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2호

'''3호'''

4호
김해 봉황동 유적
'''수원화성'''
부여 가림성
수원화성의 얼굴마담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1. 개요
2. 상세
3. 화성 건축 이유
4. 역사
4.1. 이야깃거리
5. 기타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image] '''대한민국 사적 제3호'''
'''수원화성'''
水原華城 | Hwaseong Fortress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 외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384,666㎡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1796년
[image]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colbgcolor=#aa2951> '''수원화성'''
Hwaseong Fortress
Forteresse de Hwaseong

'''지정번호'''
817
'''등재연도'''
1997년
'''등재기준'''
(ii)[1], (iii)[2]
}}}}}}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

조선 정조, 정조실록(正祖實錄) 15년(1791)


조선시대 정조가 지은 수원시성곽 건축물.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었으며, 치밀한 사전 계획 하에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수원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3]
오늘날의 수원화성은 수 차례의 자연 재해와[4]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일부 복원한 상태이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는데 수원화성은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2. 상세



'''수원성'''(水原城), 또는 간단히 '''화성'''(華城)이라고도 부르며[5], 화성시의 '화성'도 바로 여기에서 따온 명칭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화성이 화성시에 없고 수원시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이는 수원시와 화성시의 역사적 행정구역 변천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화성시(화성군)는 원래 수원군에 속했는데,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수원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잔여 지역을 이 화성의 이름을 따 화성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때도 수원화성은 수원읍에 있었음에도, 분리 승격될 수원부 지역과 잔여 수원군의 동질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름만 따서 이렇게 된 것이다.[6]
실제로 수원과 화성은 같은 고을로 수원화성 축조 전까지 수원부(수원도호부)의 원래 읍치(邑治, 고을 소재지)는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일대였으나 바로 이 곳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조성하면서(현륭원, 현재의 융릉) 기존 읍치를 밀어버리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읍치를 이전한 것이다. 또한 수원부의 진산(鎭山)인 '화산(花山/華山)'은 수원 고을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를 본따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짓게 된 것이다. 1793년 수원부가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원부사를 '화성유수(留守, 오늘날의 수원시장)'로, 수원도호부(수원부)를 '화성유수부(화성부)'라 불렀다.[7]
군사적으로도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치성[8]의 활용으로, 성벽 전체 구간에 치성을 갖추어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세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9]
