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렌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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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endra Bir Bikram Shah Dev
1945년 12월 28일 ~ 2001년 6월 1일
1. 소개
네팔의 10대 왕. 재위 말기에 네팔 왕실 참극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비운의 명군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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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렌드라는 1945년 12월 29일에 당시 왕세자였던 마헨드라(1920년 ~ 1972년, 재위 : 1955년 ~ 1972년) 국왕과 인드라 왕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동생 디렌드라를 낳느라 어머니 인드라를 잃었다. 그런데 그 동생 디렌드라는 커서 형과 같은 최후를 얻었다. 이후 영국으로 유학 생활을 하였고, 1964년 이튼스쿨을 졸업했다. 이후 여러 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유능한 인물이었다.
2.2. 재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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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당시 기준 명칭으로) 갸넨드라 왕제, 비렌드라 국왕, 디펜드라 왕세자, 코말 왕제비, 아이슈와라 국왕비
1972년 1월 31일 부왕인 마헨드라가 죽자 즉위하였다. 마헨드라는 절대왕정 독재를 통해 네팔의 근대화를 이룩하겠다는 생각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다당제를 금지했으며 국왕이 모든것을 관장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하다가 민주주의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거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과격한 마오이스트들은 산간지역을 점거하고 무장투쟁을 벌이는 등 나라는 극도의 혼란가운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렌드라는 즉위하자마자 교육 정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국민들을 위해 이곳저곳을 시찰하면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래서 네팔은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된 '''지금도''' 비렌드라 전 국왕에 대한 국민과 사학계의 평가가 아주 좋은 편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혼란과 숙제를 어느 정도 잘 풀어내기도 했을 정도였고 국내 정치도 비렌드라 사후에 국왕이 되어 전제정을 펼치다 폐위당한 남동생 갸넨드라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
1979년 카트만두에서 거센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이듬해인 1980년 비렌드라는 네팔의 통치체제에 대해서 국민투표를 시행한다는 결단을 내린다. 마헨드라가 도입한 무정당 판차야트제를 유지할지, 아니면 다당제 민주주의를 도입할지의 여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한것. 물론 이런 결단에는 비렌드라의 통치가 국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판차야트 체제가 공인될거라는 자신감도 있었기에 내린 결단이었겠지만. 결국 근소한 차이로 기존의 판차야트 체제 유지로 결론이 났지만 비렌드라는 어느 정도 판차야트 제도를 개선해서 1981년 5년 임기의 판차야트 대표를 뽑는 총선을 1959년 이후 22년만에 시행했다. 이후 1986년에도 총선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6월 항쟁을 시작으로, 중국, 타이완, 베트남, 필리핀 등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민주화 열풍에 이르자''' 이에 자극을 받은 네팔에서도 다시 대대적인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결국 1990년 비렌드라는 스스로 절대 왕정을 포기하고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였다. 무정당 판차야트 체제를 포기하고 다당제 민주주의를 다시 도입했으며 1991년 합법화된 네팔 의회당과 네팔 공산당이 참여한 총선이 치뤄져 의회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국민들이 국왕을 열렬히 지지하였고, 대외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1] 이렇듯 그는 네팔 국민들의 좋은 왕으로 남아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3. 최후
2001년 6월 1일, 네팔 현지 시각 오후 9시경(한국 시간 6월 2일 새벽 12시 15분경), 비렌드라는 왕실에서 개최하는 연회장[2] 에 참석하였다. 여기에는 아이슈와라 왕비, 슈르티 공주, 나라잔 왕자 등 왕실 고위 인사가 참석했고, 분위기는 평소처럼 화기애애했다. 디펜드라 왕세자 또한 이 연회에 참석했으나, 그냥 술만 마시고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이슈와라 왕비가 디펜드라한테 나가서 좀 쉬라고 타일렀고, 디펜드라는 그냥 조용히 나갔다. 그러나, 잠시 후 디펜드라는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하고 와서 문을 잠근 다음 총을 들고 '''천장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비렌드라 국왕을 총으로 쏘고, 그 다음 주변에 있던 왕족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당시 나라얀히티 왕궁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그 상태에서 디펜드라는 고모 3명(비렌드라의 전임 국왕 마헨드라의 딸들)을 총으로 쏘고, 여동생 슈르티 공주를 총으로 쏜 다음 숙부 디렌드라를 총으로 난사해 죽였다. 그 후 아이슈와라 왕비와 나라잔 왕자도 총으로 쏘아 죽였다.[3] 그리고 소리를 지른 후 그 자리에서 소총을 버리고 권총을 빼들어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을 기도했다. 이때 경호원들과 왕실 경비병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지만 때는 너무 늦은뒤였다. 비렌드라 국왕의 재위 29년. 이후 디펜드라는 혼수 상태에 빠지다가 3일 후인 2001년 6월 4일 사망했다. 끔찍한 사건은 비렌드라 국왕 일가와 디펜드라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3.1. 사태의 원인
원인은 다름아닌 디펜드라 왕태자가 데비아니 라나를 사랑했지만, 비렌드라 국왕은 데비아니 라나가 슈르티 공주의 남편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크게 반대했고, 아이슈와라 왕후는 '''디펜드라가 35세 이전에 결혼하면 왕(비렌드라)이 죽을 것'''이라는 점성가들의 예언을 굳게 믿고 있어서 반대했다. 무엇보다 사건이 터지기전에 디펜드라는 마약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어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고 몰래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네팔 왕실에서는 이를 몰랐던 것이다.
