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미 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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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리적으로는 류큐 제도에 속하며, 문화권도 규슈 본토보다는 오키나와현에 가깝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일본 가고시마현 오시마군(大島郡, おおしまぐん)에 해당된다.
아마미오섬, 도쿠노섬, 오키노에라부섬, 요론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군도이다. 위치는 규슈와 오키나와 섬 사이에 있는데, 문화적으로는 오키나와권이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가고시마현 산하인 중간 지대이다. 요론섬 같은 남쪽 섬들은 규슈보다 오키나와섬에 훨씬 가깝다.
특산물로는 사탕수수로 유명하다. 전체적으로 아열대기후에 속한다. 류큐어 방언인 아마미어(시마유무타)가 사용된다. 이 곳은 과거에 일본과 류큐 왕국 모두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었던 탓에 일본 민요와 류카(琉歌: 류큐 음악)의 경계선이 그어지는 곳이었다. 아마미 군도의 민요인 시마우타(島唄)는 도쿠노 섬 이북으로는 일본 민요의 음계를 따르는데 반해 오키노에라부 이남은 류카의 음계를 따른다.
2. 역사
원래 류큐 왕국에 속했으며, 여러 호족에게 지배받았다. 남쪽 요론이나 오키노에라부 섬 등은 오키나와 본토에 지배받았지만, 북부는 비교적 독립적이었다. 1571년 류큐는 아마미 군도의 호족 세력을 진압했으나 1609년 사쓰마 번에게 빼앗겼다.[2] 오늘날 아마미 군도가 오키나와현이 아닌 가고시마현에 소속된 이유는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때 폐번치현을 하면서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아온 아마미 군도를 사쓰마 번 본토 지역 대부분과 함께 가고시마현으로 편성했던 것이다.
사쓰마 번은 아마미 군도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며 큰 수익을 봤다. 그러나 사탕수수 단일 경작으로 토양이 황폐화되고, 식량이 부족해졌다. 사쓰마 번은 아마미 설탕을 헐값에 사들여 큰 이익을 봤으며, 아마미 군도에 여러 생필품을 비싸게 팔았다. 섬을 벗어나는 것은 금지였다. 섬 주민은 성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으며, 극심한 빈곤과 기근에 시달렸다.
또한 사쓰마 번은 아마미 일대의 가로(家老)들에게 일본인과 다르게 성씨를 한 글자로만 쓰길 강요했다. 사쓰마 번에서는 원래 아마미 가로들의 성을 없애려고 했으나,[3] 그 경우 현지 가로들의 권위가 실추되기 때문에 번에 재고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쓰마 번은 대개 두 글자 이상의 성씨를 쓰는 본토의 사족(士族)들과 달리 아마미 군도의 가로들에게 한 글자 성씨를 쓰라고 명령했다.[4]
1871년 일본은 폐번치현에 따라 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했다. 1872년과 1879년에는 각각 제1·2차 류큐 처분에 따라 류큐 왕국이 오키나와 현이 되는 과정을 겪었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마미 군도는 가고시마 현 소속이 되었다. 제2차 류큐 처분이 있던 1879년에 아마미 군도의 영제국[5] 을 오스미노쿠니(大隅國) 소속으로 지정하고 아마미 군도 일대에 오시마 군(大島郡)을 설치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고,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2차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미국이 오키나와 섬에 상륙하여 난세이 제도(南西諸島) 중 북위 30도 이남에 속하는 지역을 일본의 시정권에서 떼어내고 미국의 통치하에 두었는데,[6] 그 중에 오키나와 현과 아마미 군도, 그리고 토카라 열도(吐噶喇列島)[7] 가 류큐 열도 미국군정부(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of the Ryukyu Islands)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1950년 8월 4일 미국군정부는 관할 지역 내에 지방자치단체 개념으로 군도(群島, Gunto)[8] 정부를 만든다. 이 군도 정부는 모두 네 개였는데, '아마미 군도', '오키나와 군도', '미야코 군도', '야에야마 군도'였다. 이 중 아마미 군도는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지리적 개념의 아마미 군도 뿐만 아니라 토카라 열도까지 커버했다. 각 '군도'는 군도 지사와 군도의회 의원을 주민들의 선거로 뽑았다.
