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규

 



朴英規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후삼국시대~고려 초의 호족이자 순천 박씨의 시조. 박씨 성을 가지고 있으니 신라왕족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후백제에서는 부마, 고려에서는 국구(國舅).[1] 견훤사위이면서 태조의 장인이 됐고 아들 정종의 장인까지 오른 케이스.

2. 생애


전라남도 승주(오늘날 순천시)의 대호족이었다. 신라 왕조가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해룡산성(오늘날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에 할거했다고 한다. 후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대이다 보니 견훤이 사위로 삼았다. 박영규 역시 충성심이 남달랐던 것 같다.
후백제 건국 이후에도 승주에 주둔하며 928년 1월, 강주를 공격했다.
928년 5월에도 강주를 기습공격 했는데, 이에 강주도독 최유문이 고자군으로 곡식을 운반하다 급히 돌아온 진경과 함께 박영규에 맞서 싸웠지만 삼백 여 명이 전사하자 최유문이 후백제에 항복했다.
강주는 이후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늘 후백제 땅이 되었다.
견신검쿠데타로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지만 견훤이 고려로 탈출하자 박영규는 견신검에게 복속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견훤과 은밀히 연락했다. 결국 936년 왕건이 견훤을 대동하고 일리천 전투에 나타나자 견훤은 좌군에 진을 쳤다. 박영규가 보낸 밀서에 왕건이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답장을 보내기도 했으며 일리천 전투는 고려의 승리로 끝났다.
견훤은 얼마 안가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박영규는 기존 재산을 모두 인정받는 것은 물론 승주의 호족으로서 고려 지배층에 편입되었다. 일리천 전투에서의 공으로 벼슬과 많은 토지를 하사받았고 두 아들들도 개국공신으로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 왕건에게 딸인 동산원부인을 시집보내 군 작위를 받았는데 동산원부인은 견훤의 외손녀이기도 했다. 이후 왕건의 아들 정종에게 동산원부인의 친동생들인 문공왕후문성왕후를 시집보내 국구로서 매우 큰 권력을 누린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후삼국시대~광종 시기까지 왕실의 외척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서인지는 몰라도 그 시기를 다룬 사극에서도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온다. 생몰년도가 불명이지만 견훤의 망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왕건이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밀서를 보낸 것 때문인지 왕건 역의 배우보다 연상인 배우가 배역을 맡았다.
견훤의 사위라는 점 때문에 고려사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학습만화에서도 동명이인의 배우의 인생 대사인 "아..! 장인어른 왜 그러세요"를 시전하면서 나온다.

3.1. 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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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장택상 역으로 유명한 임혁주가 열연했다.[3] 공교롭게도 임혁주는 광주광역시가 고향이고, 전봉준, 현준호 등 호남 출신 유명인들을 다수 연기한 바 있다.

극 전반부와 공직과 더불어 견훤의 휘하에 들어온 호족으로서, 견훤이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또한 극 중에서는 견훤의 후궁이자 금강의 친모가 되는 고비라는 여인을 견훤에게 바치기도 했는데, 그녀는 박영규의 일족으로 설정되어 있었다.[4]
이후, 견훤을 따라 고창 전투, 운주 전투 등 여러 전장을 누비며 활약했다. 특히 견훤이 최승우와 더불어 마지막까지 신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최승우의 지략과 능력에 미치지는 못할 지언정 다른 장수들이 막판에 견훤을 배신하는 것과 달리 끝까지 그를 옆에서 보좌하는 등 우직한 충신으로 후백제의 장수들 중에서는 그래도 비범한 능력과 진중한 인품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박영규가 부각되는 것은 극 후반부에 후백제의 후계자 문제와 관련하여서였다. 본래 박영규는 후백제의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 중립을 지켰지만[5]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신검으로는 도저히 고려를 이길 수 없다 는 생각이 든 나머지[6] 금강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견훤의 뜻에 동참한다.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 군이 대패하여 금강, 파진찬 최승우와 함께 견훤을 무사히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운주 전투에서는 늙은 탓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견훤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금강, 최승우, 김총 등과 함께 퇴각을 권유하나 신검이 무리하게 적진으로 들어간 탓에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이때 군졸로 변장하여 견훤을 수행하며 퇴각하는 와중에도 전의성주 이치[7]가 이끄는 고려의 추격군과 맞서 싸웠다. 특히 최필을 전사시킨 이치와 호각으로 맞섬과 동시에 시간을 지연시켜 견훤 일행의 탈출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견훤의 신임을 얻어 최승우와 함께 금강의 후견인 격으로 지목되어 모든 군권을 일임받게 된다. 하지만 신검의 쿠데타로 인해 그 자리에서 밀려나 구금되었다가, 신검이 자신의 매부임을 고려하여 목숨을 보존하여 낙향시키는 형벌을 내리는 정도로 그쳤다.[8]
낙향한 이후 고향에서 지내던 중, 김제 금산사에 감금되있던 견훤이 왕사(王師)인 경보 대사를 통해 그곳을 탈출할 의사가 있음을 사위인 박영규에게 알리자, 박영규는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부인이자 견훤의 딸인 국대부인이 견훤을 도와줄 것을 청하면서 자신이 부리는 사람들을 보내 견훤을 금산사에서 빼내어 나주를 통해 고려로 귀순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9] 이후에는 더 이상의 출연이 없었다.
만약 견훤의 고려 귀부 이후에도 출연했다면 후백제의 지리와 사정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백제의 최후의 결전에 왕건과 견훤을 호종하여 출전했거나, 견훤이 금산사에서 임종할 때 그 곁을 지키는 장면이 나왔을 것이다.