다만 세간에 퍼진 화포에 대비하여 성벽을 낮게 쌓고 뒤쪽에 언덕을 덧대었다는 이야기는 낭설에 가깝다. 이런 방식은 내탁외축이라고 하여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우리나라 전통의 축성방식이다[10][11] 성벽 높이도 삼년산성 같은 삼국시대의 거대 성벽이나 해외의 거성에 비교하여 낮은 것이지 조선시대의 읍성치곤 그렇게 낮지도 않다. 수원화성의 성벽이 낮은 직접적인 원인은 예산부족이다. 원안은 25척의 높이를 가진 성벽을 쌓는 거였는데 예산이 딸려서 20척 높이로 낮춰 쌓았다고.[12]
특이점으로, 수원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정문이 아니다.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 일반적으로 동북아에서는 남문이 정문이지만, 수원화성에서는 정조가 한성에서 수원화성으로 올 때 북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임금이 들어오는 문을 정문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장안문은 팔달문보다 크다.
간혹 팔달문을 화성으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팔달문은 화성의 일부분일 뿐이다. 한양도성숭례문/남대문과 마찬가지로 교통을 이유로 좌우의 성벽이 헐린 상태라서 독립적인 건축으로 보일 뿐이다. 사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임에도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좀 안습이다.
2011년 이후 팔달문 좌우 및 남수문 일대를 제외한 성곽 전 노선이 연결되어 팔달문을 기/종점으로 삼아 화성 일주가 가능하다. 화성 일주는 성인 기준으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팔달문과 같은 이유로 성벽 좌우측이 절단된 장안문 및 성벽 일부가 헐린 창룡문의 경우 육교로 연결되어 있는데[13], 팔달문 인근이 이렇게 연결이 어려운 것은 이미 못골시장, 영동시장 등을 비롯한 재래시장 및 상가들이 밀집한 상태라, 이걸 다 헐어내고 성곽을 연결시킨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
2012년 6월 9일, 1922년 대홍수 때 파괴된 남수문의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수원천 복개구간 철거 공사와 맞물려 이루어진 공사인데, 상부의 여장은 화성성역의궤에 근거하여 복원되었으나, 하부의 수문은 9개의 수문은 유지하되 홍수 대비를 위해 세부는 상당히 다르게 복원되었다. 원래의 수문은 오각형 기둥이 이중으로 배열되고, 전/후열의 기둥 사이가 비어있었으나, 복원된 남수문은 일자형 기둥으로 건설되었다. 이는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진행되었지만, 향후 학계에서 논란의 소지는 남아있다. 여하튼 현재는 팔달문 좌우의 성벽을 제외한 전 성벽이 연결된 상태.
걸어서 관람도 가능하고, 성벽을 따라 산책로가 매우 잘 조성되어 있고, 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이는 경치나 소소한 볼거리도 훌륭한 편이다.[14] 특히 화서문 - 장안문 - 화홍문 - 방화수류정 - 활터까지 이르는 성벽길은 조명도 꽤 괜찮게 해놓아서, 해진 저녁에 연인과 분위기를 잡고 싶다면 추천하는 코스다. 화홍문 옆의 호수인 용연 옆 언덕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수원에서 숨겨진 데이트 핫 플레이스. 방화수류정에서 보이는 화성 전체의 경관도 좋고, 용연에 조성된 공원에서 올려다보는 방화수류정도 아름답다. 관광 열차[15]를 사용하여 관람도 가능하다. 화성 관람 시 관람료는 성인 기준 1,000원이며 중간중간 매표소에서 직원이 표를 검사하는 방식이다. 수원시민은 주소가 기재된 신분증을 제시하면 관람료가 면제된다. 또한 '2016년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창룡문 밖 주차장에 수원화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열기구가 생겼다. 다만 좀 비싸다.[16]
화성 성곽 내부에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지으면서 수원유수부 관아를 화성행궁에 위치시켰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가 세워지면서 1912년 수원유수부를 철폐하여 관아가 폐지되었다. 이후 수원부청이 세워졌으나 조선총독부의 결정으로 수원부청은 수원화성 바깥으로 나가게 됐다. 결국 현대 대한민국에 와서 수원화성 내부에는 오랫동안 수원시청 및 수원시 관련 행정관청이 단 하나도 없었다. 2014년 4월 팔달구 구청이 수원화성 내부 종로사거리에 입주하였다. 이로써 '''102년 만에 수원화성 내부에 수원시 지방관청이 처음으로 복귀했다'''.

