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전투

 

1. 개요
3.1.1. 제2차 침공
3.3.1. 제3차 침공
3.4. 제1차 홍건적의 침입
4.1.1. 제1차 평양성 전투
4.1.2. 제2차 평양성 전투
4.1.3. 제3차 평양성 전투
4.1.4. 제4차 평양성 전투
4.1.5. 결과
4.1.6. 명나라군의 학살 소문
4.1.7.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6.1.1. 전투 전 상황
6.1.2. 전투 경과 (10.18 ~ 10.20)
6.1.3.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


평양은 역사적으로 한반도 북부의 요충지로써, 고조선, 고구려의 수도이자, 고려의 북진정책의 중심지였다. 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때마다 평양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많이 벌어졌다

2. 삼국시대



2.1. 고구려-백제 전쟁



2.1.1. 371년


근초고왕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했고 고국원왕이 전사한 전투로 유명하다. 평양성 전투(371년) 항목 참조.

2.1.2. 377년


근구수왕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했고 소수림왕이 방어에 나선 전투. 다만 함락시키지는 못한 듯 보인다.

3년(서기 377)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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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제24권 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

7년(서기 377) 겨울 10월, 눈이 내리지는 않았으나 우레가 쳤다. 민간에 전염병이 돌던 무렵에 백제가 병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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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소수림왕}}}

2.2. 고구려-수 전쟁


내호아(來護兒)가 평양성밖 60리까지 도달했는데 이때 태자였던 고건무의 계략으로 평양성으로 유인한 후 물리쳤다.[1]

2.3. 고구려-당 전쟁



2.3.1. 661년 ~ 662년


  • 날짜 : 661년 8월 ~ 662년 2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해 치열하게 싸웠으나 오히려 고구려군에게 진지를 빼앗기는 등 불리한 정황이 이어졌고, 거기다 식량마저 끊겨 전멸 위기에 처한다. 이때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눈길을 뚫고 가까스로 도달해 식량을 보급해주었고, 당군은 전멸위기에서 벗어나 무사히 퇴각한다. 평양성 전투(661년) 항목 참조.

661년 가을 8월, 소정방이 패강(浿江)에서 우리의 군사를 물리쳐서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662년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제22권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하}}}

고려인이 말하기를 '12월에 고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가 얼어붙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북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운거와 충팽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고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 (그러나)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당의 진지를) 빼앗을 수가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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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2.3.2. 668년


  • 날짜 : 668년 9월 21일(약 1달여간)
나당연합군은 9월 21일에 평양성 포위를 시도했고 1달여간의 공방전 끝에 연남건의 심복 신성이 당나라의 이세적과 내통하고 성문을 열어주며 항복하게 된다. 고구려 역사 최후의 전투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평양성 전투(668년) 항목 참조.
2011년 영화 평양성이 이 전투에 대해 다루고 있다.

2.4. 나당전쟁


  • 675년 2월
문무왕의 지시로 평양성을 공격해 탈환한다.

3. 고려시대



3.1. 여요전쟁



3.1.1. 제2차 침공


요성종이 이끄는 20만의 병력이 강조가 이끄는 30만 고려군을 무너트리고, 이후 서경에 도달했다. 이때 여러 사건이 이어지고 심지어 탁사정이 주력군을 데리고 튀는 바람에 함락 위기를 맞이할뻔 했으나 강민첨과 조원의 맹활약에 결국 서경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3.2. 묘청의 난


묘청이 이끄는 반란군과 김부식이 이끌던 고려 중앙군간의 대결. 주모자인 묘청조광이라는 자에게 목이 베어졌고 조광은 묘청의 목을 들고 항복을 청했으나 김부식은 거절했고 결국 지리한 공방전이 이어져 장장 2년간 대치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윤언이의 계략을 통해 점령에 성공하며 전투가 종료된다.

3.3. 여몽전쟁



3.3.1. 제3차 침공


홍복원의 맹활약으로 서경은 변변한 전투 없이 문을 열었고 몽골군의 아지트(...)로 활용되었다.

3.4. 제1차 홍건적의 침입


1359년 12월, 홍건적이 침공하자, 공민왕은 이암을 서북면 도원수로 임명하고 서경을 방어하라 했으나, 이암은 방어가 힘들다고 판단해 후퇴하게 된다. 이때 이암은 청야전술을 펼치자는 제안을 거부하고 내려갔는데 그의 계획대로 홍건적은 물자를 챙기기 위해 서경에 무혈 입성한후 약탈에만 집중하며 더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1360년 1월, 고려는 2만의 병력을 서경 탈환전에 투입해 홍건적과의 치열한 교전을 펼쳤고 수천의 홍건적을 사살하며 서경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4. 조선시대



4.1. 임진왜란



[image]
임진왜란 당시의 평양성 전투(平壤戰鬪)는 1592년~1593년에 걸쳐 평양을 둘러싸고 조선일본이 벌인 전투로 총 4번의 전투를 벌였으며, 3차례 전투에서 조선군이 모두 패했으나 4차 전투에서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을 탈환했다.[2]

