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

 


'''류큐국
琉球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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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문장'''
[image][1]
'''1429년~1879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삼산시대
'''일본제국'''
오키나와 현
'''위치'''
오키나와
'''수도'''
슈리[2]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언어'''
류큐어
(오키나와어)
'''종교'''
류큐 신토, 불교, 유교, 신토
'''주요 사건'''
1429년 류큐 통일
→류큐 왕국으로 건국
1609년 사쓰마 번의 침략
에도 막부아마미 군도 점령
1872년 일본제국이 속령으로 선언
1879년 일본제국에 강제병합되어 멸망
한자(정체자/신자체)
琉球國/琉球国[3][4]
琉球王國/琉球王国[5]
일본어
琉球国(りゅうきゅうこく)[6]
琉球王国(りゅうきゅうおうこく)[7]
오키나와어
琉球国(るーちゅーくく)
표준중국어
琉球國(Liúqiúguó)
琉球王國(Liúqiú Wángguó)
한국 한자음
유구국, 유구왕국
영어
Ryukyu Kingdom[8]
1. 개요
2. 역사
2.1. 신화 시대
2.3. 삼산 통일
2.4. 제1 쇼씨 왕조
2.5. 제2 쇼씨 왕조
2.5.1. 류큐의 전성기
2.5.2. 사쓰마의 침공
2.5.3. 근세 류큐
2.6. 류큐 처분과 멸망
3. 외교
3.1. 에도노보리
3.2. 조선과의 관계
3.3. 청나라와의 관계
4. 종교
5. 문화
5.1. 관련 문서
6.1. 류큐 왕가의 이후
7. 언어
8. 류큐의 상징들
9. 창작물에서
10.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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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守禮之邦 예의를 지키는 나라'''[9]

'''中山世土 중산이 다스리는 땅'''[10]

동중국해 남단의 류큐 제도를 영토로 하여 왕정 체제를 꾸렸던 국가. 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국(琉球國)으로 기재되어 있다. 현재는 일본오키나와 현으로 합병돼 있으나 여전히 그 일대를 류큐라고 부른다. 짧게 류큐국이라고도 한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조선에도 종종 조공을 바치거나 표류한 어민들을 송환하는 등 동아시아 세계의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을 맡고 있었다. 최대 영토는 현재 가고시마 현에 소속된 아마미 군도까지 포함됐었다. 하지만 이후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 결국 류큐 왕국이 아마미 군도의 지배권을 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마미 군도 문서를 참고할 것. 2차대전 직후 미군은 류큐를 일본에서 떼어내고 미국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는데, 오키나와 현과 아마미 군도는 물론이고 한 번도 류큐의 지배에 들어간 적이 없는 도카라 열도까지 류큐에 포함시켰다가 1950년대 초에 도카라 열도와 아마미 군도를 차례로 일본에 반환했다. 그래서 미국이 세운 류큐 정부의 관할 범위는 오키나와 현으로 축소되었고, 이후 1972년에 오키나와 현도 일본에 반환된다. 수도는 슈리(首里)였는데, 미국 통치기 이후 오키나와 현의 수도인 나하시의 일부가 되었다. 왕궁은 슈리성이다.
한국의 탐라국과 비교할 수 있지만, 지리적으로 제주도에 비해 본토에 훨씬 멀리 떨어져 있고, 제주도의 경우보다 훨씬 늦게 본토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독자성이 더 강하다. 그리고 탐라국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조선 초기에 완전히 중앙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왔고, 그 이전부터도 이미 국권이 사실상 넘어간 자치지역 수준으로 남은 데 반해 류큐 왕국의 일본 흡수는 근대 일제에 의한 합병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분리주의 운동이 잔존하고 있다. 또, 오키나와 현민들 사이에 분리주의를 지지하든 않든 여부를 떠나 일본 '본토' 주민들과 자신들을 다른 존재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2. 역사




2.1. 신화 시대


류큐 신화에서는 천신(天神) 아마미쿄(アマミキョ)의 후손이 천손씨(天孫氏) 왕조를 세우고 25대를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천손씨 왕조는 마지막 왕이 간신 이용(利勇)에게 시해당해 멸망하였다.

2.2. 구스쿠 시대


규슈와 타이완 사이의 태평양에 점점이 펼쳐있는 류큐 군도의 섬들에는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의 형태들이 출현하였다. 이들 섬에는 저마다 아지(按司)라고 불리는 족장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족장의 지위는 서로 평등하였고 이들은 평화로운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1~12세기경부터 오키나와 섬 각지와 주변 섬들에 구스쿠라는 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대륙과 일본의 철기가 도입되고 정착 농경문화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인구도 많이 증가했다. 이 시기 농업은 물이 잘 빠지는 석회암 대지에 를 심고, 주변 저지대는 으로 개간하는 형태였다. 현재 오키나와의 특산물이 된 사탕수수는 17세기가 되어서야 전해진다.
구스쿠와 함께 구스쿠를 다스리는 족장 혹은 영주인 아지(按司)[11]라는 존재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의 경쟁과 충돌에 의해 구스쿠시대는 전국시대와 같은 양상을 보였다.

