석방을 위한 협상만 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010년에는 아이티 지진의 구호활동에도 나섰는데 그해 2월 12일 심장에 통증을 호소하며 뉴욕의 어느 병원에 입원했다. 2004년에 심장 문제로 수술을 받은 전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 가서 미국의 조예선 마지막 경기를 관람했는데 랜던 도노번의 극적인 인저리타임 골로 자국이 16강에 진출하자 매우 흐뭇해하는 광경도 보였다.
20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타나서 오바마 지지 연설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대선이 박빙으로 흐르면서 오바마가 클린턴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응해 격전지인 스윙 스테이트들을 돌면서 오바마 지지를 호소했던 것. 여전히 민주당 정치인 중에선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라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든 밋 롬니가 당선되든 클린턴이 최후 승자일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전직인 그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민주당에서 지분이 높아지고, 롬니가 당선되더라도 야당이 된 민주당의 원로 정치인으로 민주당의 간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 심지어 클린턴이 부인 힐러리의 대선 출마를 고려해서 오바마를 지원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오바마의 재선 이후 힐러리의 인기는 계속 오르고 있다. 반면 공화당에서는 그나마 낫던 롬니가 잘리고 나서는 현재 누구를 올려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막장이 되었다.
그리고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에 출마한다고 발언한 이상, 힐러리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빌은 前 대통령이자 現 대통령의 부군이 되는 셈이다. 참고로 이런 경우를 위해 영부인(First Lady)와 대등되는 First Gentleman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대통령의 남편에게는 한 번도 쓰인 적은 없었다.[28] 빌 클린턴이 최초로 대통령 남편으로서의 First Gentleman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자 남편 빌도 전국을 돌며 유세를 도왔다. 여담으로 "아내는 내가 바람피웠을 때도 날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니 여러분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적인 지지연설과 힐러리를 적절하게 잘 띄워준 말솜씨 덕에 언론과 좌중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걸(언론의 포장과 전통적 블루 스테이트라는 점에 가려져) 보지 못해서 발생한 러스트벨트 문제, 힐러리 클린턴 자신의 이메일 스캔들, 이라크&리비아의 수렁, 월가 문제 등이 겹쳐 예상 외의 패배를 당하며[29] 클린턴 부부 대통령의 꿈은 좌절되었다. 아내 힐러리도 이젠 나이가 있고 정계 은퇴가 확실하기 때문에 빌도 그냥 전직 대통령으로만 남게 되었다. 빌은 노동자 계층과 경제를 무시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지만 힐러리가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가 그를 자문역으로 고려 중이라고 한다. 클린턴 가족의 사이가 공화당과 그리 좋지 못함을 감안할 때 공화당 입장에선 이게 성사되면 매우 충격적인 일이 될 듯. 그러나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결국 무산된 것으로 보여진다.
# 힐러리 클린턴 대선 출마 당시 민주당 성명에서 빌 클린턴이 홍보용 풍선을 가지고 즐거워하는게 재밌다는 반응이 생기고, 한 소녀에게 풍선을 뺏기기 싫어하는 모습이 밈화되었다.
2018년 북미정상회담이 가까워지자 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민주당과 리버럴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심장 수술을 받은 것을 계기로, 아예 육식을 중단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2018년 미국 우편 폭탄 미수 사건에서 그의 집으로 파이프 폭탄이 배달되었다.
2019년 5월 딸 첼시 클린턴과 정치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하였다.
2020년 12월 14일, 당해 치뤄진 미국 대선의 뉴욕 주 선거인단으로서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조 바이든과 카멀라 해리스에게 투표를 했다.