4.1.1. 제1차 평양성 전투


'''제1차 평양성 전투'''
第一次平壤城戰鬪

'''시기'''
1592년 7월 21일 ~ 22일
(음력 6월 13일 ~ 14일)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성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광해군'''
김명원
윤두수
이원익
고언백
김침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오토모 요시무네
고니시 요시치로
고니시 안토니오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비야 아고스트
마츠우라 사다무
히다카 코노무
'''병력'''
3,000 ~ 4,000여명
10,000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일본군의 승리, 평양성 함락
한양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7월 9일(음력 6월 1일) 개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선조는 원래 평양을 사수하기로 하였으나, 고니시의 진격 소식을 전해듣고 다시 평양에서 의주로 몽진하였고, 평양은 스스로 수비를 자원한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지키게 하였다. 다만 김명원의 경우는 그 간의 패배로 인하여 군중에서 인망이 실추되어 실제 전투 지휘는 윤두수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도 지휘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는지 얼마 없는 병력조차도 제대로 배치를 못하는 실책을 범했다.[3]
7월 20일(음력 6월 12일) 광해군은 평양성의 남자들을 동원해 성을 정비한 후, 자신은 똑같이 행동하겠다고 백성들에게 선전했다. 이때, 평양성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올라갔다고 한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 대동강에 도달한 고니시의 부대는 양각도를 건너 대동관을 조총으로 사격했다. 이에 조선군이 맞서긴 했으나, 오랜 평화상태동안 훈련을 제대로 안했는지, 비효율적인 전투를 이어갔다.[4] 그러나 윤두수와 이원익, 김침 등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동대원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해 수백 명을 죽이고 말 수십 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른 일본군들이 석회탄에 진을 쳐 여기를 지키던 조선군이 크게 패해 도망쳤다. 보고를 들은 윤두수는 허숙과 김억추를 시켜 대동강을 지키게 하고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새벽에 고언백을 시켜 400명의 병정을 주어 부벽루 밑 능라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하게 했으나 오히려 패배했고, 강을 건널 당시에는 배를 탔으나, 퇴각하면서는 배를 찾을 여유가 없어 군사들이 왕성탄으로 걸어서 퇴각했다.
이것을 보고 대동강의 수심이 얕은 것을 본 일본군이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윤두수와 김명원은 군사들을 내보낸 뒤 무기를 모두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빠져나왔다. 결국 평양성은 전쟁 개전 60일 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당했다. 광해군은 당시 평양성이 함락된 후, 바로 빠져나와 안주로 후퇴했다.

4.1.2. 제2차 평양성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
第二次平壤城戰鬪

'''시기'''
1592년 8월 23일 (음력 7월 17일)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성
'''교전국'''
조선 [image]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김명원'''
황원
'''조승훈'''
사유†
장국충†
마세륭†
대조변†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요시치로
고니시 안토니오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비야 아고스트
마츠우라 사다무
히다카 코노무
'''병력'''
조선 3,000명
명 3,000명
총 병력 6,000명
10,000명
'''피해'''
대부분 전멸
불명
'''결과'''
일본군의 승리, 조명 연합군의 최초 패배
의주로 몽진한 선조는 명나라에 이덕형을 사신으로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고, 명 황제 만력제는 병부 상서 석성의 의견에 따라 원군을 파견하도록 하나, 당시 이여송 등의 요동 주력군이 보하이의 난을 진압 중이었기 때문에, 우선 요동 부총병 조승훈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1차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조승훈의 명군은 1592년 7월 초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3,000명 군사와 합류해 평양 북방 순안군에 집결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의 보급을 지원하였고 조승훈은 곧 평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평양성에는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1만 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가 함께 입성하였다가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황해도 공략을 위해 성을 빠져나왔는데 이를 본 조선 측의 척후장 순안 군수 황원이 적의 주력 부대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오인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조명 연합군 지휘부는 일본군 측이 전의를 상실했다고 여겨 평양성 탈환의 기회로 여겼다. 결국 8월 23일(음력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적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고 이것이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어 길 양편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조총 사격으로 크게 패해 사유가 일본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부장 천총과 장국충 등도 전사하였다.
결국 부상까지 입은 조승훈은 수십 기의 패잔병만 이끌고 8월 24일(음력 7월 18일) 요동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제2차 평양성 전투는 조명 연합군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황원의 오인 보고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는 한동안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군을 함정에 빠트렸다는 소문이 돌아서 조선 조정은 사신을 파견해 이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