3. 화성 건축 이유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17] 그는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천하였으며, 정교한 석축술을 보여준 것이 이 화성이다.
또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18]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 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19] 또한,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와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다.[20]
일설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혜경궁 홍씨와 같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병으로 정조가 일찍 사망해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튼 왕릉[21]을 옮기고,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이 곳에 두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 하나 공들여 쌓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평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에 굳이 성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상인들의 유통을 활발하게 하려는 정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천도설은 말 그대로 '''썰'''에 불과하다. 수도인 한양에 비하면 화성은 '''1/16 수준에 불과'''하며[22] 행궁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즉 수원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화성을 내성으로 삼아 행궁을 확장한 후 별도의 외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의 구상이 있었다면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해 어딘가에 사료로서 논의가 남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딱히 발견된 근거가 없다. 게다가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수운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이, 한강이라는 거대한 내륙 수로를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지극히 적다.[23]

4. 역사


성벽 자체가 외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벽은 자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든 점을 들어 동양 성곽 건축의 백미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단은 돌로 쌓고 상단을 벽돌[24]로 쌓았으며, 망루 간의 간격이 화포의 사거리 이내로 서로 엄호가 가능하며, 이전 조선의 성들과는 다르게 망루가 성 내부에 있다. 이전에 지어진 성에는 외부에 독립된 형식으로 있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독립된 망루를 점령하고 홍이포를 배치하여 쏘는 등 부작용이 있었다. 또한 화공을 위한 장치와 화재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도 마련되어 있으며, 약식이나마 대포에 대한 대비도 되어있는 등, 방어에 상당히 신경을 쓴 형태다.
읍성(邑城)이 행정적 형식에 그쳐, 방어 시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던 조선의 성들을 고려한다면,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록된 것이다.
[image]
한국전쟁 당시의 훼손되어 있는 장안문의 모습.[25] 전쟁의 참화를 워낙 심하게 겪은 나머지, 복원 전에는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았는데, 동문은 도망가고 북문은 반만 있네"'''[26]라는 자조 섞인 노래까지 있을 정도였다.
참고로 저 반파된 장안문의 모습은 1951년 1월경의 모습이고, 1년 뒤인 '''1952년에는 홍예의 형태까지 더 심하게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참고 한국전쟁 당시 수원화성의 4대 문 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게 장안문이다.
화성성역의궤가 온전히 남아있어, 성이 완전히 무너져도 다시 복원할 수 있다. 현재 화성은 복원물이나, 철저히 기록에 의거하여 복원했기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27] 즉 '''이론상으로는 완전 복원이 가능한 성.''' 일제강점기에 거의 반 해체된 상태였고, 한국전쟁 당시에 미군, 북한군 등의 공습으로 파괴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거의 복원됐다.
수원화성 복원과 화성성역의궤의 상관관계에 착안해 진행된 프로젝트 *문화유산기술연구소
그러나 복원 이후 현대에도 은근히 수난을 겪고 있다. 예전에 화성 서장대에서 20대 청년이 술을 마시고 서장대 안에서 자다가 술김에 추워서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서 불을 질러 태워먹었다. 이 바람에 정조가 친히 쓴 글씨였던 서장대 현판까지 전부 다 불타버렸다. 지금 있는 서장대는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미 불타버린 서장대도 1990년대에 복원한 것이었다.'''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누군가가 불을 지르려 시도하질 않나,[28] 성벽에다 불을 지르질 않나. 참고로 불을 지른 용의자는 중학생이라고 한다. 용의자 주장에 따르면 핸드폰을 찾으려고 했다고. 엄밀히 말해 성벽 자체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닌 성벽 주변 억새밭에다 불을 질렀다. 솔직히 말해서 핸드폰 찾겠다고 억새밭에 불 지르면 그 안에 핸드폰도 통구이 될 거 뻔히 알 텐데 정신줄 놓고 불 지르진 않았을 테고, 억새밭 속에 짱 박혀서 담배를 피우다가 실수로 불냈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다.

