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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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왕정복고 이후 즉위식을 거행하는 후안 카를로스 1세 스페인 전 국왕. 중간에 각각 부인 소피아 왕태후와 아들 펠리페 6세 현 스페인 국왕, 딸 엘레나 공주와 크리스티나 공주도 보인다.[1]
王政復古, Restoration
1. 개요
2. 실제 사례
2.1. 왕정복고 후 현재까지 지속 중인 사례
2.2. 일시적인 왕정복고 사례
2.3. 논의는 있으나 이루어지지 않거나 안 되고 있는 경우
2.4. 실현성과는 별개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
3. 왕정복고의 조건
4. 이전과의 차이점
5. 가상의 사례
6. 관련 문서


1. 개요


폐지되었던 군주제를 부활시키는 일. 복벽(復辟)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나의 왕가가 존재하지만 다른 왕가에 의해 억제당하다 상황이 변해 부활하는 형태가 있고, 공화제 개헌 또는 혁명, 쿠데타 등 기타 여러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폐지된 왕정으로 돌아가는 현상이다.
대체로 군주제 폐지 후 정치적 혼란과 내전, 지속되는 내분 끝에 정국이 난장판이 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옛날 왕정 체제로 회귀를 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 종식 이후의 스페인과 캄보디아가 대표적이고 1973년 왕정 폐지후 쿠데타와 잦은 내전과 전쟁으로 정부 통제력이 와해되어 사실상 파탄 국가로 전락한 아프가니스탄과 카다피의 군부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고 카다피 독재 정권 축출 후 정국 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리비아에서 논의가 되고 있다.

2. 실제 사례



2.1. 왕정복고 후 현재까지 지속 중인 사례


영국의 경우 1642년 청교도 혁명으로 인해 혁명지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1649년 찰스 1세 국왕을 처형하고 왕정이 폐지되면서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하는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크롬웰의 독재 체제였고 크롬웰이 죽자 사후 그의 아들이었던 리처드가 호국경이 되었으나 리처드는 아버지와 달리 별 다른 정치력이 없었고 영국 국민들 역시 오랜 크롬웰의 통치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스코틀랜드에 주둔 중이었던 조지 멍크 장군은 군부내 추종자들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리처드와 정권내 나머지 크롬웰파 세력들을 제거하고 런던에 들어와 임시 의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유럽에 망명중이었던 찰스 1세의 차남이었던 찰스 2세 전 왕태자[2]를 귀국시켜, 1660년에 그가 왕위에 즉위하면서 왕정이 다시 복고되었다.
스페인 또한 1931년 왕정이 폐지되었다가 왕정 폐지 후 허약한 공화국 정부스페인 내전으로 들어선 프랑코 독재 체제 등을 거치면서 1975년 독재자 프랑코 전 총통이 죽고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에 즉위하면서 다시 왕정으로 복고되었다.
캄보디아도 왕정이 폐지되었다 혼란 끝에 왕정으로 복고된 나라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 후 노로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는 군주국으로 출발했으나 1970년 론놀의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내전과 학살, 베트남군 침공으로 혼란을 거듭했고 1993년 UN의 개입 아래 총선이 치루어져 같은 해 제정된 신헌법에 의해 쫓겨났던 시아누크 전 국왕을 다시 국왕에 앉히면서 왕정으로 다시 돌아갔다.
왕정복고로 보기는 애매하지만 1815년 네덜란드는 나폴레옹에게서 독립한 후에 오라녜나사우 가문을 왕가로 삼아서 공화국에서 왕국으로 변하는 일이 있었다. 왜 애매하냐면 공화국 시절에도 오라녜나사우 가문이 독립전쟁을 이끈 공로로 세습 '국가원수'직을 맡아 사실상 입헌군주정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 게다가 복고란 말이 돌아왔다는 것인데 네덜란드 왕국이 공화국으로 전환했다가 다시 왕국으로 전환한 것은 아니라, 원래 공화국이었던 네덜란드가 왕국으로 바뀐 것이니 복고란 말 자체도 맞지 않다.
일본에서는 1868년 에도 막부를 없애고 천황(덴노)이 국가의 중심으로 다시 대두된 것을 왕정복고라 표현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대정봉환 항목 참조.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전에도 천황은 허수아비로나마 존재하였으므로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엄밀한 의미의 왕정복고와는 차이가 있다. 2차대전 패전 이후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천황은 여타 입헌군주국들과 마찬가지로 권한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회귀하였다.