3. 평가
3.1. 미국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이끈 대통령으로 클린턴 집권 당시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40여년간 대립하던 '''소련의 붕괴'''로 인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30] 그 어느 국가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래 60년만에 최초로 8년 임기를 마친 '''민주당''' 대통령이 되었다.[31] 또 후임자 조지 W. 부시의 실정으로 더욱더 클린턴의 업적이 고조되는 측면이 있다. 퇴임 8년 뒤 후임 민주당 대통령이었던 오바마의 당선, 재선과 함께 보수화되었던 미국 정치판의 축을 돌리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아래에서 보듯 소수민족과 여성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폈으며, 환경 정책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군의 동성애 정책을 일신한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Don't ask, Don't tell)" 정책, 즉 DADT도 큰 성과 중 하나다.[32] 로버트 라이시(노동부 장관)와 같은 젊은 관료와 로이드 벤슨(재무장관) 같은 경륜의 인물도 잘 등용했다.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난과 잡음도 많았다. 클린턴의 결정적인 탄핵안을 비롯해 의회와 대법원에서도 그야말로 박빙의 표결들이 여러차례 연출되었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믿기지 않을지 몰라도, 퇴임 당시 그는 그렇게 고평가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8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으니 그야말로 위기에 강하고 강운을 가진 사나이였다고 볼 수 밖에...
임기를 통틀은 가장 큰 실책으로는 글래스-스티걸 법안(Glass-Steagall Act)으로도 불리는 1933년 은행법(Banking Act of 1933)을 폐지한 게 손꼽히는데,[33] 경제 대공황의 원인이기도 한 은행의 고위험 투자를 막는 법을 폐지함으로서 금융기업과 상업은행의 분리가 의미 없어지고 후임자 조지 W. 부시 시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세계금융위기의 경제난을 초래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빌 클린턴 혼자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80년대 이래로 진행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미래의 화근을 알아채지 못하고 남들과 똑같이 훗날 미국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비극의 기반을 쌓아간 것은 사실이긴 하다. # 자세한 내용
베이비 부머 세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베이비 부머들은 2차 세계 대전 승리 후 초강대국으로 올라선 미국의 낙관주의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대단히 개인적으로 개방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온갖 성추문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누릴 수 있던 것은 동세대의 성격과도 다르지 않다. ‘'''공화당원은 열심히 줄을 서고, 민주당원은 사랑에 빠진다(The Republicans fall in line, The Democrats fall in love)'''.’는 격언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통령.
3.2. 한국
<시사IN>, 1997년 말, 미국은 왜 한국을 집어삼키려 했나?
한국에서는 1993년 집권 초부터 쌀개방 주도자로서 농민들과 한총련 등 NL 운동권 사이에서 비난을 받아 방한 반대 시위까지 터졌고, IMF 사태로 미국식 구조조정을 강요한 원흉이자[34] 한국 금융시장을 미국식 금융자본에 종속시켜 놓은 원흉이라 할 수 있으며, 1997년 미일가이드라인 개정으로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근거를 마련한 점에서 한국의 진보세력이 반미 강력 주장에 적극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5]
훗날 한국의 IMF 구제금융에 대해, 당시 IMF 총재로서 IMF 협상을 지휘했던 미셸 캉드쉬는 '''당시 조치가 가혹한 측면이 있었다'''고 하는가 하면, IMF조직 자체적으로 외환위기 처방이 가혹하다며 자기반성하기도 하였다. IMF 거듭된 자기반성 - 외환위기 처방 가혹했다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36]
3.3. 국외 문제
클린턴 집권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의 수장이자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있던 소련이 붕괴되면서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정책을 아무 무리없이 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클린턴의 대외정책은 그렇게 순탄치 않았다. 심지어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전쟁광"이라는 비판도 들었을 정도니...
국외에서는 1차 북핵문제와 관련된 인상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온건파로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코소보 공습도 클린턴의 당시 업적(?) 중 하나다. 특히 코소보 공습 때 미군을 파견하여 당시 코소보 분리 독립에 반대했던 유고슬라비아를 찍소리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2008년 코소보는 결국 독립하게 된다.[37]
한편 한국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이 폭탄 테러로 붕괴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즉시 아프가니스탄과 수단 공화국에 순항미사일 공격을 가하여 박살내기도 했다. 이라크에 대해서도 비행금지선을 어겼다는 이유로 심심하면 두들겨팼다.[38] 결국 감질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 후임자가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39] 를 빌미로 이라크를 조지고 부수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수단도 박살났고.
