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신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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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신성비 제1비, 신라 591년, 석(石), 높이91.0 cm×너비44.0 cm, 국립경주박물관(사적 제22호인 남산신성을 쌓을 때의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한 비석이다.) 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 남산신성비 제1비
1. 개요
2. 내용
2.1. 제1비
2.2. 제2비
2.3. 제3비
2.4. 제4비
2.5. 제5비
2.6. 제6비
2.7. 제7비
2.8. 제8비
2.9. 제9비
2.10. 제10비
3. 바깥고리


1. 개요


慶州 南山 新城碑. 신라 진평왕 13년(591),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에 위치한 남산 신성을 쌓은 후 이를 기념하여 세운 신라시대 비석 10기. 현재 제1비부터 제10비까지의 10기 모두를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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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 남산신성비(경주 남산에 새로이 성을 쌓으면서 세운 비석)
경상북도 경주시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 진평왕 시기 경주 남산에 쌓은 성곽 관련 기념비로, 지금까지 총 10기가 발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사전에는 업데이트가 아직 되지 않아 1934년부터 1994년까지 모두 9기가 발견되었다고 설명했다. 1기가 더 발견된 이후 서술된 국립중앙박물관 등의 소개문에서는 1934년부터 2000년까지 총 10기가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이와 같이 아직도 발굴 중인 상태라 이후 새로운 비석이 또 추가될 수 있다.
1934년에 경주 탑리 식혜곡 부근에서 제1비가 신고된 이후 지금까지 총 10기가 발견되었는데 원래의 위치에 놓였다고 추정되는 제9비만이 성벽 안쪽에 붙어 출토되었고, 나머지는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제3비는 배반리 사천왕사지, 제4비는 탑리 일성왕릉, 제5비는 남산에서 떨어진 사정동 영묘사지[1]에서 발견되었다. 이중 제1비와 제9비는 완형이나 제2·3비는 상하 2편으로 절단되었고, 제4·5·6·7·8비는 단편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견된 모든 남산신성비에는 591년 2월 26일엔 서약을 새겼다. 서약의 내용은 축성하여 3년 내로 무너지면 벌을 받겠다는 것이다. 3년 동안 붕괴되지 않은 성곽을 축조하고자 책임을 부여한 것으로 실상 고대 한국 사회의 율령(律令)과 같은 효력이 있다. 비문에는 보이지 않으나 약속의 대상은 국왕으로, 왕에게 바친 충성 서약의 일종이기도 하다.
각 남산 신성비마다 외형이나 글자 수 등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문단이 3단락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는 학계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한다. 다만 기재순서는 비문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첫째 단락은 남산 신성의 축성과 관련된 연월일로 신해년(辛亥年) 2월 26일을 기재한 부분과 함께 축조 후 3년 이내에 성이 붕괴되면 벌을 받는다는 서사문(誓事文)이다. 이는 모든 남산 신성비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구절로서 제1비부터 제10비까지 모두 남산 신성비임을 알게 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후 둘째 단락과 셋째 단락은 각각 역을 동원하는 데에 책임을 진 신라 유력자의 인명을 열거한 부분과 각 단위집단들이 축성을 담당한 수작거리(受作距離)를 나타낸 부분이지만 비문에 따라 양자의 순서가 뒤바뀐 경우도 있다.
역 동원에 책임을 진 집단의 인명은 그 역할에 따라 구분하여 직명, 출신지명, 관등명의 순서로 열거하였다고 한다. 첫째, 도사(道使)나 나두(邏頭) 등 왕경 출신의 지방관명을 열거한 부분, 둘째, 군(郡)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역역동원에 참여한 지방유력자들인 촌주(村主), 장척(匠尺), 문척(文尺) 등을 열거한 부분, 셋째, 직접 축성을 담당한 행정성촌 출신의 지방유력자들이 지닌 직명과 이름을 열거한 부분이다.
경주 남산 신성의 둘레는 대략 2800여 보로 분담거리를 평균하여 나누면 적어도 200여 집단이 축성에 동원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이 각각 하나씩의 비를 세웠다면 남산 신성비는 앞으로 적어도 수십 개에서 많게는 200개가 발견될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현재 경주시의 예산 및 발굴 기술 문제로 아직 경주 남산 일대의 발굴이 채 5%도 안 될 정도로 거의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차후 수많은 신라시대 유물 출토를 기대해볼 수 있는 상황이다.
6세기 신라의 지방통치체제 및 역 동원과 관련한 문제, 촌락구조 문제, 성곽 축조 기술 및 동원 체계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문서 자료로 인정받는다.
여담으로 현재 같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명활산성비가 꽤 오랫동안 이 남산 신성비 중 하나로 오해받았다. 옛 학계에서는 그동안 명활산성비를 남산 신성비 제9비로 지정했으나, 1988년에 추가로 발견된 비석 파편의 내용을 해석한 결과 남산 신성비보다 40년 앞선 진흥왕 12년(551)에 명활산성을 축조하며 세운 비석이었으므로 제9비를 명활산성비로 따로 명명하였고, 기존 남산 신성비 제10비를 제9비로 정정하였다. 이후 2000년에 지금의 제10비가 발견되어 다시 10기가 되었다.

