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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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한 KBS 대하드라마. 'KBS 고려사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
2000년 4월 1일부터 2002년 2월 24일까지 총 200부작으로 KBS 1TV에서 방송되었다.[1] 주연은 왕건 역의 최수종, 궁예 역의 김영철, 견훤 역의 서인석이다. 내레이션은 성우 김종성. 이환경 작가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대적 배경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후삼국시대인 869년~936년(총 68년)이며, 공간적 배경은 송악, 철원, 완산주, 사벌주, 금성(錦城),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지역이다.
대한민국 사극 역사상 최초로 후삼국시대를 다루었다.[2] '''한국 사극 사상 최장편 드라마'''로서, '''최고 시청률 60.5%'''을 기록했다.[3]
2. 영상
2.1. 오프닝
2.2. 주요 장면
3. 구성
태조 왕건은 총 200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9개 장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4]
- 제1장 (1회 ~ 13회): 신라의 혼란 그리고 궁예와 견훤의 대두 (869년~900년)
- 제2장 (14회 ~ 45회): 후삼국시대의 개막 (900년~903년)
- 제3장 (46회 ~ 70회): 아지태의 등장, 금성 공략 (903년~904년)
- 제4장 (71회 ~ 95회): 독화살에 쓰러진 궁예 (904년~911년)
- 제5장 (96회 ~ 120회): 태봉의 미치광이 황제 (911년~918년)
- 제6장 (121회 ~ 144회): 왕건, 고려를 창건하다 (918년~925년)
- 제7장 (145회 ~ 166회): 위기에 빠진 고려 (925년~930년)
- 제8장 (167회 ~ 184회): 통일의 기반을 다지다 (930년~935년)
- 제9장 (185회 ~ 200회): 견훤의 귀부, 그리고 통일의 완성 (935년~936년)
3.1. 회차 목록
해당 내용은 KBS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 다시보기에 나온 짤막한 내용임을 밝힌다.
4. 특징
4.1. 캐스팅
왕건 역은 최수종[7] 이 맡았으며, 궁예 역을 김영철[8] , 견훤 역을 서인석[9] 이 맡았다. 최수종의 경우 캐스팅 당시만 해도 청춘스타의 이미지[10] 가 강했던 탓에 배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무난하게 소화하면서 이후의 최수종은 오히려 사극 주인공 역할을 많이 맡게 되었다.
사실 최수종이 했던 왕건 역의 경우 극중에서 궁예가 살아있는 시기까지는 김영철의 연기력과 '''비중'''에 가려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궁예의 죽음 이후 견훤과 대립하면서부터 캐릭터가 분명해지기 시작했고 이후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최수종은 1962년생이지만, 동안 중에 동안이라 10대 후반 시절[11] 을 맡아도 위화감이 별로 없는데다 어쨌든 중년이니 중년 가능, 게다가 연기력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 보장되어 있어서 적응도가 높았다. 다만, 이후 사극에서 왕이나 강한 인물(장보고 등) 역할을 할 때마다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발성을 하는데, 원래 부드러운 목소리를 커버하기 위한 조치이지만 너무 인위적인 짓이라며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
4.2. 캐릭터
전중반에는 궁예, 중후반에는 견훤이 너무 부각되었다는 평가도 있는데, 그럭저럭 무난한 성장형 영웅인 왕건에 비해 극적인 면이 많은 궁예나 견훤이 주목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궁예와 견훤은 후삼국의 한 주축이 되는 나라들을 밑바닥에서부터 만들어낸 군주들[12] 이고, 왕건은 이미 만들어진 나라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자리를 넘겨받은 군주이다. 전자의 과정이 더욱 드라마틱할 수밖에 없다.
작가도 이 사실을 인지했던지 아직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이전인 아역 시기부터 왕건을 등장시켜 비중을 높이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거기다가 서라벌에서의 둘의 일기토(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자 결투)는 비겼다. 이후, 드라마는 견훤과 궁예의 성장부터 시작해 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다가, 궁예의 죽음으로 1기가 끝나고[13] , 최종적으로 견훤의 죽음과 후삼국의 통일로 종결되는 드라마다. 사실상 제목만 태조 왕건이지, 실제적으로는 궁예와 견훤이 더 부각된 작품인 것이다. 특히, 궁예는 전반부 출연 기간에는 누가 뭐래도 이견이 없는 실질적인 '''진 주인공'''이었다.[14] 그래도 주인공인 왕건이 성장하면서 궁예와 견훤을 결국 꺾는 과정을 보면 '''전체적으로 성장형·만능형 군주인 왕건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맞다.