더불어 수단 공화국에 있는 화학무기 공장을 폭격하게 했더니만 그게 남수단의 유일한 아동 백신 제조공장이라서 많은 남수단 아이들을 죽게 한 일도 있었다. 이를 두고 자신의 성추행을 감추고자 일부러 그랬다는 비난을 들었다. 물론 이 공격으로 수단은 미국의 테러단체 지원 중단을 수용하게 되었다.
더불어 1998년 핵실험을 강행한 인도와 파키스탄을 중재하러 간다고 뉴델리에 방문했으나 당시 인도 총리 아탈 베하리 바지파이(Atal Bihari Vajpayee, 혹은 Bajpai)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40] 미국 대통령이 인도 총리를 먼저 와서 기다리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41]
미국이 감싸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중동 지역에서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목표가 되기도 했다. 클린턴 스스로도 중동 평화에 관심이 많아 당선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을 이끌어내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극단파 유대인에게 암살되고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에서 미국의 아랍 공격에 항의하는 민중폭동이 이어지면서 결국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도리어 실제적 업적은 차라리 북핵 문제와 관련된 제재의 정당성 확보 및 북아일랜드 분리독립 문제 해결 측면에 있다.[42]
일본에 대한 무례하고 압박적인 태도로 일본에서는 논란을 빚기도 했는데 1998년 일본 방문시 일본 국왕 아키히토가 클린턴을 영어를 쓰며 공손히 영접했는데 일본과 국제사회를 지나치게 압박하고 일본 천황에게도 영어를 강요하여 국제적으로 영어를 전세계에 강요하는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 논란을 빚기도 했다.[43]
훗날 클린턴은 2000년 오키나와 방문시 오키나와 평화의 비 앞에서 뒷짐을 지고 참배를 했다. 1:12초에 나온다.
4. 르윈스키 스캔들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여자 문제로 트러블이 매우 많았다. 1990년 9월 중순, 주지사 연임을 시도하던 클린턴을 아칸소 주 개발재정국에서 해고된 직원 래리 콜린스가 "클린턴이 아칸소 주의 재정을 유용하여 다섯 명의 여자와 간통을 했다."라고 폭로한 것이다. '''클린턴은 아무 것도 모르고 출근하다가 AP통신의 기자 빌 시먼스에게 그 소식을 전해듣고 기겁했지만,''' 매우 침착하게 시먼스 기자에게 콜린스가 지목한 여자들과 인터뷰할 것을 요청했고 시먼스는 '''다섯 명 전부에게서 그런 적이 없다는 진술을 받았다.''' 하지만, 공화당에서 이를 놓칠 리 없었고 공화당 주지사 후보 셰필드 넬슨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클린턴을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했지만, 여자들이 자꾸 이러면 고소하겠다고 반발했고 콜린스의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터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외에도 클린턴이 주지자로 재직하던 시절 호텔에서 그에게 성관계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한 폴라 존스, 12년간 클린턴과 혼외정사를 했다고 주장한 제니퍼 플라워스, 성매매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등의 스캔들이 있었다.