2.2. 일시적인 왕정복고 사례


프랑스의 경우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루이 17세가 탕플 감옥에서 외로이 죽어간 이후 망명 간 루이 18세에 의해 여러 차례 왕정 복고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제정이 들어섰다. 나폴레옹이 쫓겨난 이후 부르봉 왕조가 돌아왔으나 다시 나폴레옹이 돌아왔고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다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 샤를 10세 시절까지 이어지나 다시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조로 교체되고 다시 1848년 혁명으로 루이필리프 1세가 퇴위함으로 다시 공화국이 된다. 그런데 첫 대통령인 샤를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2년에 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다시 제국이 됐다가 1870년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고 제국은 폐지된다. 이후 부르봉 왕조의 복고가 지지를 받았으나 부르봉 왕조의 계승자인 샹보르 백작 앙리는 무자했던 까닭에 그의 사후 왕위가 오를레앙파로 넘어갈 것으로 되어있었다. 두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오를레앙파가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고 싶었던 샹보르 백작은 기어이 왕정복고를 포기하고 삼색기가 공화정의 상징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떼를 부려 모든 복고 공작을 와해시켰다. 프랑스는 이후로 그냥 공화국이 된다. 독일 제국 내부에선 해리 폰 아르님 주불 독일 대사를 비롯해서 보나파르트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공화국으로 남아야 프랑스를 포위하는 군주국 대불 동맹이 성립되기 쉽다고 이를 거부했다.
중국의 경우에는 신해혁명으로 무너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는 1917년 장훈복벽으로 복위하여 열흘간 제국이 복고되지만 공화주의자 펑위샹베이징을 점령하고, 자금성에서 청 황족을 내쫓은 핍궁사건이 발발한다. 이후 국민정부장제스가 푸이에게 북양정부가 한때 약속했던 청 황실 우대를 부활시켜주겠다고 제안했으나, 황릉 도굴 사건으로 황제고 뭐고 이미 모든걸 포기한 푸이는 거절하고 만주로 건너가 살다가 일본 제국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자,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고 옹립되어 상징적 황제가 된다. 그외 1911년 청나라 체제로의 복귀를 목표로 한 종사당(宗社黨)이란 왕당파 정당이 있었지만 효과가 없었고 1916년에 해산되었다.
멕시코아구스틴 1세가 쿠데타로 쫓겨난 이후에 나폴레옹 3세에 의해 괴뢰국이 되면서 멕시코 제국이 되고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황자를 데려와 막시밀리아노 1세로 제위에 앉혀 공화정이 제정으로 전환되긴 했지만 외세가 세운 황제고 순식간에 반란군에게 멸망당하고 프랑스의 외면 속에서 막시밀리아노도 총살되면서 사실상 쳐주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이전인 1820년 미국이 나폴레옹의 형으로서 미국에서 살던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멕시코 황제를 제의하였으나 허수아비 왕 노릇은 지긋지긋하다며 거절했던 일이 있다. 그런데 이 경우 멕시코는 전례에 없는 아주 골때리는 정치구조를 갖게 되었는데 '''대통령황제가 공존하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누가 이겼냐로 왕정복고의 여부가 갈리는 상황인데 대통령이 이기는 바람에 왕정복고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 1924년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바뀌었으나 1936년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에 왕정을 복고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67년 군사 쿠데타로 왕이 쫓겨나고 1973년에 군사정권 주도하에 공화국이 되었다가 1974년 군사 정권 퇴진 후 국민투표에 의해 민주 공화정으로 개헌이 확정되면서 공화정 국가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헝가리의 경우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붕괴 이후 벨라 쿤에 의해 공산주의 국가가 건설되었으나 루마니아 왕국군과 연합한 호르티 미클로시의 공격으로 공화정이 붕괴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런데 호르티 미클로시는 왕정은 복고했으되 국왕을 옹립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호르티의 집권이 허가된 이유 자체가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으로 간다는 전제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호르티가 자신의 충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스위스에서 달려온 오헝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는 체포한 다음 추방해 버렸고[4] 자신은 섭정 자리에 앉아 함대 없는 제독이 왕 없는 왕국을 통치하는 해괴한 통치 체제를 이어갔다. 어찌보면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5] 만약 호르티가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했으면 어떻게 했을지 호사가들의 궁금심을 자극한 대목이다. 스페인처럼 자기 손으로 왕을 옹립했을지 그리스처럼 왕조를 폐지했을지 아니면 자기가 새 왕조를 개창했을지. 어쨌거나 헝가리는 나치 독일에 붙었다가 소련에게 밟혔고[6] 이후 냉전 시기 동안 공산국가가 되었다.

