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산성비
[image]
안압지출토명활산성비(雁鴨池出土明活山城碑)의 모습. 사진 출처
[image]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의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명활산성작성비
明活山城碑.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명활산성(明活山城)을 쌓은 뒤 세운 비석 2기. 현재 둘 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비석 두 기는 아래와 같이 구분된다.
[image]
551년에 신라에서 명활산성(明活山城)을 쌓은 후 만든 비석이다. 1975년~1976년,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출토되었던 경주 남산 신성비 제9비가 학계의 연구 결과 남산 신성이 아닌, 명활산성을 쌓은 후 만들어진 것임이 확인되면서 명활산성비로 공식 확인되었고, 이후 1988년 8월 명활산성 내성 북벽의 성벽터 일부가 무너지면서 그곳에 숨겨져 있던 더 큰 명활산성비 하나가 더 확인되었다.
[image]
원래는 551년에 명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비석이었지만,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월지 축성 당시 석축의 호안석(護岸石)으로 이용되었다. 월지를 만들 당시 이 비석을 몇 동강 내어 사용한 듯한데 현재는 그 중 한 부분만 발견된 것으로, 동강난 비의 다른 부분 또한 월지 내부의 석축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발굴 당시 월지를 세밀하게 조사하지 못하여 아직까지 나머지 비석의 행방은 알 수 없는 상태다. 이 비석은 월지 발굴 직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원래는 경주 남산 신성비 중 하나로 여겼으나, 이후 연구 결과 기존 남산 신성비와는 비석 형태 및 비문 구조가 매우 큰 차이를 보였고, 결정적으로 ‘간지(干支)’란 관등표기법이 사용된 것이 확인되어 적어도 남산 신성비는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후 월지 호안석에 이용된 석재의 원산지를 추적한 지질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이 비를 명활산성비로 잠정 결정하였고, 훗날 1988년에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가 나온 이후 둘을 비교한 결과 비문의 구조나 형식·내용 등에 상당한 유사성이 보여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명활산성비임이 분명해졌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의 크기는 20*30 cm 정도이며 글자의 크기는 2~3 cm이다. 원래의 비석 모습에서 왼쪽 아랫 부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서체로 쓰여진 4행 26자가 남아 있다.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image]
[image]
명활산성작성비 탁본 사진 출처 : 경주 명활산성작성비 탁본
1988년 8월 26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전 56번지의 명활산성 내성 북벽의 성벽터 일부가 무너지면서 발견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 66.8 cm, 상폭 29.6 cm, 하폭 31 cm, 최대두께 16.5 cm이다. 형태는 긴 사각형이며 중간부분이 약간 둥글게 들어갔으나 나머지는 파손된 부분 없이 거의 원형을 유지했고 글자의 획도 뚜렷하다.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거의 꽉 차도록 각자(刻字)되었다.
비문에는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공사 담당 위치, 작성 참가자의 수, 공사 기간, 글쓴이의 이름 등을 기록했다.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 중고기의 역역(力役) 동원 체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경주 남산 신성비의 경우 1개 비석에 1개 집단만 기록되어 있는 반면, 명활산성작성비에는 1개 집단이 3개 소분단(小分團)으로 편제되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이 비석에는 축성에 소요된 공사 기간이 약 한 달인 35일로 기록되어, 당시 신라가 정확히 어떠한 기술로 성곽을 축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성을 축조하는 데 종래의 견해처럼 수개월이나 수년까지는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비석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상인나두(上人邏頭)', '장인(匠人)', '서사인(書寫人)', '군중상인(君中上人)' 등 신라 고유의 직명이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상인나두에서 나두는 성이나 촌 단위로 파견된 지방관을 뜻하고, 상인은 '윗사람'이라는 뜻인 듯하다. 장인은 지방민으로 축성을 담당하는 기술자, 서사인은 문자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문서를 담당하는 문관, 군중상인은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의 윗사람 즉 촌주(村主)로 추정한다.
6세기 경 신라의 역역동원체제 및 지방 통제 강화책에 대한 모습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명활산성작성비의 전체 비문은 아래와 같다.
안압지출토명활산성비(雁鴨池出土明活山城碑)의 모습. 사진 출처
[image]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의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명활산성작성비
1. 개요
明活山城碑.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명활산성(明活山城)을 쌓은 뒤 세운 비석 2기. 현재 둘 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비석 두 기는 아래와 같이 구분된다.
- 1. 1975년 3월 ~ 1976년 3월에 걸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기존 안압지(雁鴨池), 현 월지(月池)를 발굴할 때 그 석축(石築)에서 발견된 제1비 - 안압지출토명활산성비(雁鴨池出土明活山城碑)
- 2. 1988년 8월 26일에 명활산성 내성 북벽의 성벽 안에서 발견된 제2비 -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
2. 내용
[image]
551년에 신라에서 명활산성(明活山城)을 쌓은 후 만든 비석이다. 1975년~1976년, 경주시 월지(月池)에서 출토되었던 경주 남산 신성비 제9비가 학계의 연구 결과 남산 신성이 아닌, 명활산성을 쌓은 후 만들어진 것임이 확인되면서 명활산성비로 공식 확인되었고, 이후 1988년 8월 명활산성 내성 북벽의 성벽터 일부가 무너지면서 그곳에 숨겨져 있던 더 큰 명활산성비 하나가 더 확인되었다.
