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

 

1. goby
2. 식물
4. 후삼국시대의 인물
4.1. 소개
4.2. 드라마에서


1. goby


망둥어와 그 친척들을 일컫는 영단어. 관상용 해수어 중 고비라 불리는 것들 중엔 의외로 제법 화려한 생김새의 해수어가 많다. 만다린이나 파이어고비 등이 그 예시.

2. 식물


영어로는 펀(Fern). 평지 혹은 산야에 나는 여러해살이의 양치식물. 어린 순은 나물로 먹거나 국을 끓여먹고, 뿌리줄기는 감기 발열과 피부 발진, 기생충 등을 다스리는 데 쓴다. 특히 육개장에 넣어 씹는 맛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보통은 친척뻘인 고사리와 혼동되기 쉽다. 직접 채집한 고사리에 가끔 빙글빙글 줄기가 말려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것이 고비다. 고사리에 비해 줄기가 많이 부드럽고 특이한 향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고비목을 참조.
슬라브 신화에서 고비의 꽃(Цветок папоротника, Fern Flower)은 발견한 사람에게 행운과 부, 동물을 부리는 초능력을 제공해주는 영험한 식물로 취급된다. 과거에는 이 고비의 꽃이 한여름 짧은 시기 안에만 폈다 진다고 알려졌고 이반-쿠팔라 축제 때도 젊은 남녀가 함께 밤중에 고비의 꽃을 찾는 의식[1]이 있었으나, 사실 고비는 양치식물이라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정확히는 포자가 뭉쳐있는 것을 꽃으로 착각한 것에 가깝다.

3. 고비사막


문서 참조.

4. 후삼국시대의 인물



4.1. 소개


姑比(?~?), 혹은 고비녀(古比女)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후백제의 창업왕 견훤, 즉 후궁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와 그의 딸(로 추정되는) 애복은 후삼국시대에 극히 드물게 공식적으로 이름이 전해지는 여성들이다.[2] 그녀가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일관되게 견훤이 신검의 쿠데타 후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다가 탈출하는 기사에서이다.

견훤은 금산에서 석달 동안 있었다.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금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을 보내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훤이 오자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이 나이가 10년 위라 하여 높여 상보(尙父)라고 불렀으며, 남궁(南宮)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겸하여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명 및 궁중의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태조 18년(935년) 여름 6월에 견훤이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 폐첩(嬖妾) 고비(姑比) 등을 거느리고 나주에 와서 고려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고려사 권2 태조 18년

견훤은 아내와 첩이 많아 10여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넷째 금강(金剛)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히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했다. 그의 형 신검·양검·용검은 그 사실을 알고 걱정했다. 그때 양검은 강주도독이었고 용검은 무주도독이어서 신검만이 견훤의 곁에 있었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은 사람을 강주와 무주에 보내 양검 등과 모의하여 청태 2년(935) 을미 봄 3월, 영순(英順) 등과 함께 신검을 충동하여 견훤을 금산(金山)의 불우(佛宇)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였다. 신검은 대왕이라 자칭하고 사면령을 내렸다.[등등] 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멀리 궁궐 뜰에서 함성소리가 들리자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검은 “왕께서 연로하여 군국(軍國)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 신검이 왕위를 대신하게 된 것을 장수들이 환호하는 소리입니다.”고 대답했다. 곧 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의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巴達) 등 장사 30명에게 지키도록 하니 “가엾구나, 완산아이. 아비 잃고 눈물짓네”라는 동요가 떠돌았다. 견훤은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과 딸 2명, 시비(侍婢) 고비녀(古比女), 나인[內人] 능예남(能乂男) 등과 갇혀있었는데 4월이 되어 술을 빚어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했다. 태조는 소원보(小元甫), 향우(香又), 오염(吳琰), 충질(忠質) 등과 해로로 가서 맞이했다. 도착한 뒤 견훤이 10살 많았기 때문에 존칭으로 상보(尙父)로 하고 남궁(南宮)에 모신 뒤 양주(楊州)의 식읍과 전장, 노비 40명, 말 9필을 주고 후백제에서 항복해 온 신강(信康)을 아전(衙前)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견훤이 고려로 달아났다. 견훤이 금산(金山)에 있은 지 석 달만에, 지키던 군사 30인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취하게 하고는,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 폐첩(嬖妾)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달아나, 사람을 보내어 고려왕에게 뵙기를 청하니, 왕이 장군 유검필, 대광(大匡) 만세(萬歲), 원보(元甫) 향예(香乂)·오담(吳淡)·능선(能宣)·충질(忠質) 등과 함께 군선(軍船) 40여 척을 거느리고 해로를 거쳐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가 이르자 예로써 후하게 대우하고, 다시 견훤을 일컬어 상보(尙父)라 하였으며, 남궁(南宮)의 관사를 주고 직위는 백료(百僚)의 위였으며, 양주(楊州)를 주어 식읍(食邑)을 삼게 하고 겸하여 금백(金帛)과 노비(奴婢) 각 40구(口)와 구마(廐馬) 10필을 주었으며, 먼저 투항한 신강(信康)을 아관(衙官)으로 삼았다.