2.3. 논의는 있으나 이루어지지 않거나 안 되고 있는 경우


1차 대전 종전 직후 유럽의 폐위된 군주들이 모여 공산주의를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왕정복고에 있다고 왕정복고를 호소하는 '폐위된 군주들의 모임'을 개최한 적이 있었지만 세간의 반응은 싸늘했다.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군부를 장악한 프로이센 귀족들이 대부분 제정 복고를 지지했지만 연합국의 살기어린 눈치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1933년에 집권한 히틀러가 군주정 혐오자라서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2차대전 이후 왕당파 귀족들이 히틀러와 협력하다 패전으로 인해 권력을 상실해 군주제 여론은 힘을 잃었다.[7]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복위는 영국까지도 지지했던 문제였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윈스턴 처칠은 다뉴브 지역은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황제가 되어 통치하는게 맞다고 주장했지만, 미국과 소련이 지지해주지 않으니 늙은 사자의 지지만으론 애로사항이 꽃피어 흐지부지되었다. 이러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복고는 물건너갔고, 적어도 오스트리아만은 제정을 복고할 가능성도 있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력 인사들은 세계 각국의 왕실들이 잘 대접해줄 테니 와서 살라는 제의나 심지어 스페인의 왕위를 내주겠다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제의[8] 등을 모두 거절했다. 게다가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1966년에 제위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물건너갔다.[9]
헝가리의 경우에는 공산당이 무너지고 나서 합스부르크 가문 복위가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나 왕정복고 시 왕위에 올라야 할 당사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공산당 붕괴 이후 부다페스트를 방문한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열렬한 환영을 받자 합스부르크 왕가를 복구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들이 나왔는데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헛소리라며 일축한 것이다.
이외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조지아 등 발칸반도 및 동유럽 국가들과[10] 네팔, 라오스 등 일부 아시아 국가들 같이[11] 오래 전에 왕정이 폐지된 나라들에서도 전 왕세자나 전 국왕 등 옛 왕실 가문 인사들이나 일부 정치 세력들, 지식인, 일부 반정부 세력들을 중심으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불가리아의 국왕이었던 시메온 2세의 경우에는 민주화 이후에 왕정복고를 위해 국왕 임기제까지 제안하며 동분서주했지만 왕정복고엔 영 뜨악한 반응이라 실패했다. 대신에 그는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아 총리에 당선되어 공화국의 수장이 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정책이 시원찮았는지[12] 국민의 인기를 잃어 그의 내각은 몇 년 만에 끝났다.
루마니아의 경우에는 미하이 1세차우셰스쿠 독재의 반동으로 루마니아 국민들의 인기를 모았지만, 차우셰스쿠의 후임인 일리에스쿠가 왕정복고를 두려워하며 미하이 1세를 추방함에 따라 왕정복고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현재는 미하이 1세가 다시 루마니아로 되돌아왔고 옛 왕궁에 눌러앉아서 사는 등 사실상 국왕으로 대접받고 있고, 국민들의 미하이 1세와 그 가족들에 대한 지지가 매우 커서 현행 공화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헌하자는 의견들이 종종 나오고 있다. 하지만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은데, 현재 루마니아의 정치권과 지식인들 상당수는 피 흘려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일군 루마니아 현 민주공화정 체제를 뒤엎고 나라를 망친 게오르기우데지[13], 차우셰스쿠 등 공산당 독재 세력들에게 집권의 빌미를 주었던 이전의 왕정 체제로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며 왕정복고 여론에 대해 결사반대하고 있는 중이다.
알바니아에서도 조구 1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왕정복고가 꽤 강하게 대두되었지만, 21세기 들어와선 시들해졌다. 다만 과거 왕정복고에 대한 국민투표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총리였던 살리 베리샤는 2011년 문제의 투표는 '공산주의 반란을 막기 위해' 조작되었다고 밝혔다. 어쨌든 투표 결과는 부결.
세르비아도 왕정복고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 진지한 논의는 아직까지 없다. 일단 왕정복고에 대한 지지율은 64%에 달한다.
몬테네그로의 왕정복고는 몬테네그로 왕가부터가 시큰둥한 입장인 데다가 세르비아의 영향권에서 탈피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라서 왕정복고 같은 마이너한 문제는 정치적으로 옳다 그르다란 논의조차 제대로 못 이루어지는 실정이다. 하지만 몬테네그로인들의 왕정복고에 대한 지지는 높은 편이다. 이웃나라인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출범을 이유로 몬테네그로 왕실을 강제로 축출했기 때문에 왕정복고에 대한 여론이 나쁘지 않다. 심지어 현재 몬테네그로 왕실은 사실상의 궁전 역할을 할 개인 아파트를 짓는 것도 허가받았고, 대통령과 함께 외국 귀빈을 맞는 일도 하는 등 사실상 비공식적인 국가원수 대접을 받고 있다. 헌데 왜 아직도 '헌법상으로는' 공화국을 자처하느냐면, 왕정복고 하는 일보다 먹고 사는 게 더 시급해서이다(...) 사실 몬테네그로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같은 동유럽 발칸 국가들의 경우 현재 자국내에서 왕정복고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이지만[14]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렇듯이 현재 공화정이긴 해도 총리에게 권력이 집중된 내각책임제 형태여서 바지사장에 불과한 대통령의 지위를 국왕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므로 왕정 전환은 절차적으로 어렵지 않은 편이다.
이라크 역시 왕정복고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이라크의 경우 1932년 이라크 왕국이 수립되어 하심 가문 통치 아래 왕국으로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하였으나 1958년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는데, 2003년 미국과 영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상대로 이라크 전쟁을 감행하자 당시 미군 밑 영국군 수뇌부들 사이에선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을 대체할 새 이라크 정부로 1958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어 국외에 망명 중인 옛 이라크 하심 가문 출신 인사를 새 정부의 지도자로 앉혀 이라크를 왕정복고시켜 사우디아라비아나 바레인, 모로코 같은 다른 아랍 친미 왕국들처럼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망명 반후세인 인사들이[15] 왕정복고에 대해 "서방에 빌붙어서 백성들 착취한 하심 왕조를 왜 다시 되돌림?", "나라 말아먹은 왕정 복고될 바엔 차라리 후세인 정권이 더 유지되는 게 낫겠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결국 후세인 축출 후 들어선 새 이라크 정부는 공화정으로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8년 왕정 폐지 이후 오랜 쿠데타와 독재, 테러, 내전, 다에쉬의 준동 같은 혼란상을 겪으며 그나마 이라크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던 1940~50년대 당시 하심 왕정 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 분위기가 이라크내 시아파 무슬림과 수니파 무슬림등을 막론하고 이라크 내부에서 하심 왕조 시대에 대한 향수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고, 현행 이라크 정부가 공화정이지만 실질적으로 대통령에게는 실권이 없고 총리에게 권력이 집중된 의원내각제라서[16] 일각에서는 대통령직을 없애고 영국에 거주중인 이라크 하심 가문의 수장인 샤리프 알리 빈 알 후세인을 이라크로 귀국시켜 새 이라크 국왕 자리에 올려 권력 기반이 허약한 공화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헌하자는 소수의 왕정복고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이라크에서도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5년도에 군주제 복귀를 주장하는 일부 정치인 후보자들이 선거에서 출마했을 정도였다.