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 전투
1. 개요
The Battle of Yongmunsan.
6.25 전쟁이 한창인 1951년, 국군 제6보병사단이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과 가평군 화야산 일대에서 중국 인민지원군 3개 사단(63군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의 공세를 격퇴하고 패잔병 무리를 춘천 지암리를 거쳐 화천 저수지(현 파로호)까지 쫓아가 섬멸한 대승을 뜻한다.
작게는 1951년 4월부터 1개월동안 계속된 공산군의 춘계공세를, 보다 크게는 6.25전쟁 초반 1년간의 치열했던 전면전을 마무리지은 전투로 평가된다. 6.25 전쟁은 이 전투 이후로 전면전에서 전선교착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게 된다.
2. 전투 이전 상황
1951년 5월, 동부전선의 국군을 격멸하기 위해 대공세를 펼친 중공군은 중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으로의 증원을 막기 위한 강력한 조공을 가했다.
이렇게 중부전선에서 펼쳐진 중공군의 공세를 직면하게 된 부대는 장도영 준장이 지휘하던 육군 6사단으로, 6.25 전쟁 개전 초기인 춘천-홍천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육군을 저지해 유명세를 떨쳤으나 딱 한 달 전인 중공군의 4월 공세 때는 화천군 사내면[1] 에서 벌어진 사창리 전투에서 방어진지를 버리고 무질서하게 도망친 부대였다. 중공군의 추격보다도 빨리 달아난 덕분에 패전은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빠른 재편성도 가능했지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영국군 제27여단을 주축으로 한 호주군, 캐나다군, 뉴질랜드군의 영연방군이 3일 동안 가평을 고수하고 이 틈을 타 유엔군이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중부전선 붕괴에까진 이르지 않았으나, 6사단은 얼마나 정신없이 패주했는지 105mm 곡사포를 하나도 안 갖고 내려와서 재편성시 18문을 몽땅 새로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굴욕은 널리널리 퍼져나가 당시 미 육군 장병들은 6사단 마크를 단 장병을 발견하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6사단은 용문산 일대에 배치돼 사창리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장도영 사단장은 제2연대 연대장과 정보주임, 작전주임을 모조리 교체하고 예하 3개 대대 역시 대대장을 모두 후송시키거나 군사재판에 회부시킨 뒤, 5월 1일 2연대의 군장검사를 실시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우리 청성부대는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데 너희가 사창리 전투에서 망쳐 놓았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 너희는 앞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이제 후퇴는 없다.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 말고 전초진지를 사수하라. 진지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최대한 지원하겠다"며 전투의지를 자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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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연대 장병들은 사창리 전투를 설욕하겠다는 결의로 뭉쳤으며, 특히 2대대는 전방으로 향하며 머리띠나 철모에 決死(결사)를 쓸 정도로 강한 전의를 보였다. 출처: 국방부 6.25전쟁 제 60주년 사업단 블로그
3. 전투경과
전투 직전 6사단 책임구역 내 최대 자연장애물은 북한강이었으나, 강을 따라 주저항선을 설정할 경우 북한강 북쪽의 적 고지에 지원부대의 움직임이 노출되는만큼 사단은 군단 방침에 따라 용문산 일대의 고지에 주저항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사단장 장도영 장군은 북한강을 활용하여 중공군 공세를 둔화시키기 위해 제2보병연대에게 '''사단의 주 방어선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 북한강변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1대대는 미사리, 2대대는 울럽산, 3대대는 (후방에 위치한) 353고지를 맡았다. 사실 밑의 요도에서도 보이듯 당시 군단 명령에 의거해 인접 사단도 1개 연대를 경계부대로 전진시켜놓았기에 이 자체는 특이한 일이라 하기 어려웠다. '''경계부대 철수를 불허하고 최후에 고수방어를 실시토록 한 점만 빼면.''' 장도영 장군은 적 공세가 시작되고 최초 진지에서 버티기 어려울 경우 427고지와 나산의 축차진지로 철수한 뒤, 마지막으로는 제2연대 전 부대가 427고지의 최후진지에서 전면방어를 수행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연대 하나를 위험천만하게 돌출시켰다는 점 때문에 미 육군 고문관도 주저항선 이남으로의 완전 철수를 권고했으나 하여간 장도영 장군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18일 저녁. 중공군의 공세가 개시되자 1대대는 미사리, 2대대는 울럽산에서 밤새 도강하는 중공군을 강타하고 19일 주간 포병과 미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353고지의 3대대 뒤로 후퇴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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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그런데 여기서 중공군으로서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전방에서 밀려나던 2연대 1, 2대대가 주저항선 뒤로 빠지지 않고 3대대 뒤의 427고지와 나산에 틀어박혀 우주방어를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미합중국 공군과 인근의 7개 포병대대(한국군 2개, 미 육군 5개)가 19일 하루에만 포탄 3만발에 달하는 화력을 무지막지하게 퍼부어대자, "'''이렇게까지 방어가 탄탄한 걸 보면 한국군의 주저항선이 틀림없다'''!"고 오판한 중공 63군 지휘부는 군단 예비대인 189사단까지 가세시킨 3개 사단의 총 공세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어진 중공군의 포위공격에 2연대는 연대본부가 공격받고 1대대장이 수류탄에 부상당하여 의식불명에 빠지는 등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1대대가 나산에서 남쪽으로 쫓기고 마치고개에서 간신히 병력을 수습하는 등 위기상황에 직면했지만, 사전에 선정된 축차 진지[2] 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싸는 전면방어(全面防禦)를 실시하고, 여기에 포병과 공군의 화력지원으로 어떻게든 중공군의 공세를 버텨냈다.
