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넨드라

 


네팔의 국왕
11대

12대

-
디펜드라

'''갸넨드라'''

왕조 폐지
[image]
Gyanendra bir Bikram Shah dev
1947년 7월 7일 출생
1. 소개
2. 생애
3. 갑자기 즉위한 왕
4. 네팔 왕실 참극의 배후설
5. 폭정과 퇴위
6. 평가


1. 소개


네팔의 '''마지막''' 국왕. 폐위되고 네팔이 공화국이 된 이후에도 현재까지 왕정복고와 네팔 신 정부에게 몰수당한 구 왕실 재산의 반환을 주장/요구하고 있다.

2. 생애


갸넨드라는 1947년 7월 7일 네팔의 9대 왕 마헨드라와 인드라 왕후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비렌드라의 동생이자 디펜드라의 숙부였다. 그가 네살이던 1950년, 그의 조부이자 8대왕 트리부반은 라나 가문과의 갈등끝에 가족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뉴델리로 망명해버렸고, 당황한 모한 샨시르 라나 당시 총리는 유일하게 궁에 남아있던 4살배기 갸넨드라를 급한대로 왕위에 추대해 권력을 이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네팔 국민들의 반발로 갸넨드라를 왕위에 올리고 라냐가문이 통치를 이어가는 일은 유야무야되고 결국 다음해인 1951년 1월 7일, 트리후반은 전국민의 열화와 같은 환호속에 카트만두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를뻔한 일은 헤프닝으로 남고, 둘째 손자였던 갸넨드라는 이후에는 왕좌와 거리가 먼 삶을 사나 싶었다. '''그런데...'''

3. 갑자기 즉위한 왕


2001년 6월 1일, 갸넨드라는 갑자기 네팔 제 2의 도시인 포카라로 공무차 출장을 떠났다. 그날 밤 9시(한국 시간 6월 2일 새벽 12시 45분)경 나린얀히티 왕궁의 연회장에서 왕세자 '''디펜드라가 아버지 비렌드라와 가족들을 총으로 쏴 숨지게 했다(네팔 왕실 참극)'''.[1] 연락을 받고 급히 카트만두로 올라온 갸넨드라는 비렌드라가 죽고 디펜드라가 권총 자살을 기도해 혼수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약 3일간 대리 청정을 거쳤고, 혼수 상태였던 조카 디펜드라가 죽자, 갸넨드라는 네팔 제 12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4. 네팔 왕실 참극의 배후설


갸넨드라가 당시 '''포카라로 출장중이라 현장에 없었고''', 그의 '''자식'''들은 현장에 있었음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아서''' 참사를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없고 갸넨드라가 평소 평판이 안 좋았던 데다가, 갸넨드라의 자식들은 다치지 않은 것은 맞지만, 부인인 코말 왕비가 현장에 있었다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 배후설은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른 배후설로 갸넨드라는 공범 내지 바지사장이고, 진짜 배후는 인도미국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이런 류의 배후설은 마오이스트 반군 계열에서나 나오는 배후설이라 진지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다.

5. 폭정과 퇴위


2001년 6월 4일 즉위한 갸넨드라는 헌법을 바꾸고 전제 정치를 부활시켰다. 또한 비상 계엄령을 선포해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게다가 형 비렌드라는 마오이스트 반군과 대화랑 협상을 통해서 휴전을 하고 이들의 무장해제를 권유해 제도권 정치에 끌어들이게 하려는 노력을 하여 평화적으로 내전을 종식시키려고 시도했었지만 갸넨드라는 이를 무효로 하며 반군에 대한 강경 진압에 들어갔다. 당연히 마오이스트 반군은 분노하여 다시 내전이 터지고 만다. 특히 국회를 해산하고 총리를 파면하여 공석으로 한 일 때문에 국민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민주화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해 왕실을 지지하는 국민들까지 돌아서게 만든다. 갸넨드라의 삽질로 마오이스트 반군은 힘을 얻었고 이들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네팔 전체를 장악하며 마침내 수도 카트만두로까지 진격했다.
결국 갸넨드라는 국민과 군대에게도 버림받은 나머지 대국민 사과문으로 항복을 선언한다. 2007년 왕정 폐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친 결과, 왕정 폐지에 대한 찬성 의견이 과반수에 도달해 2008년 5월 28일부로 왕실이 폐지됨으로써 갸넨드라는 즉위한지 7년만에 폐위되었고 샤 왕조는 종말을 맞이한다. 초대 국왕인 프리트비 나라얀이 1768년에 즉위한 후 딱 240주년이 되는 해였다.

