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양민 학살사건
1. 개요
6.25 전쟁 당시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민간인 학살[3]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육군에 길이 남을 수치이자 흑역사이다."엄마가 숨막힐 듯이 나를 껴안는 순간 천지를 뒤엎을 듯 한 총소리가 들리고 나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나 보니 '''엄마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몸뚱이만 나를 안고 엎어진 채였다.'''"
산청군 금서면 생존자 최금자씨 증언 #
산청과 함양에서 시작되어 거창에서 끝난 사건이므로,[4] 산청·함양·거창사건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2. 진행
2.1. 민간인에게 가해진 학살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로가 막힌 다수의 인민군 부대들이 좌익들과 함께 입산하여 빨치산 운동을 전개하자, 국군은 독립군 출신 최덕신 소장을 사단장으로 하는 화랑사단을 빨치산 토벌에 전담시켰다. 사단은 영호남 지역에 전개되어 최덕신 장군이 독립운동 도중 중국 국부군에서 체득했다는 이른바 견벽청야(堅壁淸野) 전략을 작전 개념으로 삼아 임하였다.
견벽청야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성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인적, 물적 자원을 모두 정리하여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청야전술이었다. 그러나 케케묵은 수천년 전의 병법서 내용을 현대전에서 구체화시키는 순간 무참한 학살극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즉 독립영웅 최덕신은 1950년-1951년 동계 작전 중 11월 남원군에서 벌인 학살극을 시작으로, 12월 함평군, 1월 광산군 등 영호남에 걸쳐 벌인 잔혹한 학살극을 견벽청야라는 중국의 시대착오적이고 야만적인 병법에 맞추어 차근차근 진행하였던 것이다.
2월이 되자 화랑사단 9연대는 지금껏 자신들이 파괴한 촌락들과 애꿎은 양민들의 시체를 뒤로 하고 거창군으로 눈을 돌린다. 신원면 인근에 빨치산이 준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연대장이었던 오익경 중령은 연대 휘하 3대대에 이런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이른바 "작전명령 제 5호"이다.
이 명령서를 접수한 3대대는 1951년 2월 8일 산청군 금서면 가현부락, 방곡부락, 점촌부락을 차례로 마치 물 흐르듯 순회하면서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11일까지 신원면 및 인근 지대를 돌며 주민 719명을 학살하였다. 이 중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359명으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61세 이상의 노인도 74명에[5] 이르렀다.'''작전지역 안의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공비(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각하라.'''
2.2. 여타 지역에서의 학살
이 작전 도중 학살이 벌어진 곳은 신원면에 한하지 않았다. 가령 2월 8일 공비 색출 명목으로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 및 화계리 주민 300여명이 유림면 서주리로 소집되었다가 화랑사단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2.3.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과 좌절
하지만 그런 지옥 같은 상황의 시체 더미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고, 사람들이 박산으로 이끌려 나가기 직전 선별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억울함을 참지 못한 살아남은 이들이 뜻을 모아 당시 거창 지역 국회의원이던 신중목에게 눈물로 호소를 했다. 신중목이 당시 악명 높던 헌병대와 특무대의 협박과 추격을 피해 부산 극장에서 열린 제 54회 임시국회에서 이 참극을 폭로하고 진상조사를 요구하면서 사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사건을 덮으려던 군의 행위 때문에 파장은 더욱 커졌다.
긴급히 국회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거창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진상조사차 내려온 국회 조사단은 거창읍 내에서 신원면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북한 인민 게릴라로 분장한 무장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실제로는 당시 지역 계엄사령관인 김종원이 11사단 군인들을 빨치산으로 위장시켜 급습했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 전쟁에 자국 병사들을 파견하고 있던 외국의 언론들도 이를 주목하고 있다 앞다퉈 보도하면서 사건은 덮일 수 없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 '거창 사건'에 관해 직접 담화문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화문의 요지는 '공비협력자 1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명백한 허위였고 얼버무림이었다.'''
