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권한대행 체제

 


'''제6공화국
참여정부
고건 권한대행 체제
髙建 權限代行 體制
'''
'''2004년 3월 12일[1] ~ 2004년 5월 14일[2]'''
'''성립 이전'''
'''이후'''
'''참여정부'''
'''참여정부'''
'''대통령'''
'''노무현''',(2003.2.25~2008.2.24),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
'''고건'''
'''여당'''
'''없음'''
1. 개요
2. 주요 행적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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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운데)'''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던 고건 국무총리가 2004년 3월 12일 16대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의결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쉽게 말해서 당시 고건이 임시 대통령이었다고 보면 된다. 1988년 민주화 이후 최초의 권한대행 체제이며 두 번째는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이다.[3]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된 2004년 5월 14일까지 고건 총리는 2개월 2일 간 대통령 권한대행 직무를 수행하였다. 참고로 권한대행 직에서 물러난 지 약 10일 뒤인 5월 24일 국무총리 직에서도 사임했다.

2. 주요 행적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재적 271명, 참석 195명, 가 193표, 부 2표). 노무현 대통령이 오후 5시 15분 국회로부터 "탄핵소추 의결서"사본을 전달받아 이때부터 대통령 권한행사가 정지되고 고건 권한대행 체제가 발동되었다.
이날 오후 고건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공백을 초래한 탄핵 사태에 대해 깊은 유감 및 국민에 대한 사과를 표명하고 흔들림 없이 국정에 매진키로했다. 고 총리는 회의에서 △대북정책 등 외교정책의 일관성 유지 △흔들림 없는 군의안보태세 △민생치안 확립 등 10가지 국정 현안을 차질 없이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 정치적 격변 사태와 관련하여 경제적 리스크를 우려한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12일 국제통화기금(IMF), 국제 신용평가회사, 해외 기관투자자 등 1천여명에게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와 관련 협조 공문을 발송했다.#
고건 권한대행 체제에 대해 외신은 특별한 기대와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 AP통신은 12일(현지시간) 고 총리가 과거 군사정권과 민주정부에서도 활동했던 인물이라면서 보수와 진보 성향의 정권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아왔으며# 탄핵안을 주도한 야당조차도 "고 총리가 있기 때문에 국정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식 호칭은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이며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겸임하는 형태라 아랫 사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4년 3월 17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수여한 상장.
왼쪽은 권한대행 자격으로 대통령상, 오른쪽은 국무총리 명의로 준 총리상이다. # #
이 기간 동안 이라크 파병 문제나 경제, 4.15 총선의 공정한 관리 등 여러 국내외 굵직한 사안들을 큰 무리없이 수행했다는 평을 받았다. 4.3 사건 특별법 제정 및 진상조사위 구성시에도 참여했는데, 두꺼운 보고서를 총리직 수행 와중에도 전부 읽고 참여하여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보상에 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유는 재원 부족. 또한 대통령 사면권이 국회의 동의를 거치게 한 개정안도 위헌 소지를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해당 법안은 16대 국회 끝물이었기에 자동 폐기 되었다.

3. 관련 문서


[1] 05시 15분[2] 08시 08분[3] 둘의 차이는 전자는 탄핵 될 가능성이 별로 없었으며 기각된 반면, 후자의 경우는 탄핵이 이뤄질 확률이 굉장히 높은 상황에서 결국 인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의 차이로 인해 고건 체제와 황교안 체제는 같은 권한대행이라 해도 그 성격이 많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