4.1.3. 제3차 평양성 전투


'''제3차 평양성 전투'''
第三次平壤城戰鬪

'''시기'''
1592년 9월 6일 (음력 8월 1일)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성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이일'''
김응서
이원익
임중량
윤봉†
차은진
차은로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요시치로
고니시 안토니오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비야 아고스트
마츠우라 사다무
히다카 코노무
'''병력'''
이일 5,000명
이원익 5,000명
김응서 10,000명
총 병력 20,000명
18,700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일본군의 승리, 평양성 탈환 실패
제2차 평양성 전투 이후 명군은 요동으로 철수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당시 편성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병력을 모아 조선군 단독으로 평양성 탈환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는 그동안 패배하기는 했지만 2차례의 전투를 통해 일본군의 병력 역시 소모되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총 병력 2만을 편성하여,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며, 9월 6일(음력 8월 1일)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다.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고 일본군은 퇴각한다.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이때 성안에서 일본군 수천 명이 나와 공격하면서 교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지휘가 마비된데다 병사들도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터라 일본군의 공격에 흩어지고 말아 일본군의 맹공격에 밀렸으며 나중에는 남은 병력도 부산원 서쪽으로 후퇴한다. 결국 임진왜란 전투 중 최초로 같은 장소에서 3번째로 전투에서 패한 기록을 남겼다.
이 와중에 김응서 군영은 적정에 대한 연락을 받지 못하여, 이일 군과 이원익 군이 퇴각하는 와중에 단독으로 적진에 돌격하였으나 많은 이들이 전사하고 일본군에게 대패하였다.

4.1.4. 제4차 평양성 전투


'''제4차 평양성 전투'''
第四次平壤城戰鬪

'''시기'''
1593년 2월 6일 ~ 9일
(음력 1월 6일 ~ 9일)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성
'''교전국'''
조선 [image]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류성룡'''
김명원
김응서
정희현
이시언
'''사명대사
서산대사
이여송'''
이여백
양원
장세작
오유충
이녕
조승훈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요시치로†
고니시 안토니오†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비야 아고스트†
마츠우라 사다무†
히다카 코노무†
'''병력'''
조선 8,000명
승병 2,200명
명 43,000명
총 병력 53,200명
약 16,000명
'''피해'''
불명[5]
불명[6]
'''결과'''
'''조명 연합군의 승리''', 평양성 탈환
4차례의 평양 전투 중 '''가장 규모가 큰 대전투'''이다.
조승훈의 1차 원군이 패전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대군을 파견할 필요성을 느낀다. 마침 보하이의 난이 진압되었기에 명나라는 북방 주력군이었던 요동군을 파병하기로 하고 경략 송응창을 최고 사령관, 제독 이여송을 현장 총지휘관으로 삼아 43,000명의 군사를 주어 2차 원병으로 조선에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그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해 유격 장군 심유경을 보내 휴전 협상으로 시간을 끌게 하였다.
1593년 1월 15일(1592년 음력 12월 13일) 명나라의 첫 선봉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1월 27일(음력 12월 25일) 이여송의 주력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선조가 있던 의주 용만관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에서도 명군의 보급을 담당하고 도원수 김명원과 평안우방어사 김응서, 좌방어사 정희현 등 총 8,000명의 군사를 주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승병 2,2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한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토모는 이를 거절하고 한양 방면으로 철수하여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7]
결국 독자 방어에 나서게 된 고니시 군은 성 방어를 위한 일본식 시설을 만들어 평양성을 최대한 요새화하고, 모란봉에는 2,000명의 조총 부대를 배치시켰다.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이일과 김응서는 함구문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의 부총병 오유충과 조선의 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해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다가 다시 반격하여 승리했다. 하지만 조선군 8,000명이 남쪽 함구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2월 7일(음력 1월 7일) 새벽 일본군 3,000명이 명나라의 좌군 부총병 양호, 중군 부총병 이여백, 우군 부총병 장세작 등의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명군이 이를 물리쳤고, 조명 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에 전진 배치하고 정희현과 김응서의 기병대에게 일본군을 유인하게 했으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2일 동안 탐색전을 하여 일본군을 관찰하다가 2월 8일(음력 1월 8일) 대공세를 가했다. 명군이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수많은 대포로 평양성을 집중사격하고, 외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가 이끄는 8,000명이, 칠성문은 장세작이, 보통문은 양호가, 모란봉은 오유충과 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에 나섰다. 양측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유충은 적의 탄환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고 이여송도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음에도 태연히 다른 말로 갈아타 군사를 지휘해 사기를 올렸다.
조명 연합군이 외성과 읍성을 함락시키고 중성으로 돌입해 일본군을 만수대와 을밀대로 압박했고 일본군은 풍월정에 토굴을 쌓아 올려 최후의 공격을 가하며 저항했다. 격렬한 전투로 양측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이여송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다.[8]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맺어 추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뒤 이날 밤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명군의 참장 이녕이 군사 3,000을 이끌고 추격에 나서 적군 358명을 사살했고 조선군도 추격에 나서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60명, 황주 판관 정화가 120명 등 총 538명을 사살했다.

4.1.5. 결과


이리하여 평양성을 잃은지 7개월만인 2월 9일(음력 1월 9일)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선조는 평양성이 탈환되자 음력 1월 18일 의주를 떠나 남하를 시작했다. 평양성에서 후퇴하던 일본군은 봉산 - 용천(서흥군) - 배천을 거쳐 한양으로 철수했으나 그 과정에서 18,700명에 달하는 병력이 6,600명으로 감소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전투를 통하여 동생인 고니시 요시치로와, 사촌인 고니시 안토니오, 일문인 히비야 아고스트 등을 잃었다.