제일 유명한 스캔들은 당시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1973 ~)와의 불륜 스캔들, 속칭 '''지퍼게이트'''이다. 모니카는 펜타곤의 공보직으로 근무하는 친구 린다 트립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클린턴과의 관계를 허물없이 털어놨는데, 린다가 이 내용을 녹음하고 언론에 공개하면서 시작되었다.[44]
미국에서는 주에 따라 간통죄의 존재 여부와 이에 대한 태도가 다른데, 대도시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뉴욕을 비롯한 동북부지역이나 LA를 비롯한 서부지역 등에서는 정치인들의 성문제에 있어 좀 관대한 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지역이나 러스트 벨트 지역 등에서는 정치인의 성문제에 있어서 민감하게 대응한다. 게다가 대선에서 클린턴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 기반이기도 한 아칸소와 루이지애나에선 특히 난리가 났었고,[45] 결정적으로 클린턴이 법정에서 위증 및 위증교사를 하면서 케네스 스타 특별 검사에게 털리고, 하원에서 탄핵 의결이 통과되어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되었고 연방대법원에서 '더 이상 우리 법원에서는 변호사로 활동할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46] 거기다 시가를 좋아하는 클린턴이 르윈스키의 음문에 시가를 보관했던 일화를 비롯한 성적인 보도가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TV 생중계 등을 통해 대통령에게도 사생활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자 여론이 어느 정도 클린턴에게 동정적으로 돌아서고 중대한 사건이 아님에도 거짓말 한 번 잘못 했다고 탄핵은 좀 지나치다 싶었는지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면서 가까스로 대통령 자리는 지켰다. 물론, 이 시기 아내인 힐러리와의 관계는 당연히 막장으로 치달았다. 이혼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 힐러리의 회고에 따르면 '''"그 때 남편을 반갑게 맞이했던 가족은 우리 집 개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소파에서 잠을 자야 했다고 한다. 바람을 피운 주제에 변명할 말도 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클린턴은 첫 대선 당내 경선에서도 이미 섹스 스캔들에 한번 휘말렸으나 힐러리의 강공으로 간신히 극복한 상황이었다. 훗날 힐러리는 한 인터뷰에서 남편이 밉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다만 이후에 화해를 제대로 하긴 한 듯하다. 당시 백악관 직원들이 남긴 회고록 등을 보면 직원들이 침실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노크를 해야 민망한(?)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마다 빌과 힐러리가 매우 격렬하게(...) 섹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두번이나 바람을 피운 자신의 남편을 대변해준 덕분에 대중들에게 호감을 쌓아 상원의원에 진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담도 있다. 물론 백악관 내에서는 태도가 돌변해, 한성깔 하는 성질 어디 안가고 빌에게 물건을 마구 던져(...) 빌이 물건에 맞아 다친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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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르윈스키 스캔들로 한창 곤경에 빠졌던 클린턴을 바라보는 아내 힐러리의 모습. 이 사진은 1999년 퓰리처상 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판결문이 인터넷에 퍼져 부모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 때 미국민들 사이에서는 클린턴의 변명을 비꼬아서 '''"오럴섹스(구강성교)는 섹스가 아니다."'''[47] 라는 농담이 생겼고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묘사한 클린턴의 '부적절한 관계'[48] 라는 표현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다. 특히 일본의 정치인들 사이에 대유행이 되어 뭔가 문제가 생기면 갖다붙이는 사과 표현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고위층의 변명으로 절찬리. 우스갯소리로 미국 대통령의 사무실이라 볼 수 있는 오벌 오피스(Oval Office)가 '''오럴 오피스'''라고 불렸다.
르윈스키 사건에 대한 빌 클린턴의 대국민 사과문을 살펴보면 한국인들의 시선에서는 온통 변명뿐인데다가 결론은 '''"이건 내 가족의 일이니 댁들은 신경 좀 꺼 주시오."'''로 읽힐 수 있어서 지탄을 받기 쉬울지 모르나, 다시 말하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륜 자체'가 아니라 '클린턴의 위증' 여부였다.
구강성교가 '성적 접촉'(Sexual relation)이 아니라는 대답을 하고 클린턴이 자기는 위증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검사가 질문을 하면서 성적 접촉의 범위를 한정했기 때문이었다. 검사는 성기나 항문, 유방 등에 접촉하는 것을 성적 접촉으로 규정하고 질문을 했다. 클린턴은 이 질문을 자신이 르윈스키의 그 부위에 접촉을 했는지 묻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입장에서 성적 접촉을 하지 않았다고 답한 것이다(...). 결국,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 정말 오럴섹스를 받기만 했는지는 당사자 둘과 신만이 알겠지만, 그동안 클린턴이 보여주었던 교묘한 화술로 보아 '성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이 발언이 국민들을 속인 것은 맞지만 탄핵할 만큼 중대한 위증은 아니라는 여론이 일었고, 결국 탄핵안은 부결된다. 하지만 호도하기 위한 증언(misleading testimony)으로 판결나서 이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벌금을 물고 변호자 자격이 정지되었다.