같은 해 12월 15일, 미국군정부는 류큐열도 미국민정부(United States Civil Administration of the Ryukyu Islands)로 전환됐다.
그런데 미국의 류큐 통치 하에서는 아무래도 규모가 가장 큰 오키나와 현 주민들의 입장이 반영되기가 쉬웠고 자연스레 아마미 군도와 토카라 열도의 의견이 덜 반영되는 일이 생겼다. 게다가 이 두 지역은 이제 일본 본토에 물산을 내다 팔기 힘들어져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은 모양. 그래서 이 일대의 주민들이 일본 복귀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초등학생이 탄원서에 피로 서명을 하기도 한 모양이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오키나와 현에 오키나와 공산당, 아마미 군도에 아마미 공산당을 만들었는데(미국에 의해 불법 조직으로 취급돼서 표면적으로 활동하는 합법 조직으로 각각 오키나와 인민당과 아마미 사회민주당을 창당함) 처음에 아마미 공산당은 '아마미 인민 공화국'의 건국을 목표로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민들의 여론을 본 뒤 일본 복귀 운동에 동참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오키나와와 아마미의 공산당은 두 지역이 각각 일본에 복귀한 뒤 일본 공산당에 합쳐졌다.[9]
결국 미국은 어차피 토카라 열도와 아마미 군도가 군사적으로 별 쓸모가 없는데 굳이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에 시달리면서까지 억지로 통치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미국은 먼저 1952년 2월 10일에 '아마미 군도 정부' 관할 하에 있던 토카라 열도를 일본에 반환했다.
한편 같은 해 4월 미국민정부는 정책을 바꿔 군도 정부를 한데 통합하여 류큐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에 따라 '군도' 별로 실시됐던 선거도 한데 통합돼서 류큐 전체의 유권자를 대표하는 지사를 선출하고 류큐 전체를 대표하는 자치 의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 후 1953년 12월 25일에는 드디어 아마미 군도가 주민들의 소망대로 일본에 반환됐다.
한편 오늘날 오키나와 현에서 류큐 자치권 확대나 류큐 독립을 주장하는 운동가들은 '류큐 주'[10] 나 독립된 '류큐 공화국'에 아마미 군도가 포함되길 희망하고 있다.[11] 그러나 일본인들이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다.
3. 언어
아마미 군도의 토착어들은 류큐어의 일종인 아마미어로 분류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류큐어 문서를 참고할 것. 유네스코는 2009년에 일본 내에서 쓰이는 8개 '언어'[12] 를 소멸 위기 언어로 지정했다. 이 소멸 위기 언어들 중에 아마미 군도에서 쓰이는 토착 '언어'들도 포함됐는데, 아마미어[13] 와 쿠니가미어[14] 가 여기에 해당된다. 다만 이런 분류법은 언어학자들한테나 통하지 일반적이지는 않다. 일반인들은 아마미 군도 내에서 쓰이는 토착 언어 또는 방언들을 그냥 일본어나 류큐어의 '아마미 방언'이라고 뭉뚱그리는 경우가 많다.
아마미 군도의 토착 언어 또는 방언들은 유네스코가 인정했듯이 소멸 위기인 상황이고, 젊은 세대들은 일본 본토의 말을 받아들여 쓰고 있다. 표준어와 완전히 동일하진 않고 아마미 군도의 전통적인 언어/방언의 간섭을 받아 변질된 신종 일본어 방언이 쓰이는 듯하다. 이것은 오키나와의 우치나 야마토구치(ウチナーヤマトグチ)와 비슷하다.
4. 출신 인물
- 노보리 쇼무(昇曙夢, 1878년 7월 17일~1958년 11월 22일): 러시아 문학자이다. 정교회 신자로, 사도 대등자(亜使徒) 성(聖) 니콜라이 대주교[15] 의 문하생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만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아마미 군도의 일본 복귀 운동을 벌였다.
- RIKKI: 시마우타와 팝을 노래하는 여성 가수.
- 하지메 치토세(元ちとせ): 아마미 민요 가수. 체리필터가 2007년에 발표한 커버 앨범에 수록된 《여신의 나무》의 원곡을 불렀다.