3.2. 사후
비렌드라의 죽음은 네팔 국민들에게 큰 슬픔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와서 슬퍼했다. 그 결과, 마침 출장 중이던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 갸넨드라가 즉위하였으나, 갸넨드라는 형과 달리 전제군주제로 통치했기에 네팔 전체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즉위 7년만인 2008년, 국민 투표로 왕실이 폐지되면서 퇴위되었다. 한편 갸넨드라의 아들 파라스(1971년 ~) 왕자는 총격 사건에서 디펜드라를 설득하려 했고, 슈르티 공주가 낳은 두 아이를 현장에서 대피시켰다.
4. 평가
아이러니하게도 비렌드라는 네팔 샤 왕조의 개창자인 프리트비 나라얀 이후로 가장 유능한 왕이었다. 부친 마헨드라 왕이 절대왕정 독재를 수립하고 불러일으킨 네팔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름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했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고 절대왕정을 포기할줄도 아는 왕이었다.
그러나 아들 디펜드라의 폭주로 비렌드라는 사망했고 결국 네팔 샤 왕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나름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던 네팔 정국도 비렌드라 사망이후 동생 갸넨드라가 시대를 거스르는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면서 왕조가 폐지되는 사태가 되어버렸던것.
하지만 한편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 시선도 존재한다. 일설에는 그가 말기에 이르러 민간정부가 무능하고 왕실내에서 자신의 권위가 위축되는 가운데 마오이스트 반군들이 크게 세를 떨치게 되자 이를 기회로 다당제를 정지하고 왕의 직접통치로 회귀하려 한게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오이스트 반군을 제압하면서 동시에 무능한 민간정부도 타도하고 비렌드라 자신이 직접 통치하려 했던게 아니었냐는것. 물론 비렌드라가 샤 왕조 내에서는 가장 민주주의에 우호적인 인물이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비렌드라 말고는 민주주의에 우호적인 왕실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4] 자칫 잘못하면 왕위를 찬탈당할수도 있어서 이런 생각을 품고있지 않았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시선도 있다.
5. 가족 관계
- 아버지 : 마헨드라(1920년 6월 11일 ~ 1972년 1월 31일) 국왕
- 어머니 : 인드라( ? ~ 1950년 1월 14일) 왕비
[1] 대한민국과도 인연을 맺었고, 한국 특사를 직접 맞이했는데, 그 특사로 파견된 인물이 하필이면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분이었던 것이다.[2] 네팔 국왕이 왕실에 대한 홍보와 가족 관계 개선을 위해 매달 1번 연회를 개최했다.[3] 이때 아이슈와라 왕비는 얼굴에 총을 맞아 죽어서 사후 얼굴이 심하게 손상되어 장례식 때 그녀의 시신에 도자기로 만든 데드 마스크를 씌우고 장례를 치루어야 했다.[4] 어머니 인드라도 남편 마헨드라의 절대왕정 독재체제를 수호하기를 바랬고 부인은 물론 남동생까지도 왕권을 이양하는것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5] 이 작자가 사랑한 여자는 인도 국적이라서 비렌드라 국왕이 반대했다. [6] 총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져서, 비렌드라 국왕의 형제 중 그녀의 오빠인 갸넨드라와 함께 유이하게 살아남았다.[7] 지방 출장을 가느라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 이후 제 12대 국왕이 되나 폭정으로 왕이 된지 7년만에 퇴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