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

 


'''시호'''
'''진평왕(眞平王)'''
'''연호'''
건복(建福)
'''성씨'''
김(金)
''''''
백정(白淨)[1]
'''왕후'''
마야부인#s.2(摩耶夫人) 김씨, 승만부인(僧滿夫人) 손씨
'''왕녀'''
김덕만, 김천명, 김선화(?)[2]
'''아버지'''
김동륜
'''어머니'''
김만호
'''동생'''
김백반, 김국반
'''신장'''
11척(2m 53cm)[3]
'''묘지'''
한지(漢只)
'''생몰년도'''
음력
(564~571년[4]) ~ 632년 정월(?)[5]
'''재위기간'''
음력
579년 ~ 632년 정월 (54년)
1. 개요
2. 치세
2.1. 즉위
2.2. 내치
2.3. 위기와 극복
2.4. 일본과의 전쟁 기록
3. 이야깃거리
4. 삼국사기 기록
5. 여러 매체에서의 진평왕


1. 개요


신라의 제26대 국왕. 연호는 홍제(鴻濟) → 건복(建福).
밖으로는 외국의 침략과 안으로는 왕권 약화 및 정치 불안으로 위기에 몰려있던 신라의 상황을 외교를 통해 극복해내고 진흥왕 때 3배 가까이 급격히 확장된 영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했으며, 뛰어난 신하들을 중용해 국가의 기반을 닦아놓은 신라 상대의 중요한 시기를 이끈 명군이다. 재위 기간 내내 고구려백제의 침략에 시달리는 등 바람잘 날이 없었으나 힘든 시기를 극복해냈기에 신라삼국시대의 최후 승자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체 조건이 뛰어나기로도 유명하며 공주들과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해서 인기있는 왕이기도 하다.
재위 기간이 워낙 길고 당대에 김유신, 김춘추 등을 비롯한 전설적인 화랑들과 정치가 등 우리가 알만한 삼국통일전쟁 시대의 위인들이 대부분 등장하는 시기라서 그들에 가려져 진평왕은 존재감이 적은 편이다.
경주 남산 신성비는 진평왕 때의 유물이다.

2. 치세



2.1. 즉위


영토 개척을 통해 신라의 전성기 기반을 닦은 진흥왕의 장손으로 아버지는 진흥왕의 장남 김동륜이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이고 왕비로는 마야부인, 승만부인이 있다. 마야부인 같은 경우는 본명이라기보다는 아버지 대부터 작정하고 지은 것.(법륜 역시 의미가 전륜성왕이다.) 백정이라는 이름 자체도 실제 인도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의 이름을 따 온 것이며 동생에게는 김백반과 김국반이라는 석가모니 삼촌의 이름, 덕만 등에게도 석가모니 누이의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정작 석가모니가 될 왕자가 태어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54년 간이나 그랬던 것.
전왕이자 숙부인 진지왕이 폐위된 후[6] 10대 초반의 나이로 숙부의 왕위를 이었다. 비록 진지왕이 폐위되고 비정상적인 형태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진평왕은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을 아껴 천명공주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궁궐의 업무를 총괄하는 내성사신으로 임명하는 등 중용하였다.

2.2. 내치


진평왕은 즉위하자마자 진흥왕 시대부터의 전쟁 영웅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고 580년 2월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그리고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김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진지왕의 폐위라는 사건으로 인한 왕권 약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즉위 2년만에 국가의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581년 정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 583년 정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 584년 2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고 3월에는 국가의 공부(貢賦)를 관장하는 조부(調府)와 거승(車乘)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는 등 각종 국가 기관들을 설치하고 연호까지 독자적으로 수립하는 등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진평왕의 정부 부처 설립은 끝이 없어서 586년 정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였고 591년 2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2.3. 위기와 극복