3.2. 제국의 아침


원로배우였던 김상순이 열연했다. 왕규와 왕식렴이 대립할 때는 왕요(정종)의 장인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왕식렴 파의 일원으로서 활동했으며, 광종 즉위 이후에는 '무시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는 호족 A' 정도로 묘사되는데 노비 안검법이나 과거제 등에 반대하는 모습이 그려지나 그리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혜종과 정종의 장인인 김긍률과 붙어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며, 극 후반에 평주 박씨 일족이 효은태자를 옹립하는 반란을 도모할 때 이들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받은 것이 빌미가 되어 김긍률과 나란히 유배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끝내 광종이 사약을 보내면서 김긍률과 같이 사사되는 것으로 극에서 퇴장한다.[10]


3.3.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배우 최병모가 출연했다. 자신의 권력을 불리는데 혈안이 된 모습으로 나오며 금강의 딸이었던 우희의 정체를 알고 그녀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를 또 다시 협박하던 중 역관광당해 목숨을 잃고 만다.

[1] 국구는 왕의 장인어른을 말한다. 세 딸을 각각 태조정종에게 시집보냈다.[2] 오프닝에서의 박영규, 맨 가운데 인물이 바로 박영규다. 좌우에 있는 인물은 각각 최필과 신덕[3] 당시 태조 왕건 공식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는 후삼국시대~고려 초기 역사를 아는 몇몇 네티즌들이 극중에 역사상의 인물인 박영규가 등장하기 전에 배우 박영규에게 이 박영규 역을 맡겨야 한다는 꾸준글을 종종 올리곤 했다. 이에 "그럼 견훤오지명이 맡냐?"라는 우문현답이 달리기도 했다. 태조 왕건 방영 전 SBS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서 오지명과 박영규가 장인과 사위 콤비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기 때문.[4] 정작 장모인 박씨 부인은 처음에 박영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과 나이 차가 꽤나 나는데다, 후궁이 되는 여인까지 소개하였던 것 때문. 하지만 극의 흐름이 진행되면서 박영규를 사위로 인정하고 잘 대우해주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박영규의 생몰년도가 불분명한데 담당 배우인 임혁주의 나이 때문에 나이차가 큰 걸로 설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나이차이가 많은 남녀가 부부가 되는 일은 요즘도 드물지 않으니 마냥 무리수 설정은 아니다.[5] 심지어 166회에서는 신검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신료들의 뜻에 동참하기도 했다. 금강과 독대를 할 때도 신검이 황제로서의 자질과 역량이 충분하다며 편들기도 했다.[6]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에서 견훤을 옆에서 수행하면서 신검의 온갖 못 볼 꼴을 보기도 하고 거기에 휘말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기 때문. 반면에 함께 견훤을 수행한 금강은 신검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였다.[7] 운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도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전의 이씨이 시조이기도 하다.[8] 신검의 쿠데타를 적극 지지한 왕후 박씨도 자신의 딸의 처지를 고려해 그의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능환, 능애 등 주동 세력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다. 신검 역시 매부가 후계를 둘러싼 갈등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누이를 고려하여 박영규를 죽일 생각은 결코 없었기도 하다.[9] 국대부인은 자신의 동복 아우들이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복 동생과 파진찬을 죽이고 아버지를 감금한 그들을 극렬히 비판했다. 그래서 자칫하면 견훤의 탈출이 후백제에 화가 될 수 있기에 망설이는 박영규에게 견훤을 도와달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결국 박영규도 부인의 말에 따라 결심을 굳히고 견훤을 돕기로 하였다.[10] 하지만 가문 전체를 멸족당한 건 아닌데, 순천 박씨는 그 계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