이후 국회에서 재조사를 결의하고 진상 조사가 재개되었다. 국정조사를 방해한 총격전의 주체가 위장 공비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결국 거창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과 조사방해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었고, 내무·법무·국방 3부 장관이 사임했으며, 군사재판이 열렸다. 양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3살짜리 피붙이까지 도륙한 화랑사단 '참전용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지휘관들은 어떠했는가. 지금껏 경쟁적으로 '전공'을 쌓아올리던 이들은 재판장에 서자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하였다. 대대장 한동석은 작전명령서를 받아보고 "이런 작전명령이 어디있느냐?"며 항의했다고 주장한다. 연대장 오익경은 전원 총살하라고 한 적이 없으며 이적행위자만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명령도 불법이었다.) 견벽청야라는 개념을 제시한 사단장 최덕신은 결단코 그런 뜻으로 견벽청야를 시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결국 사단장 최덕신에게는 책임을 묻지 못하고 직위 해제 징계를 내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연대장 오익균 대령, 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는 살인죄로 무기징역이, 그리고 위장공비를 꾸며내 국회조사를 방해한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에게는 공무집행방해죄로 3년 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1년 후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특별 사면으로 석방했고, 김종원을 경찰 간부로 특채했으며, 사건을 계속 은폐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희생자들의 유해들은 수습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다가 사건이 발생하고 3년이 지난 1954년 4월에 들어서야 수습할 수 있었고,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아이로 구분하여 화장한 다음 박산에 매장하였다. #
이 사건은 4.19 혁명 이후 자유당 정권이 물러난 제2공화국 시기,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이 당시 학살에 협력했던[6] 면장[7] 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면서[8] 사건은 다시 중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거창의 생존자들은 명확한 진상 규명과 학살당한 이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당시 기사. 이를 계기로 국회는 진상조사를 다시 시작해 거창을 비롯한 인근 함양, 산청, 문경, 함평 등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밝혀냈다. 전남, 전북, 경남의 지리산 인근 모든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부대에 의해 반복적으로 자행된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이들과 유족회 간부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넣고, 묘소는 파헤쳤으며, 위령비는 훼손하여 파묻어버렸다.[9] 아닌 게 아니라 이 정권에서 2인자 중 하나인 정일권이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최덕신도 박정희 정권에서 권력 밖으로 쫓겨나기 전까지는 호의호식하였다. 물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직접적인 학살 명령을 내린 증거가 없어서임은 물론이다. 김종원도 권력은 잃었지만 조사 방해는 중죄가 아니고, 학살 가담자가 아니라며 더는 처벌하지 않았다.
한편 한동석, 오익경의 경우에는 1년도 안 돼 사면되어 현역으로 복직했다는 것이 1960년 뒤늦게 밝혀졌고 이후 다시 조사를 받았다. 1980년대 말 방영된 드라마 제2공화국에 의하면 대체로 기존 수사 결과와 일치하나 일부분에 한정하여 서로 다른 진술을 했다고 하며, 그 이상으로 알려진 것이 현재로서는 없어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하다.[10]
2.4. 재조명과 보상 처리
이후 90년대 들어서 다시금 사건이 재조명되었지만, 이 사건의 진상 규명과 보상에 대해서 굉장히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6년 '거창 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으나 상당히 불비한 점이 많아서 논란이 되었다. 심지어 대한민국[11] 은 이미 시효가 지나서 국가배상의무가 소멸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12] 이에 불복한 피해자들은 특별법이 적용된 다음부터 소멸시효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13]
이런 상황에서 2002년 일부 국회의원들이 특별조치법을 발의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들이 명예훼손 외에도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도 해야 한다며 법률 개정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런 일이 겨우겨우 국회를 통과한 것은 2004년 3월이었지만, 당시는 '''탄핵정국'''이었다. 그리고 고건 대통령 권한 대행은 '사건이 재판에 계류 중이고, '''6.25 관련 피해보상이 계속 통과되면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된다'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실제로 이 특별법은 16, 17, 18대에 걸쳐서 국회를 통과하지만 결국 정부는 ''''모든 보상을 다 하면 최대 25조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꾸준히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3. 기타
게릴라 토벌 과정에서 같은 나라 국민을 아예 적국 국민으로 취급하는 것도 어처구니 없는데, 적국 국민으로 취급해서 몽땅 살해에 나섰고, 그게 우발적인 것도 아니고 사단장의 방침에 의한 조직적인 활동이란 점까지[14] , 여러 모로 당시 11사단이 벌인 학살은 뭔가 표현할 말조차 부족할 정도의 일이다. 이후 11사단은 전방으로 보내졌고, 대신 다른 사단이 토벌에 투입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의 악행이라며 없는 일도 만들어내는 북한이 거창 사건에 대해서는 조용한 편인데, 이는 11사단이 벌인 민간인 학살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인 사단장 최덕신이 1986년 월북해 김일성 곁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최덕신의 젊은 날의 과오 식으로 살짝 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위로하는 유일한 장면은 이 사건 정도가 아닐까? 문제는 이걸 발의한 박준선 의원이 친이계로 친박 때문에 재선이 가능함에도 공천되지 않아, 친박 최대 흑역사를 이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용인시에서 시장과 시의장이 민주통합당이란 것을 생각하면 친이, 친박 갈등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담으로, 한동석의 부대가 1차적으로 집결했을 당시, 단 한 명의 빨치산도 잡지 못하자 화가 난 오익경에게 심한 문책을 당했고, 그로 인해 빡친 한동석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상 장교로써의 기본 소양도 갖추지 못했다는 이야기. 다만 이 부분은 확실한 근거가 없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김영삼의 측근 중 한 사람이었던 김동영 의원이 정계에 투신한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15]
2016년 거창 사건 65주기 추모식에서 이 사건을 처음 폭로한 신중목 전 국회의원의 공적비 건립 제막식이 열렸다. #
한편 거창 학살에 앞서 군경 가족들을 골라내는 등 양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었던 이는 면장 박영보라는 자였는데, 그는 10년 후 4.19 혁명으로 세상이 바뀌자 참았던 분노를 폭발시킨 유족들의 손에 말 그대로 끔살당한다. 그러나 그 유족들은 1년 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서 거꾸로 체포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파손된 추모비는 그간의 왜곡된 역사를 후대에 바로 알리기 위해 사건을 재조명하고 추모 사업을 진행한 뒤에도 훼손되고 쓰러진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16]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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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 감독의 작품으로 2013년 개봉한 《청야》는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학살에 연루된 군인의 손녀와 이 학살을 취재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PD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간다는 것이 주된 줄거리이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8권 및 제2공화국(드라마)에서 다뤄졌다.
