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신라 토지대장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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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관련 항목
4. 바깥고리


1. 개요


2019년 12월 9일, 경상북도 경산시의 소월리 유적에서 발견된 6세기 경 신라시대 목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화랑문화재연구원에서 발견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될 예정이다.

2. 내용


지금으로부터 1,500년전 신라인들이 마을에 둑을 쌓고 그 쌓은 둑 덕분에 받은 혜택에 따라 일종의 이익분담금을 냈고 그 이익분담금을 ‘결’과 ‘부’라는 토지단위로 계산했음을 시사해주는 일종의 토지 관련 문서이다. 2019년 12월 9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직원이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발견했던 사람 얼굴 모양 신라토기의 안에서 발견하였다.
결(結)과 부(負), 곡(谷)과 답(畓), 제(堤) 등 기존 민정문서에는 수록되지 않았던 6세기 경 토지 관련 내용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어 학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아직 정확한 연구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당장 신라의 토지제도인 결부제가 기존 문헌자료보다 100~150년 정도 앞선 시기인 6세기 중엽에 시작되었음이 이 자료를 통해 드러나 고대 한국의 토지 제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서기 500년 경 경산시 인근 지역의 토지 현황을 기록한 토지관리 문서로, 골짜기(谷)와 (堤)을 중심으로 한 당시 신라 지방 촌락의 입지,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축조한 제방과 그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의 존재, 그리고 그곳을 대상으로 조세를 수취하는 중앙 정부의 지배 양상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논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우리 고유의 한자(漢字)인 답(畓)을 사용했다는 점, 조세 부과를 위한 토지 면적 단위는 결(結)이나 부(負)를 사용했다는 점도 밝혀졌다. 결은 대략 1만5400㎡, 부는 154㎡로, 100부가 1결이 된다. 토지 면적 단위인 결(結)과 부(負)는 지금까지 삼국통일 이후 사용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번에 발견된 목간을 통해 그 사용 시기를 6세기까지 올려볼 수 있게 됐다.
또한 후대 왕조의 경우 (수원화성 축조 이전까지) 지방관청 또는 유생들이 강제적으로 백성들을 징발하여 무보수로 요역(徭役)시킨 반면에, 신라 때는 공공사업의 일환으로 지역민들이 일정하게 규정된 사례를 받고 노동을 하였으며, 일이 마무리 된 후에도 결과물의 혜택에 따라 지역 공동으로 이익분담금을 관리, 지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와 같은 한반도 고대국가의 경우, 현전하는 당대의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1]을 고려해보면 본 유물들의 발견은 역사학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며 그 가치도 아주 높은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관련 항목



4. 바깥고리



[1] 특히 당시의 행정적인 부분과 관련된 기록은 전무한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