# 다만 왕정복위 주장이나 팔라비 왕조나 알 세누시 왕조 등 왕정 시절에 대한 향수심이 가끔씩 나오거나 힘을 얻기도 하는 이라크의 옆나라이자 전통적 앙숙관계인 이란이나 저 멀리 왕정 체제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42년 동안 장기 종신 집권을 하던 독재자 카다피가 축출당한 리비아 등 다른 중동권 국가들과는 달리 이라크는 1958년 왕정 폐지 이후에 쿠데타와 내분, 전쟁, 독재 정치 등의 정치적 혼란들을 거치면서[17] 하심 왕조 시기의 잔재들 대부분이 사라져버렸고[18] 아랍의 봄 이후에 IS와의 전쟁 등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정국이 다시금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지라 폐지된 왕정이 복고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게다가 2011년 카다피 독재 정권이 카다피 정부군과 반카다피 시민군과의 내전에서 붕괴된 이후에 알 세누시 왕정 시대 때 쓰던 예전 국기#와 국가#를 다시 제정했던 리비아와는 다르게, 이라크는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이 축출된 이후에도 하심 왕정 시기 때 쓰던 옛날 국기#와 국가#를 다시 제정조차 하지 않았고. 국가 역시 새 국가인 나의 조국(Mawtini)으로 바꾸고, 국기 또한 왕정 폐지 이후인 1963년에 제정되어 후세인 정권 시절때까지 사용하던 적백흑의 가로 3색기 국기에서 녹색 별 3개를 삭제, 1991년 후세인 정권 시기에 추가된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아랍어 문구만 남기고 개정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란도 과거 왕정이었다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붕괴되고 이슬람주의 성향의 공화국 정부가 세워졌는데, 현재 이란의 이슬람 신정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일부 세속주의 반체제 인사들과 이란 혁명 이후 서방으로 망명한 레자 시루스 팔라비 왕세자 등 옛 이란 팔레비 왕족 인사들을 중심으로 현 이란 정부를 타도하고 옛 팔레비 왕조 체제로의 왕정 복귀를 목표로 하는 망명 단체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비 2세 전 이란 국왕이 근대화와 경제발전 등 치적들은 둘째치고 사치와 폭력적인 통치로 민심을 잃었으며 혁명 이후 이란 현지에서도 암군, 폭군 취급을 받는 군주인데다 현재 이란을 막장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비판을 받고 있어 이란은 왕정복고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대부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 때문인지 최근에는 팔라비 가문도 왕정복고에 대한 어려움을 느꼈는지 팔라비 왕조 망명 정부를 해산하고 왕정복고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에 대한 모든 반체제, 반혁명 활동을 중단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국외에 망명 중인 팔라비 가문 사람들의 이란 귀국을 현 이란 정부에게 줄기차게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현 이란 정부 측은 현재 서방 등 해외에 망명 중인 레자 시루스 팔라비 왕세자를 비롯한 구 팔레비 왕족들이 이란으로 돌아올 시 곧바로 검거해서 팔라비 왕조 시기 팔레비 2세 전 국왕이 저지른 독재와 부패, 반인륜적 행위를 물어 사형을 시키겠다며 축출당한 레자 시루스 팔라비 왕세자와 파라 팔라비 전 왕비 등 팔라비 가문 인사들이 이란으로 돌아올 경우 이들을 검거해서라도 처벌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19] 망명 팔라비 왕조 가문 인사들의 이란 귀국은 현재까지 실현되지 못 하고 있다..[20] 최근에는 이란으로의 귀국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가망조차 없는 왕정복고를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2018년 최근 이란 반정부 시위에서 일부 시위대가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귀를 주장하는 반정부 구호를 외치기도 했었다.
일부 이란 현 신정체제에 적대적인 미국의 매파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복원시키되 과거 팔레비 2세 전 국왕이 저질렀던 폭정들을 고려, 감안해서 1993년 왕정복고 이후의 캄보디아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처럼 왕의 정치 개입을 완전히 금지하고 레자 팔레비 왕세자를 팔레비 3세로 즉위시켜 실권 없는 상징적 군주로 삼고 총리가 실질 권력을 휘두르는 의원내각제 형태의 입헌군주제 정부를 수립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왕정 폐지 이후 정권을 장악했던 론놀이나 폴포트 등이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 하며 독재와 폭정을 휘둘러 국민들의 증오심이 하늘을 찌르며 왕정 시절에 대한 향수가 존재하였고 훈센, 헹삼린 등 국내 권력 실세들이나 망명 반정부 세력들 사이에서도 왕정복위에 대한 여론이 존재했던 캄보디아와 달리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폭압적 통치와 비판 여론과는 별개로 현 이슬람 공화국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꽤 높은데다 이전 정부였던 팔레비 왕조와 팔라비 2세 전 국왕과 그의 자녀들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증오심이 상상이상이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위를 지지할만한 국내의 정치 세력이나 해외 망명 단체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21][22]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게다가 이란은 팔라비 가문 뿐만 아니라 팔라비 가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던 이전 왕조인 카자르 왕조 역시 붕괴된 카자르 왕조의 왕위 계승권과 왕정복위를 주장하고 있다.
이집트 역시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와 무하마드 나기브가 주도하는 군부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는데 2011년 아랍의 봄을 전후하여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극소수이지만 나세르의 쿠데타로 축출된 무하마드 알리 왕조를 복위시켜 왕정복고를 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다만 국민들 과반수가 압도적으로 공화정 현 체제를 지지하고 있는데다 이전 무하마드 알리 왕조 가문에 대한 이미지가 극도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이집트 무하마드 알리 왕조가 왕정복위 될 가능성은 이라크의 하심 왕조나 이란의 팔레비/카자르 왕조, 아프가니스탄의 바라크자이 왕조, 또는 이집트의 이웃국가인 리비아의 알 세누시 왕조가 다시 왕정복귀 될 확률보다 더 희박하다.
브라질은 마지막 황제인 페드루 2세가 워낙에 성군이었던 데다가 제정을 공화정으로 대체한 이후 브라질이 독재와 부패에 시달린 나머지 뜬금없이 제정이 폐지된 지 100년이나 지난 1990년대에 대대적인 제정 복고가 주장되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조지아에서는 역대 행정부의 삽질 때문에 바그라티온 왕가의 왕정 복고에 긍정적이라는 응답이 여론조사에서 2007년 40%가 나왔고 2013년에는 '''80%까지 나왔다.'''
한국의 경우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1919년 고종 사망 이전까진 복벽이 독립운동의 노선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상설, 김가진, 임병찬 등이다. 하지만 1919년 고종이 숨을 거두고 3.1운동이 발생하면서 공화주의로 재편하여 이 노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귀결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제 대한제국 시절과는 너무나도 별개의 나라가 되어버린데다, 황실과 왕조시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국제 정세 파악에 서툴러 일본에 나라를 뺏기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부정적 인식이 강한데다 의친왕 등 독립운동에 나섰던 일부[23]를 제외한 다수의 일가들은 친일반민족 행위를 한 점으로 인해 인식이 매우 나빠져 왕정복고가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조선 왕실이 없어진 지 백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대한제국 황실의 왕정 복고를 주장하는 이들이 극소수나마 있으나 사실상 멸절되었다고 보면 된다. 국민들이 대한제국 황실에 대해 부정적인데다 만약 대놓고 대한제국 황실의 왕정 복고를 주장하면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음지에서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자세한 것은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 참조.