한편 사단 본부와 다른 연대들은 2연대의 외로운 혈전을 애타는 심정으로 주시하며 한시라도 빨리 공격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지만, 6사단 사령부는 물론 미 9군단도 섣불리 반격을 지시할 수 없었다. 이는 사단 책임구역 내 중공군 공세는 군단 전체를 선형으로 잇는 주저항선에 도달하지조차 못한 상황이었고, 6사단 본대가 주저항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차상급부대인 미 8군 차원에서 야전군 전체가 반격으로 전환한다는 지침이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사단 사령부의 어떤 장교는 안타까운 나머지 지휘소 천막 밖으로 나가 동쪽 하늘을 향해 어서 날이 밝으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 때 주공을 동부전선으로 지향해 5월 공세를 실시한 중공군은 현리 전투에서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대관령에서 한국군 1군단이, 벙커고지를 비롯한 한계 전투에서 미 2사단이 사투 끝에 견부진지를 굳건히 고수하자 돌파구를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고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광주에서 10시간만에 100km을 달려와 평창 속사리에 전개한 미 8군 예비대 미 3사단이 돌파구 첨단 봉쇄에 들어간 19일부터는 중공군 5월 공세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음이 분명해졌다. 이에 미 8군은 20일을 기해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에서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실지 회복을 위한 제한적 역습이 아니라 동부전선의 적 주력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야심찬 공격계획이었다. 적의 군단급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전력에 큰 손실을 입지 않은 6사단 역시 이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애타게 공격 명령을 기다리던 6사단 본부는 즉각 공격계획 수립에 착수, 20일 02:00 시점에 각 예하대에 약식 명령을 하달했다.
19일 야간부터 20일 새벽까지 네 차례나 이어진 중공군의 파상공세가 결국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 20일 오전 5시, 용문산 북방 고지군의 주저항선에서 대기중이던 6사단의 나머지 연대들인 제7, 제19 보병연대가 반격을 개시했다. 2개 연대의 뒤치기를 당한 중공군들은 이를 적의 대대적인 포위 내지는 반격이라고 '''오판'''했고, 직후 중공군 3개 사단은 이들에게 쫓겨 패주하기 시작했다.[3] 오후 7시에는 사흘간의 분전 끝에 427 고지의 최후진지에 집결한 2연대와 공격중이던 19연대가 연결에 성공하면서 용문산 방어전은 6사단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이제 패주하는 중공군 63군을 추격해 섬멸할 차례였다.