2.3. 삼산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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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쿠 시대 후기인 1187년 슌텐 왕이 첫 왕조인 슌텐 왕조를 개창했다. 2대 왕 슌바준키의 선정에도 불구하고 슌텐 왕조는 3대 기혼왕 때 망하고, 왕위를 찬탈한 신하 에이소가 에이소 왕조를 세우고 남송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5대 만에 망한다.
그 후 14세기 말 류큐 군도의 최대 섬인 오키나와에 남산(南山), 중산(中山), 북산(北山)의 세 왕조가 탄생하였다. 류큐의 삼산시대 또는 ‘삼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삼국 중에는 오키나와 섬 가운데 위치한 중산왕국의 국력이 최강이었고 북산왕국이 최약체였다. 류큐의 삼국시대에는 류큐 군도 북부의 아마미 제도와 남부의 사키시마 제도는 미개한 상태였다. 세 왕국이 치고 박고 싸우던 중 오키나와 섬 남부 사시키(佐敷)[12]아지[13]인 쇼 하시(尚巴志)가 등장하였다. 그는 1406년에 중산을 무너뜨려 아버지 쇼 시쇼(尚思紹)를 중산왕으로 옹립했다. 이때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는데, '왕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다.'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이 죽고 세자인 쇼 시쇼가 뒤를 이었다.'고 보고했다. 이 즈음에 수도를 우라소에에서 슈리로 옮기고 슈리성을 왕궁으로 삼았다.
1416년에는 북산왕 한안지(攀安知)에게 불만을 품은 북산의 여러 아지들과 힘을 합하여 북산의 수도 나키진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한안지는 자결하고 북산은 멸망하여 중산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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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년에 쇼시쇼 왕이 붕어하자 쇼하시가 중산왕에 즉위했다. 1425년에는 명나라의 영락제가 보낸 책봉사가 도착하여 쇼하시의 중산왕 즉위를 인정했다.
1429년, 쇼하시는 남산을 멸망시켜 삼산을 통일했다. 이듬해 쇼하시는 명나라의 선덕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우리 류큐국은 세 왕이 다스리기를 백여 년, 싸움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이 허덕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제가 두 왕을 토벌했습니다. 이제 류큐는 태평세가 되어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선덕제는 "내 마음에 맞는 사업이다. 자만하지 말고 나라를 안정시켜라."라고 유지를 내렸다. 명나라 황제는 딱히 누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아니고 그저 류큐 지역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느라 조공을 받는 데 차질이 생기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2.4. 제1 쇼씨 왕조


삼산이 통일된 1429년부터 제1 쇼씨(尚氏) 왕조가 시작되어 1470년까지 이어졌으며, 이때부터 류큐 왕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중산이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류큐의 왕은 삼산 시대에 책봉 받은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의 칭호를 훗날 류큐가 일본에 합병돼 나라가 망할 때까지 사용한다. 명나라청나라로부터 대대로 그 칭호로 책봉 받았고 조선 등 다른 나라에 국서를 보낼 때도 이 칭호를 썼다. 또한 중산은 류큐의 별명이 돼서 류큐 역사서 제목에 들어가기도 했다. 《중산세감(中山世鑑)》, 《중산세보(中山世譜)》 등이 그 예이다.
일단 오키나와 섬은 겉으로는 통일되었지만, 내적으로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쇼하시가 죽고 나서 왕족들 사이에 잦은 내분이 일어났다. 쇼 하시 이후 제1 쇼씨왕조의 왕들 가운데 재위기간이 10년을 넘긴 경우가 없었다. 특히 1453년, 5대 왕 쇼 킨푸쿠(尚金福) 사후 왕위를 놓고 벌어진 싸움인 시로·후리의 난(志魯・布里の乱) 때에는 슈리성이 불타기도 했다.
1458년에는 고사마루·아마와리의 난(護佐丸·阿麻和利の乱)이 일어난다. 당시 고사마루(護佐丸)와 아마와리(阿麻和利)는 나카구스쿠구스쿠(中城城)와 카츠렌구스쿠(勝連城)를 거점으로 한 아지들로, 류큐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의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아마와리는 야심찬 인물로, 그를 경계한 고사마루가 만일을 대비하여 군사를 키웠다. 아마와리는 이를 역적모의라고 쇼 타이큐 왕에게 보고했고, 왕명을 받은 아마와리는 고사마루를 쳤다. 고사마루는 임금의 군대와 맞서 싸울 수 없다며 자결하였다. 이윽고 자신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지자 아마와리는 슈리를 공격하여 류큐 왕국을 무너뜨리고자 했으나 실패하여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당시 류큐 왕국의 왕권이 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5. 제2 쇼씨 왕조