2.4. 실현성과는 별개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 성향의 팔라비 왕조가 붕괴되고, 혁명 후 호메이니와 하메네이 등 이슬람 혁명을 주도한 이슬람주의파 세력들이 집권했거나 현재 집권하며 반미국가로서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이란 역시 이란 국가 평의회(National Council of Iran)와 이란 왕국의회, 이란 입헌당처럼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고와 미국 등 서방국가들에 망명중인 팔라비 왕실 인사들의 환국을 주장/지지하는 망명 단체들이 프랑스와 미국 등 서방 각국에 거점을 두며 활동하고 있다. 특히 이란 국가 평의회는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가 2013년에 창설하였는데 현재 레자 전 황태자가 이 단체의 대표로 재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는 왕정복고의 여부를 이란 국민의 결정에 맞기거나, 아예 불가능하면 왕정복고 주장을 포기하고 이란 정부와 협상을 통해서 이란으로 귀국할 수 있다며 왕정복고 주장의 일변도에서 다소 벗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8년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바뀐 네팔의 경우, 왕정복고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는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당(RPP-N)이 활동하고 있는데 현재 원내 4당 정도의 위치라고 한다. 다만 이들은 갸넨드라 전 국왕이 복위를 하되 전제군주로서 네팔 정치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감안하여 실권이 없는 상징적 군주로 두고, 총리의 권력이 강력한 일본이나 유럽 왕국들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리비아 역시 1969년 카다피의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는데 2011년 리비아 내전이 발발하자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혼란이 커질 경우 과거 카다피의 쿠데타로 축출당해 국외로 망명한 이드리스 1세 전 국왕의 손자를 왕위에 앉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내전 당시 과도국가위원회(NTC)등 반카다피운동을 주도했던 반정부 세력들은 입헌군주제가 아닌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공화제를 채택했다. (다만, 국기는 1950,60년대 왕정 시절 적흑녹 3색기 국기로 되돌린 상태다.)하지만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이후 리비아의 정국 상황이 악화되자 리비아 내부에서 다시 왕정복고가 거론되고 있다. 시대착오적이라 반대하는 자들도 있지만 헌법복구파나 수니파 민병대들 중에서 지지하는 사람이 꽤 되는 모양. 현재 미국에 망명을 간 리비아의 알 세누시 왕가는 국민의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반색하고 있다. 만약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면 카다피 정권 하에서 농업부 장관을 지낸 적도 있는 모함메드 알 세누시[24]가 유력한 국왕 후보로 보이며 아랍권에서 왕정이 폐지된 나라들중 유일하게 왕정이 복고된 국가의 사례가 될 가능성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는 왕국이었다가 1973년 군주제 폐지 이후 소련 침공과 소련군 철수 이후 부족, 군벌, 정부군, 탈레반간 내전으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나가는 막장 헬게이트 상태에 빠져 지금도 정치적으로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 때문인지 60년대 평화로웠던 왕정 시절이 그립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고 한다.[25] 일각에선 이 나라도 캄보디아처럼 UN 등 국제기구의 개입, 감시하에 왕정 복고를 추진해보면 어떻겠냐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2007년 모하메드 자히르 샤 전 국왕이 서거하였고 사망한 고 자히르 샤 전 국왕의 아들들이 굉장히 많은데다 만일 왕정복고를 한다면 전 왕조 바라크자이 가문의 일족들 중 누구를 아프가니스탄 새 국왕으로 옹립하여 왕정복고를 할것인지에 대해서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도 논란이 오가는 상황이다.[26]
칠레령 이스터 섬(라파누이)의 독립주의자들도 이스터 섬이 독립국가로 독립할 시 생존중인 라파누이 족의 마지막 국왕의 손자를 국왕으로 추대하는 입헌군주제를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이라크 역시 왕정복고의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지만 현재 영국에 거주중인 이라크 하심 가문들과 이라크 국내의 소수 근왕파 세력들을 중심으로 군주제를 복귀시켜 1958년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이 일으킨 군부 쿠데타로 전복된 왕정을 다시 재건하자는 주장도 종종 나오고 있다.[27]