당시 늘그막이던 전설적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클린턴의 성추문을 두고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디마지오는 사랑하던 전 아내 마릴린 먼로가 존 F. 케네디와의 성추문 때문에 죽었다고 여겼기에 높으신 분들의 성추문을 혐오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마지오는 클린턴도 평생을 증오하던 케네디와 맞먹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잘못한 것이 클린턴 본인이니 할 말도 없긴 하다. 그런데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에게 매일 야구배트로 폭행을 했던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는 놈이라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마릴린 먼로가 이혼장을 내밀면서 했던 말이 "그가 나를 때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모니카 르윈스키는 스캔들이 터진 지 14년이 지난 2014년에 회고록을 냈다.
5. 어록
'''“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클린턴 캠프가 사용한 캐치 프레이즈. 조지 H. W. 부시의 재선을 저지하고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결정적인 구호로 꼽힌다.
'''“A lot of your life is shaped by the opportunities you turn down as much as those you take up.”'''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선택하는 기회들 만큼이나 거절하는 기회들에 의해 정해지게 됩니다.
자서전 <My Life>에서.
'''“I did not have sexual relations with that woman, Miss Lewinsky.”'''
저는 그 여자, 르윈스키양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클린턴이 르윈스키 스캔들을 부인하며 한 유명한 말. 이 말은 미국 정치 풍자 유머에서 많이 쓰인다. 스캔들을 부인하기 위해 단호하게 부인했지만, 정작 이 말 때문에 클린턴에 대한 의심을 키웠다는 의견도 있다.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코끼리를 떠올리는거랑 비슷하게.
'''“It’s arithmetic!”'''
그건 산수입니다!
2012년 DNC에서 하나의 전설이 된 지지 연설[49]
의 상징. # 대본[50]
“I've lived a long, full, blessed life. It really took off when I met and fell in love with '''that girl'''.”
저는 길고 꽉 찬, 축복받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시작된 겁니다.
6. 등장 매체
[image]
비비스와 버트헤드 극장판인 미국을 먹어버리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 그렇게 멍청하거나 비꼬지 않지만 이 두 사고뭉치를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칭찬해준다. 사실 이 두 녀석이 온갖 사고를 저지르면서도 도움을 준 게 있다보니.
듀크 뉴켐 3D 추가판 레벨에 우주괴물에게 잡혀 의자에 묶여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에미넴이 2013년에 발표한 노래 'Rap God'에서 로윈스키 스캔들을 가지고 강도 높은 디스를 했다.
사우스 파크에서 르윈스키와 시가 일화를 써먹는다.Got a fat knot from that rap profit
Made a living and a killing off it
'''Ever since Bill Clinton was still in office'''
'''With Monica Lewinsky feeling on his nut-sack'''[52]
랩으로 얻은 돈뭉치가 꽤나 빵빵해. 그걸로 먹고 살고 죽여보기도 했지. 빌 클린턴이 집무실에서 르윈스키랑 거시기 느낌을 즐기고 있을 때부터 말야.
프론트 미션에 등장하는 클린턴형은 이 대통령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파생기종인 뷰렌은 미국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에서 따 왔다.
왝 더 독의 스토리는 르윈스키 스탠들에서 따왔다.
존 트라볼타 주연의 영화 프라이머리 컬러스에서는 존 트라볼타가 클린턴 역할로 나온다. 개봉 당시 클린턴이 아직 현역이던 때라 미묘했는지 등장인물들 전부 가명을 쓰고 약간의 변형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실화 영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Fate/Zero에서는 라이더의 세계정복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적으로 묘사되었다.
