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곤 덴노
1. 개요
일본 남북조시대 북조의 초대 덴노. 이름은 카즈히토(量仁).
1313년 고후시미 덴노와 뇨고 사이온지 비의 사이에서 9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동복 아우로 유타히토(豊仁)가 있는데, 그는 훗날의 북조의 제2대 덴노 고묘 덴노가 된다.
2. 생애
1331년 고다이고 덴노는 원홍의 변을 일으켜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려하다 발각되어 오키섬으로 유폐되었고, 카즈히토는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고곤 덴노로 추대된다. 그러나 1333년 고다이고 덴노는 오키섬을 탈출하고, 고다이고 덴노와 손잡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장악하여 고곤 덴노는 즉위한 지 2년 만에 폐위되어버린다.
반란이 일어나 고다이고 덴노는 다시 폐위된 후 유폐되었고, 코곤 덴노의 아우 유타히토가 새 덴노가 되었다(고묘 덴노).
1351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형제의 내분으로 북조가 항복하고 남조가 일시적으로 세력을 회복하였다. 남조의 고무라카미 덴노가 교토에 입성하여 북조의 스코 덴노를 폐위시키고 상황 고곤 덴노, 고묘 덴노와 함께 남조로 끌고 갔다. 그 후 고곤 상황은 남조의 거점인 도조, 아노, 곤고지 등을 전전하는 가운데 선승 무소소세키에게 귀의하여 출가하고 법명을 쇼코치로 하였다. 그는 교토에 돌아온 후 조쇼코지에서 선에 정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일기로 고곤천황신기(光厳天皇宸記)가 전한다.
3. 가계도
- 비(妃) : 센세이몬인(宣政門院) 요시코(킨시) 내친왕(懽子 内親王) (1315-1362) - 고다이고 덴노의 황녀
- 제3황녀 : ? (1335-?)
- 제4황녀 : 히가코(코우시) 내친왕(光子 内親王) (1337-?)
- 비(妃) : 키안몬인(徽安門院) 코토코(쥬시) 내친왕(壽子 内親王) (1318-1358) - 하나조노 덴노의 황녀
- 텐시 : 산죠(후지와라) 히데코(三条(藤原) 秀子) (1311-1352) - (오오기마치)산죠 킨히데((正親町)三条 公秀)의 딸
- 후궁 : 킨온카타(今御方) 사이온지(후지와라)씨(西園寺(藤原)氏) - 사이온지 사네히로(西園寺 実衡)의 딸
- 후궁 : 타이온카타(對御方) 사이온지(후지와라)씨(西園寺(藤原)氏) - 사이온지 사네아키라(西園寺 実明)의 딸
- 제4황자 : 손쵸 법친왕(尊朝 法親王) (1344-1378)
- 황녀 : ?
- 후궁 : 이치죠노츠보네(一条局) 오오기마치(후지와라)씨(正親町(藤原)氏) - 오오기마치 킨카게(正親町 公蔭)의 딸
- 제3황자 : 오기마치노미야(正親町宮) 요시히토 친왕(義仁 親王) (?-1415)
- 후궁 : 오이노미카도(후지와라)씨(大炊御門(藤原)氏) - 오이노미카도 후유우지(大炊御門 冬氏)의 딸
- 황녀 : ? (1331-1402)
- (생모 미상)
- 황녀 : 카린에겐(華林恵厳) (?-1386)
4. 일화
1342년 9월, 고곤 상황의 행차가 지나갈 무렵에 마침 막부측 무사인 미노국의 슈고인 도키 요리토의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어가 행차측에서 "원(院, 인)의 행차이니 말에서 내리시오"라며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요리토는 "인의 행차? 개(이누)의 행차라고?. 개(이누)라면 활로 쏘아야지"라며 수레를 발로 걷어차며 활로 쏘았다.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이를 알고 격노해 요리토를 체포할 것을 명했고, 요리토는 일단 미노로 돌아가서 모반을 계획하지만 실패하고 선승 무소 소세키가 있던 임천사로 도망쳐 구명을 호소했다. 또 각지에서도 앞서 막부를 도와 전공을 세운 요리토의 구명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다다요시는 "국사를 봐서 요리토는 엄벌에 처하되 도키 씨의 자손은 용서하겠다"라며 일축했고, 요리토는 임천사를 포위하고 있던 막부군에 연행되어 사무라이도코로노카미 호소카와 요리우지에게 신병이 넘겨졌고 12월 1일에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