3. 왕정복고의 조건


일단은 국민들이 왕정복고를 열렬히 원한다 하더라도 해당 국가의 실세들이 원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캄보디아만 해도 실세인 훈센 총리가 왕정복고를 지지했고 스페인도 프랑코 총통이 왕정복고를 결정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 정권이 세워지거나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던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등의 국가들은 20세기 중, 후반기 공산당 정권, 군사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화 운동 세력 지도자들이 다당제 공화정을 선호하고 왕정복고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어림없는 소리가 되었고[28] 대한민국도 해방 직후 민중들의 근왕 성격이 많이 남았지만 실세인 이승만이 왕정에는 코웃음을 치는 상황이라 어림도 없었다. 만약 민의만 따졌다면 좀더 많은 나라가 왕정복고가 되었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만 해도 선정을 펼쳤던 왕가에 대한 향수가 대단하여 왕정복고가 인기가 높고 전 대통령으로 10년을 집권한 카르자이도 원래 왕정복고파였지만 권력을 잡아보자 생각이 바뀌었는지 자신이 다 해먹었다.
왕정복고를 하려면 왕실로 옹립하기에 걸맞는 자격을 가진 가문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근대 이후 수백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열강들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독립 이후 왕정복고를 하고 싶어도 복고할 왕실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열강들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는 피아스트 왕가나 아센 왕가 등 이들 나라들을 지배하던 왕실들이 있었지만, 이후 열강들의 침략을 받아 수백년간의 오랜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토착 왕가란 개념이 사라져 버렸다. 이 때문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아예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할 당시 국체를 공화정으로 할 것인지 왕정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조차 필요가 없어서 바로 공화국으로 갔을 정도. 다만 발칸반도 일대의 그리스나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의 국가들은 19세기 왕국으로 독립하긴 했지만 위에서 말한 이유로 현지 토착 왕조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서 열강들의 간섭 하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나 글뤽스부르크 가문 등 독일이나 덴마크 등지의 외국 왕가나 귀족 가문들이 건너와 국가를 차지한 것이라 이들 신생 왕국들의 사례를 왕정 '복고'라고 보기는 어렵다.[29][30]
그리고 대체적으로는 일단 국민들이 "왕을 다시 모시자"는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나라가 막장이어야 한다.''' 왕정복고 얘기가 나오는 국가들은 과거엔 왕정이었으나 현재는 공화정인 국가일 테니 결국 왕정을 하자는 얘기는 공화정 체제 하에서의 국가가 다시 왕정을 회귀하는게 나을 거 같을 정도로 안 좋게 굴러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위안스카이조그 1세처럼 이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이들도 존재하긴 한다.
다만, 이는 왕실이 큰 업적을 남겨야 가능하다. 만약 왕실이 큰 업적을 남기지 않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왕정복고는 불가하다. 그런 국가의 국민들은 민주화 또는 정치 개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4. 이전과의 차이점


단 왕정이 복고된다고 해도 이전처럼 왕이 무엇이건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대개 왕정이 돌아오는 경우는 국민과 사회지도층이 왕정이 차라리 낫다고 판단해서인 경우이기 때문에 대부분 왕의 지위는 유지하되 권력은 주지 않는 입헌군주제로 개정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위안스카이, 조그 1세처럼 스스로가 군주가 된 경우에는 전제군주제가 된다.[31]
예를 들어 캄보디아의 경우 노로돔 시아누크를 다시 왕의 자리에 앉히긴 했으나 대신 그가 과거 저지른 과오를 감안하여 권력은 주지 않기로 결정. 현재도 캄보디아의 왕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못하고 있으며 영국의 경우에도 입헌군주제까지는 아니나 찰스 2세는 크롬웰의 독재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반감이라는 이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아버지 찰스 1세처럼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영국의 귀족 및 성공한 서민층으로 구성된 의회와 협의하는 형태로 정치를 수행해야 했으며[32] 그리고 찰스 2세 사후 왕위에 오른 남동생 제임스 2세가 그걸 깨고 전제정치로 돌아가려다 실권한 뒤에는 아예 권리장전을 만들어 정식으로 입헌 군주제를 도입했다.
스페인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게 권력을 물려받아 한때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권한을 휘둘렀던 적도 있으나 그는 이 권력을 민주화 실현에 사용했고 입헌군주제의원내각제를 택해 다시 실권이 사라졌다.

