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
1. 개요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관리. 본관은 서흥.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스승이고 남효온의 친구이다.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동방사현이라 불린다.참조[1]나는 소학동자, 나랏일을 어찌 알겠는가
남효온의 사우명행록
2. 생애
30세가 될 때까지 소학을 읽으면서 수기를 하였다. 김종직은 김굉필을 극찬했는데 ‘성인(聖人)이 될 바탕이 있다’고 칭찬했다.
40세가 넘어서야 벼슬에 나갔다. 김종직의 제자였지만 김종직이 현실 타협적인 면을 보인다고 비판하여 사이가 나빠졌으며 김종직이 죽었을 때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참조
1498년(연산군 4년) 7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임금의 정치를 비난하거나 시국을 비방했다”는 죄로 벌을 받게 된다. 곤장 80대, 평안북도 희천(熙川) 유배형을 받았다.[2] 2년 후 다시 전라남도 순천(順天)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1504년(연산군 10년) 9월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연루되어 사약을 받게 되는데 향년 51세였다.
그 후 김굉필의 부인은 "책을 봐서 사형에 처해졌다"고 책을 전부 불태우고 자식들과 함께 경상남도 창녕으로 내려간다.
1610년(광해군 2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3. 여담
소학을 좋아했으며 친구인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서는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자인 조광조 역시 소학을 매우 좋아했다.참조
대표적인 제자로는 조광조, 김안국, 이장곤, 김정국 등이 있다.
4. 참고
사옹(蓑翁) 김굉필 “겉은 젖을망정 속까지 젖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