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고(순양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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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 (こんごう / こんかう)
IJN BB Kongo(Imperial Japanese Navy Battleship Kongo)
구 일본 해군의 순양전함으로 공고급 1번함. 이름의 유래는 나라현과 오사카부 사이에 있는 산인 공고산(金剛山)에서 따왔다.
세계 최초의 현대적 전함 드레드노트의 등장 이후 벌어진 건함경쟁에서 서구열강과의 차이를 인식한 구 일본 해군이 기존의 장갑순양함 건조계획을 확대시켜 해외에서 도입한 최후의 주력함이다. 설계는 영국에서 이루어졌고, 자매함들은 일본 조선소에서 건조한 데 비해 초도함인 공고는 건조도 영국 빅커스에서 이루어졌다.
건조 당시는 순양전함이었으나, 일본 해군이 순양전함이라는 함종을 폐지하는 과정에 장갑이 강화되고 관측기기 및 탐조등 등을 위해 마스트를 지지대 삼아 파고다형 함교로 개장되는 등, 전함으로 탈바꿈한다.[1] 전간기 동안 1차 개장 이후에도 2차, 3차 개장을 통해 그 성능이 더욱 향상되었지만 공고가 취역한지 20년을 지나 30년이 다 되어가자 공고는 구식 전함 취급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공고가 활약할 기회를 더 만들어주었다.[2]
당시 일본 해군은 함대결전사상에 미쳐있었는데, 요약하자면 전함은 매우 중요한 전력이니 함부로 나설 수 없으며 결전용으로만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고는 결전의 주요 전력으로 쓰기엔 후달려서 야마토 등과 달리 여기저기 다니면서 활약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야마토급이 트럭 섬에서 선상호텔로 쓰이는 동안에도 공고는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해서 못쓰게 만드는 등의 활약을 했다.[3] 이후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다른 전함들과 함께 레이테 해전 등에 참가했다가 본국으로 후퇴하던 도중인 1944년 11월 21일 새벽 3시 미 해군 잠수함 SS-315 시라이온의 공격을 받아 어뢰 2발을 맞고 5시 30분에 대만 근처 해역에서 침몰했다. 여담으로 시라이온의 어뢰관에는 일본의 필리핀 침공때 침몰당한 사르고급 SS-195 시라이온에서 전사한 스텔링 세실 포스터, 멜빈 도널드 오코넬, 어니스트 업햄 오길비, 발렌타인 레스터 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본래 새벽 3시에 어뢰를 맞자마자 심각한 침수가 발생했지만, 그래도 일단 전함은 전함이라 아직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일단 속도를 늦추고 응급수리를 했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잠수함을 일단 떨쳐내고 나서 보수하는 편이 낫겠다는 이유로 오히려 속도를 올렸고, 그 결과 노후화된 함체 및 격벽의 손상이 점점 심해져 침수가 급격히 늘어는 끝에 2시간 뒤에는 기관 정지와 함께 배가 심하게 기울고 말았다. 이때 수리를 위한 응급팀이 투입됐지만 때는 너무 늦었고, 피탄 2시간 30분 뒤인 새벽 5시 30분에는 완전 전복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포탑 준비탄 저장대에서 포탄이 굴러 떨어져 격발되면서 유폭을 일으키는 바람에 승무원 1,300명이 사망했고 생존자는 호위함대였던 제17구축대 구축함들에게 구조됐다.[4]
더 자세한 설명은 공고급 순양전함 문서로.
[1] 맨 위의 사진이 3차 개장 이후의 모습. 건조 당시의 모습은 공고급 항목 참조.[2] 참고로 1920년대 당시 일본의 답없는 기술력을 이야기 할때 나오는 도시 전설 중에 하나가 공고의 1차 개장때 "일본제 드릴 비트가 부러져서 영국에서 수입한 드릴비트로 겨우 천공했다는" 건데 부품만 영국서 사온 히에이의 경우를 보면 거의 도시전설에 가깝다.[3] 물론 그만큼 격침될 위험도 많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기리시마 항목 참조.[4] 제17구축대는 공고가 뇌격을 받을 때 함께 공격당해 구축대 기함 우라카제가 굉침하고 전대장 다니 대좌 이하 탑승원 전원이 전사한 상태였다. 호위함대가 시작부터 목이 잘린 상태였던 셈으로, 이 상황은 공고가 현장을 신속 이탈하려 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