팟캐스트 방송 중에서 물뚝심송의 독재유산 답사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내용을 다룬 편이 방영되었다. 듣다보면 참으로 착잡한 내용과 함께 왜 이 학살이 거창 학살 사건으로밖에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배경설명도 나온다.
드라마 야인시대 88회에서 이 사건이 나온다.
또한 KBS에서 2013년 방영한 드라마 상어에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꽤나 중요하게 언급된다. 드라마 줄거리나 핵심 인물들의 키워드라고 해도 될 정도. 애당초 해당 드라마가 한국의 어두운 현대사가 많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언급된다. 당장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인물인 천영보의 이름 자체가 실제로 학살 사건 당시 큰 역할을 하고 이후 유족들에게 화형을 당한 면장의 이름과 완전 판박이다.
4.2. 애니메이션
5. 관련 항목
[1] 현 제11기계화보병사단[2] 공식적으로 발견, 신고된 사망자다.[3] 본 문서의 제목은 <양민 학살 사건>으로 되어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양민 학살보다는 그냥 거창 사건, 혹은 거창 학살 사건 등으로 표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양민 학살이라는 단어에 있는 함의는 양민이 아닌 빨갱이들은 그냥 냅다 죽여도 괜찮다는 암묵적인 동조가 있음으로, 가능하면 <민간인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추천한다.[4] 1951년 2월 7일에 산청군 금서면 지역에서 395명을 학살, 그 다음 함양군 유림면에서 310명, 2월 9일 ~ 11일에는 거창군 신원면에서 719명 학살.[5] 사건 후 유족회에서 조사했다.[6] 11사단은 당시 학살을 하는 과정에서 군경 가족 등 일부에 대해서는 제외시켰는데, 그걸 확인하는 권한이 면장에게 있었다. 이러면 면장은 주민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에도 드러나는 사례가 있지만, 11사단 관련해서는 결정적으로 표출된다.[7] 참고로 이 때 불타 죽은 면장의 이름이 박영보. 드라마 상어에서 자주 언급되는 천영보가 아무래도 이 면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8] 참고로 처음부터 피해자들이 면장을 화형에 처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요구는 '''인정과 사과.''' 하지만 해당 인물이 인정을 거부하고 도주하다가 잡히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고 볼 수 있다.[9] 기자들도 몰랐던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 홍준표의 '빨갱이' 발언, 거창 민간인 학살 상처를 다시 들추다, 거창 사건 추모공원.[10] 두 사람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아무 근거 없는 주장.[11] 국가에서 행한 행동이기 때문에 피고가 대한민국이다. 물론 대한민국이 재판에 참여할 수는 없기 때문에, 피고 대한민국의 경우는 법무부장관이 대표자가 되어서 소송을 진행한다. 물론 실제 재판정에는 법무부 장관도 안 나오지만. 의외로 '''피고 대한민국''' 판례는 많다.[12] 이전 중앙정보부 시절 고문으로 사망하게 한 후 이를 은폐한 사건에서도, 피해자에 대해서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한 바 있다. 이 사건은 법원도 못 참아서 권리 남용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의외로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면서 피해자를 막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13] 지방법원에서는 일부승소 판결이 내려지기도 하였지만, 결국 대법원까지 올라간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패소했다.[14] 다만 최덕신의 견벽청야 전술은 기본적으로 게릴라 활동 지역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 처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했기에, 최덕신이 명백하게 학살을 지시했다는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단정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예를 들어 주민 소개 및 마을 소각을 지시했는데 밑에서 학살로 알아들었다면 상부에서 학살을 교사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게 되는 것이다.[15] 고향이 거창인 데다 본인의 삼촌도 공비에게 살해당한 후 일어난 사건이라 억울한 이들의 편에 서겠다는 결심을 했었다고. 여기 참고.[16] 박산 합동 위령비 첨부파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