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쿠 시대

 


1. 개요
2. 구스쿠 시대의 특징
3. 역사
3.1. 천손씨
3.2. 슌텐 왕조
3.3. 에이소 왕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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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쿠시대(グスク時代)는 오키나와 역사의 시대구분 가운데 하나로 구스쿠(城, ぐすく)가 등장한 11~12세기부터 류큐 왕국에 의해 오키나와 섬이 통일된 1429년까지를 이르는 말이다. 아지시대(按司時代)라는 표현도 쓰인다.
구스쿠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성(城)들인 구스쿠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2. 구스쿠 시대의 특징


11~12세기 경부터 오키나와 섬 각지와 주변 섬들에 구스쿠라는 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대륙과 일본의 철기가 도입되고 정착 농경문화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인구도 많이 증가했다. 이 시기 농업은 물이 잘 빠지는 석회암 대지에 를 심고, 주변 저지대는 으로 개간하는 형태였다.[1]
구스쿠와 함께 구스쿠를 다스리는 족장 혹은 영주인 아지(按司)[2]라는 존재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의 경쟁과 충돌에 의해 구스쿠 시대는 전국시대와 같은 양상을 보였다.
나하시 등지에서 구스쿠 시대의 류큐인 인골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당시 야마토 민족의 것과 차이가 없는 유골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일본 본토 혹은 중국 대륙 혹은 한반도 등지로부터 새로운 집단이 유입되었고, 이들이 농경 문화, 철기 기술 등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12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도자기들이 오키나와에서 출토되기도 했는데, 이는 아지들이 중국과 교류했던 증거로 여겨진다. 심지어 로마 동전도 썼었다.
14세기 초부터 오키나와 섬은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삼산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보통은 삼산시대를 구스쿠 시대의 일부로 보고있다.

3. 역사


이 시기의 역사는 가요집 <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 역사서 <중산세감>(中山世鑑), 중산세보<中山世譜> 등에 기록되어있지만, 역사라기 보다는 신화인 부분이 많다. 또 책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특히 천손씨는 아무리 봐도 신화이고, 슌텐 왕조는 중국의 하나라(夏)와 같은 전설상의 왕조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에이소 왕조는 우라소에 요도레(浦添ようどれ)와 같은 유적등을 근거로 실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3.1. 천손씨


전해지는 바로는 천제(天帝)가 여신 아마미쿄(阿摩美久, 阿摩彌姑)와 남신 시네리쿄(志仁禮久)를 보내어 류큐 열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아마미쿄와 시네리쿄(<오모로소시>) 혹은 천제의 아들딸(<중산세감>, <중산세보>)이 3남2녀를 낳았고, 장남이 천손씨(天孫氏), 차남이 아지(按司), 삼남이 백성의 시조가 되었으며, 장녀가 키미기미(君々)[3], 차녀가 노로(ノロ)[4]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천손씨는 25대 17802년동안 류큐를 다스렸다고 하며, 순희 연간(淳煕, 1174~1189)에 역신인 리유(利勇)에 의해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3.2. 슌텐 왕조


이때 등장하는 오키나와의 영웅이 우라소에의 아지인 슌텐(舜天)이다. 슌텐은 1187년 천손씨를 멸망시킨 리유를 물리치고 중산왕(中山王)에 즉위하였다.
슌텐은 기록에 의하면 이즈 제도에 유배되었던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에 건너오게 되었고, 이후 오오자토(大里) 아지의 누이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곧이 곧대로 신뢰하기는 어렵고,[5] 류큐 왕국에서 행해진 숭조사업(崇祖事業)이거나,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전설로 생각된다.[6]
슌텐 왕조는 2대 슌바준키(舜馬順煕), 3대 기혼(義本)까지 이어졌다. 왕이라고는 하지만, 중앙 집권국가의 통치자가 아닌, 여러 아지들의 수장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3. 에이소 왕조


1260년, 슌텐 왕조의 3대 왕이었던 기혼은 나라에 역병과 재앙이 발생하자 책임을 지고 섭정이었던 에이소(英祖)에게 양위했다. 이로서 슌텐 왕조는 종언을 고하고 에이소 왕조가 시작되었다. 에이소는 천손씨의 후예였다고 전해지며, 어머니가 태몽으로 태양을 삼키는 꿈을 꿨기 때문에 티다노코(てぃだのこ, 태양의 아들)라고 불렸다고 한다.
에이소가 즉위하던 시기에 남송의 승려 젠칸(禅鑑)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에이소는 죽은 후 우라소에 구스쿠에 위치한 우라소에 요도레(浦添ようどれ)에 묻혔다. 이곳을 조사한 결과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기와에 새겨진 계유년(癸酉年)이라는 글씨에 근거해 정확히는 1273년 경에 조성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에이소 왕조 4대 왕인 타마구스쿠(玉城)가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쇠락하기 시작했고, 나이가 어렸던 세이이(西威)가 5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에이소 왕조는 결국 몰락했다. 14세기 초부터는 오키나와가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으로 분열된 삼산시대가 시작된다.

[1] 현재 오키나와의 특산물이 된 사탕수수는 17세기가 되어서야 전해진다.[2] 이외에 요노누시(世の主, '세상의 주인'), 테다(てだ, '태양')라고 불리는 지배자들도 있었다.[3] 상급 신녀(神女)[4] 류큐 신토의 여성 사제[5] 이즈 섬에서 오키나와까지 거리가 1300km가 넘는다![6] 이 이야기는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으로 발전, 후일 류큐가 일본제국에 병합되었을 때, 일본의 류큐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이거나 일본 본토가 오키나와를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의 근거로도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