4.3. 후속작
이어지는 후속작으론 같은 작가가 집필했고 시대도 그대로 이어지는 제국의 아침이 있었다. 배우들만 교체되었고 시대상으로도 드라마적으로도 태조 왕건 마지막 화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내용이며 세계관도 공유한다.[15] 작가도 같고, 태조 왕건과 제국의 아침의 관계는 이를테면 야인시대 1부와 2부의 관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왕건이 죽는 시점부터 시작해 2, 3대를 거쳐 고려 4대 왕인 광종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광종을 너무 미화한데다 진행도 하도 루즈해서 전작에 비해 인기는 거의 없었다… 거기에 전작에서 등장한 인물 중 몇몇은 제국의 아침에서도 등장할 법도 한데, 배역이 한 명도 유지되지 않고 전부 교체되었으며, 동일 배역임에도 태조 왕건 때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성을 보여주어서 시청자들에 큰 위화감을 준 것은 덤이다.[16]
다만,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이후에 똑같이 임진왜란 시대를 다룬 드라마인 불멸의 이순신과 징비록의 경우에도 배역이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17] 다시 말하면, 태조 왕건과 제국의 아침은 엄연히 서로 다른 작품이니만큼, 작가가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다른 배역을 쓸 수 있다. 단, 제국의 아침은 태조 왕건이 종영된 직후부터 후속편으로 방영되었으며, 태조 왕건의 바로 뒷 이야기를 다루고, 같은 방송사에 같은 방송시간, 게다가 작가마저 같고 1화에서 왕건이 죽어가면서 회상하는 장면은 태조 왕건의 영상을 재탕한 것이었다. 방송사의 의도야 어땠건 시청자들에게는 제국의 아침이 태조 왕건의 후속작으로 보였기 때문에 위화감이 더 컸다.
제국의 아침 이후로는 고려 초중기를 건너뛰고[18] 무신정변기를 다룬 무인시대를 방영하였다. 그러므로 태조 왕건은 고려사 3부작의 시작인 셈이다. 하지만 2부였던 제국의 아침은 밝혔듯이 시종 루즈한 전개로 망했고, 이후, 이환경이 손을 뗀 무인시대는 작품성을 인정받음에도 태조 왕건만큼 화려한 주목은 받지 못했다. 이들 3부작 이후로는 2005년 MBC의 신돈(공민왕), 2009년 KBS의 천추태후(경종~현종), 2012년에는 MBC의 무신(여몽전쟁) 등이 고려사를 조명했다.
사실, KBS의 최초 기획 당시에는 '''고려사 드라마로 10년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원래 설정이라면 태조 왕건 → 제국의 아침 → 천추태후[19] 등으로 이어나갈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제국의 아침이 시청률이 너무 저조해서 좀 더 선이 굵고 남성적인 무인시대로 방향을 틀었으나, 무인시대 이후에는 고려를 포기하고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 임진왜란기인 불멸의 이순신이 편성되는 바람에 4년[20] 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 KBS 정연주 사장의 성향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무인시대가 후반부부터 그런 이야기가 KBS 게시판에서부터 시작되어 인터넷 여러 곳에 퍼졌으나 불멸의 이순신이 흥하면서 묻혀버렸다. 이런 글 특성상 그럴 듯하면서도 실질적인 근거 자체는 부족[21] 하기 때문에 그런 얘기도 있다는 정도였다.
4.4. 특이사항
주인공이 마지막 회까지 살아있는 몇 안 되는 정통 사극이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개경에 돌아와 왕건이 신하들에게 환호받는 장면[22] 에서 끝이 나며 왕건은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의 2화에서 사망한다. 사망 직전 회상신에서 태조 왕건의 궁예나 견훤의 마지막 장면들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다. 이후로는 대왕 세종 등 결말까지 주인공이 죽지 않는 드라마가 늘어났다.
간접적이지만 발해의 멸망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다. 145회에서는 발해가 멸망하면서 신덕이라는 장수가 부하 500명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하고, 그 과정에서 발해가 거란의 침입과 내분으로 인해 멸망하고 있다는 설명이 나오며, 184회에서 대광현이 백성들을 대거 거느리고 귀순하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그리고 왕건 역을 맡은 최수종은 본 드라마가 방영되고 나서 몇 년 뒤에 드라마 대조영의 주인공이 된다.