2.1. 제1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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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및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1비

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節如法以作後三」

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阿良邏頭沙喙」

音乃古大舍奴道使沙喙合親大舍營沽道使沙」

喙▨▨知大舍郡上村主阿良村今知撰干柒吐」

▨▨知尒利上干匠尺阿良村末丁次干奴村次」

▨▨干文尺▨文知阿尺城使上阿良沒㚓生上」

▨▨尺阿次干文尺竹生次一伐面捉上珎」

▨門捉上知次捉上首尒次小石捉上辱次」

 ▨▨受十一步三尺八寸」

신해년(辛亥年) 2월 26일, 남산신성(南山新城)[2]

을 지을 적에, 법에 따라서 (성을) 지은지 3년이 지나서 붕파(崩破)한다면 죄를 내릴 것이라 교사(敎事)하였으니, 교를 알려서 이를 서사(誓事, 맹세)토록 한다.[3]

아량나두(阿良邏頭)인 사훼(沙喙)의 음내고(音乃古) 대사(大舍),

노사도사(奴舍道師)인 사훼(沙喙)의 합친(合親) 대사(大舍),

영고도사(營沽道使)인 사훼(沙喙)의 ▨▨▨지(▨▨▨知) 대사(大舍),

군상촌주(郡上村主)인 아량촌(阿良村)의 금지(今知) 찬간(撰干),

칠토▨▨지이리(柒吐▨▨知尒利) 상간(上干),

장척(匠尺)인 아량촌(阿良村)의 말정차(末丁次) 간(干),

노사촌(奴舍村)의 차▨▨례(次▨▨禮) 간(干),

문척(文尺)인 ▨문지(▨文知) 아척(阿尺),

성사상(城使上)인 아량(阿良)의 몰내생(沒㚓生) 상▨(上▨),

▨척(▨尺)인 아▨▨차(阿▨▨次) 간(干),

문척(文尺)인 죽생차(竹生次) 일벌(一伐),

면착상(面捉上)인 진앙▨(珎卬▨),

문착상(門捉上)인 지례차(知禮次),

▨착상(▨捉上)인 수이차(首尒次),

소석착상(小石捉上)인 욕▨차(辱▨次)[4]

… 11보(十一步) 3척(三尺) 8촌(八寸)을 받았다.[5]


2.2. 제2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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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및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2비

 阿大兮村

年二月廿六日南山新城作節如法▨ 三」

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阿且兮村」

道使沙喙勿生次小舍仇利城道使沙喙級知小舍」

大支村道使喙所叱孔知郡中上人沙」

刀城西利之貴干久利城首利之撰干匠」

尺沙戶城可沙里知上干文尺美叱▨之一伐阿大」

兮村作上人所之上干尺可尸▨之一伐文尺」

毛之一尺面石捉人仁尒之一伐回石捉人」

首叱兮之一尺石捉人乙安尒之彼小石捉人」

丁利之彼受作七步四尺」

아대혜촌(阿大兮村)

신해년(辛亥年) 2월 26일,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지을 적에, 법에 따라서 (성을) 지은지 3년이 지나서 붕파(崩破)한다면 죄를 내릴 것이라 교사(敎事)하였으니, 교를 알려서 이를 서사(誓事, 맹세)토록 한다.