7. 여담
-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92년부터 2000년까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20년대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기까지의 두 시기와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긴 경제적 팽창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닷컴버블로 인했던 것으로, 그가 대통령 자리에서 퇴임한 지 두 달 만에 미국 경제는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허나 클린턴의 집권기가 유독 주목받는 이유는 전대의 황금기들이 제국주의 서유럽 국가들 혹은 소련과 세계 패권의 파이를 나눠먹었다면, 이 시기는 오로지 미국이 홀로 완벽하게 세계 패권을 주무를 수 있었던 독보적인 초강대국으로 군림했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현재의 미국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리고 90년대의 황금기는 클린턴 퇴임 이후 조금씩 하락세였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호황은 후임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2006년까지 길게 이어졌으며 이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통해 깨지게 된다.
- 상당한 동안으로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와 동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역 시절엔 정적이었던 조지 W. 부시랑 지금은 절친하게 지낸다. 둘이 리더십 프로젝트로 같이 교육 프로그램도 만들고 행사에도 같이 나오고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서 부시가 클린턴을 지목할 정도로 친한 사이. 왜냐 하면 둘 다 이미 미국의 대통령으로 임기를 모두 마치고 퇴임했기 때문이다. 한쪽이 낙선했더라면 사이가 절대로 좋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둘이 정반대의 정당 출신 대통령이었어도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클린턴과 W.부시는 공적으로는 정적이었어도 사적으로는 이젠 친구가 되었다.[53]
- 중간 이름에 나오듯이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을 존경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둘 다 불륜 혐의가 있고(...) 공화당에서는 당신은 제퍼슨이 아니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 영화팬이며 한때 배우가 되려는 꿈도 가지고 있었다. 월간조선의 관련 기사에 따르면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s-2가 개봉했을 때, 백악관에서 사람 여럿 불러놓고 본 적 있다. 꽤 만족스럽게 보았다고 하며, 특히 백악관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엄청 즐거워했다고 한다.
- 어려운 시절부터 주식으로 먹었던 패스트푸드를 대통령 재임기에도 즐겨 먹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 각료들과 햄버거를 먹으며 각료회의를 하기도 했으며 대통령 재임기에도 백악관을 나가 맥도날드의 햄버거를 자주 사 먹었다고 한다.[54] 당연히 이런 식성이 클린턴의 심장 질환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 역시 사실이다.
여담으로 빌이 퇴임하고 20여년 뒤 그의 아내를 대선에서 이기고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도 햄버거를 비롯한 패스트푸드를 무척 즐긴다. 도널드 트럼프는 빌 클린턴과는 달리 태생부터 상류층이지만 워낙 빠르고 간편한 걸 선호하다 보니 패스트푸드를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조간회의 때 다이어트 콜라 5-6캔 정도를 까 마신다고 하며, 아예 집무실 책상에 따로 빨간색 버튼을 설치해 이 버튼을 누르면 백악관 주방에서 다이어트 콜라를 가지고 온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 어머니 쪽 이부(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로저 클린턴은 가수로 활약하고 있고... 더럽게 재미없는 B급 호러영화 펌프킨 헤드 2에 대사 좀 있는 단역으로 출현했는데 이 영화가 국내 개봉할 당시 내한을 했다. 당연히 대통령 동생이라는 후광을 받아서. 친아버지 쪽으로 이복형 헨리 레온 리첸탈러(Henry Leon Ritzenthaler)[55] 와 이복누나 샤론 리 페티존(Sharon Lee Pettijohn)이 있다.