3.1. 그리고 이어진 추격, 지암리 포위전
승세를 탄 6사단은 22일까지 미 9군단의 1차 목표로 지정된 홍천강-청평댐선의 통제선 "조지아"를 확보한 후 23일 새벽 4시부터 군단 정면 압박부대로 전환, 달아나는 중공군 무리를 맹렬히 추격했다. 군단 포위망 우익의 미 7사단 17연대와 좌익의 미 24사단 21연대는 전차와 차량화 보병으로 구성된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6사단의 양 측방으로 고속 진출시켜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일대로 예상되는 적 63군 집결지 북방에 포위망을 형성했다. 지암리에 갇힌 중공군은 활로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간혹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차근차근 포위망을 압축하던 6사단과 미 9군단은 이러한 적 부대가 식별될 때마다 포격과 공습으로 강타하여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이 시점에서 중공군은 전투의지를 완전히 상실하여 무장도 없는 노무자에게 1개 분대가 투항하거나, 가설병 3명에게 소대가 무장을 해제당하고 투항하는 등 소대, 중대, 심지어 대대급이 줄지어 항복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물론 중공군 중에서도 아직 전투의지가 남아있던 이들은 있었고, 이들로 인해 포위전 과정에서 몇몇 사병들이 전사당했다. 29일까지 전개된 지암리 포위전에서 6사단은 한국전쟁 최대 수준의 포로획득 전과를 거두었다. 6사단에서만 살상전과를 제외하고서도 포로 2,600명을 획득했고, 그 가운데서도 지암리 전투 도중 화천 추격전에 전환 투입된 다른 두 연대와 달리 끝까지 포위전에 참가한 19연대가 1,700명의 중공군을 사로잡았다. 6사단의 포위망을 어떻게든 벗어난 중공군도 군단 서측 포위망 외곽의 미 24사단에게 대부분 포착되어 투항했으며, 그 수효도 2,000명에 달했다.
이처럼 용문산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뒤 지암리에서 거의 완전히 섬멸당한 중공군 제63군은 후방에서 부대를 재편성하고 전투력을 회복하는 데 수 개월 이상을 필요로 할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실제로 용문산 전투 이후 깨끗이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섯 달이 지난 51년 10월에서야 전선에 다시 출현했다. 육본 판단에 따르면 5월 30일까지 63군에서만 18,500명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 손실이 집계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3.2. 중공군 5월 공세를 끝장내다: 파로호 전투, 643고지 전투
6사단이 지암리를 향한 공격을 시작한 23일 오전부터 중동부전선의 미 10군단과 동부전선의 한국군 1군단도 반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의 한국군 3군단 전선 돌파로 형성된 돌출부 기저를 차단함으로써 홍천과 인제까지 뚫고 내려온 중공군 주공을 포위섬멸하려는 의도였다. 미 10군단은 미 9군단이 지암리에서 운용한 것과 유사한 전차와 차량 탑승 보병 위주의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화천과 양구로 돌진시켰고, 그 결과 양구 일대의 중공군 동쪽 퇴로가 차단되었다. 지암리에서 포위섬멸전이 한창이던 25일부터 26일 사이 동부전선 돌파구에 몰려 있던 5~6개 군단 규모의 중공군 주력도 시시각각 조여오는 유엔군의 포위망을 깨닫고 오음리-화천발전소(구만리 발전소) 통로를 향해 모여들었다. 보병 위주로 별도의 도하장비를 보유하지 못한 중공군에게는 수심이 깊고 동서 길이만 21km, 남북 폭이 1km에 이르는 파로호(당시엔 화천저수지로 불렸다)를 맨몸으로 도하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천댐을 경유하는 통로만이 중공군 2개 병단의 유일한 탈출로였다.
지암리 일대에서 포위망을 전개하고 있던 6사단이 임무 전환을 지시받은 것도 이 시점이었다. 포위망에 19연대와 2연대 2대대를 잔류시켜 적 63군 섬멸을 속행토록 한 후 사단 본대는 26일부터 춘천 북방으로 신속히 이동, 화천발전소와 그 남쪽 매봉(매봉산)을 다시 점령[4] 함으로써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이었다. 중부전선의 중공군 조공을 격파한 6사단이 이젠 동부전선의 중공군 주공을 섬멸할 전면 반격의 최선봉이 된 것이다.
사단 주공을 맡은 부대는 2연대였고, 2연대의 주공은 353고지에서 사투를 벌인 3대대였다. 27일 아침부터 험악한 산악지형을 타고 침투 공격을 시작한 2연대 3대대는 오후 늦게 중간 경유지점인 용화산을 탈취한 다음, 특별한 적정이 관측되지 않자 저녁 7시 매봉을 향해 야간행군을 개시했다. 여기에서 3대대의 행군로로는 일반적인 능선이나 평지 대신 8부 능선이 선택됐는데, 이는 평지는 너무 멀리 돌아가는 길이고 능선은 중공군에게 부대가 노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3대대가 험악한 산악지형 8부 능선을 따라 전진하기 위해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노새를 분대 단위로 지급, 운용하면서 전력을 기울인 보람이 있어 오후 11시경 매봉이 탈환됐다.
