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
1. 개요
慶州 獐項里 西 五層石塔.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은 경주시 토함산 동쪽 기슭의 장항리에 위치한 절터에 서있는 약 9m 높이의 화강암제 오층석탑이다. 본 석탑 이외에 경주 부근에 위치한 오층석탑은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이 유일하다. 장항리 서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이 서 있는 절터에 관해서는 현재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본래의 이름조차 알 수 없으며, 절터가 위치한 지명을 따서 장항리 사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1] 현재 이 절터에는 서 오층석탑과 동탑, 석조불대좌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은 국보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장항리 사지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폐사지에 남아 전해져 오던 유물들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훼손을 당했었다. 절터 인근에 금광이 있었는데 1923년 도굴꾼이 남아있는 서탑과 불상에 안치된 복장유물들을 노리고 금광에서 쓰던 다이너마이트로 야음을 틈타 유물들을 폭파시킨 것이다. 이렇게 파괴되어 몇 년간 그대로 방치되던 서탑을 이후 193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도굴꾼에 의해서만 장항리 사지의 유물들이 수난을 겪은 것은 아니다. 장항리 사지가 위치한 터 자체가 협소한데다 계곡 사이에 있기에 자연적인 침식이 발생하고 토질도 약하여 상당히 불안정하다. 동탑의 경우, 위치한 지반 자체가 약하여 일제시대에도 이미 땅이 붕괴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탑은 계곡으로 굴러 떨어져 기단의 극히 일부만이 계곡 위의 본래 위치에 남아 있고 나머지 잔해들은 계곡 아래에 뒹굴고 있었으며 잔해에 새겨진 부조들과 지붕돌들도 추락의 충격과 계곡물에 의한 침식으로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동탑은 1966년 그 잔해들을 수습하여 서탑 옆에 대충 쌓아놓은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항리 서 오층석탑은 이런저런 수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태가 그럭저럭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탑의 전체적인 구조는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5층의 몸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록 머리장식은 없어졌고 맨 꼭대기 지붕돌은 절반 가량이 훼손되었으며 나머지 층들도 어느정도 손상이 남아 있지만, 다이너마이트로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탑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장항리 사지에 있는 석탑들에서 우선적으로 보이는 특이사항은 동탑과 서탑의 배치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절터가 협소하여 공간배치에 변형이 생겼다. 추정이긴 하지만, 바로 탑을 건물 앞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좌우 양 옆에 배치한 것이다. 동탑이 있던 위치는 그 지반 자체가 붕괴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서탑의 배치 방식을 보았을 때 좌우 대칭 방식으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탑의 층수와 배치 양상도 이례적인데, 오층으로 된 탑을 쌍으로 배치한 것은 장항리 사지를 제외하면 신라시대의 사찰에서는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2]
장항리 서 오층석탑에서 또 다른 특이할 만한 부분은 1층 탑신에 새겨진 부조#s-2들이다. 1층 탑신의 4면 모두 2명의 인왕(또는 금강역사)이 지키고 있는 문을 조각해 놓았는데, 그 조각 수준이 대단히 뛰어나다. 문에는 괴수 얼굴의 문고리를 조각해 놓았고 문의 좌우로 인왕이 무기를 들고 그 특유의 자세를 취하며 문을 지키고 서 있다. 인왕상과 문고리는 양각으로, 문 자체는 음각으로 새겨놓았는데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입체감과 생동감을 느낄수 있다. 이 인왕들에 대한 또 한가지 특이사항은 이들이 연꽃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대개의 인왕상들은 땅이나 돌을 밟고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장항리 서 오층석탑에 새겨진 인왕들은 연꽃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 등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석탑 연구에 있어서 특수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이 인정 받아 1987년 3월 9일 국보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4. 국보 제236호
장항리사지는 토함산 동쪽의 한 능선이 끝나는 기슭에 마련된 절터로서, 절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마을의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지라 부르고 있다. 이 곳에는 현재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1923년 도굴범에 의해 붕괴된 것을 1932년에 복원이 가능한 서탑만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동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지붕돌만 남아있으나, 서탑은 약간 소실된 것을 빼고는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서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기단부는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으며,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을 본떠 조각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 몸돌의 각 면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는 한 쌍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고 있고,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다. 5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이 남아 있다.
탑의 1층 몸돌 각 면에 한 쌍의 인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것이 특이한데, 이러한 현상은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이 탑의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다. 전체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수법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