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막부
[clearfix]
1. 개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92년에 창설한 일본 최초의 막부.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쇼군)에 임명된 1192년이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이지만, 그 이전부터 요리토모의 통치 기구는 존재하고 있어서 실질적인 성립은 1185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요리토모의 직계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에서 단절되고 그 이후부터는 호조 가문의 싯켄이 막부의 실세로 등극했다.[2] 참고로 호조씨는 타이라의 간무 헤이시다.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나 에도 막부를 종종 쇼군의 성씨에 따른 아시카가 막부, 도쿠가와 막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를 미나모토 막부라고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다.#
2. 시대상
가마쿠라 시대 참조.
3. 쇼군들의 역사
1199년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적장자인 요리이에가 그 뒤를 이었다(2대 가마쿠라도노 취임). 그러나 호조 씨를 중심으로 한 13인 합의제가 성립되면서 실권을 잃고 말았고, 이에 반발한 요리이에는 측근들을 동원하여 정국을 독단하였다. 선대부터 쇼군의 총애를 받던 카지와라 카게토키는 다시 이에 반발하여 요리이에의 동생인 사네토모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정변이 실패한 후 교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했고, 요리이에는 1201년에 이르러 조정으로부터 쇼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203년에 요리이에가 중병으로 드러누우면서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외조부인 호조 도키마사가 모든 실권을 쥐고는 요리이에의 동생인 사네토모를 다시 옹립하였다. 이 와중에 요리이에의 장남인 이치만이 사망하였고, 요리이에 본인도 이즈 슈젠지에 유폐되었다가 호조의 손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사네토모는 겨우 12살의 나이로 옹립되었으나, 실권은 계속 호조 씨가 쥐고 있었고, 정치나 군략보다는 문예에 재능을 보였다. 그런데, 1219년 1월 27일, 가마쿠라의 츠루가오카 하치만구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형 요리이에의 차남인 쿠교에 의해 살해당했다. 같은 날에 쿠교 또한 처형당했으므로 가와치 겐지 씨의 직계는 대가 끊기었다. 안습.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손이 3대째로 끊겼기 때문에, 이후에는 요리토모의 부인 호조 마사코의 친정인 호조씨가 싯켄(執權, 한국어로 읽으면 '''집권''')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6대 이후에는 천황가에서 황자(친왕)를 데려다가 명목상의 쇼군으로 앉히기도 했다.
싯켄과 함께 점점 명목상의 힘으로 약화되던 가마쿠라 막부는 고다이고 덴노가 끌어들인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아시카가 다카우지-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의 연합군에 의해 1333년 멸망하면서[3] 겐무 신정을 거쳐 남북조시대와 무로마치 시대가 열리게 된다.
4. 지배 구조
4.1. 역대 정이대장군
4.2. 역대 싯켄
5. 관련 문서
[1] 1203년 호조 도키마사 집권부터. 13세기 중반부터는 호조 가문의 당주인 도쿠소(得宗)가 싯켄보다 권력을 더 갖는다. 대부분 싯켄 본인이거나 퇴임한 싯켄이다. 하지만 이 제도도 가면서 퇴색해갔고, 1333년 호조씨가 망했을 때 도쿠소이자 전 싯켄으로 실권자였던 호조 다카토키는 만 30세에 불과하였으며 모든 실권은 다카토키 지배 시작부터 그의 보좌관 나가사키 엔키에게 있었다. 그는 호조씨와 함께 죽는다.[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요리토모의 장인 호조 토키마사가 임명된 것이 시초로 이후 호조 가문에서 대대로 계승했다.[3] 2년 뒤 호조씨의 잔당이 가마쿠라를 재점령하며 재기를 꿈꿨으나 이마저 다카우지에게 격파당한다. 이후 전국시대에 호조씨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후호조씨라고 호조씨와는 별 관련없다. 이들의 혈연적인 공통조상은 무려 헤이안 시대에 가야 나올 정도다.[4] 쇼군직에서 몰려난 형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차남이자 조카인 구교가 달려들었고, 그대로 피살된다.[5] 廻国伝説. 도키요리는 후대의 미토 고몬 비슷하게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나라를 돌며 암행했다는 전설이 있다.[6] 뒤의 두 사람은 다카토키의 인기가 떨어지자 앉힌 바지사장들이고, 실제로 가마쿠라 막부는 다카토키가 1333년 포위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살하면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