5. 등장인물
6. 평가
6.1. 평가 및 흥행
6.2. 비판
7. 미디어믹스
8. 여담
- 삼국지연의 표절이 아주 노골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왕건-신숭겸-박술희를 유비-관우-장비에 대비[23] 시키고 적벽대전의 동남풍 이야기를 태평에게, 하후돈의 눈알 삼키기를 금강에게 대입시켰다. 다만, 왕건 의형제에 유금필을 추가한 것은 어쩌면 중국 드라마인 신삼국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나레이션 내용 중 일부에 삼국지의 내용이 들어가 있다.
-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60선 조선상고사 편에서 이 드라마에서 궁예의 최후가 각색된 이야기를 했다.
- 촬영 도중, 서인석과 강재일 간에 술자리에서 벌어진 폭행사건이 있었고[24] , 덕분에 추허조는 이 드라마에서 12년이나 빠른 대야성 공략전에서 전사 처리 되었고, 이후 강재일은 대조영에서 묵철로 복귀하기 까지 오랜 기간 방송을 쉬어야 했다.
-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서는 이미 수 백번은 본 이 드라마를 10년 가까이 또 보고 또 본다는 아빠 때문에 고민이라는 사연이 등장하기도 했다.https://youtu.be/_A4wUQ5sNnA
- 유튜브에 존재하는 궁예를 포함한 드라마 태조 왕건의 내용이 함유된 영상들이 'kbs media 님이 저작권상의 이유로 차단된 콘텐츠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차츰차츰 유튜브 상에서 삭제되고 있는 중이다. 원본 영상들은 물론, 합성물 중 가장 조회수가 높던 '눈에 뵈는 게 없는 궁예' 등등까지 거의가 급속히 삭제되고 있다. 검색하면 찾을 수 없고, 라이브러리 개인 시청 목록에서 찾을 수는 있지만, 저런 글이 나온다. 물론 이런 식으로 삭제되는 유튜브 영상들은 비단 태조 왕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래도 다른 인터넷의 포털 사이트에서 영상을 볼 수는 있다. 정 다 보고 싶다면 KBS my K를 이용해 보자.
- 고등학교 천재교과서의 문학(상) 교과서에 2화의 대본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 작중 신검이 이총언과 싸웠다가 패퇴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신검을 연기한 이광기는 이총언을 시초로 한 벽진 이씨의 후손이라 후손이 선조와 싸운 격이 되었다. 여기에 드라마와 현실을 혼동한 벽진 이씨의 어른들 중 일부가 이광기에게 시조님께 무슨 괘씸한 짓이냐고 이광기에게 쓴소리를 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 촬영하는 내내 문경시 조령관문 중 하나인 주흘관 뒤편 일대에 사극 세트장[25] 이 건립되었고, 제천시와 문경시에도 촬영장을 두었다. 다만, 드라마 종영 이후에도 다른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으로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이후 관광객 감소와 관리 비용 등의 이유로 제천 촬영장은 폐쇄되었고, 그 부지는 현재 한국환경공단의 연수원을 짓고 있으며, 안동 촬영장 역시 현재는 관리 부실로 인해 폐허처럼 변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사찰에서도 촬영했는데, 특히 많이 촬영한 곳이 공주시 마곡사와 영주시의 부석사, 김제시의 금산사이다. 이는 태조 왕건 촬영 시기인 2000~2002년에 마곡사와 부석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금산사는 사적으로 지정되기 이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 덕분에 더욱 실감나는 촬영을 할 수 있었다.
- 유명한 드립으로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누가 웃음 소리를 내었는가'가 있다.
8.1. 유튜브 스트리밍
8.2. <야인시대>와의 관계
태조 왕건의 극본을 집필한 이환경은 이후로 야인시대의 극본을 집필했다. 또한, 태조 왕건 제작팀이 그대로 야인시대 제작팀으로 다시 모여서 작업했으며, 출연 배우들 중에서도 김영철[26] , 나한일[27] , 김학철[28] , 임혁주[29] , 임병기[30] , 기정수[31] , 이광기[32] , 손호균[33] , 정국진[34] , 유태술[35] , 이대로[36] , 방형주[37] , 전병옥[38] 등이 야인시대에 다시 캐스팅 되었다.