28일에는 주간에 퇴각하는 수천명 단위의 적 부대를 향해 공습을 유도하는 등 공격기회를 노리던 3대대는 29일 새벽 은밀하게 공격을 재개해 화천발전소를 점령하고 461번 도로를 차단, 화천 일대의 통로를 봉쇄함으로써 임무를 완수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이 황급히 버리고 간 트럭 수십대 분량의 막대한 보급물자가 노획됐다. 다만 원래 미 8군 목표이던 적 철수부대는 6사단이 공격을 개시한 27일 시점에서 이미 화천발전소 통로를 통해 빠져나간 뒤였다는 사실이 후일 밝혀졌다. 또한 이 와중에 패주와 철수 행렬을 엄호하기 위해 새로운 부대가 출몰했는데, 전후 공개된 중공측 기록에 따르면 20군 예하 58사단이 27일 화천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한편 패주중인 중공군들은 여전히 달아나기에 급급해 낙오병과 패잔병이 연이어 발생했으며, 이 와중에도 상당수가 미 공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거나 파로호를 무리하게 헤엄쳐 건너려다 익사했다. 그래서 전투가 종료된 지 며칠 후인 6월 2일부터 파로호에 익사한 중공군의 시채가 부패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시체가 너무 많아 별도의 인력을 동원해 수거하고 나서야 식수로 이용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한편 이 와중에 최후미로 대기중인 중공군 제20군(예하 58, 60,[5] 151사단)이 화천댐 서쪽 대이리의 643고지(수리봉[6] )를 기습 점령 후 알박기를 시작했고, 이에 6월 3일부터 5일까지 미 제17연대가 항공지원을 받으며 탈환 작전을 실시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이후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6일부터 포위 공격을 감행,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점령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중공군이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달성하고자 전력을 기울인 마지막 시도였던 5월 공세가 완전히 끝났다. 이후 중공군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포기하고 유엔군의 반격으로 형성된 전선을 조금씩 밀고 당길 뿐인 고지쟁탈전으로 일관했으며, 그나마 전선의 위치조차 중공군이 4월 공세를 시작하기 이전 시점과 거의 비슷했다. 4월, 5월 공세에서 중공군은 수많은 목숨을 잃고도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특히 홍콩에서 1968년 발간된 중공군인지(中共軍人誌)는 5월 공세 당시 중공군이 입은 손실을 사상 10만, 포로 1만으로 추정했으며, 2000년 중국 군사과학원이 발간한 공간전사 중 하나인 '항미원조전쟁사'는 5월 전역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의 손실을 8만 5000명 수준으로 기록했다. 홍콩 언론이 추정한 10만여명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육박하는 대규모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중국측도 인정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중공군 입장에선 20군을 내려보내 엄호를 해주며 643고지 알박기 등으로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패주중인 2개 병단, 10만~20만명은 통째로 화천 저수지 이남에서 포위섬멸당해 동부전선에 큰 공백이 났을 것이다.
1951년 6월 23일, 소련 유엔 대표 야코프 말리크는 "소련은 한국에서의 무력충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며 휴전 혹은 정전 회담을 제안했다. 이는 교전 당사자인 중국과 북한의 공식 휴전 회담 제의나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애초에 북한의 남침을 협의하고 계획하여 무기를 제공했으며, 무엇보다 중국과 북한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주의권 최고의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5월 공세를 분쇄하고 반격에 성공한 직후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이 미 합참에 "(이번) 유엔군의 승리가 적을 휴전 협상의 무대로 불러 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고한 그대로였다.