[image]
당시 신라와 백제가 충돌했던 지점들. 가장 짙은 색인 남원 운봉은 아막성 전투가 벌어진 지점이다.
5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통치했던 진평왕 시기는 국제 정세가 변하가는 시기 속에 있었다. 먼치킨 진흥왕이 백제를 철저히 눌러놓았던 임팩트가 남아서 진평왕의 재위 초기까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었다. 고구려의 평원왕진흥왕의 기세에 눌려 죽을 때까지 신라를 침공하지 않았고 백제의 위덕왕도 시도는 몇 번 했지만 딱히 신라에 유효타는 넣지 못했다.
590년 고구려의 온건파 평원왕이 죽은 직후, 그전부터 줄기차게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을 주장해 왔던 강경파 온달이 갓 즉위한 처남 영양왕을 설득하여 진흥왕 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온달이 전사하면서 고구려군은 패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서 연개소문이 신라가 수나라와 고구려가 싸울 때 죽령 이북을 빼앗아 갔다고 기록하고 있어, 물론 신라가 당항성 쪽으로 중국과 계속 교통하는 것을 봐선 한강 유역 중부지방을 전부 다 빼앗겼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일부분은 온달 전쟁 때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일부는 수복했다는 추측도 힘을 얻고 있다.
600년 즉위한 백제 무왕은 602년 4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거의 40년만에 처음으로 신라 침공을 감행하여 아막산성을 침공했으나, 진평왕은 백제군 4만명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603년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진평왕이 직접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에게 동시에 압박을 당하게 되는 중과부적의 상황에 놓인 진평왕은 수양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백제 역시 위덕왕 시절부터 줄기차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간청했었고, 아직 고구려와 사이가 나빴던 백제 무왕 또한 수양제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제차 사신을 보내었다.[7][8] 이러한 백제와 신라의 요청과 후방 지원 약속이 조금은 영향을 미쳤는지[9] 611년 4월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을 위한 동원령을 내렸다. 612년 정월 수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고구려의 을지문덕 등의 활약으로 물 말아먹고 끝났다.
한편 백제 무왕신라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때인 611년 10월 얘기치 않게 신라를 기습하여 가잠성을 점령하는 성과를 얻었다(가잠성 전투). 한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614년까지 후속전이 치뤄졌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잠잠해지자, 616년 무왕이 모란성을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진평왕은 618년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죽였다(가잠성 전투). 이처럼 620년대초까지 백제와 신라는 치고받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이렇듯 백제, 고구려와의 끊임없는 공방전 속에서 화랑 귀산(602년 사망). 찬덕(612년 사망)과 그의 아들 해론(618년 사망)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은 위치가 잊혀졌지만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철원군 고석정에 진평왕이 건립한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신라군이 철원 지역까지 북상해 고구려군과 일진일퇴를 벌인 일면이다.
그러나 진평왕은 고령으로 접어들면서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진평왕 말년에는 백제 무왕 쪽으로 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623년 백제 무왕은 신라 침공을 재개하여 6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무왕은 626년~627년에도 신라를 침공하여 왕재성 등 3성을 차지, 점점 신라를 압박해 들어갔다.[10]
말년인 630년에는 서라벌천재지변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지진이 발생해서 궁궐의 땅이 갈라질 정도였고[11], 631년에는 이를 빌미로 이찬 칠숙아찬 석품(石品)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칠숙·석품의 난) 왕은 반란을 미리 알아채고 진압하여 칠숙을 처형하였으며, 석품은 백제로 도망치려 했다가 처자식 보려고 몰래 들어오다가 잡혀 죽었다.
신라는 진평왕 시기에 힘을 축적해 비로소 통일신라로 가기 시작했다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진평왕에 대해 많은 전설과 후대 왕들의 존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평왕은 '''성골 출신의 마지막 남성 왕이기도 하다.'''