아차혜촌(阿且兮村)의 도사(道使)인 사훼(沙喙)의 물생차(勿生次) 소사(小舍)

구리성(仇利城)의 도사(道使)인 사훼(沙喙)의 급지(級知) 소사(小舍)

답대지촌(答大支村)의 도사(道使)인 ▨훼(▨喙)의 소질공지(所叱孔知) ▨

군중상인(郡中上人)인 사도성(沙刀城)의 평서리지(平西利之) 귀간(貴干)

구리성(久利城)의 수구리지(首仇利之) 찬간(撰干)

공척(匠尺)인 사호성(沙戶城)의 가사리지(可沙里知) 상간(上干)

문척(文尺)인 미질▨지(美叱▨之) 일벌(一伐)

아대혜촌(阿大兮村)의 작상인(作上人)인 소평지(所平之) 상간(上干)

▨척(▨尺)인 가호▨지(可尸▨之) 일벌(一伐)

문척(文尺)인 득모▨지(得毛▨之) 일벌(一尺)

면석착인(面石捉人)인 인이지(仁尒之) 일벌(一伐)

회석착인(回石捉人)인 수질혜지(首叱兮之) 일척(一尺)

▨석착인(▨石捉人)인 을안이지(乙安尒之) 피(彼, 피일?)

소석착인(小石捉人)인 정리지(丁利之) 피(彼, 피일?)

7보(七步) 4척(四尺)을 받아 짓는다.


2.3. 제3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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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및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3비

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節如法以作

後三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喙」

部主刀里受作卄一步一寸部監▨▨▨次大舍」

仇生次大舍文尺仇▨▨小舍里作上人只冬大舍▨文知」

小舍文尺久匠面石捉上人▨▨▨▨▨▨▨▨」

大鳥▨石捉人▨下次大鳥小石捉上人▨▨小鳥」

신해년(辛亥年) 2월 26일,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지을 적에, 법에 따라서 (성을) 지은지 3년이 지나서 붕파(崩破)한다면 죄를 내릴 것이라 교사(敎事)하였으니, 교를 알려서 이를 서사(誓事, 맹세)토록 한다.

훼부(喙部)의 주도리(主刀里)가 20보(步) 1촌(村)을 받아 짓는다.

부감(部監)인 ▨▨▨차(▨▨▨次) 대사(大舍)와 구생차(仇生次) 대사(大舍)

문척(文尺)인 구▨▨(仇▨▨) 소사(小舍)

이작상인(里作上人)인 지동(只冬) 대사(大舍)와 ▨문지(▨文知) 소사(小舍)

문척(文尺)인 구장(久匠) 길사(吉士)

면석척상인(面石捉上人)인 ▨▨▨▨▨▨▨▨ 대오(大鳥)

▨석척인(▨石捉人)인 ▨하차(▨下次) 대오(大鳥)

소석척상인(小石捉上人)인 ▨▨ 소오(小鳥)


2.4. 제4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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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및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4비

   節如法以」

  聞敎令誓事」

  邏頭沙喙弩」

  貝太舍一善支」

  古生村珎」

  利上干匠尺」

  古一伐古生城上」

  只一尺書尺夫」

 次石捉上人」

▨次小石捉上人」

…… 적에 법에 따라서 …… 교를 알려서 (이를) 서사(誓事, 맹세)토록 한다.

…… 나두(邏頭)인 사훼(沙喙)의 노(弩) ……

…… 패(貝) 태사(太舍) 일선지(一善支) ……

…… 고생촌(古生村)의 진(珎) ……

…… 리(利) 상간(上干)과 장척(匠尺) ……

…… 고(古) 일벌(一伐)과 고생성(古生城)의 상(上) ……

…… 지(只) 일척(一尺)과 서척(書尺) 부(夫) ……

…… 차(次) 소사(小舍)와 ▨석착상인(▨石捉上人) ……

…… 차(次) 피일(彼日)과 소석착상인(小石捉上人) ……


2.5. 제5비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5비

辛亥

崩破者罪敎事爲聞▨

道使▨▨啄部▨文▨

問村▨▨上干同▨

▨城作上人▨

▨▨一利▨

另▨

신해(辛亥) ……

붕파(崩破)한다면 죄를 내릴 것이라 교사(敎事)하였으니 ▨를 알려서 ……

도사(道使)인 ▨▨훼부(▨▨啄部)의 ▨문▨(▨文▨) ……

문촌(問村)의 ▨▨(▨▨) 상간(上干)과 동▨(同▨) ……

▨성작상인(▨城作上人)인 ……

▨▨일리▨(▨▨一利▨) ……

영▨(另▨) ……


2.6. 제6비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6비

▨尺同▨▨

尺豆▨

▨척동▨▨(▨尺同▨▨)