그리고 야인시대까지 종영한 이후,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인터넷에서 뜬금없이 내가 고자라니가 대유행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야인시대가 주구장창 합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합성을 하다 보니 태조 왕건에서도 비슷한 배우가 나와서 비슷한 맛의 대본으로 비슷하게 연기를 하는 것을 알게 된 합성 제작자들은 심영물에 태조 왕건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심영물에는 야인시대를 주력으로 해서 여기에 태조 왕건이 양념처럼 들어가 있게 된다.
- 야인시대/합성물/등장인물: 태조 왕건에서 궁예 역을 맡았던 김영철이 야인시대의 장년기 김두한 역을 맡았기 때문에 야인시대 합성물(심영물)에서 배우 개그로 자주 크로스오버된다. 주로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에피소드의 궁예가 김두한의 또 다른 자아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다른 에피소드의 궁예가 활용되기도 하며, 두 작품에 모두 출연한 다른 배우들[39] 을 끌어 오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1] 제작 개시 시점이 딱 후삼국시대로부터 1,100년이 된 시기였다.[2] MBC도 후삼국시대를 다룬 사극으로 맞불을 놓으려 했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3] 참고로 태조 왕건 다음으로 많이 방영한 작품은 왕과 비(186회), 용의 눈물(159회), 무인시대(158화), 대조영(134화)[4] 아래 구성은 임의로 구분한 것이며, 공식 분류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음.[5] 단, 왕건의 경우는 그의 청소년기 역할을 아역배우 오현철이 연기했으며 14회까지 등장했다.[6] 궁예의 경우는 2, 3회에서 그의 아동기 역할을 아역배우 맹세창이 연기했다.[7] 캐스팅 가운데 세 후보 중 한 명으로 나머지는 노영국과 윤승원이다. 노영국은 연기력이 탁월했지만 당시 49세로 청년 역할은 무리일 정도로 많은 나이의 한계로 인해서, 윤승원은 당시 연기 활동에 오랜 휴식 기간을 거치고 있었는 데다가 사업 실패로 구설수를 들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캐스팅되지 못했다.[8] 캐스팅 과정에서 이덕화도 거론되었으나, 당시 궁예의 재해석을 하려고 했던 제작진은 너무 요승 같은 이미지로 나올 것 같아 김영철을 캐스팅했다고 한다. 당시 이덕화의 사극 대표작은 한명회였다. 결과적으로 김영철이 재해석된 궁예를 훌륭히 연기했으므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9] 전작 왕과 비에서 세조 역 물망에 한 때 거론되었다.[10] 태조 왕건이 첫방송되던 당시는 최수종의 배우 커리어에 있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첫사랑이 종영되고 불과 3년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11] 최수종은 태조 왕건 방영 4년 전에 방영된 첫사랑에서도 극 초반 고등학생이던 성찬혁 역을 맡기 위해 머리카락을 빡빡 깎기도 했었다. 참고로 왕건 방영 시작 무렵의 최수종은 만 38세였다.[12] 정확히는 궁예가 더 밑바닥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견훤은 서라벌의 군관 출신에서 지역 군영의 장군으로 임명되어 내려오면서 어느 정도 자산은 있었기 때문에...[13] 궁예는 120화에서 사망하고, 이후부터 131화까지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이 동안 환선길이나 이흔암, 임춘길 등 궁예를 추종하던 인물들이 제거되고, 청주와 명주(지금의 강릉)의 반란이 진압되는가 하면 왕건이 철원에서 송악으로 천도하는 등 궁예의 흔적이 깨끗하게 지워진다. 또한 1기의 분위기 담당이었던 아자개도 사실상 퇴장하며(극 최후반에 다시 나오기는 하는데, 캐릭터의 역할이 전혀 다르다), 견훤의 셋째 아들 용검이 등장하는 등 견훤의 아들 교육과 후계자 선정, 신검파와 금강파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14] 1화부터 120화까지 각 화의 맨 마지막 장면만 모아놓고 보면, 궁예가 나오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나 된다. 