2.4. 일본과의 전쟁 기록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진평왕 시대인 서기 600년, 일본이 신라를 공격해 5개 성을 빼앗았다고 써 있는데 일본서기의 다른 대외기록이 으레 그렇듯 신빙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다만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 혜성가에서 삼국사기에는 없는 진평왕 시대의 왜구를 말하고 있어[12] 기록 세부내용이 과장이 된 것 외에 왜군이 공격해왔다는 것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다.
반대로 진평왕 치세에 신라가 일본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역시 삼국사기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안정복동사강목에서 해동기(海東記)를 인용해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서기 583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일본의) 서변을 토벌하였다"는 전승을 실었다. 다만 더 오래된 사서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일화라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서 학계에서 주목하는 기사는 아니다.

3. 이야깃거리


  • 특기할 점이 많은 왕이며 민간에서 인기가 좋았는지 각종 전설이나 설화에 등장한다.
  • 기록에 따르면 진평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한다. 키는 11척이나 되는 장신이었는데 어찌나 거구였고 힘이 장사였는지 계단에 올라가려고 발을 내딛자 돌계단 섬돌 두 개가 한 번에 부서질 정도였다는 전설도 있다. 임금의 위엄을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해 부서진 흔적을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왕의 위엄을 설명하기 위한 과장일 수도 있지만 지증왕이나 진덕여왕 등 비슷한 시기 신라 왕실에서 덩치가 컸다는 묘사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덩치가 큰 게 유전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옛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전체적으로 평균키는 작았다 해도 왕족귀족들은 영양적으로 현대인보다 부족할 이유가 없다.
  •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인데 창업자인 박혁거세를 제외하고는[13]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긴 임금으로 무려 53년을 재위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대로 국제 정세나 내부 천재지변이나 나라 안팎으로 혼란이 가득했고 진평왕 본인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는 등 상당히 고생을 했음을 감안하면 천수를 누린 것 자체가 대단할 정도.[14][15] 한편 원광 법사가 당나라에 유학간 때(589년), 그리고 돌아와 귀산과 추항이라는 화랑들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친 것, 수나라에 원군 파병을 요청한 걸사표를 지은 것(608년), 김유신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진평왕 말년(629년) 모두 이 시기에 해당된다. 아무래도 재위 기간이 길다보니 알게 모르게 진평왕과 관련된 역사가 많다.
  • 진평왕이 메고 다녔던 허리띠 천사옥대는 신라 왕가의 보물로 보존되었는지,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장육존상과 더불어 하늘이 내려준 '성제옥대(聖帝玉帶)'라 하여 신라삼보(3대 보물)로 칭해졌다고 한다. 일종의 3대 요소 클리셰다. 《삼국유사》에는 이 허리띠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으며[16], 《삼국사기》에는 훗날 신라 말엽에 고려 태조 왕건이 이 허리띠에 대해 신라 사신에게 물어보고 결국 경순왕이 고려에 바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라 삼보의 다른 하나인 황룡사 9층 목탑이 몽골 제국의 침입 때 잿더미가 된 것에 반해 야사에 의하면 이 혁대는 조선시대까지도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 신라를 막장으로 몰아놓은 골품제의 창시자, 혹은 등장 배경이라는 학설이 존재한다. 정확하게는 성골진골의 차이가 도대체 뭐냐에 대한 학설 중 하나로 신라 왕가 중에서도 오직 진평왕 아버지인 동륜태자의 직계만을 성골로 만들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전륜성왕에서 시작된 이름자 놀이, 여왕의 즉위 이유 등 성골과 진골에 대한 여러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평왕의 조카로 방계인 진덕여왕은 성골이 되는 것이고 진평왕의 외손자로 직계인 태종 무열왕은 진골이라는 게 설명이 된다. 그리고 이 설이 맞다고 치면 성골이라는 신분은 고작 2대만에 끝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 진평왕 자신에 대한 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편으로 그와 관련된 일화로는 장녀[17]인 덕만(선덕여왕)에게 왕의 소질이 있다고 판단하자 그녀를 후계자로 밀었다는 것과 재위 초기에는 매일같이 와 사냥개를 끌고 사냥하며 노는 걸 무척 좋아했지만 죽어서까지 충언을 한 충신 김후직 덕분에 올바른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후직은 죽어서 왕의 사냥길에 묻힌 뒤에 왕이 사냥하러 그의 무덤 앞을 지나갈 때 무덤 속에서 사냥을 관두라는 진언을 올렸다고 한다.