6. 평가


비록 정치적으로 몰락한 폭군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왕위를 잃고 폐위당한 아시아권 다른 나라들의 전 군주들과 비교해보더라도 왕위를 잃고 폐위되어 쫓겨났을지언정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인물인건 분명해보인다. 오만의 사이드 빈 타이무르는 폭정 끝에 아들반정으로 쫓겨난 뒤 망명국인 영국 런던의 도체스터 호텔에서 2년간 쓸쓸하게 살다가 숨졌으며,[2] 이란의 팔라비 2세는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축출된 뒤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3] 1980년에 이집트에서 지병인 암으로 숨졌고 현재 남아있는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나 파라 팔라비 전 황후, 파라나즈 팔라비 전 공주 등 일가족들도 망명객 신분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를 떠돌며 이란으로 돌아가지 못 하고 있다.[4] 이라크파이살 2세는 1958년 반 왕정 쿠데타를 일으킨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의 쿠데타 군대의 총탄 세례를 받고 참혹하게 총살당했으며 라오스의 전 국왕인 사방바타나는 1975년 라오스 내전에서 패전해 공산 반군인 파테트라오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당하고 공산당 정권이 성립된 이후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옥사하여 참혹한 최후를 맞은 것을 감안하면, 갸넨드라와 그 일가족들은 폐위되어 왕위와 왕족 지위를 잃어버리고, 재산마져 몰수당했음에도 몰락/폐위 이후 사망해 죽거나 쫓겨나 해외에서 망명객 신세로 객사하거나 떠돌기는커녕 네팔 국내에 거주하면서 왕정 복고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나마 네팔은 왕정 폐지 후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정치 세력들이나 정당이 일부 있기라도 하지, 이란[5]이나 이라크,[6] 라오스[7]는 그마저도 없다.
[1] 이 참극 속에서 갸넨드라의 형제들 중에선 여동생인 쇼브다 공주만 살아남았다.[2] 그래도 이 쪽은 군주만 교체하고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3] 미국, 멕시코, 모로코, 파나마, 바하마 등 여러 나라들을 전전했으나 팔레비 왕가의 인도 내지 망명 불허를 요구하던 이란 혁명 후 수립된 이란 신 정부의 압력으로 여러 국가들을 떠돌았다.[4] 실제로 이란에서는 이란 혁명 당시 국외로 도주했던 팔라비 2세 전 국왕과 그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선고한 궐석재판에서의 사형 판결이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심지어 현재 이란 정부의 공식 입장 역시 이 사형판결에 의거해 팔라비 왕가가 망명을 접고 이란으로 돌아올 시 사형에 처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데 어쨌거나 이 사형판결의 존재로 인해 지금도 서방에 망명 중인 팔라비 구 왕가들이 아직까지도 이란으로 귀국하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세한건 팔라비 왕조 문서 참조.[5] 실제로 이란에서는 팔라비 왕조의 복고 내지 망명 중인 팔라비 2세 전 국왕의 자녀들을 용서해주거나 귀국해주자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게 되면 반혁명 혐의로 인해 사형 또는 징역형 등 처벌을 받을 수 있다.[6] 단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붕괴된 직후에 정국 혼란을 빛는 과정에서 1958년 폐지된 하심 왕조에 대한 왕정 복고의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다. 자세한건 왕정복고 참조.[7] 여기는 공산당 1당제 국가이며 현재까지도 왕정 폐지를 주도한 파테트라오 출신의 지도부와 그 후예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