4.1.6. 명나라군의 학살 소문


한편 전투 이후 명군이 1만명에 가까운 평양 백성들을 학살해 수급을 베고 남은 시신은 대동강에 버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전투에서 남쪽의 군사들이 날래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이들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의 사상자도 많았으며 굶주려 부르짖으며 피를 흘리는 자가 길에 잇따랐다. 뒤에 산동 도어사(山東都御史) 주유한(周維韓)과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 양정란(楊廷蘭) 등이 올린 주본(奏本)에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 중국 조정에서는 이를 인하여 포정(布政) 한취선(韓就善)과 순안(巡按) 주유한 (周雀翰) 등으로 하여금 직접 평양에 가서 진위를 조사하게 하고, 또 본국도 사실에 의거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도 변명을 하였다(선조 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1일 병인 13번째 기사)

하지만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3개월 뒤의 기록 때문이다.

처음 평양부와 개성부가 수복되고 나서 '''이 제독은 대대로 북쪽 지방에 살았으므로 군대를 쓰고 공을 논할 때에 모두 북군(北軍)을 우선하고 남군(南軍)을 뒤로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남군과 북군 사이에 불화가 생기니, 군중에 뜬소문이 퍼지기를''' ‘제독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에 조선 백성들을 많이 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목을 베어 적의 수급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사실이 중국 조정에 알려지자 중국에서는 포정(布政) 한취선(韓取善)을 파견하여 군사(軍事)를 조사하게 하였다.(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21일 을사 2번째기사 )

그러니까 이여송이 북쪽 지방 출신이라 북군의 공을 우선시하고 남군을 홀대해서, 불만을 품은 남군 병사들 사이에 이여송을 비난하느라 조선 백성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소문이 정말인지 알아보기 위해 명나라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확인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자문 답변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가 오랫동안 왜적의 침략을 당해 3도(三都)가 함락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황제께서 군사를 일으켜 구원해 주었습니다. 이 제독은 천자의 명을 공경히 받들어 대군을 통솔하고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흉악한 왜적을 소탕하였습니다. 그는 적을 참살하는 소란한 가운데서도 반드시 먼저 우리 나라의 백성들을 가려서 내보내어 살게 해주었는데, 그 수효가 이미 1천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진영에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을 경계시켰으니 그의 신중함이 이렇듯 극진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신민들이 고맙게 여겨 마지 않는 것은 역시 목숨을 구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문에서 말한 ‘불에 태우고 물에 빠뜨려 잘못 죽였다.’는 말은 '''근거 없는 헛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매우 사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적을 사로잡고 수급을 벤 것은 분명하게 조사해 올린 것'''이니, 실제의 수효보다 과장해서 보고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당직(當職)이 변변치 못하나 어찌 차마 스스로 속여 배반하는 죄에 빠질 리가 있겠습니까.(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21일 을사 3번째기사 )

한마디로 조선 조정에서 이 소문을 직접 부정했다. 당연히 이여송도 처벌받지 않았다.
4차 평양성 전투는 명나라 단독으로 치룬 전투가 아니라 조선군도 만명 넘게 참전한 전투다. 정말로 명군이 조선 백성을 만 단위나 학살했다면 조선군 병사들이 보고만 있을리는 없으니 충돌이 있는게 당연하고, 이런 중요한 보고가 조정에 올라오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당시 평안도 체찰사였던 류성룡이 평양성 탈환에 대해 올린 장문의 보고서[9]에도 오히려 구출한 남녀 포로가 1천 15명이라는 기록만 있지, 명군의 학살 같은 기록은 없다.
설사, 조선 조정은 명나라 눈치 보느라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보는 눈이 저렇게나 많았으니 학살이 있었다면 세간에 안알려졌을리가 없는데, 난중잡록이나 고대일록같은 의병장들의 사료에도 명나라군의 학살 기록은 없다. 특히 고대일록에는 4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있고, 명나라군의 약탈과 횡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 백성들을 학살했다는 기록은 없을 정도.[10]

4.1.7.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4.1.7.1.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1, 2, 4차 평양성 전투를 다룬다. 1차 평양성 전투는 이 드라마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류성룡이 윤두수 이원익과 함께 대동강변에 병력을 배치해서 방어에 나선다. 부족한 병력을 메꾸기 위해서 허수아비에 군복을 입혀서 강변에 배치한다. 윤두수와의 대화를 통해서 왕성탄이 노출될 것을 염려하는 와중에 왕성탄이 뚫리면서 조선군이 대패하며 전투종료. 2차 평양성 전투는 조승훈이 일본군을 무시해 마구잡이로 평양성으로 진격하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매복에 걸려서 대패하며 전투종료. 4차 평양성 전투는 이여송의 대군에 서산대사와 이일의 조선군이 합류해서 왜군을 몰아낸다. 풍월정에서의 공방전도 다룬다.