척두▨(尺豆▨)


2.7. 제7비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7비

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

節如法以作後三年崩破者罪敎」

事爲▨▨▨誓事之▨▨▨▨▨」

▨▨▨▨▨▨舍▨▨▨▨▨▨」

신해년(辛亥年) 2월 26일,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지을 적에, 법에 따라서 (성을) 지은지 3년이 지나서 붕파(崩破)한다면 죄를 내릴 것이라 교사(敎事)하였으니, …… 이를 서사(誓事)토록 한다. ……


2.8. 제8비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8비

奈日」

나일(奈日)


2.9. 제9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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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및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9비

辛亥年二月卄六日南山新城作節如」

法以作後三年崩破者罪教事爲聞教」

今誓事之伋伐郡中伊同城徒受六步」

郡上人▨安知撰干生伐▨文上干匠」

尺同村內丁上干▨谷村▨利支文尺」

▨伐只次▨城促上人伊同村母尸兮」

上干工尺▨大次村入夫▨文尺伊同」

村▨次兮阿尺▨促伯干支村支刀面」

捉同村西▨阿尺▨捉人伊同村▨▨」

▨▨▨▨▨▨▨」

신해년(辛亥年) 2월 26일,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지을 적에, 법에 따라서 (성을) 지은지 3년이 지나서 붕파(崩破)한다면 죄를 내릴 것이라 교사(敎事)하였으니, 교를 알려서 이를 서사(誓事, 맹세)토록 한다.

급벌군(伋伐郡) 중(中) 이동성(伊同城)의 무리[徒]가 6보(步)를 받았다.

군상인(郡上人)인 ▨안지(▨安知) 찬간(撰干) · 생벌(生伐)의 ▨문(▨文) 상간(上干)

장척(匠尺)인 동촌(同村)의 내정(內丁) 상간(上干) · ▨곡촌(▨谷村)의 ▨리지(▨利支) 일척(一尺)

문척(文尺)인 ▨벌(▨伐)의 지차▨(只次▨) 일벌(一伐)

착상인(促上人)인 이동촌(伊同村)의 모호혜(母尸兮) 상간(上干)

공척(工尺)인 ▨대차촌(▨大次村)의 입부▨(入夫▨) 일벌(一伐)

문척(文尺)인 이동촌(伊同村)의 ▧차혜(▨次兮) 아척(阿尺)

▨착백(▨促伯)인 간지촌(干支村)의 지도(支刀) 일척(一尺)

면착(面捉)인 동촌(同村)의 서▨(西▨) 아척(阿尺)

▨착인(▨捉人)인 이동촌(伊同村)의 ▨▨

소석착인(小石捉人)인 ……


2.10. 제10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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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및 원문 출처 : 경주남산신성비 제10비

辛亥年二月」

節如法以作」

事爲聞教今」

신해년(辛亥年) 2월 ……

…… 적에 법에 따라 지은지 ……

…… 사(事)하였으니 교(教)를 알려서 ……


3. 바깥고리



[1] 그 유명한 얼굴무늬 수막새가 발굴된 곳이다.[2]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진평왕 13년(591) 7월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854보(步)에 달했다고 하였다. 비문에 등장하는 남산신성(南山新城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3] 당시 신라에서 성을 쌓을 때에 국법에 따라 나름대로의 기준을 매기고 책임을 지게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 구절은 이 외의 남산신성비에서도 발견된다.[4] 이 명단은 성의 해당구획을 쌓은 사람들의 인명을 나열한 것이다. 중앙에서 파견된 나두 · 도사 등의 지방관들은 경위인 대사 관등을 칭하고 있으나, 그 외의 인물들은 외위를 칭하고 있다.[5] 이 비문에 보이는 사람들이 성벽을 쌓도록 할당받은 구획의 길이, 즉 축성거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