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이성산성 출토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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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인문학정보 위키
1990년,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이성산성(二聖山城)에서 발견된 38점의 신라시대 목간. 현재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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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 :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 유적지는 6세기 "신라성"
대한민국 사적 제422호로 지정되어 있는 하남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6~7세기 경 신라시대의 목간 38점으로,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1986년부터 1999년까지 7차년에 걸쳐 총길이 1,925m의 성 내부를 발굴조사하여 목간ㆍ목제인물상ㆍ철기류ㆍ호기류 등 3,352점의 신라 유물을 출토했을 때 함께 발견된 것이다. 목간은 이성산성 A지구 1차에서 15점, 2차에서 9점, C지구에서 14점이 발굴되었다.
이성산성 출토 목간은 다면형ㆍ원주형ㆍ장방판형ㆍ홈형 등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으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戊辰年"명 목간과 "褥薩"명 목간이다.
'무진년(戊辰年)'명 목간은 [앞면] 戊辰年正月十二日朋 南漢城道使…, [옆면] 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 [뒷면] ■■浦 ■■■■■■…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남한성과 수성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도사(道使)라는 지방관이 보여 당시 이성산성이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기능하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나오는 '무진년'은 603년으로 추정되며, 당시 하남 이성산성이 신라인들에게 남한성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욕살(褥薩)'명 목간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의 목간으로 추정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받았다. 욕살은 고구려의 지방관직명이며, 이 목간과 함께 요고라 불리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쓰이던 전통악기가 발견되어 당시 고구려인이 사용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왔다. 다만 지속적인 연구 결과 현재는 이 욕살 목간 또한 하남 이성산성의 다른 목간들과 마찬가지로 신라목간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상태다.# 이 욕살 목간의 기록은 辛卯五月八日向三△北吳△△△前褥薩郭△△△六月九日 이다.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이 이곳을 백제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한 이후, 이 목간이 발굴되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하남 이성산성은 백제의 왕도인 풍납토성-몽촌토성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백제가 만든 성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발굴 조사 결과 나온 유물 3천여점이 모두 신라의 것이고, 목간 또한 신라인들이 쓴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백제가 아닌, 신라가 만든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외곽성임이 확인되었다. 성의 구조 또한 확인해보니 토성(土城) 중심의 백제 산성과 달리 전형적인 신라식 석성(石城)이고, 수직으로 쌓아올린 성벽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삼각형 단면의 석축을 성벽 하단에 덧대 쌓는 신라 전통 양식의 보축(補築)으로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동아일보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이성산성 주인, 백제냐 신라냐… 미스터리 풀어줄 목간 한 점 - 신라 관직명 적힌 목간(木簡) 출토, 중앙일보 : “이성산성은 최고의 신라성”
이성산성 발굴을 통해 신라가 5세기 중엽부터 이미 한강 유역을 점령한 것을 넘어 백제 왕도(王都) 인근에까지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었음이 확인되어 역사상·학술상으로 중요한 유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목간들은 시간적으로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과 경주 월지 목간의 중간 쯤에 위치하여 고대 한국 목간문화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인문학정보 위키
1. 개요
1990년,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이성산성(二聖山城)에서 발견된 38점의 신라시대 목간. 현재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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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 :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 유적지는 6세기 "신라성"
대한민국 사적 제422호로 지정되어 있는 하남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6~7세기 경 신라시대의 목간 38점으로,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1986년부터 1999년까지 7차년에 걸쳐 총길이 1,925m의 성 내부를 발굴조사하여 목간ㆍ목제인물상ㆍ철기류ㆍ호기류 등 3,352점의 신라 유물을 출토했을 때 함께 발견된 것이다. 목간은 이성산성 A지구 1차에서 15점, 2차에서 9점, C지구에서 14점이 발굴되었다.
이성산성 출토 목간은 다면형ㆍ원주형ㆍ장방판형ㆍ홈형 등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으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戊辰年"명 목간과 "褥薩"명 목간이다.
'무진년(戊辰年)'명 목간은 [앞면] 戊辰年正月十二日朋 南漢城道使…, [옆면] 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 [뒷면] ■■浦 ■■■■■■…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남한성과 수성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도사(道使)라는 지방관이 보여 당시 이성산성이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기능하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나오는 '무진년'은 603년으로 추정되며, 당시 하남 이성산성이 신라인들에게 남한성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욕살(褥薩)'명 목간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의 목간으로 추정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받았다. 욕살은 고구려의 지방관직명이며, 이 목간과 함께 요고라 불리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쓰이던 전통악기가 발견되어 당시 고구려인이 사용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왔다. 다만 지속적인 연구 결과 현재는 이 욕살 목간 또한 하남 이성산성의 다른 목간들과 마찬가지로 신라목간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상태다.# 이 욕살 목간의 기록은 辛卯五月八日向三△北吳△△△前褥薩郭△△△六月九日 이다.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이 이곳을 백제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한 이후, 이 목간이 발굴되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하남 이성산성은 백제의 왕도인 풍납토성-몽촌토성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백제가 만든 성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발굴 조사 결과 나온 유물 3천여점이 모두 신라의 것이고, 목간 또한 신라인들이 쓴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백제가 아닌, 신라가 만든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외곽성임이 확인되었다. 성의 구조 또한 확인해보니 토성(土城) 중심의 백제 산성과 달리 전형적인 신라식 석성(石城)이고, 수직으로 쌓아올린 성벽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삼각형 단면의 석축을 성벽 하단에 덧대 쌓는 신라 전통 양식의 보축(補築)으로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동아일보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이성산성 주인, 백제냐 신라냐… 미스터리 풀어줄 목간 한 점 - 신라 관직명 적힌 목간(木簡) 출토, 중앙일보 : “이성산성은 최고의 신라성”
이성산성 발굴을 통해 신라가 5세기 중엽부터 이미 한강 유역을 점령한 것을 넘어 백제 왕도(王都) 인근에까지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었음이 확인되어 역사상·학술상으로 중요한 유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목간들은 시간적으로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과 경주 월지 목간의 중간 쯤에 위치하여 고대 한국 목간문화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유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