4.1. 이야깃거리


  • 사실 화성 건설이 완전히 정조의 기획만은 아니었고, 정조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실학자로 익히 알려진 유형원이 철저한 계산 하에 현재 화성 부지에 성을 건설하면 적절할 것이라는 안을 낸 바 있었다. 이 안건의 적절성이 후에 정조와 당시 노론 대신들 사이에서 검토, 수용되고, 실제로도 그에 걸맞은 성과를 거두게 되자, 화성 건설 시에 유형원은 죽은 뒤에나마 이조참판을 제수받는 등 크게 찬탄받았다. 실제로 실록에 유형원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때가 바로 정조 때인데, 유형원의 생애(1622년 ~ 1673년)와는 100년이 넘는 간극이 있다. 유형원이 처음 정계에 언급된 것도 죽은 뒤인 숙종 때인데 말 그대로 무시당했고, 영조 대에 들어서야 겨우 '반계수록'의 종합적 시각이 주목받으면서 일종의 고전과 같이 주목받게 된다. 그것이 절정에 달했던 것이 정조 때. 근래 학계에서는 '실학'의 실체에 대한 회의가 많이 일고 있지만, 유형원의 삶은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실학'의 언급과 빼닮아 있다.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실학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면도 많지만, '뛰어난 저술 → 그러나 생전에는 무시당함 → 영조·정조 시기 발굴되어 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 화성에서 보이는 시설 중 하나인 포루(砲樓) 역시 정조나 정약용의 독창적인 기획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포루를 기획한 사람은 서애 류성룡으로, <징비록>에 따르면 1592년 중양절(음력 9월 9일) 포루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것과 구조를 적고 있는데, 수원화성의 포루와 비슷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대에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6년 모형을 만들다 중단하였으며, 지인 김사순에게 편지를 통해 설계를 보내자 김사순이 포루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지역 주민들이 '전에는 이런 거 없어도 적을 잘 막았는데 왜 이런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가'하며 반발했고, 김사순은 강행하였으나, 병으로 눕자 작업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리고 터진 게 제2차 진주성 전투... 이외에도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훗날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나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한번 활용해보라'고 하거나, <설책지법>[29]에서 총포를 설치하는 형태의 목책도나 성을 고안하는 등 총포로 아군을 방어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유형원처럼 정조 대에 재조명받거나 하진 못했지만.
  • 정조는 측근들에게 화성을 이름 그대로 아름답게 지으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성이 완공된 뒤 정조가 친히 와서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대동했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정조에게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드는 성을 굳이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정조의 대답, "아름다움이 적을 이기느니라!" 실제 정조가 한 주장은, 성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들면 보는 사람의 기를 꺾으므로, 성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정도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7년(1793년) 12월 8일(정묘) 1번째 기사. 확실히, 수원화성은 유달리 미적인 측면에도 많은 신경을 쓴 건축물인 것은 사실이다.
  •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달리, 정약용은 다른 업무들이 많아 수원화성 건설을 직접 지휘하지 못했다. 그는 수원화성 공사가 끝난 이후에야 수원성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성이 지어지지 않았음에 한탄했다. 하지만 만일 정약용의 주장대로 성을 지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 당시 정약용은 수원화성 전체를 중국식 벽돌성으로 지을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와 다른 대신들은 당시 조선이 벽돌 제작 및 건축 기술이 부족하고,[30] 근처에 석재 광산이 발견[31]되었으니, 기존 방식대로 쌓기로 결정하고 진행했다. 그러다 수원화성 공사 후반부부터 벽돌 건축 노하우가 쌓이면서 옹성이나 포루, 공심돈 등 부가적인 구조물에 한해 벽돌 위주로 지은 구조물들이 나타났는데, 이렇게 지은 곳들은 횡력에 약한 벽돌의 특성상 후대에 무너져서 다시 쌓은 기록이 심심찮게 실록에 나온다.
  • 수원화성을 소개하는 곳에 보면, 성문의 화공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소화전인 오성지(五星池)를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실제 중국의 오성지를 살펴봤던 정약용이 건설에 참여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적당히 만들다 보니, 실제 오성지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32] 벽돌 사용과는 반대되는 케이스.
  • 수원화성 이후에 축성된 성은 덕진진이나 초지진같은 강화도에 있는 돈대 정도인데 훼손 정도가 심해서 성곽사 연구에 화성이 결국 그 끝을 장식하고 있다. 조선시대 산성[33]에선 남한산성, 북한산성에 이은 완성형으로 보아 비교 연구하거나, 성곽 축조 양식의 마지막 단계로 연구하고 있다.
  • 팔달문은 1975년 복원을 했는데, 이 때 공사가 잘못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책임을 맡은 대목장 신응수의 말로는, 기둥의 굵기가 미묘하게 가늘어 문화재청 측에 계속해서 두께를 두껍게 해야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결국 복원 중에 화성성역의궤가 발견되고 기둥의 치수를 확인하니 대목장의 말이 옳았다고. 결국 후손들에게 '나는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니 너희가 지혜롭게 해결해 달라.'고 기둥에 먹칼로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문화재청 정밀 진단조사 결과, 들보 등에 심한 균열과 뒤틀림이 생겨, 2011년부터 완전 해체 보수공사를 시작해서 원래대로 복원 공사를 해, 2013년 초에 완공되었다.
  • 현재도 계속 화성 복원 공사는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 한국전쟁 이후 화성은 대부분 완파되고, 성곽 주위로 많은 이들이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화성이 본격적인 복원 공사가 이뤄지면서 제모습으로 복원이 이뤄지게 된거다. 지금도 꾸준히 문화재 구역 안의 사유 주택들을 매입해서 허물고 문화재 구역으로 바꾸는 공사가 계속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화성 인근지역은 건축 규제가 심한 편으로, 많은 주민들의 불만사항이기도 하다. 현재는 남공심돈으로 대표되는 팔달문 주변 일부만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복원되지 못했다.[34]
  •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곳은 원래 효종의 묫자리가 될 예정이었지만, 당시에는 민가(즉, 옛 수원 시가지) 철거 문제 때문에 취소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민가들을 모두 허물고(이에 대한 대책이 바로 수원화성 건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신도시를 건설해 개발구역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것), 현륭원 조성을 추진하게 되었다.