4.1.7.2.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2차, 3차 평양성 전투를 다루었다. 고니시는 병력을 철수하는 척하여 백성들과 첩자들을 속인 후 일부 백성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아군이 철수한 것으로 증언하라고 요구한다. 이후 조승훈이 이끄는 명나라 군과 김명원이 이끄는 조선군이 성문 앞에서 대기하다 돌아온 조선군 척후병들로부터 성이 비어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김명원은 척후를 다시보내 성안 구석구석을 살펴야 한다는 의견을 냈으나 조승훈은 천병을 누구 막겠냐면서 김명원의 요구를 누르고 성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아무 일도 없자 조승훈은 조선군이 허약하다며 조롱한다. 그러나 그 순간 매복하던 일본군들이 기습을 하면서 조명 연합군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조승훈은 간신히 명나라로 도망친다. 이후 김명원이 다시 조선군을 이끌고 단독으로 공격을 한다. 비록 성문을 열기는 했지만 결국 패전을 하고 물러난다.
작중에서 등장하는 평양성 전투는 2차의 비중이 꽤 높으며 3차는 간단하게 새로 찍었고 4차는 내레이션으로 처리하였다.

4.1.7.3. 징비록

징비록에서는 1차와 2차 그리고 4차 평양성 전투를 다루었다.
1차 평양성 전투는 20화 후반과 21화 초반에 짧게 다루었다. 선조가 평양을 떠난 이후 방어를 맡아 윤두수와 김명원과 이원익 그리고 임세록을 영접하기 위해 남은 류성룡이 평양성에 남아있는다. 당시 류성룡은 임세록을 통해 요동 주둔 명나라 군대를 몇명만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들을 평양성에 배치시켜 일본군이 명나라와 전쟁을 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줄 생각이었다. 류성룡은 윤두수에게 양해를 구해 임세록을 만나러 평양성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조선군은 밤을 이용해 고니시 군을 기습한다. 당시 감시원으로부터 반협박과 압력을 받던 고니시는 즉시 반격을 명하고 기습에 성공한 조선군은 후퇴를 한다. 그런데 고니시 군은 이들을 뒤쫓았고 결국 조선군은 후퇴하면서 왕성탄을 통해 도하하는 길을 알려주고 만다. 이를 본 고니시는 조선군이 길을 안내해 줬다면서 기뻐한다. 결국 고니시 군은 왕성탄을 통해 도하를 하였고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져버려 일본군은 무혈입성하여 평양성에 보관중인 군량 10만석도 확보한다.
대체로 고니시 군에 대한 조선군의 기습 장면을 짧게 다루었으며 내레이션과 함께 고니시 군의 무혈 입성과 군량 확보 장면을 보여주었다.
2차 평양성 전투는 24화에서 다루었다. 한달 동안 조승훈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않자 이원익이 찾아가 공격을 요구하고 이에 조승훈은 차를 즐기면서 도망갈 시간을 주었던 것 뿐이며 이제 적을 공격할 때가 된 것 같다면서 군사들을 이끌고 간다. 한편, 평양성에 주둔하던 고니시 군은 풍토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어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이 매우 적었다. 이에 고니시는 조승훈의 공명심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조승훈을 성 안으로 유인시키려 한다. 류성룡은 신명철과 이천리를 데리고 급히 조승훈과 이원익에게 와서는 매복 가능성을 말하였고 이에 조승훈은 척후병들을 보내 백성들을 데려온다. 백성들은 일본군이 철수하였음을 말하였지만 류성룡은 확실히 확인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승훈은 이를 거부하며 이원익과 조선군을 빼고 명나라 군대를 단독으로 이끌고 평양성으로 들어간다. 평양성으로 들어간 조승훈은 백성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들어온다. 하지만 조승훈에게 일본군이 없다고 말한 것은 순왜들이었고 일본군에 협력한 백성들은 성문에서 명나라군대를 환영하다 이내 갑자기 달아났고 명나라 군대가 당황하는 순간 일본군이 기습을 한다. 결국 명나라 군대는 맥없이 무너지며 사유를 포함한 수많은 명나라 군사들이 전사하고 일부는 포로로 잡히며 불랑기포 등의 무기를 빼앗긴채 조승훈은 간신히 빠져나온다.
대체적으로 불멸보다는 좀 더 역사적으로 비슷하게 묘사하였으나 조선 쪽 정찰 부대의 실책을 삭제하고 명군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게다가 이때 조선군을 이끌고 참전한 김명원도 나오지 않는다.