2.1. 안압지출토명활산성비(雁鴨池出土明活山城碑)
[image]
원래는 551년에 명활산성을 축조한 뒤 이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비석이었지만,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월지 축성 당시 석축의 호안석(護岸石)으로 이용되었다. 월지를 만들 당시 이 비석을 몇 동강 내어 사용한 듯한데 현재는 그 중 한 부분만 발견된 것으로, 동강난 비의 다른 부분 또한 월지 내부의 석축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발굴 당시 월지를 세밀하게 조사하지 못하여 아직까지 나머지 비석의 행방은 알 수 없는 상태다. 이 비석은 월지 발굴 직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원래는 경주 남산 신성비 중 하나로 여겼으나, 이후 연구 결과 기존 남산 신성비와는 비석 형태 및 비문 구조가 매우 큰 차이를 보였고, 결정적으로 ‘간지(干支)’란 관등표기법이 사용된 것이 확인되어 적어도 남산 신성비는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후 월지 호안석에 이용된 석재의 원산지를 추적한 지질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결과 이 비를 명활산성비로 잠정 결정하였고, 훗날 1988년에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가 나온 이후 둘을 비교한 결과 비문의 구조나 형식·내용 등에 상당한 유사성이 보여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명활산성비임이 분명해졌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의 크기는 20*30 cm 정도이며 글자의 크기는 2~3 cm이다. 원래의 비석 모습에서 왼쪽 아랫 부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서체로 쓰여진 4행 26자가 남아 있다.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삼국시대를 이야기 할 때 지방에 대한 기록들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지방통치와 관련된 기록으로 진흥왕 순수비나 각종 비석에서 지방통치에 대한 여러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고, 경주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산성을 쌓을 때 지역별로 축성책임을 할당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긴 남산 신성비나 명활산성비 등에서 지방의 이름 및 각 지역의 조세납부 등에 관련된 기록들을 찾을 수 있어 한국 중고기의 지역사 및 역사상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村道使喙部」
干支大工尺侊兮之」
▨尺豆婁知干支」
一伐徒十四步」
...촌(村) 도사(道使)는 탁부(喙部) 출신의 ...
...간지(干支) 대공척(大工尺)은 광혜지(侊兮之)...
...ㅁ 척(尺) 두루지(豆婁知) 간지(干支)...
...일벌(一伐)의 무리는 14보(步)
2.2.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
[image]
[image]
명활산성작성비 탁본 사진 출처 : 경주 명활산성작성비 탁본
1988년 8월 26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전 56번지의 명활산성 내성 북벽의 성벽터 일부가 무너지면서 발견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 66.8 cm, 상폭 29.6 cm, 하폭 31 cm, 최대두께 16.5 cm이다. 형태는 긴 사각형이며 중간부분이 약간 둥글게 들어갔으나 나머지는 파손된 부분 없이 거의 원형을 유지했고 글자의 획도 뚜렷하다.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거의 꽉 차도록 각자(刻字)되었다.
비문에는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공사 담당 위치, 작성 참가자의 수, 공사 기간, 글쓴이의 이름 등을 기록했다.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 중고기의 역역(力役) 동원 체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경주 남산 신성비의 경우 1개 비석에 1개 집단만 기록되어 있는 반면, 명활산성작성비에는 1개 집단이 3개 소분단(小分團)으로 편제되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이 비석에는 축성에 소요된 공사 기간이 약 한 달인 35일로 기록되어, 당시 신라가 정확히 어떠한 기술로 성곽을 축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성을 축조하는 데 종래의 견해처럼 수개월이나 수년까지는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비석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상인나두(上人邏頭)', '장인(匠人)', '서사인(書寫人)', '군중상인(君中上人)' 등 신라 고유의 직명이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상인나두에서 나두는 성이나 촌 단위로 파견된 지방관을 뜻하고, 상인은 '윗사람'이라는 뜻인 듯하다. 장인은 지방민으로 축성을 담당하는 기술자, 서사인은 문자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문서를 담당하는 문관, 군중상인은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의 윗사람 즉 촌주(村主)로 추정한다.
6세기 경 신라의 역역동원체제 및 지방 통제 강화책에 대한 모습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명활산성작성비의 전체 비문은 아래와 같다.
明活山城作城碑文
辛未年十一月中作城也上人邏頭本波部
伊皮尔利吉之郡中上人烏大谷仇智支下干支
匠人比智烋波日并二人抽兮下干支徒作受長四步
五尺一寸▨叱兮一伐徒作受長四步五尺一寸▨
利波日徒受長四步五尺一寸合高十步長十
四步三尺三寸此記者古他門中西南回
行其作石立記衆人至十一月十五日
作始十二月二十日了積卅五日也
書寫人須欣利阿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