5. 기타


  • 수원시의 랜드마크이다보니 수원시와 관련된 것에는 꼭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수원시의 로고도 버들잎 모양의 전체 성곽 형태와 가장 높은 구조물인 서북공심돈을 나타낸 것이다.
  • 2015년, 수원시에서 수원화성 축조 220주년을 기념하여 2016년을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지정하였다. 지정과 동시에 약간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문인 창룡문을 비롯하여 성곽을 전반적으로 보수하는 한편 장안문 근처의 건물들의 벽을 정조와 화성을 상징하는 그림들로 채워넣고 있다. 팔달문 쪽은 접근성 때문에[35] 그런 그림을 넣는 일 자체가 어려워서 그냥 두고 있다.
  • 수원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 FC의 엠블럼에 수원 화성 로고가 새겨져 있다. 여담으로, 수원 FC가 1부 리그로 승격하여 수원 더비가 성사되었을 때에 만든 기념 로고에는 두 구단 엠블럼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수원 화성이 로고가 되었다.[36] 이후 K리그1 2020시즌공식 인트로에 수원 삼성을 상징하는 건물로 등장한다.
[image]
[image]
  •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의 전광판에 수원화성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수원에서 개최된 2015 KBO 올스타전 로고에도 수원의 랜드마크인 화성의 이미지가 삽입되었다. 또한 이곳 4층 스카이존에 앉으면 전광판 뒤로 서장대가 보인다.
  • 대전노은고등학교가 수원화성을 모티브로 하여 지어졌다. 아름다운 학교 건물상도 받았다.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수원시 로고도 수원화성을 형상화했으며, 수원을 연고로 한 축구 구단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 FC의 엠블럼에도 수원화성이 형상화되어 있고, 수원 연고의 야구 구단 kt wiz의 홈구장 수원 kt 위즈 파크 전광판 위에도 수원화성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다. 제10전투비행단도 정문이 수원화성의 구조물을 형상화한 것이다.[4] 주로 남수문이 수해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5] 축성 당시 이름은 화성이지만, 관공서나 매체에서는 화성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수원 화성이라는 명칭으로 자주 부르고 있다.[6] 실제로 시와 군이 분리될 경우, 특히 그 군의 전통적인 중심지가 분리될 경우 지명으로 시 지역과 군 지역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기존 지명에서 한 글자를 바꾸거나(청주시 - 청원군 등), 고지명(충주시 - 중원군 등) 혹은 유적 이름(경주시 - 월성군 등)을 쓰는 방식을 썼다. 다만 전통적인 중심지가 아닌 곳이 시로 분리되는 경우 시 쪽이 새 이름을 지었는데 대개 시가 될 지역의 읍면명을 땄다(사천군 - 삼천포시 등).[7] SBS 드라마 은실이에서는 이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가상의 행정구역 '''화산군'''이 등장한다.[8] 성벽 중간중간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는 구조물을 말한다. 치성에 병사들의 감시초소를 지어 올린 것은 포루(鋪樓), 여기에 휴식처로서의 기능을 더한 게 각루이다. 또한 총포를 활용하기 위해 치성을 개조한 것은 포루(砲樓), 아예 벽돌로 작은 요새를 지어올린 것이 공심돈이다.[9]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게 사각없이 서로를 엄호할 수 있는 성형 요새의 삼각형 포루(砲樓)다.[10] 오히려 이렇게 안 지은 성을 찾는 게 어렵다.[11] 사실 당시 조선은 화포에 대비하여 특별히 새로운 설계를 할 필요가 없었다.19세기 이전엔 동아시아에 화포로 성벽을 완전히 때려부술 수 있는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성첩(성 위에 병사들의 엄폐물로 쌓은 담장)을 무너트리거나 외벽을 일부 파손해서 기어올라갈 만한 틈을 만드는 게 한계였다.[12] 사실 수원화성은 조선에서 중국식 성곽 시설을 도입하여 쌓은, 기존에 없던 성곽 건축의 시제품으로서 가치가 높은 것이지 군사 요새로서는 여러모로 부실한 점이 많다. 치성이 잘 갖춰있긴 해도 다중성벽에 천연 해자를 갖춘 진주성, 평양성이나 지금 가도 토나오는 험지에 지은 남한산성, 북한산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13] 도로 위로 육교를 만든 뒤 성벽을 육교로 연결시킨 구조로 만들어놨다.[14] 특히 한양도성의 구조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종로라든가, 종로 옆의 수원천이라든가. 