이후 3차 평양성 전투는 나오지 않다가 이여송과 조승훈이 4만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으면서 4차 평양성 전투가 다루어진다. 4차 평양성 전투가 29회 후반에 주로 다루었고 30회 초반에 마무리 부분을 다루었다. 평안도 도체절사로 있던 류성룡은 평양성 전투에 앞서 순왜로서 일본군에 협조하던 김순량을 포함한 전령들을 처형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끊어버린다.
이후 류성룡과 이일 그리고 김명원이 이여송과 더불어 명나라 군대에게 평양성에 대한 설명을 하고 평양성의 방비가 강화되지 않은 보고까지 올라오자 공격을 요청한다. 이때, 이여송은 심유경이 만력제로부터 허락을 얻어 회담을 하자고 한 것처럼 속여 평양성 근처에 있는 역원인 부산원으로 유인하여 고니시를 생포할 계략을 세운다. 전령을 받은 고니시는 군량과 군마 부족 상황에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기쁨에 찼지만 함정의 가능성이 있어 자신이 먼저 살피겠다는 소 요시토시의 요청에 그를 먼저 보낸다.
결국 작전은 실패를 하였고 소 요시토시는 이일에게 생포될 뻔한 위기에서 부장들과 일부 군사들만 간신히 데리고 도망을 친다.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승병 2천을 이끌고 온 유정 대사를 반갑게 맞이하던 류성룡과 이여송은 이천리로부터 작전 실패 보고를 받자 급히 공격 준비에 나선다.
한편, 여유롭게 요시토시의 보고를 기다리던 고니시는 간신히 살아 돌아온 요시토시로부터 진실을 듣자 자신이 속은 것에 격노하며 황해도 봉사에 주둔 중인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지원 요청을 하면서 전투 태세를 명한다. 이후 조명 연합군 5만은 외성과 외성 앞에 설치된 목책에서 전투 태세를 갖춘 일본군을 맞이하였고 드디어 이여송의 명과 함께 전투를 시작한다. 우선 조선군의 총통과 명나라군의 불랑기포들이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고 포격과 활 세례의 지원하에 조명 연합군이 공격을 한다. 이에 고니시 군도 노획한 총통 등과 조총으로 저항을 하며 전투는 격렬해진다. 그러나 이여송의 계략으로 모란봉에서 조승훈의 미끼 부대에 걸린 일본군은 그들을 추격했다 기습을 당해 전력 중 일부를 상실하고 밤새도록 포격과 활 세례를 퍼붓는 조명 연합군의 물량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공격에 결국 평양성의 내성 관문인 칠성문이 뚫리면서 성의 대부분이 조명 연합군에게 점령된다. 이에 고니시는 풍월정 근처에 만들어 두었던 토굴로 병력들을 모아서 게릴라전으로 대항한다.
결국 명나라군은 일본군의 게릴라 전술로 피해가 늘어나자 퇴로를 열어주게 된다. 이에 류성룡은 반발하지만 모든 군권이 이여송에게 주어지고 조선군도 명나라군 소속으로 된 탓에 아무 말도 못하고 이시언과 김경로에게 고니시군의 퇴로 주변에 매복하여 고니시를 생포하라 한다. 하지만 이여송의 문책을 두려워하던 김경로가 군을 철수하면서 고니시를 생포할려는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고 이시언만이 고니시군을 습격하여 일부 일본군들을 포로로 잡는다. 결국 고니시 군은 평양성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하지만 전투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상태에서 조선군의 습격도 받고 탈영병들과 중상자들을 버리며 간신히 철수했기에 사실상 괴멸 상태에 빠진다. 부산진성 전투와 함께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였다. 협소한 세트장과 겨울이 아닌 여름의 배경, 적은 인원, CG와 맞지 않는 실사 장면과 포탄이 터지는 등의 문제[11]가 있지만 화력덕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시원한 포격 장면과 조명 연합군이 돌격하는 CG의 높은 퀄리티, 기존의 횡포만 부리고 무능한 명군에서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가진 명군의 모습, 제대로 살려낸 전투의 분위기 등 '''여러모로 진주 대첩이나 탄금대 전투보다 잘 찍었다는 평이 많다.''' 무엇보다도 불멸의 이순신에서 다루지 않은 육상 전투에 집중하겠다는 제작 의도로 내세운 전투들 중에서 불멸에서 확실히 잘 다루어지지 않던 4차 평양성 전투를 다루어내며 제작 의도를 충실히 따랐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다만 명군 묘사가 제대로 된건 이 전투 장면 뿐 이다. 이 전투 전후로는 명군에 대해 철저한 왜곡으로 일관하고 있다.