여담으로 화천 추격전은 용문산 전투로 5월 공세를 맞닥뜨린 6사단이 그 5월 공세의 피날레로 벌인 전투라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전투사 용문산 전투 편에서처럼 용문산 방어전, 지암리 포위전과 함께 묶어 서술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해서는 중공군 조공을 격퇴 및 섬멸한 뒤 그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화천 저수지에서 따로 패퇴중인 적 주공을 차단하려 시도한 별개의 전투다. 따라서 명칭도 화천 추격전, 화천발전소 전투, 파로호 전투 등으로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4. 결과
이 전투에서 6사단은 5월 19일부터 21일까지의 '''2연대만의''' 확인 전과만 '''사살 및 포로 4,959명'''[7] ,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사단 전체의 전과로는 육본 추정 적 병력 손실 판단 15,930명[8] 이라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과를 몇 만명까지 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용문산 방어전에서 바로 이어지는 지암리 포위전과 화천발전소 전투까지 모두 포함하는 광의의 용문산 전투를 뜻하는 것일듯. 엄밀히 말해서 제63군 잔여병력을 섬멸한 지암리 포위전과 중공군 5월 공세 전체를 끝장낸 파로호 전투는 각각 전자는 6사단을 포함한 미 제9군단 전체, 그리고 후자는 미 8군 전체의 반격작전이므로 6사단만의 전과로 잡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기간 전체를 포함할 경우, 제6사단 전투상보에 기록된 사단 전과는 5월 19일-30일간 사살 21,550명, 포로 2,617명에 달한다. 반면 6사단의 피해는 전사 및 실종 204명, 부상 494명으로 매우 경미했다.
제2연대의 끈질긴 우주방어, 미 공군과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지원 등의 요소를 승리의 요소로 꼽을 수 있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단장 장도영 장군의 상식 밖의 전술이었다. 보통 경계부대는 관측, 화력 유도와 원거리 사격으로 적을 교란하고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주저항선으로 철수함으로써 적 공격을 지연, 주력 조기전개를 강요하고 아군 주방어지대를 기만하는 역할을 수행한 뒤 예비대로 전환한다. 그러나 6사단 경계부대인 제2연대는 축차 후퇴하다가 마지막에는 강력한 고수방어를 실시함으로써 경계부대로써는 가급적 회피되는 근접전투를 사단 주저항선 전방에서 수행했고, '''상식적인 판단'''에 따라 이처럼 완강한 방어를 벌이는 2연대 진지가 당연히 주저항선일 것으로 오인한 중공군 제63군은 여기에서 본대를 성급히 전개시켰음은 물론 군단 예비대까지 조기 투입하면서 결정적 전투를 벌였다가 돌이킬 수 없는 대패를 맛보았다.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비대를 갖지 못한 지휘관은 대사건의 방관자에 불과하다"는 어록처럼 예비대의 부재가 중국군의 패착이었다는 인식이 있으나 이는 어폐가 있다. 중공군 제63군은 한방 공격을 위해 예비 사단까지 공세에 투입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국군 6사단은 초반에 지연전을 수행하며 뒤로 물러났어야 할 2연대가 온갖 화력을 지원받으며 주공을 맡았고, 주 저항선에 있었던 7,19연대가 도리어 이 역할을 맡았다. 상기했듯 방어작전시 경계부대, 일반전초는 가급적 손실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펼치며 주저항선 밑으로 철수해 재정비 및 예비대로 전환하는데, 이 전초부대인 2연대가 주저항선 앞에서 고수방어를 수행하는 바람에 이변이 일어난 것. 이 점은 1983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전투사 용문산 전투 편에서 야전교범까지 인용해가면서 특이사항으로 지적한 사안이다. 괜히 미 육군 고문관이 왜 2연대를 철수 안 시키냐고 채근한 게 아니다. 하지만 장도영 장군의 이런 상식 밖의 전술이 제2연대의 놀라운 분전, 중공군의 중대한 오판, 그리고 사단을 뒷받침하는 각종 제반 여건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전사에 남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전장의 불확실성에 대처할 예비대에 돌아갈 자원을 아측이 유리한 전초지대에 모조리 쏟아부음으로써 불확실성 자체를 감소시키고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제2연대의 시의적절한 축차진지 변경과 용맹한 고수방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제2연대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 군단급 부대에 맞서 북한강변의 최초진지부터 근접전투를 벌이면서도 제때 몸을 빼내 축차진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는 대대별로 사주방어를 실시하여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수 차례나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해냄으로써 중공 제63군의 주저항선 오인과 예비대 조기투입이라는 치명적인 패착을 유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거의 같은 시기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그대로 무너져 궤주한 한국군 제3군단과 비교해보면, 2연대는 사창리 전투의 오명을 씻은 것은 물론 현리 전투로 떨어진 한국군의 체면을 지켜냈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미 제9군단과 공군의 엄청난 화력지원 역시 승리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6사단 제27포병대대 외에도 인접사단 포병과 군단포병이 제2연대 방어구역 전면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쉼없는 포격지원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2연대라도 9:1 이상의 수적 열세를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중공군 예비대 제189사단은 19일 야간에서 20일 새벽 사이 초월공격을 실시하던 도중 군단포병의 맹렬한 포병사격에 휘말려 주저항선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주방어지대 전방에서 돈좌되었다. 미 공군의 근접지원은 야간에는 운용에 제한이 있었으나 주간에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중공군이 감히 공격이나 기동을 제대로 감행하지조차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 대승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에게도 전해져 이를 기념해 화천 저수지를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뜨린 곳)로 개명했고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정도니 이 전투의 의의를 짐작할 만하다. 몇몇 관련 기록 가운데는 아예 이 전투를 '''현대판 살수대첩'''이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
한편 김일성과 중공군은 호수 전체가 남한에게 넘어간 채 휴전할 수 없다고 휴전을 앞둔 시점에서 백암산 전투, 425고지-406고지 전투 등을 벌였지만 탈취에 실패해 호수 전체가 남한령이 되었다. 게다가 최근 중국 정부가 호수 이름을 개명하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자세한 건 밑 이야기거리에서 후술.
