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안방
1. 개요
조선 전기의 무신, 청백리(淸白吏). 자는 여주(汝柱),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경상도 현풍 출생이다.
곽안방(郭安邦)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과 함께 대구 현풍의 대표적 불천위(不遷位)[1] 인물이다. 곽안방은 세조 때 전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고, 해남현감과 익산군수 등을 역임했다. 수령을 지내면서 남달리 청렴한 벼슬생활로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오른 그는 ‘청백리(淸白吏) 곽안방’으로 불린다.
곽안방에 대한 기록은 전란 등으로 거의 멸실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청백선생실기(淸白先生實紀)’가 남아 있지만, 자료가 부실해 그의 생몰연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관련 기록을 참고할 때 대략 1420년 쯤 태어나 1480년 전후에 별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의 5대조이다.
2. 생애
곽안방(郭安邦)은 경상도 현풍[2] 에서 아버지 곽득종(郭得宗)과 어머니 수성 나씨(壽城 羅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낸 송포(宋褒)의 딸 김해 송씨(金海宋氏)이다. 곽승양(郭承陽)·곽승화(郭承華)·곽승문(郭承文) 세 아들을 두었다.
세종때 무과에 급제한 후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되었으며, 1455년(세조 1)에는 세조의 등극을 도운 공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다. 1467년(세조 13)에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부사직(副司直)·진무(鎭撫) 등의 무관직을 역임하였고, 외관직으로 해남 현감과 익산 군수를 지냈으며 봉열대부(奉列大夫)에 올랐다. 특히 외관직에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해남현(海南縣) 명환(名宦)에는 곽안방에 대해 “은혜로운 정치를 했으므로 백성들이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세조 연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관직 생활을 끝낸 후 고향 솔례(率禮)[3] 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3. 청백리
곽안방은 세종 치세 말기에 무과에 급제한 후 출사, 승진을 거듭해 해남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렴한 관리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세조 때 군공(軍功)이 인정되어 원종이등훈(原從二等勳)에 오르며, 그 후 세조 연간에 익산군수로 발령받아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오르게 된다.
군현(郡縣)에 나아가 정사를 펼 때는 엄하고 분명하며, 어질고 용서를 베푸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노래하며 속이지 않았다. 평생 얼음과 옥같은 처신을 했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한필의 말로 소조(蕭條)하게 돌아오니 사람들이 태수의 행차인 줄 몰랐다.
익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한 노비가 열쇠 하나를 차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이것 또한 관공서의 물건이니 어찌 적고 큰 것을 논하겠는가. 나를 더럽힐 수 없다.” 그러고는 바로 돌려 보내도록 했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현어(懸魚)를 실천한 것과 같다’고 했다. ‘현어’는 관공서에서 선물받은 고기를 창고에 달아 놓고 떠날 때 가져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리의 청렴을 비유한다.
그의 청백리 명단은 증보문헌비고(최초 발행 영조 46년<1770년>, 최후 발간 광무 11년<1907년>), 대동장고(순조 때의 학자 홍경모<1774∼1851년>가 편찬 발행), 청선고(광무 10년<1906년> 대한제국에서 편찬 발행), 전고대방(강효석이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편찬 발행) 등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4. 관련 유적지
1707년(숙종 33) 청백사(淸白祠)에 배향되었다. 청백사는 지금의 이양서원(尼陽書院)[4] 으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있다. 또한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대리 솔례 마을에 곽안방의 제청(祭廳)인 추보당(追報堂)[5] 이 세워져 있다.
그의 묘소는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이방리 산 64-14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