신 스틸러라고 불러도 한참 넘치는 수준. 이와 비슷한 케이스는 MBC 선덕여왕의 미실이 있다. 심지어 두 인물 모두 분량이 늘어난 것까지 같다. 이 때문에 궁예 역의 김영철은 2000년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15] 1화에서부터 왕건이 박술희를 '의제'라고 부르는데, 태조 왕건에서 이들이 의형제를 맺을 때 나레이션으로 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편의상 묶어 놓는다고 나온다. 또, 병이 위중해진 정종이 내군 장군을 불러 '예전에 궁예 대왕도 내군 장군에게 죽여 달라 했다던데 나도 그렇게 해 달라' 운운하기도 하며, 광종의 측근 중 하나인 장단열은 서도로 행차하는 광종 일행을 호위하는 문제를 휘하 장수들과 논의하면서 걸출하던 궁예 대왕이 화살 한 대를 잘못 맞아 무너졌으니(철원 황궁 공사장에서 후백제의 사주를 받은 양길의 잔당들에게 독화살을 맞은 것을 가리킴), 광종의 호위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고 주의를 주기도 한다.[16] 전자의 경우, 민욱(유긍달→왕육), 정국진(왕식렴→왕욱), 백인철(환선길→염상) 등이 있으며, 후자의 경우, 박술희, 혜종, 왕규, 왕식렴 등이 있다.[17] 그래도 징비록은 권율 역의 김영기와 가토 역의 이정용은 그대로 유지시켜주어서 어느 정도는 불멸의 이순신을 의식하고 팬서비스를 해준 편이다.[18] 훗날 천추태후가 제국의 아침에서 바로 이어지는 시대를 다루긴 했다. 사실, 우리 역사 사료들은 다수가 조선시대이며, 고려시대 이전에는 사료가 부실할뿐더러 남은 사료들 역시 승자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 다수라...[19] 광종 다음 경종 시대부터 시작했다.[20] 태조 왕건 2년, 제국의 아침과 무인시대가 각각 1년.[21] 고려사 계획을 승인한 당시 KBS 사장직을 역임하던 박권상 사장은 정연주의 동아일보 선배였고, KBS 사장이 되기 전에 시사저널 주필직을 지냈다.[22] 원래대로라면 뒷이야기인 신검과 견훤의 최후를 당겨서 보여주느라 왕건의 귀환신의 시점이 헷갈리게 한다. 실제 드라마 촬영의 최종은 신검의 처형 장면이었다.[23] 사실 그 원조는 견훤이라 할 수 있다. 자신과 친아우 능애를 포함해 능환, 추허조, 능창을 의형제로 표현했다. 이후에는 궁예와 왕건을 의형제로 대입시켰다.[24] 강재일이 이번엔 제가 사겠다고 하자, 서인석이 술에 취해 건방지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강재일도 얼큰하게 술에 취한지라 욕을 먹으니 화가 났는지 서인석을 걷어찼고, 서인석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서인석은 이외에도 술에 취해 대리 기사를 폭행하는 등 주사로 구설에 오른적이 있다.[25] 관련 홈페이지. 이후로도 고려시대 드라마들도 촬영을 했는데, 지금은 당시 모습들을 찾을 수는 없다. 2008년 대왕 세종 촬영을 위해서 조선시대 모습으로 고쳤기 때문에... 여담으로 대조영의 촬영도 일부 이 곳에서 이뤄졌으며, 주 촬영장이던 속초시 설악 세트장은 2019년 고성-속초 산불에 의해 전소되었다.[26] 태조 왕건의 궁예 → 야인시대의 김두한의 장년 시절.[27] 태조 왕건의 변사부 → 야인시대의 금강[28] 태조 왕건의 박술희 → 야인시대의 조병옥.[29] 태조 왕건의 박영규 → 야인시대의 장택상.[30] 태조 왕건의 신덕 → 야인시대의 박헌영[31] 태조 왕건의 파달 → 야인시대의 단게 국장, 현도 스님[32] 태조 왕건의 신검 → 야인시대의 이억일[33] 태조 왕건의 원회 → 야인시대의 상하이 박, 이석재[34] 태조 왕건의 왕식렴 → 야인시대의 이만섭[35] 태조 왕건의 김총 → 야인시대의 김득만[36] 태조 왕건의 도선 대사 → 야인시대의 염동진[37] 태조 왕건의 방희 → 야인시대의 고릴라[38] 태조 왕건의 능애 → 야인시대의 김책, 혁명군 검사[39] 상술하다시피 김학철은 태조 왕건에서 박술희 역을 맡았고, 이어 야인시대에서 조병옥 역을 맡았으며, 이대로 역시 두 드라마에서 각각 도선대사와 염동진을 맡았으며, 그 외 다른 배우들도 두 드라마에 연이어 나온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