5. 가상의 사례



6. 관련 문서



[1] 펠리페 6세 국왕과 엘레나 공주, 크리스티나 공주의 경우 당시 유년기여서 그런지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2] 사실 실제로 찰스 2세는 장남의 위치에 더 가까웠다. 자세한 건 찰스 2세 문서 참조.[3] 브뤼미르의 쿠데타 이후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도 접촉했지만 거부당했다.[4] 다만 이는 호르티 개인의 권력욕 때문이라기보다 현실적인 상황 때문으로, 가장 가시적으로는 당시 소 협상국이라 불리며 연합한 이웃나라들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가 합스부르크 왕가에 극도로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를 1세가 헝가리로 가서 부다페스트로 진군하며 왕위 복귀 직전에 이르렀던 때에 체코와 유고는 아예 군대를 동원해 헝가리 국경에 데려다놓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질 시 침공하겠다며 무력시위를 하였다. 카를 본인도 이를 감안해서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놓았으며 이를 통해 주변국의 반발을 꺾겠다는 논리를 폈지만 프랑스 정부가 부인하며 무산되었다. 실제로 다소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얽혀있었지만 서방의 강대국들도 대체로 합스부르크 왕정복고에 긍정적이지 않았다.[5] 프랑코 역시 1947년 이후부터 왕 없는 왕국의 섭정으로 스페인을 통치했고 사후에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왕좌를 주었다.[6] 호르티는 중간에 배신을 때리려다 실패하여 유폐되었고 이후 망명해서 객사했다. 천수는 누렸지만...[7] 2차 대전 종전 직전까지의 독일은 프로이센의 힘이 절대적이었고, 독일 통일 또한 프로이센의 주도 하에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농경지를 기반으로 한 융커들이 대지주, 즉 귀족으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말기에 독일 동부에 소련군이 들어닥치면서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즉 프로이센의 발상지와 주 영역은 영구히 상실하였고, 여기서 융커 출신들 또한 서부로 피난하거나 소련군에 살해되는 등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거기다 그나마 독일에 남은 프로이센 영토 중 상당수가 동독에 있어서, 동독의 공산주의 체제에 따라 융커의 기반은 철저하게 끝장났고, 대신 남독일 지역과 라인 강 유역 공업도시들을 중심으로 독일이 재건되어 독일의 정체성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8] 카를로스 1세 이래로 스페인의 황금 시대를 이끈 왕조가 합스부르크였다. 보르본 왕가로 왕관이 넘어간 계기는 카를로스 2세의 유언 때문. 항목 참조.[9] 오스트리아 공화국 정부의 압박도 한몫 했을 것이라 추정이 되고 있다.[10]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공산당 독재 정권 수립, 군부 쿠데타등에 의해 왕정이 폐지당했다.[11] 파테트라오, 네팔 공산당 등 국내 좌익 반군들과의 내전에서 패망.[12] 사실 시메온 2세는 불가리아가 시장경제 전환이 실패하고, 국민들의 빈익빈 부익부는 심각했으며, 부패가 만연한 시점에서 총리로 당선되었다. 그래서 불가리아 국민들이 그를 최후의 희망으로 여겼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이나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건 사실이다. 개막장 상태였던 불가리아 경제는 그가 총리 퇴임을 할 시기에 실질 GDP 성장률이 5.5%로 호전되기도 했다.[13] 후임자인 차우셰스쿠의 스케일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 사람도 공산주의 독재자로서 잔악하기로 만만치 않았다.[14] 근데 그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몬테네그로나, 루마니아는 각각 세르비아소련 등 외세에 의해 왕실이 억울하게 쫓겨난 거라서,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여론은 높지만, 경제사정이 시궁창이라서 당장 왕정복고를 하면 왕실을 먹여살리는 비용에 대한 부담이 증가할까봐서 당장의 복위를 반대하는 것이다. 반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왕정복고를 하여 왕실을 부양, 감당할 수 있는 경제사정도 시궁창이기도 하고, 왕실이 민심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의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티토와 지프코프, 디미트로프 등 전쟁 당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나치 게릴라 전을 이끈 자국내 공산당 세력들에 의해서 왕정이 폐지되었고,(물론 불가리아는 자체적으로 나치독일을 몰아내고 공산정권을 수립하여 소련과 거리를 뒀던 유고슬라비아와 달리, 자국내 공산당 세력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공산정권을 수립했지만, 소련군이 2차 대전 말기에 불가리아로 진주하기 전에도 별도로 국내의 공산당 세력들이 나치독일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쳤다.) 국내의 여론이 압도적으로 공화정을 지지하는거라서 경우가 다소 다르다. 그래서 왕궁 거주권을 돌려받고 사실상 왕실이 복권되다시피한 루마니아몬테네그로와는 달리,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왕실 인사들은 왕궁으로 돌아가기는 커녕, 국내 거주와 입국 허용을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할 지경이다.[15] 문제는 이 망명 반후세인 인사들 대다수가 이라크 내부에 인지도도 없고 능력도 없고 오로지 수니파에 대한 증오와 권력욕에만 불타고 네오콘 비위나 맞추는데 유능했던 막장 인물들이 대다수였다는 것. 대표적인 인물이 딕 체니와 도널드 럼즈펠드를 구워삶는데 성공한 아흐메드 찰라비나 이야드 알라위, 누리 알 말리키 같은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의 사바사바로 인하여 이라크의 인적 기반이 거의 전멸해 버리고 이라크 내전이 터져 각지 곳곳에서 미군과 친미 이라크 정부에게 대항하는 저항 반란군들이 봉기하고 테러와 전투가 끊이지 않는 개판이 되어버린다. 