- azusa: 아마미오 섬 야마토 촌 출신 싱어송라이터. 2003년에 스파클링 포인트라는 3인조 그룹으로 데뷔했으며 나머지 두 명도 같은 섬의 아마미 시 출신이다. 2008년 솔로로 전향한 후 아마가미 SS 등의 애니메이션 삽입곡에 참여해 인기를 얻었다.
- 다지마 나비(田島ナビ): 1900년 8월 4일생으로 2017년 9월 18일부터 2018년 4월 21일까지 공식적인 세계최고령자였다. 세계최고령자가 된 날 가고시마현 지사가 아마미오 섬 동쪽의 작은 섬인 기카이 섬(喜界島)까지 가서 행사에 참석했다. 또한 출생일이 공식적으로 증명된 마지막까지 남은 마지막 19세기 생존자 였다. 2018년 4월 21일 사망했다. 117년 260일 동안 살았으며 이는 잔 칼망 (122년 164일) 사라 나우스 (119년 97일)에 이어 공식적으로는 역대 3번째로 오래 산 인물이다. 생존하고 있는 세계 최고령자 기록은 요코하마에 사는 미야코 치요(都千代, 1901년 5월 2일 생)에게 넘어갔다.
5. 기타
- 카와세 나오미의 영화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의 배경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교복을 입고 바다로 뛰어드는 묘사가 등장하는데, 아마미 군도에서는 꽤 흔한 일이라고 한다.
- 국내에 얼마 안 되는 아마미 오오시마의 추천 여행기 #
- 중앙일보 기자가 쓴 키가이섬의 모습 #
- 일본의 중의원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였을 당시에는 유일하게 1명만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 지역이었는데 시골동네답게 보수성향이 우세햇지만 특이하게도 자민당이 의석을 독식하던 지역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유인 즉슨 자민당 후보와 보수계 무소속 후보가 맞붙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쟁구조는 의외로 꽤 치열해서 폭력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알려져있는 사쓰마 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두 번이나 유배를 갔던 곳으로 유명하다. 첫번째는 아마미오시마, 두번째는 오키노에라부로 각각 유배되어 총 5년을 보냈다.
6. 관련 문서
[1] 오랫동안 아마미 군도와 아마미 제도(奄美諸島/あまみしょとう)라는 명칭이 혼용돼 왔는데, 2010년 일본 국토지리원 산하 '지명 등의 통일에 관한 연락 협의회'에서 아마미 군도로 통일하기로 결정했다.[2] 단, 1609년 이후에도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아마미 군도가 류큐 왕국에 소속된 것처럼 취급되었다. 아마미 군도에서는 마기리(間切)라는 류큐 왕국의 행정 구역 단위가 유지되었다. 반면에 일본 율령제에 의거한 국(國)·군(郡)·리(里)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사쓰마 번 본토의 도조제(外城制)도 실시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에도 막부에서 발행된 공식 지도에서도 유구국(류큐 왕국)의 일부로 취급하였다(겐로쿠 연간에 그려진 지도, 덴포 연간에 그려진 지도). 근데 이들 지도에서는 일본이 자국 내에 율령제에 따라 명목상으로 운용 중이던 국(國)들과 유구국 간에 별 차이를 두지 않고 있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구국이 일본의 실질적 행정구역 중에 하나라고 오해하기 좋게 그려져 있다. 이래저래 류큐 왕국은 안습.[3] 전근대 일본에서는 성씨를 지배층만 가졌고 평민이나 천민은 성씨를 가질 수 없었다. 아마미 군도의 가로들이 성씨를 못 쓰게 하는 건 그들을 평민 취급하겠다는 뜻이다.[4] 류큐 왕국의 지배층은 중국식 성명과 일본식 성명을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류큐 지배층은 일본식 성명은 일본과의 외교에서만 사용하고 명·청이나 조선과의 외교에서는 중국식 성명을 썼다. 일본은 아마미 군도가 대외적으로는 계속 류큐 왕국의 영토인 척했기 때문에 여기에 맞춰 중국식으로 성씨를 한 글자로 쓰게 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중국식 성씨 중에도 두 글자 성이 있고, 일본식 성씨 중에도 한 글자 성이 있긴 했지만 대개 전자는 한 글자(그리고 류큐인들이 썼던 중국식 성씨는 모두 한 글자였다), 후자는 두 글자 이상이 많으니깐. 이 때문에 훗날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아마미 군도 출신으로 가로의 후손이었던 주민이 조선인으로 오해받아 학살당하기도 했다.