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쿠

 

[image]
우루마시에 위치한 카츠렌구스쿠(勝連城)
[image]
나하시에 위치한 슈리 성의 성벽.
1. 개요
2. 기원
3. 특징
4. 기타


1. 개요


구스쿠(城, 御城, ぐすく)는 류큐 제도에 세워진 성 또는 요새들을 말한다. 오키나와어에는 스(す)가 시(し)로 변하는 음운 현상이 있어서 구시쿠(ぐしく)라고도 한다. 구시쿠 쪽이 현대에 많이 쓰이는 발음인듯. 현대 오키나와 본도에 많이 분포해 있으며 이외에도 아마미 군도 등에도 분포되어 있다. 모든 구스쿠들을 합하면 300여개 가까이 된다.
이르게는 11~12세기부터 구스쿠가 오키나와에서 등장하게 되는데, 금속과 같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군장국가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스쿠와 그 일대를 다스리는 족장 혹은 영주들을 아지(按司)라고 불렀다. 또한 이 시기부터 류큐 왕국의 건국까지를 구스쿠 시대라고 부른다.
구스쿠는 성의 영향권 하에 놓인 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카구스쿠구스쿠(中城城) 같은 경우에는 나카구스쿠에 있는 구스쿠이기 때문에 나카구스쿠구스쿠라고 하는 것. 한국으로 치면 개성에 지어놓은 성을 개성성이라 하는 것과 비슷할까나.
2000년에 나키진구스쿠(今帰仁城), 자키미구스쿠(座喜味城), 카츠렌구스쿠(勝連城), 나카구스쿠구스쿠(中城城), 슈리 성(首里城)[1]이 다른 유적들과 함께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2. 기원


구스쿠의 초창기 등장 원인으로는 네 가지 설이 존재한다.
  • 성역설: 오키나와 사람들이 신성시하던 곳이라는 설. 오키나와의 류큐 신토에는 제사를 지내는 성소인 우타키(御嶽)가 있는데, 초창기의 구스쿠는 우타키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난죠 시에 위치한 타마구스쿠구스쿠(玉城城)의 경우에는 아직도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 여러 구스쿠의 내부에는 우타키가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 집락설: 오키나와 사람들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건설했을 것이라는 설.
  • 성관설: 아지와 같은 유력자의 거점으로 건설되었다는 설.
  • 삼별초설 : 몽골과 항쟁하던 삼별초군이 제주도에서 패배한 후 일부 생존자들이 오키나와로 이동하여 건설하였다는 설
이에 대한 근거로 구스쿠에서 출토된 기와가 고려 삼별초 시대
에 제작된 기와의 문양과 똑같으며, 제작자와 만든시기가 기와에
표시되어있음 https://youtu.be/yTya5JcM1kA

3. 특징


오키나와는 가공이 용이한 석회암이 풍부하였고, 이 덕분에 많은 구스쿠들이 석회암 성벽으로 건설되었다. 구릉이나 평지에 많이 건설되었다.
상당히 견고한 성곽이었기 때문에,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의 방어진지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미군은 애를 먹기는 했지만 포탄을 쏟아붓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때문에 상당수의 구스쿠들이 폐허가 되어버렸다. 슈리성은 1992년이 되어서야 복구되었으며, 일부 부분은 아직도 복구가 계속되고 있다.

4. 기타


오키나와에서 구스쿠라는 단어는 사람의 성(姓)이나 지명에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본토 일본어의 영향으로 '시로'나 '죠'로 읽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아직도 '구스쿠'라는 독음을 쓰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헷갈리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는 듯.
두산백과에 따르면 구스쿠의 어원은 '홍길동'의 집단이 살던 곳이라고 하지만 '''이건 말도 안된다.''' 구스쿠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이전이고, 홍길동은 15세기 사람이다. [2]

[1] 복원된 건축물은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지 않았다. 지정된 부분은 성터 뿐이다.[2] 다만 원전의 홍길동이 마지막에 율도국으로 건너가서 왕이 되었는데, 최근 고전문학 관련 연구에 따르면 류큐왕국이 율도국의 모티브로 추측되며, 율도국으로 건너갔다는 설정이 지금의 형태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