물론 이들 저항군들은 미군과 이라크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후세인 축출 후 권력을 장악한 다수 시아파 세력들의 수니파에 대한 보복과 억압이 지속되어 열악한 정세 상황마져 개선되지 않고 악화됐고 2011년 아랍의 봄의 여파로 이웃나라 시리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이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라는 최악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 무리들이 이라크와 시리아 내륙 전 지역을 장악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16] 후세인 정권 붕괴 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전환했다.[17] 리비아는 카다피가 1969년 군부 쿠데타로 알 세누시 왕조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42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었지만, 이라크는 1958년 하심 왕조를 쿠데타로 축출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던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의 군부 독재 정권이 1963년 바트당의 쿠데타로 무너져 카심과 그의 일파 세력들이 그 과정에서 군부 반란 세력들에 의해 총살되는 등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가 성립된 이후에도 거듭되는 쿠데타와 정권 전복으로 정치적 혼란이 반복되어 리비아의 전 독재자였던 카다피처럼 장기 통치를 한 군부 독재자가 없다. 그 유명한 사담 후세인조차도 군인이 아닌 민간인 출신이었는데다 독재자로서 집권한 기간이 거의 20년 남짓 밖에 안 된다.[18] 마치 조선왕조 이후에 일제강점기와 일본 식민지배에서 해방 이후에 6.25 전쟁과 반독재 민중혁명, 독재 정치 등을 거치면서 조선 왕조 시절의 구습 잔재들 대부분이 없어져버린 한국과도 비슷한 양상이다.[19] 실제로도 이란 혁명 직후 국외로 도주한 팔라비 왕가에게 궐석재판으로 선고했던 사형판결이 아직도 이란 정치권에서 유지하고 있다.[20] 헌데 과연 팔라비 가문 인사들이 해외 망명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이란으로 귀국해 돌아온다고 해도 현 이란 정부가 팔라비 가문 일족들을 잡아다 사형이나 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애시당초 군주국이었다가 공화정으로 바뀐 나라들의 사례들 중 왕정 폐지 후 왕조 때 저지른 과오의 책임을 물어 전 국왕이나 왕족들을 사형시키거나 죽이는 사례도 있지만,(예: 프랑스 루이 16세, 영국 찰스 1세, 이라크 파이살 2세,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등) 대부분은 한국의 조선 왕조 전주 이씨 가문이나 네팔 갸넨드라, 불가리아 시메온 2세 전 국왕처럼 왕위를 잃은 뒤에도 법적 처벌을 받거나 사형당해 목숨을 잃지 않고 일반 국민으로 멀쩡하게 자기 나라 모국에서 사는 사람들도 많다.[21] 외려 현 이란 신정체제에 반대하는 이란의 해외 망명 반정부 단체들조차도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위보다는 터키나 튀니지처럼 세속주의적 공화정 정부 수립을 주창하는 공화주의/좌파 세력들이 더 많다. 이들 대부분은 이란 현 신정체제가 붕괴할 경우 팔레비 왕조 일가들이 철저히 배제된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세력들이 과연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귀를 지지할리 만무하다.[22] 결정적으로 캄보디아의 훈센 현 총리 같이 왕정복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인물이 이란 팔레비 왕조에겐 없다.[23] 상해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한 사람이다.[24] 리비아의 마지막 국왕인 이드리스 1세의 조카의 아들.[25]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옛날 왕정 통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6,70대 노인층들을 비롯하여 젋은 세대들도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들의 영향을 받아 왕정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26] 현재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현재 전국의 영토와 분열된 국민들을 통합하지 못하고 통치조차 못할 정도로 개판이다.[27] 반면 이슬람 다와당과 이라크 공산당, 이라크 바트당 등은 공화제를 지지하고 있다.[28] 특히 루마니아는 위에서 봤듯이 국민들의 대다수가 군주에게 실권을 주지않는 영국식 입헌군주제 형식으로 왕실을 복위시키는 것에 대해 강한 지지를 보였지만, 아직도 정치권에서는 이런 여론을 자꾸만 씹는 중이다.[29] 오죽하면 이들 나라들의 사학자들도 제2차 세계대전 후 외국계 왕조가 지배하던 자국의 왕정 체제를 폐지해 버림으로써 왕조 폐지 후 제대로 된 민족주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30] 특히 그리스와 알바니아는 독립 당시만 해도 공화국이었던 것이 외세의 압력이나,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강제로 군주를 모시는 나라가 된 경우라서(알바니아의 경우 그저 조그 1세가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서 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국민들 사이에서 왕정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그래서 자국이 다시금 공화정을 채택하자 이를 반기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31] 물론 두 사례 경우 적어도 위안스카이는 '전제적' 이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어쨌든 입헌군주제를 택했고 조그 1세도 입헌군주제를 선포하였다. 물론 이는 북한이 공화국이라 해놓고 3대세습하는 것처럼 겉모양만 입헌군주제 외치는 거지만 말이다.[32] 찰스 2세는 아버지 찰스 1세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려다 청교도 혁명으로 목이 잘려나가고 왕정이 폐지되어 어머니 앙리에타 마리아 왕비와 함께 해외 망명 생활을 뼈 저리게 겪었던지라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다만 당시 영국 의회의 권위가 크롬웰의 독재 통치로 크게 실추되어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찰스 2세도 나름대로 의회를 압박하며 통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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