4.1.7.4. 임진왜란 1592

4회에서 묘사되었다.

5. 구한말



5.1. 청일전쟁



청일전쟁 중 일본군과 청군간의 전투. 청군이 패하여 평양은 일본군이 점령하게 된다.

6. 현대



6.1. 6.25 전쟁



'''평양 전투'''
'''시기'''
1950년 10월 18일 ~ 1950년 10월 20일
'''장소'''
평양시
'''교전국'''
[image] UN군
[image] 대한민국 제1공화국
[image] 미국
[image] 영국
[image] 북한
'''지휘관'''
[image] 프랭크 W.밀번
[image] 백선엽
[image] 최인
[image] 최용건
'''병력'''
28,250 명
제 19사단, 27사단
제 43사단, 239사단
'''결과'''
UN군과 국군, 평양 탈환
미 1군단 소속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국군 2군단 소속 제7보병사단이 1950년 10월 18일 ~ 10월 20일 사이 평양직할시를 점령하기 위해 치룬 전투.

6.1.1. 전투 전 상황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서울을 수복(收復)하자 북괴뢰군 총사령관 김일성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전면적인 철수 명령을 내렸다. 10월 1일10월 2일 국군과 유엔군이 잇따라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평양을 사수하던 조선로동당은 북괴뢰군과 함께 평양을 떠나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직접 지원을 거절했지만 중국은 회의 끝에 개입을 결정한다.
10월 9일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탈환하기 위해 연천군 고랑포를 출발, 황해도와 평양 주변의 북괴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백선엽 국군 1사단장은 자신들의 목표가 평양이 아닌 해주~진남포임을 알게 되어 밀번 1군단장을 찾아가 우리가 평양을 점령하겠다고 요청했고, 이에 미 전차중대 하나를 배속받아 본디 평양으로 진격하려던 미 24사단과 임무교대한다. 그리고는 10월 14일 신계를 거쳐 16일에 수안까지 도달한다.
10월 17일 미 1군단의 양익을 맡은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은 북괴군의 외곽방어선이 있는 황주∼율리선까지 진출하였고, 미 1군단은 10월 18일을 기해 평양 포위작전을 개시하기로 한다.
한편 국군 1사단 15연대는 별도로 강동 쪽으로 우회해 대동강 북쪽 모란봉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국군 2군단 소속 6,7,8사단은 평양 동쪽에서 계속 북진 중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 미 1기병사단이 평양으로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고 지시했고,[12] 이에 정일권은 국군 2군단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달함으로서 국군 7사단과 8사단이 평양 방면으로 방향을 튼다.[13]

6.1.2. 전투 경과 (10.18 ~ 10.20)



▲ 영국 British Pathe가 촬영한 기록영화 <한국 평양의 폐허>
10월 18일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이 평양 포위를 전개하며 선교리 일대에서 진격하는 와중 대동강 상류 쪽에선 국군 1사단 15연대와 국군 2군단 7사단 8연대가 도하를 준비중이었고, 특히 8연대는 이날 아침 평양 동남쪽 40㎞ 지점의 율리에서 유재흥 2군단장과 신상철 7사단장이 평양을 먼저 점령하라는 작명서와 함께 트럭 20여대를 지원받아 차량화보병 상태로 달려온 상태라 팔팔했고, 이 덕분에 오후 5시 8연대 9중대가 먼저 평양에 입성해 김일성 대학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후 8연대의 본대가 1사단 작전지 내로 침범해 들어왔고, 8연대장 김용주 중령은 오후 9시경 백선엽 1사단장으로부터 "당신, 여기 왜 왔냐"라는 의문 섞인 추궁을 받았으나 이에 잔적들을 추격해 왔다며 둘러댔다. 이 와중 8연대의 대대들은 대동강변에 도착한 근처에 버려진 배 3척으로 밤새 도하했는데, 이후 병력 수를 확인해보니 뜬금없이 1개 대대가 하나 더 있길레 확인해보니 1사단 소속이라길레[14] 이들을 임시 배속받는다. 이후 4개 대대로 김일성 대학을 거쳐 모란봉으로 향해 그곳을 점령하고 교전을 산발적으로 이어갔다. 이후 10시간 뒤 7사단 3연대도 8연대의 진격로를 따라 후속 진입했다.
10월 19일 일출 무렵까지 괴뢰 잔당들과 교전하던 7사단 8연대는 갑자기 '''1사단 11연대로부터 57mm 대전차포로 공격당했고''' 소대 하나를 전령으로 보내는 와중에도 (지뢰 피해까지 겹쳐) 사상자 수십명이 나왔으며,[15] 당장 여기서 철수하라는 11연대장의 방송까지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 와중 국군 1사단 12연대는 도하장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도하해 오전 11시 대동교 동쪽 100m 지점에 있는 동평양의 선교리로 진출했다. 뒤이어 오후 2시 쯤, 11연대가 동평양 북쪽 미림비행장을 점령함으로서 선봉 입성의 영광을 얻는다. 이후 야간에 15연대가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들을 제치고 대동강을 건너 본평양을 점령했다.
이 와중에 모란봉을 거쳐 평양 북서쪽으로 진출, 화신백화점 평양점을 점령한 뒤 그곳에 CP를 차리고, 일대를 탈환해 나가던 8연대장 김용주 중령은 오전 11시경 1사단장 백선엽과 대면당해 "전장 문란죄가 뭔지 아느냐" 며 추궁당했고, 이에 (유재흥) 군단장과 (신상철) 사단장께서 까라면 까라 어쩔수 없이 왔다며 쩔쩔맸다. 또한 1사단 장병들 역시 7사단에 대해 '전공 욕심에 눈이 멀었다'는 편견으로 7사단 장병들에게 또 알짱대면 진짜 쏘겠다며 위협했고, 이에 7사단 장병들도 '평양이 니네들 꺼냐, 위에서 까래서 온 거지' 라며 대치했으나 이후 "어쨌든 미군보다 국군이 먼저 평양에 들어왔으니 됐지 않느냐"며 대치를 풀었다.#
10월 20일 국군 1사단은 오전 10시 평양시를 완전 장악하였고, 국군 제1사단에 이어 미 1기병사단도 대동강을 도하하였다. 또한 평양 선봉 입성의 체면을 살린 이승만은 1사단에게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는 의미로 전진이라는 부대 명칭을 하사하고 사단 장병 전원을 일계급 특진시켰으나, 정작 자신의 명령을 욕먹어가며 수행해온[16] 7사단은 그런거 없이 쫓기듯 평양에서 물러나야 했다.