[5] 일본이 고대에 당나라로부터 율령제를 수입하면서 전국에 쿠니(國)이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는데, 오늘날 國의 의미가 다른 뜻(주권 국가)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구분을 위해 영제국(료세이코쿠)이나 율령국(리쓰료코쿠)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에도 막부 때 번(藩)이 실질 행정구역이 됐기 때문에, 영제국은 명목상의 행정구역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일본은 근대화 과정을 거친 뒤에는 이전보다 더욱 영제국이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6] 오가사와라 제도 등 그 밖의 지역도 별도로 미국의 통치 하에 두었다.#[7] 원래 토카라 열도는 류큐 왕국의 영토였던 적이 없으나 미국에 의해 꼽사리 끼게 됐다. 이 당시에 오시마군의 관할 구역은 지금보다 더 넓어져서 도카라 열도와 가미미시마(上三島)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미국은 오시마군의 당시 관할 지역 중 가미미시마는 따로 큐슈 섬과 인접한 지역이라 여기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 즉 아마미 군도와 도카라 열도를 류큐에 포함시켰다. 오시마군은 이때부터 몇 년 동안 일본 본토에 속하는 지역(가미미시마)과 류큐에 속하는 지역으로 분단된 상태로 있게 되었다.[8] Gunto는 일본어를 그대로 로마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 '군도'는 행정적 개념으로 급조한 것이라서 지리 용어와 정확히 대응되진 않는다.[9] 하지만 막상 복귀후에 좌파인사들이 이득을 보는 일은 없었는데 나제 시장 출신으로 복귀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이즈미 후루우는 일본복귀 이후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20%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면서 떡실신 당했고, 이후로 당선되지 못한채로 사망했고, 이후로 사회당이 여러번 후보를 내보기는 했지만 자민당 vs 보수계 무소속 후보라는 구도를 단 한 차례도 깨보지 못하고 나중에 와서 후보를 내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되었고, 공산당도 주기적으로 후보를 내기는 하지만 자민당 vs 보수계 무소속 후보 구도가 되었을때는 한자릿수대의 매우 저조한 득표율만 얻으로 패배하기 일쑤였다.[10] 도주제 문서 참고.[11] 예: 가리유시 클럽(구 류큐독립당)의 공식 홈페이지 본문. 본문을 암미(奄美)로 검색해서 죽 살펴보다 보면 자신들이 과거에 아마미 군도의 역사에 대해 무지했다며 반성하는 문장도 찾을 수 있다![12] 이 8개 '언어' 중 아이누어를 제외하고는 관습적으로 개별 언어가 아니라 방언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 8개 언어는 일본어의 류큐방언 또는 류큐어로 취급되는 오키나와어, 아마미어, 미야코어, 야에야마어, 쿠니가미어, 요나구니어, 류큐 열도를 제외한 일본 내에서 특수한 방언으로 분류되는 하치조어, 그리고 일본어와 완전히 다른 언어인 아이누어이다.[13] 유네스코보다 더 세분화한 에스놀로그(Ethnologue)의 분류 방식에 따르면 북아마미오시마어, 남아마미오시마어, 도쿠노시마어, 기카이어에 해당되며 이들 모두 아마미 군도 내에서만 쓰인다. 자세한 것은 류큐어 문서의 설명을 참고할 것.[14] 유네스코가 구니가미어로 분류한 언어는, 유네스코보다 더 세분화한 에스놀로그(Ethnologue)의 분류 방식상 쿠니가미어(유네스코보다 좁은 의미), 요론어, 오키노에라부어에 대응되는데, 이 중 요론어, 오키노에라부어만 아마미 군도에서 쓰인다. 에스놀로그가 정의한 좁은 의미의 쿠니가미어는 오키나와 본섬 북부에서 쓰이기 때문에 아마미 군도의 토착어는 아니지만, 아마미 군도에 속하는 요론 섬과 오키노에라부 섬의 말과 비슷한 모양이다. 자세한 것은 류큐어 문서의 설명을 참고할 것.[15] 1836년 8월 1일(율리우스력)~1912년 2월 16일(그레고리력). 본명은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카사트킨(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Касаткин)으로, 일본에 정교회를 전파하고 일본 정교회를 창건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