  •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비형랑이란 인물과 얽힌 일도 있다. 어느 날 진평왕이 비형랑을 불러 에서 살게 하고 관직을 주었다. 그런데 이 놈이 밤마다 궁을 빠져 나가 밖에서 놀다 오는 것이 아닌가? 진평왕은 병사들을 시켜 스토킹하게 하였다. 병사들이 비형랑을 따라가보니 비형랑은 귀신과 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강에 다리를 놓게 하니 하룻밤 사이에 다리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귀신 중에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냐고 물었는데 그러자 비형랑은 길달을 추천하였다. 마침 각간의 직위에 있던 임종에게 자식이 없어서 왕은 길달로 하여금 임종의 양자가 되게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니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이를 잡아 죽였다. 이후로 귀신들이 비형랑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는 믿거나 말거나인 이야기도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진평왕 본기'''
一年秋七月 진평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一年 친동생을 갈문왕으로 봉하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다
三年春一月 위화부를 설치하다
五年春一月 선부서를 설치하다
六年春二月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다
六年春三月 조부와 승부를 설치하다
七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七年秋七月 지명이 진에 들어가다
八年春一月 예부에 영 2인을 두다
八年夏五月 천둥과 벼락이 치다
九年秋七月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十年冬十二月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十一年春三月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가다
十一年秋七月 홍수가 나서 진휼하다
十三年春二月 영객부에 영 2인을 두다
十三年秋七月 남산성을 쌓다
十五年秋七月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다
十六年 수 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十八年春三月 담육이 수에 들어가다
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十八年冬十月 영흥사에 불이 나다
十九年 삼랑사가 완성되다
二十二年 원광법사가 돌아오다
二十四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四年秋八月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秋九月 지명이 돌아오다
二十五年秋八月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다
二十六年秋七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六年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담육이 돌아오다
二十七年秋八月 백제를 침략하다
三十年 원광이 걸사표를 짓다
三十年春二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三十年夏四月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빼앗다
三十一年春一月 모지악 아래의 땅이 불에 타다
三十三年 수에 군사를 청하다
三十三年冬十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三十五年 가뭄이 들다
三十五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五年秋七月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다
三十六年春二月 일선주를 설치하다
三十六年 진흥왕비가 사망하다
三十七年春二月 큰 잔치를 베풀다
三十七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八年冬十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다
四十年 해론이 백제와 싸우다 죽다
四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四年春一月 왕이 황룡사에 거둥하다
四十四年春二月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삼다
四十五年春一月 병부에 대감을 두다
四十五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五年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다
四十六年春一月 시위부에 대감을 두다
四十六年春三月 당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四十六年冬十月 백제가 6성을 포위하다
四十七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八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다
四十八年 고허성을 쌓다
四十九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오다
四十九年夏六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九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습격해 함락시키다
四十九年秋八月 서리가 내리다
四十九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年春二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五十年 크게 가물어서 비를 빌었다
五十年 백성들이 굶주리다
五十一年秋八月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五十一年秋九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二年 대궁의 땅이 갈라지다[18]
五十三年春二月 흰 개가 궁궐의 담장에 올라가다
五十三年夏五月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꾀하다
五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三年 흰 무지개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다
五十四年春一月 왕이 죽다
재위 기간이 긴 만큼 기록도 많다. 고구려, 백제와 싸운 기록,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 각종 자연 재해와 말년엔 반란까지... 삼국사기 4권은 지증왕부터 시작하여, 진평왕으로 끝난다.

5. 여러 매체에서의 진평왕



5.1. 삼국기


박웅이 연기했다.

