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비호산 전투
1. 개요
본격적으로 참전한 중공군에 의해 한미 연합군이 쭉쭉 밀려나던 1950년 11월 1일부터 6일까지[1] 국군 7사단이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 비호산 일대에서 청천강 전투 1차전의 일환으로 치른 방어전으로, 비호산 전투로도 부른다.
2. 전투 경과
참고자료1 참고자료2 참고자료3
2.1. 11월 1일
오전 7시, 7사단 3연대 수색중대는 604고지 우측을 경계하다 중국어를 쓰는 이들과 교전을 하였다. 한편 이 무렵 2군단의 전방에선 국군 6사단과 8사단이 철수와 엄호를 병행하며 분투중이었고, 중공군들은 이들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태평으로 진출해 퇴로 차단을 기도하는 중이었다.
오전 8시 2군단은 7사단에게 덕천-구장동 일대를 확보해 군단의 동측방을 방호하며 산악지대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 격멸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에 신상철 7사단장은 3개 연대를 모두 투입시키기로 결정한다. 이에 3연대는 신흥리와 백령천, 5연대는 덕천, 8연대는 용문산[2] (1190고지)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각자 떠난다. 하지만 8연대가 향하던 용문산엔 중공군 1개 소대가 이미 자리잡고 있어 이를 격퇴했다.
오후 5시, 3연대는 1개 연대급 중공군과 교전했고, 오후 10시 무렵엔 공세가 격해지자 각 연대들은 오후 11시 무렵 원리로 철수했다.
2.2. 11월 2일
이 무렵 워커 중장은 퇴로 차단을 우려해 병력을 전부 청천강 이남으로 물려야 한다는 건의에도 불구하고 강 북쪽에도 병력을 배치해 청천강 및 대령강의 교량과 전차 도하지점 등 교두보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2군단장도 7사단에게 미 24사단 5연대가 있는 군우리 북쪽 비호산(622고지)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명령했고, 이에 7사단 3연대는 비호산 서쪽, 5연대는 비호산 동쪽 760고지로, 8연대는 사단 예비로 군우리 남쪽 용현리로 각각 이동하였다.
2.3. 11월 3일
오전 3시 봉천리를 경유해온 2개 연대 규모의 중공군들은 비호산의 3연대를 포위격멸하고 비호산 및 그 뒤의 개천을 점령하고자 비호산 서쪽의 3연대를 집중 공격했다. 이에 2대대는 축차적으로 주저항선으로 철수한 뒤 비호산 정상을 두고 3시간 가량 쟁탈전을 반복하다 개천에 있는 UN군 포병대대의 지원포격에 힘입어 가까스로 격퇴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비호산 동쪽의 5연대 역시 1개 대대와 교전하나 예비중대를 투입해 격퇴했다.
2.4. 11월 4일
오전 10시 7사단 3연대는 8연대와 임무교대한 뒤 개천의 조양국민학교로 이동해 재편성에 들어갔고, 8연대는 비호산 주봉에서 청천강 남안으로 연결된 북쪽 능선 일대의 진지들을 강화하고 수색대를 편성해 정찰보냈다. 이 무렵 5연대는 비호산 남쪽 535고지-760고지간의 진지를 강화하고 있었으며, 오후 10시 2개 중대 규모의 정찰대와 조우해 격퇴했다.
2.5. 11월 5일
오전 3시 사단급의 중공군들은 덕천에서 개천쪽으로 우회해 535고지의 5연대 2대대의 진지들을 돌파했고, 직후 8연대 2대대도 협상참 계곡으로 밀려나 비호산이 탈취당하고 만다.
이에 3연대는 비호산 남쪽에서 5연대의 철수를 엄호한 뒤 탈환을 기도했으나 돈좌되었다.
2.6. 11월 6일
오전 8시 30분간의 공격준비사격 후 5연대와 8연대는 고지 남북으로 협공을 시작한다. 일단 5연대는 남쪽에서 미 5연대 진지를 초월해 535고지에 이어 비호산 동쪽을 탈환했고, 8연대 역시 3대대를 주공, 2대대를 조공으로 하여 일대를 점령해 나갔고, 오후 5시 즈음엔 일대를 완전히 탈환하고 진지공사에 들어갔다.
한편 중공군들은 한미 연합군의 저항이 거세자 병력들을 일단 물렸다.
2.7. 11월 9일
국군 7사단은 미 1기병사단과 임무교대 후 개천에서 부대정비에 착수했다.
3. 결과
- 이 전투 속에서 연합군은 운산과 온정리 일대에서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 미8군 역시 이렇게 지켜낸 청천강 교두보를 통해 다음 작전을 계획하고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 이후 국군 7사단은 청천강 전투 2차전에서 국군 8사단과 함께 전멸 후 재편성에 들어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