한양도성으로 치면 종로청계천이 나란히 가는 모습과 흡사하다.[15] 노면전차는 아니고, 서울대공원의 코끼리 열차와 같은 형식이다.[16] 15분 정도 탑승하는데 성인 18,000원, 청소년 17,000원, 어린이 15,000원이며, 수원시민의 경우 연령 구분 없이 성인 요금의 30% 할인된 가격인 12,600원에 이용할 수 있다.[17] 어떻게 보면 루이 14세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한 이유와 유사하다.[18] 추존왕 장조. 사실 정조는 아버지를 높이긴 했지만 왕으로까지 추존하진 못했다. 장헌세자가 왕(장종)으로 추존된 건 대한제국 고종 때인 1899년의 일. 1901년에는 다시 황제(장조 의황제)로 추존된다.[19] 이때 사용된 거중기에 대해서는, 사용된 거중기가 총 11대여서 작업 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는 설과, 거중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고 대신 당시 조선의 모든 기술을 종합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축성 기간과 비용을 상당히 아꼈다는 설 두 가지가 존재한다.[20] 조선 후기에 개성, 강화, 광주, 수원을 유수부로 둔 것은, 바로 이들 지역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적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수도권 지역의 1차 저지선인 셈.[21] 사도세자가 사후 추증이 됐긴 하지만, 어쨌든 정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 정도 대우였다.[22] 성벽의 길이로 따지면 한양도성의 총 길이가 약 18.6㎞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총 길이가 약 5.5km이다.[23] 이 시기에는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일대까지가 해안선이기는 했지만, 마포 광흥창~서소문을 통해 한성으로 접근하는 경로와 야목리 일대에서 수원화성으로 접근하는 경로는 거리가 4배 차이다. 거기다가 도로 공사를 장려하지 않는 조선의 교통망을 생각하면...[24] 일반적으로 벽돌 양식은 중국풍으로 우리나라에서 벽돌을 이용한 건축물은 희소하다. 광주 왕륜동(618여 눌, 61만 8천여 개), 북성 밖 가마(37여 눌, 3만 7천여 개), 서봉동 가마(39여 눌, 3만 9천여 개)에서 조달되었다.출처[25] 수원시 경계 표지판(This is Suwon)이 장안문 앞에 있는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에는 아직 장안구 중북부 지역(정자동, 송죽동, 조원동 등)이 수원시에 편입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당시 화성군 일왕면). 이 지역은 1963년 수원시에 편입되었다.[26] 혹은 운율을 살려 "반만 있네" 대신 "부서졌네"라고도 한다.[27] 사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복원물, 혹은 최근에 건축된 건물은 극히 적은데 수원화성이 지정된 이유는, 원래 설계 도면과 건축 방법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과거 건축 방법 그대로 재연해서 복원했다는 점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28] 문에 불을 질렀는데, 다행히 서장대 사고 이후 방화 창호지를 썼기 때문에 큰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다.[29] 만기요람에 실려 있다.[30] 한반도의 토질은 전반적으로 중국 벽돌 건축의 중심이 된 북중국 지역의 것에 비해 습기가 많아, 벽돌 제작뿐만 아니라 전축성 건축에도 별로 적합하지 않다. 대신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해, 돌을 통짜로 이용해 만든 건축물이 많다. 이는 '중국은 전탑, 한국은 석탑, 일본은 목탑'이라는 개략적 비교로도 알 수 있다.[31] 화서문 밖 인근에 숙지산(熟知山)이 대표적인 석재 광산이었다. 당시 숙지산은 돌 뜨는 터(浮石所)로 불렸다.[32] 정약용 본인이 공사 이후 성을 둘러보며 남긴 한탄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말한 벽돌 사용.[33] 성이 팔달산에 걸치고 있어서 평산성으로 구분한다.[34] 정확히는 팔달문 기준 서남암문쪽으로 95m, 남수문쪽으로 160m 정도가 건물이 들어선 관계로 복원되지 못했다.현재는 팔달문시장의 일부가 철거되는 등 복원의 기초가 다져지고 있다. 물론 반대하는 분들도 많다.[35] 육로가 연결된 장안문과 달리 팔달문은 사방이 이미 상권이 형성되어있어 완전히 단절되어있어 화성문화제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직접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36]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