동국통감 권12 신라기 신라 경순왕 9년, 후백제 견훤 44년, 고려 태조 18년, 을미년(乙未年-935년) 여름 6월

드라마 태조 왕건의 영향으로 인해 신검의 쿠데타 당시 살해된 금강의 어머니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3], 그녀가 금강의 어머니라는 명시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견훤의 후궁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름이 전할 뿐더러 견훤의 유폐와 탈출 당시에도 곁에 있었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으니 그녀의 아들이 후계자로 낙점받는 것이 제법 개연성이 있을 뿐이다.
견훤이 탈출할 당시 데리고 있던 막내아들 능예와 딸 애복은 일반적으로 고비가 낳은 자녀들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추정대로라면 신검은 쿠데타를 통해 자신의 직접적인 경쟁자인 금강은 죽였으되 그 모친과 친동생들은 살려놓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여동생들은 그렇다 쳐도 남동생인 능예를 어째서 죽이지 않은 것인지는 불명이다. 막내아들이라는 언급을 보아 아직 어린 나이었기에 경쟁자로 인식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버지인 견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4.2. 드라마에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등장한다. 배우조민희.
견훤이 백제를 세우는 전반부에 합류한 승평(전남 순천)의 대호족 박영규가 견훤에게 바친 일족의 여인으로 36화부터 등장한다. 처음 견훤은 가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정도의 관계를 유지했으나[4] 박영규의 적극적인 권유로 결국 그를 후궁으로 맞아들이고 넷째아들인 금강을 낳기까지 한다.
처음 고비는 서슬퍼런 황후 박씨의 밑에서 후궁으로서 어느 정도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모습을 보였지만, 남편인 견훤이 자신의 아들인 금강을 점점 총애하고 정실 소생의 세 아들을 박대하기 시작하면서, 아들 금강을 뒤에서 부추기고 자신의 일족인 박영규에게 금강을 부탁하는 등 적극적으로 황태후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결국 견훤에게서 금강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금강의 즉위식에서 입을 화려한 비단옷을 마련해 상궁에게 자랑해보이지만, '''그 상궁이 신검의 쿠데타 사실을 알리면서''' 얼굴이 싹 굳어져버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인생무상이란 단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결국 중과부적으로 자신의 처소에 숨어든 아들 금강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끌려나가 최후를 맞이하고, 그나마 황후 박씨의 마지막 배려로 목숨만은 부지해 견훤과 함께 금산사에 유폐된다. 하루하루 술을 퍼마시며 등창으로 시름하던 견훤의 곁에서 눈물을 흘리던 와중에, 왕사인 경보대사가 방문하여 고려로의 귀순을 제의하자 노발대발하는 견훤을 옆에서 적극적으로 설득한다. 이미 이 백제 땅에서 모든 것을 잃었고, 더 이상 발 붙일 곳도 없으니, 차라리 폐하의 손으로 삼한 통일을 보라며 피를 토하는 그 모습은 가히 자식을 잃은 한과 분노만이 남은 어머니의 비통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숨은 명장면. 결국 그녀의 일족이며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도움으로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로 귀부하는데 성공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드라마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그녀의 존재는 최후반부에 이르러 후백제 왕실의 복잡한 권력암투를 꽤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장치가 되었는데, 그녀가 박영규의 일족이자 금강의 어머니로 설정되면서 박영규가 '''신검의 매형이면서도'''[5] 견훤의 탈출을 돕고 고려로 귀부하는 개연성이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견훤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나 아내의 정의감만으로는 뭔가 2% 부족한 설명이, 박영규가 고비를 왕실에 들인 장본인으로 금강과도 혈연적으로 엮이면서 신검 정권에 환멸을 느낄 이유가 한층 배가되었다. 또한 창업왕의 자존심으로 고려 귀순을 거부하던 견훤에게 금강이 죽은 한을 품고 마지막 결정타를 꽂아넣는 역할로서 견훤의 고려 귀순 과정에도 그럴법한 개연성을 부여해주었다.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 한 줄 남은 인물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불어넣어 요긴하게 써먹은 케이스.
여담으로 197화에서 견훤이 나주로 탈출할 때 고비는 함께 어차에 타지 않고 따로 말을 타고 따라오는데, 배우가 빠르게 달리는 말을 타는 것이 무리였는지 대역이 소화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고비를 잘 보면 대역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나 덩치가 배우랑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5. 퀄컴 고비


문서 참조.

[1] 두 남녀간의 약혼 및 보호자에 의해 묵인되는 첫번째 성 경험을 뜻한다.[2] 그 외에는 아자개의 딸이자 견훤의 누이인 대주도금 정도.[3] 한국어 위키백과의 고비 항목에서는 아예 금강의 어머니라고 명시해놓았다.[4] 드라마에서 지방 호족들과 적극적으로 정략결혼을 추진했던 왕건과 달리 견훤은 이런 정략결혼을 그다지 마뜩치 않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성향은 소설판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장화왕후 오씨가 원래 견훤에게 바쳐질 뻔 했으나''' 견훤이 이를 거부했다는 묘사까지 등장한다. 확실히 견훤의 용력과 호남지방의 막대한 생산력=지역 호족들의 분포를 생각해보면, 아들만 25명인 왕건에 비해 견훤의 아들 9~10명은 좀 적어보이기는 하다.[5] 일단 드라마에서는 박영규의 아내가 신검의 누나로 설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