5.2. 서동요


배우최동준. 서동요 설화처럼 주인공 서동(무왕)의 장인어른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셋째 딸인 선화를 끔찍하게 아끼고 왕위 계승 문제에 얽히지 않게 하길 원한다. 그래서 선화공주를 당대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던 김사흠 가문에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다가 선화공주와 서동의 스캔들이 터지고, 신라 귀족들과 화랑들이 선화공주를 죽이라고 아우성치자 선화공주를 살리기 위해 귀족들에게 굽히게 되고 선화의 공주 신분을 박탈하고 비구니로 출가를 명한다. 그러나 선화공주는 백제로 건너가 살게 되고 한동안은 등장이 없다. 이후 서동이 백제에서 왕위를 두고 다투고 선화가 그 일에 개입하자 보호 겸 내정 개입을 위해 신라군을 백제의 내전 와중에 보내 선화를 무사히 신라로 귀환시킨다. 서동은 거사에 성공하여 백제 무왕이 되고 신라에 정식으로 청혼하자 진평왕은 흔쾌히 선화를 백제 왕후로 시집보낸다. 그러나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선화공주를 비롯해 딸려 보낸 신라인에게 첩자 노릇을 지시하였고 뒤에선 전쟁을 준비한다. 선화공주는 이를 거부하지만 결국 전쟁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이번에는 백제 내에서 귀족들이 선화공주를 죽여라 폐위시켜라 난리를 치는 상황이 온다. 이에 백제무왕은 귀족들을 잠재우기 위해 친히 진두지휘하여 신라와 전쟁을 이끌고, 이후로 진평왕은 실제 역사대로 백제에게 탈탈 털린다. 무왕은 왕으로서 신라 영토를 점령하는데는 성공하여 백제를 부강하는데는 성공하나 선화공주는 이 과정에서 마음의 병을 얻게 되고 결국 일찍 죽어버리는 새드엔딩으로 끝난다. 이 드라마를 새드 엔딩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인물.

