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수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광수는 1903년 12월 28일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택상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 중퇴했고, 1921년 3월 1일 3.1 운동 기념 선전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북간도로 망명한 그는 1921년 9월 북간도 소재 '상해당 만주뷰로'에 입당했고, 곧 연해주로 이동해 러시아 내전에 참가하여 고려혁명운동 의용병대에 소속되어 러시아 백군과 맞서 싸웠다. 1922년 3월 대한의용군에 입대하여 8월까지 하바로프스크에 머물다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1925년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청년회 및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25년 10월 국내로 돌아왔고, 1926년 2월부터 7월 20일까지 조선노동당에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당국이 조선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조사하자, 고광수는 해외로 피신했다가 8월에 재입국했다. 이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청년동맹과의 통합에 노력하여 ‘통합 고려공청’을 탄생시키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는 국내외를 오가며 공산주의 청년단체의 통일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노력했다.
1929년 길림에서 ‘조공재조직중앙간부회’ 결성에 참여한 고광수는 6월부터 함경남도 북청에서 철도부설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 조공 재건을 위한 지하운동을 펼치다가 도중에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받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에 걸려 신음하다 1930년 1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그해 2월 5일 김해시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고광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