5. 여담
- 경계부대인 2연대가 후퇴하는 대신 사단 주저항선 앞쪽에서 사주방어를 실시하도록 한 결정을 장도영 장군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미리 의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사학자들의 의견이 다소 갈린다. 그러나 최전선보다 약간 후방인 427고지에 강화진지를 미리 구축해 둔 점, 부사단장 임부택 대령이 전투 직전 돌아다니면서 "대대 단위로 전면방어를 실시하라"고 교육한 점, 포위기동이 특기인 중공군을 상대로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후퇴 후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는 점, 그리고 미 육군 고문관의 2연대 완전철수 권고를 무시하고 04시까지 427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점 등을 미루어보면 처음부터 선 방어, 후 반격 계획을 짜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은 덕이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군단급 총공세를 1개 연대로 방어해내고, 직후 반격에 성공하여 1개 사단으로 중공 63군을 와해시킨 장도영 장군은 전쟁사상 희대의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해낸 장군이 되었다.
- 2연대의 방어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여 주는 수많은 무용담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최고 격전지였던 353고지에서 19일 밤 10시 중공군 3차 공격 때 있었던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중공군 주공을 받은 3대대 10중대는 예하 소대장 둘이 전사 혹은 중상을 입고 방어선이 흔들리자 중대장이 당황하여 일부 병력과 엉겁결에 대대관측소로 후퇴하면서 중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대대장한테 까이고 제정신을 차린 중대장이 다시 진지로 복귀하자 정훈병 서기종 일병이 호 밖으로 뛰쳐나와 카빈을 연사하면서 "중대장님이 건재하시다. 다시 싸우자. 이대로 물러나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라고 독려했다. 중대원들은 훤히 노출된 호 밖에 우뚝 서서 카빈을 쏘아대는 서기종 일병의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용기에 사기가 치솟아 육박전을 무릅쓰고 진지를 사수해냈다. 서기종 일병은 다시 이어진 중공군 공세에서 자동화기사수가 쓰러지자 자동화기를 이어받아 끝까지 사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후송됐고, 한국군으로서 드물게 + 사병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미 은성 무공 훈장을 받는다. 참고로 정훈병은 편제보직이 아니라 3대대장 김두일 대위가 지휘관의 의지 전달을 위해 각 중대별로 배치한 임시 보직이었다.
- 당시 쫓겨가던 중공군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노무자에게 항복하거나 마을 노인에게까지 잡혀올 정도였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등에 의하면 전투 중에는 이것이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강인하고 끈질기게 싸우는 최정예 전투원이면서도, 일단 총을 놓고 나면 누구보다도 온순해지는 것이 중공군이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이런 에피소드도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 중공군에 비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국군 측에서도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의 피해를 입었다. 대표적인 전사자가 KBS 이정민 아나운서의 친할아버지. 이 쪽은 상술한 지암리 포위전 도중 저항하던 중공군에 의해 전사했다.
- 인근 주민들은 시체들로 인해[9] 식수원이 오염되자 외부에서 급수를 해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뒤로도 파로호의 물고기를 사람 시체를 뜯어먹고 자란 물고기라는 이유로 종전 후 10년 가까이 먹지 않았다고 한다.