5.3. 선덕여왕


진평왕(선덕여왕) 문서로,

5.4. 대왕의 꿈


[image]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김하균이 이 역할을 맡았다.
여기서도 귀족들과 대신들간의 분란이나 자신을 옹립하여 섭정을 했었던 할머니 사도태후의 그림자에 머무는 어찌보면 안습한 왕. 하지만 단순히 안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촌인 용춘과 그의 아들 춘추를 생각해 주기도 하며 딸인 덕만에게 "용상에 오래앉아 있다보면 신료들이 누가 참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는지 다 보인다. 허나 정치란 참, 거짓을 가르는게 아니라 그 둘을 화합시키는 것이기에 더욱 어려운것이다. 그게 용상을 오래 지키는 길이기도 하고."라는 대사로 나름대로 정치적 경륜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슬하에 자식이라곤 딸밖에 없고 그나마 유력한 성골 왕위 계승자인 동생 국반 갈문왕[19]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20] 춘추를 태자로 들일 것인지에 대한 말이 많아 후계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13화에서 놀라운 반전이 벌어졌는데, 병세를 위장한 진평왕이 절묘한 기만책을 사용하여 단숨에 권신들을 굴복시키고 군강신약의 구도를 만든 것이다. 이에 깜놀한 상대등 숙흘종이 고개를 내리깔고 "우리는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소이다"라며 움츠러드는 장면은 압권. 게다가 기우제를 성공적으로 치뤄낸 절호의 타이밍에 위장 전술을 폈기 때문에 자연히 모두가 왕에 대한 외경심을 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연기가 덕만에게 왕위를 승계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점에서도 예상을 뒤집는 반전이었다.
그러나 승만왕후가 권력에 대한 본격적인 야심을 드러내는 19회부터 진평왕에게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미약을 먹여서 선덕여왕에서의 진평왕처럼 무력한 신세가 되기도 했다. 이후 난이 진압되고 막바지엔 험난한 정치판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탓인지 딸 덕만마저 경계하는 노이로제를 보이기도 했으며, 왕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가시방석 같은 위치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며 눈을 감는다.
이후 선덕여왕으로 즉위한 딸 덕만은 "자신이 그 위치에 오르고 나서야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알겠다"며 아버지 진평왕의 부담감과 고독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1]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의 이름을 그대로 지은 것이다.[2]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실존여부가 불분명하다. 등장도 야사인 삼국유사에 한정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동성왕과 혼인한 이찬 비지의 딸과 동일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3] 삼국유사에 11척이라 나온다.[4] 아버지 동륜태자진평왕 본인 모두 부모의 혼인 이후 누나 없이 곧바로 태어난 장남일 경우 564년까지는 생물학적으로 가능하다. 또한 동륜태자가 사망한 것이 572년이고 진평왕 밑으로는 최소한 2명의 동생이 있으므로 (막내 동생을 유복자로 가정할 경우) 571년 이전에는 출생해야 한다.[5] 632년 정월에 죽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631년 칠숙의 난 직후에 죽었다는 《신당서》의 기록 역시 첨가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53년 재위하고 죽은 셈이 된다.[6] 음란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를 거쳐서 폐위당했다는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이 승하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7] 여제동맹은 삼국시대 최후반부에나 나타나고, 신라가 공동의 적이었을 뿐 여제동맹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제기되고 있을 정도로 실체가 불확실하다. 원래 고구려와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수백년간 사이가 나빴다.[8] 수나라가 붕괴한 이후에도 고구려와 신라는 사이가 좋지 않아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길을 막는 등 충돌이 계속되었고 추가로 백제까지 상대적으로 강성해지자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당나라에게 징징대어, 수나라에 이어 중원을 통일한 당 고조 이연이 고구려에게 '너네 사이좋게 지내라'라는 봉서를 보내기에 이른다. 6년간 6회에 걸쳐 사신을 보낸 기록도 있다.[9] 무왕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면 후방에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실제 전쟁 때는 참여하지 않았다.[10] 620년대 백제의 연이은 침공으로 신라 백성들이 삶이 힘들어 자식을 팔았다는 기록이 나왔다.[11] 이 정도면 최소한 건물 몇 채는 붕괴되었다는 얘기도 된다.[12] '''단''', 혜성가의 진평왕대 왜구 침공도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견해(강고운, ≪향가신해독연구≫, 한국문화사, 2004)와 혜성과 함께 연상된 상징적 부연으로 보는 견해(이승남, 「혜성가의 배경적 의미와 문학적 형상화」, ≪국어국문학≫ 123, 1999)가 둘 다 있다.[13] 그런데 박혁거세의 재위 기간은 60년에 맞추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설이 많다.[14]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수나라(581년 건국)와 당나라(618년 건국)가 들어섰고 고구려는 최후의 중흥기 왕으로 알려진 평원왕(559년 즉위), 영양왕(590년 즉위), 영류왕(618년 즉위), 백제 역시 위덕왕(554년~598년), 혜왕, 법왕, 무왕(600년)이 들어서는 최대의 난세였다. 이쯤 되면 무난한게 멀쩡한 거란 말이 나온다.[15] 내물 이사금으로 등장하는 《삼국유사》에서는 내물 마립간이 57년 (345년~402년)으로 재위가 좀더 길고 《삼국사기》에는 47년 (355년~402년) 이다. 그 다음은 흘해 이사금의 47년 (310년~356년).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38년 (308년~345년)이다. 흘해 이사금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석우로의 아들인데 석우로가 죽은 후 100년이나 더 살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뢰가 떨어져서 재위년이나 계보 중 하나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는 설이 있기는 하다.[16] 옥대의 옥이 하나하나가 다 이어서 그 중 하나를 떼어 에 던지자 용이 승천했다 한다[17] 사실 덕만이 장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18]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인데 땅이 갈라질 정도가 되려면 진도 6.5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19] 진덕여왕의 아버지이다.[20] 물론 이 극의 설정이며 실제 역사와는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