- 오랫동안 정치 활동을 벌이고 있는 아내 힐러리 외에도, 딸인 첼시 클린턴(1980년생)도 곧 정계에 진출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워싱턴 정계에 퍼져 있다. 첼시는 만 17살 때 대학 졸업 후[56]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금융가로 있다가, 언론 리포터와 국제관계학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다. 클린턴 부부가 설립한 대형 재단에 '빌·힐러리·첼시 클린턴 재단'이라 하여 첼시의 이름을 붙이는가 하면 넬슨 만델라 추모식에 첼시를 동반하기도 했다. 단순히 부모로서 딸을 생각하는 수준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공식적이고 노골적인 형태라 벌써 정치 후계자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70대에 접어든 클린턴의 나이나, 2017년 기준 30대 중반이 된 딸의 나이를 생각하면 '벌써'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 미국의 황색 언론에서는 무남독녀 첼시 클린턴이 빌의 친딸이 아니라 힐러리가 외도로 낳은 혼외자식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돌고 있다. 이들의 '빌 클린턴은 무정자증이고, 힐러리는 옛 애인이었던 변호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고, 빌은 그 사실을 알고도 아이가 있는 쪽이 자신들의 이미지에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냥 가만히 있는 거다', '첼시는 빌과 전혀 닮지 않았다' 라고 주장한다. 으레 황색 언론의 보도들에 대한 반응이 다 그렇듯 이러한 가쉽성 보도에 대해 미국 사회에서의 반응도 이뭐병.
- 달변가로 유명하다. 미국의 제38대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빌 클린턴을 "이미 녹아 버린 얼음도 팔아먹을 수 있는 (화술의) 인물"이라 말했다. 물론 좋은 말만 한 건 아니고 "여자만 보면 눈을 두리번거리는 섹스 중독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archive wayback
- 클린턴을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며 장난스럽게 부르기도 한다. 흑인 문학가 토니 모리슨이 한 발언에서 비롯된 건데, 모리슨은 빌 클린턴이 평소 흑인들이 애용하는 색소폰을 애용한다는 점, 흑인들처럼 빈민층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이 흑인의 습관과 가깝다는 점(패스트푸드를 즐겨먹는 점 등)을 들어 그리 말한 것이다. 한 마디로 '겉은 백인이지만 속은 우리 흑인들과 같아 흑인들을 잘 이해해주는 좋은 대통령'이라는 의미에서 흑인 대통령이라 빗댄 것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인 힐러리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후 평가가 더욱 올라가고 있다. 그 이전에는 똑부러진 힐러리, 사고뭉치 빌의 이미지가 있었다. 빌이 대통령이 된 것은 똑똑한 힐러리의 내조 덕분이었다는 평은 덤.[59] 그러나 인기 절정의 현역 대통령을 꺾고 재선에 승리한 빌 클린턴과 달리 질 수 없는 대선이라는 평이 자자했던 선거에서 패한 힐러리 클린턴이 대조되면서 평가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 2018년 6월, 작가 제임스 패터슨과 공동으로 '대통령이 사라졌다(The president is missing)'라는 제목의 범죄 스릴러 소설을 출간했다. 대통령 조나단 던컨이 탄핵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미국을 전복시키려는 테러 세력을 찾아나선다는 내용이다. 출간 직후 쇼타임에서 드라마화 하기로 결정했다. 북미에서만 판매량이 100만 부를 돌파하는등 미국 대중들에겐 반응이 좋았던 반면 평단의 반응은 차가웠다(....) 사실 작가 두 사람의 이름값을 내려놓고 본다면 소설 플롯 자체는 흔한 이야기고 반전도 예측 가능하다.
- 그 외에도 미국 선거사에서 재밌는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 대선에서 43.0%, 두번째 대선에서 49.2%의 총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미국에서 두 번 다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들[60] 중 같은 민주당의 전임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함께 한 번도 대선에서 득표율 50%을 넘기지 못한 유이한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는 미국 대선 역사상 드물게도 빌 클린턴이 치른 두 번의 대선에서 로스 페로라는 제3후보가 등장해서 18.9% - 8.4%를 기록하며 선전했기 때문이다.
- 아칸소 주지사 시절 유약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Ricky Ray Rector'란 범죄자를 사형시켰다. 문제는 이 죄수가 정신지체였다는 점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빌 클린턴을 공격할 때 인용하는 레퍼토리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