- 이 전투 후 국군 6사단은 직전의 참패로 부대 외부 사람들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놀리는 일은 없어졌고, 비웃음을 받아도 흑역사를 가지고 놀려먹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야 주방어선보다 위로 올라가더니 3개 사단을 떡실신시키고 추격해 갈아버린 영웅들인지라(...).
- 중국 입장에선 치욕적인 대패의 역사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항미원조전쟁(6.25 전쟁) 대승 사례로 상감령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홍보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역사책에도 싣지 않을 정도로 없었던 일로 치지만 그래도 인지는 하는지 패주 무리가 섬멸당한 걸 기념해 개명된 파로호 명칭을 최근 개명하라고 요구해 파문이 일고 있다.#. 일단 '자국 관광객들이 불쾌하게 생각한다' 는 핑계를 대고는 있지만 진짜 목적은 치욕적인 패전의 기록을 지우려고 하는 걸로 언론과 네티즌들이 추측중이다.패전 흔적 지우려…中, '파로호' 개명 요청 이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가 강원도와 화천군에 파로호 이름을 대붕호(大鵬湖)로 바꾸라는 지시를 했다는 뉴스가 돌기도 했으나[10] 강원도와 화천군 관계자는 정부에게 그런 지시를 전혀 받은 적도, (정부도 아닌 일개 단체의 요구만으로) 지명을 바꿀 이유도 없다고 거듭 부인과 반대 의사를 천명했다.#1#2[11]
- 이곳에 수몰된 중공군 유해 발굴과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 나무위키와 엠팍를 비롯해 여러 커뮤니티에서 우마오당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주한미군 철수 및 주한중공군 주둔같은 반달리즘과 여론조작을 시행한 바 있는데, 이에 혹자가 파로호에 있는(수장된) 중공군만으로도 주한중공군은 충분하다고 받아친 바 있다.
- 한개 연대로 9배 규모인 3개 사단을 박살내고, 사창리 전투에서 패전의 굴욕을 당한것을 호되게 설욕하는 등 극적인 요소가 많은데다 2010년대 후반 들어 반중감정이 격화됨에 따라 국내 밀덕들 중에는 매체에서 이 전투를 다뤄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다만 백마고지 전투나 인천상륙작전 등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가 떨어지고 문화예술계에서의 차이나 머니 비중도 높아지는 편이라 제작될 가능성이 높지 않아보인다.
6. 참고 자료
전쟁기념관-전투자료 동영상, <용문산 전투>: 단순한 홍보 영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자료화면과 함께 전투의 경과를 깔끔하게 브리핑하고 있는 영상이다.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보도록 하자.
7. 같이 보기
[1] 현 제27보병사단 주둔지.[2] 특히 3대대의 353고지가 용문산 전투 전역을 통틀어 가장 격렬한 전장이었다고 한다. 좌우측방으로 사단 책임구역 내 주요 기동로 두 개를 모두 감제하는 요지 중의 요지였기 때문.[3] 사실 피아 규모에 상관없이 한 번 전의를 상실하거나 지휘체계가 와해된 군대는 사단이 3개든, 30개든 인간 세트(…)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수대전, 그리고 사창리 전투와 현리 전투가 있다. 최근 IS 자폭대원 800여 명에 도망친 이라크군 15000명의 사례가 대표적으로 떠올랐다. 물론 그 이후에는 오히려 이라크군 소속 M1 에이브람스 1대에 100여 명이 갈려나가는 등, 역전되기는 하지만...[4] 사실 이곳은 이미 4월에 점령한 곳인데, 정확히는 정탐을 나간 KLO가 포대와 전차 위치를 알려 이를 폭격으로 제거해도 다음날이면 또 모습을 드러내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중공군으로 위장한 인민군 출신 오죽송이 살펴보니 전나무를 깎아 그럴듯하게 칠한 가짜여서 4월 18일 7연대가 돌격해 점령했다가 사창리 전투로 화천 이남으로 패주하는 과정에서 잃었었다.[5] 사창리 전투의 굴욕을 안겨준 그 사단이다.[6] 신읍리의 수리봉과는 이름만 같다.[7] 출처: 제6사단 전투상보[8] 출처: 육본 정기 정보보고 제143호(1951. 5. 22.)[9] 여기엔 호숫가에서 사살되거나 익사한 것 외에 악취나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수장시킨 것도 있다.[10] #[11] 참고로 앞의 기사는 5월 24일 기사이며 강원도 관계자가 이를 부인한것은 5월 29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