6.1.3. 여담


  • 일단 대외적으로는 유엔군 전투지경선을 멋대로 침범해 중대 하나를 먼저 보낸 7사단보단 유엔군 전투지경선을 지키며 사단 전체가 평양으로 진주한 1사단을 평양선봉입성 부대로 인정하고 있으나 누가 먼저 입성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국군 1사단과 7사단, 전사(戰史) 관계자 사이에서 입성 시간대, 점령 및 게양한 위치, 정통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 이견은 지금도 분분해 2010년 국방부도 인정할 정도이며, 정일권 당시 참모총장은 1985년 이를 공동 입성이라고 증언했다.#[17]
  • 백선엽 장군도 전후 7사단의 뒷사정을 알고 '무모하고 위험했으나 뭐라 탓할 수는 없으며, 쌍방 교전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다'고 술회했다.#
  • 국군 7사단과 함께 평양 쪽으로 방향을 튼 국군 8사단은 19일 성천을, 20일엔 강동을 점령했으나 이때는 이미 평양이 점령된 이후라 덕천 방향으로 향했다.

7. 관련 문서




[1] 삼국사기에는 우리 장수라고만 표현되나 수서 내호아 열전에 고구려군을 이끈 이는 고건무라고 언급되어 있다.[2] 정확히 말하자면 2, 4 차 전투때만 명나라 군이 참전했다.[3] 성 안의 군사와 민병은 합하여 3, 4천 명인데 이 인원으로 성가퀴를 나누어 배치하였으나 대오가 분명하지 못하고, 성 위에 사람들이 혹은 드문드문하고 혹은 빽빽하며, 혹은 사람 위에 사람이 서서 그 어깨와 등이 서로 부딪히고, 혹은 연달아 몇개 살받이 터에는 한 사람도 없기도 하였다. 그리고 옷가지를 을밀대 근처의 소나무 사이에 걸어 놓고 이를 의병(疑兵)이라고 하였다. - 징비록[4]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평화 상태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포를 쏘는 것이 미숙하여 성 위에서 쏜 화포전은 모두 강물 속에 떨어지고 그 소리도 맹렬하지 못했으므로, 왜적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강변에 나와 목욕까지 하는 형편이었다. - 징비록[5] 5천 ~ 6천 정도로 추정[6] 후퇴 과정까지 9천 정도로 추정. 평양성 전투에서 피해가 얼마인지는 기록이 없으나 고니시의 1군이 한양으로 후퇴한 뒤 6,6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기록은 있다. 이는 일본측 기록이다.[7] 오토모 요시무네는 기독교 다이묘로 유명한 오토모 소린의 아들이다. 결국 이 전투에서 고니시를 돕지 않은 것이 보고되어 개역당하고, 가문의 영지는 모두 히데요시의 직할지로 편입되었다. 오토모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전사했다는 오보와 가신들의 반대로 인해 고니시를 지원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고, 그냥 알면서도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얘기도 있다.[8]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명군의 피해가 매우 컸다고 기록되어 있다. "적이 안에서 탄환을 쏘았는데 맞아 죽은 명나라 군사의 시체가 서로 잇따랐고 제독이 탄 말도 탄환에 맞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제독에게 조금 후퇴하여 군사들을 휴식시키기를 청하였다. 포시(晡時)에 제독이 적의 굴을 함락시키기 어렵고 많은 군사들이 주리고 피곤하다고 하여(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1일 병인 13번째기사)"[9] 심지어 류성룡의 보고서에는 평양성 탈환에 대해 크게 유쾌하게 생각한다고 썼다.[10] 예를들면 1593년 7월 14일 "명나라 군대가 군(郡)에 가득하고 주민은 텅 비었으니, 긁어모으는 피해가 왜노(倭奴)와 다를 바 없다." 이처럼 고대일록에는 명나라 군대에 대한 악평이 한가득이라 명군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학살 기록은 없다.[11] 하지만 터지는 포탄의 경우 멋을 위해 고증을 어느 정도 덜 지켰다고 볼 수도 있다.'''이 정도 고증 오류까지 따지면 거의 다큐 수준이 된다'''[12] 여기에 집착한 이유는 개전 초기 탈취된 서울 선봉 입성을 미 해병대에게 빼앗긴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 게다가 이 당시 국군 1사단은 미 1군단에 예속돼 그들의 명령을 듣는 상태였기에 (즉, 미군이 멈추라면 멈출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에) 불안감을 키웠다.[13] 이 때 7사단 내에서도 유엔군 진격로를 이렇게 멋대로 바꿔도 되냐며 물었지만 유재흥 2군단장은 '평양을 먼저 따고 볼 것이다'라고 일축했다.[14] 정황상 15연대.[15] 다만 포탄이 아군을 향해 떨어졌다는 건 3, 8연대장도 공통 증언했으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건 당시 8연대장 김용주 중령이니 유의. 또한 국군간의 팀킬과 그 원인이 워낙 부끄러운지라 대다수에선 이를 생략하거나 위협 포격, 심지어 축포(!) 등으로 서술하고 있다.[16] 상술했듯 대통령께서 지켜보시는 중대 사항이라 이게 문제가 될 것임을 알아도 감히 항명할 수 없었다.[17] 이와 비슷한 사례로 원산최초 입성문제가 있는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제3보병사단이 이를 두고 쌍방 신경전을 벌이자 김백일 1군단장이 이종찬 장군과 송요찬 장군을 불러 공동입성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