2.5.1. 류큐의 전성기


1470년 쇼 토쿠(尚徳) 왕이 죽은 직후 궁정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신하였던 카나마루(金丸)가 세자를 살해하고 왕족들을 추방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을 쇼 엔(尚円)이라 하며 중산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부왕이 죽어 세자인 제가 뒤를 이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1477년 즉위한 왕조의 3대 왕 쇼 신(尚真)은 류큐 왕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여겨진다. 우선 제1 쇼씨 왕조의 혼란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쇼 신 왕은 각지의 구스쿠에 할거해 있던 아지들을 슈리에 모여살게 했다. 아지들을 대신하여 왕부에서는 아지웃치(按司掟, あじうちい)라는 관리들을 파견하여 지방을 다스렸다. 또한 관위와 신분별로 착용하는 관의 색깔과 비녀의 재질을 규정하였다.
쇼 신 왕은 적극적인 군사 활동 또한 펼쳤다. 1500년에는 미야코지마야에야마에 전함들을 보내 평정하여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522년에는 요나구니까지 영역을 넓혔다.
쇼 신 왕은 류큐의 종교도 정비하였다. 류큐 신토에는 노로(のろ)라고 하는 신녀들이 있는데, 쇼 신 왕은 이들의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자신의 누이를 최상급 노로인 치휘우후진(聞得大君, ちふぃうふじん)으로 취임케 하였다. 불교 또한 숭상하여 슈리성의 옆에 엔가쿠지(円覚寺)를 세웠다. 또 왕릉인 타마우둔(玉殿)을 조영했다.

2.5.2. 사쓰마의 침공


전국시대 당시 규슈를 거의 통일할 뻔 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실패한 사쓰마시마즈 가문임진왜란에서 상당한 손해를 보았다. 게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서군 편에 붙는 바람에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미운털이 박힌 도자마 다이묘가 되었다. 사쓰마 번은 이러한 곤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큐를 노렸다.
사실 이전부터 사쓰마 번은 류큐국에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준비할 무렵에도 류큐에 군량미를 내놓아라, 나고야성(名護屋城)[14] 축조 비용을 분담해라 등등 여러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류큐국에서는 이 요구들을 다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일부만 받아주었다.
1608년, 시마즈 타다츠네[15]는 사신을 보내 에도 막부에 조빙(통교)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류큐 조정에서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 그 와중에 삼사관(三司官, 재상)의 하나였던 쟈나 웨카타 리잔(謝名親方利山)[16][17] 이 깽판을 부려 사신을 모욕했고, 사쓰마는 류큐 침공을 결심했다.
1609년 3월 4일 사쓰마에서 무장 카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가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류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3월 7일에 아마미 제도의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를 점령한 이후, 차례차례 섬들을 점령하면서 본토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 이후 3월 25일에 류큐 왕국의 본토에 있는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에 도착, 이틀 뒤 나키진 구스쿠(今帰仁城)를 함락시켰다. 이후 우라소에 구스쿠(浦添城)를 함락시킨 이후, 슈리성 앞까지 진군해나갔다. 류큐국은 저항을 시도했으나 사쓰마군의 맹렬한 조총 세례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4월 1일, 사쓰마군이 나하시에 도착하자, 류큐국과 사쓰마는 류큐의 왕자와 삼사관을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5월 15일, 사쓰마는 쇼네이 왕과 100여 명의 신하들을 가고시마로 데려왔다. 결국 이들은 사쓰마에 충성의 맹세를 한 후, 에도까지 끌려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하고 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쟈나 웨카타 리잔은 끝까지 거부하였고, 결국 끓는 물에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

2.5.3. 근세 류큐


사쓰마는 류큐 왕국을 아예 멸망시키지는 않았는데, 류큐 왕국이 중국의 조공국가로 존재하면서 생기는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치품들이나, 중계무역 수익 등이었다. 류큐는 중국과 사쓰마, 그리고 에도 막부에 이중삼중으로 복속되는 신세가 되었다.
류큐를 속국으로 삼은 사쓰마는 우선 류큐에서 아마미 군도를 뜯어갔다. 단 대외적으로는 계속 류큐 왕국 영토인 것처럼 취급했고 대내적으로도 류큐 왕국의 행정구역 단위인 마기리(間切)가 유지되었다. 아마미 군도가 류큐와 별개의 지역이 된 건 메이지 유신 때 행해진 폐번치현에 의해서였다. 이후 현재까지 아마미 군도는 오키나와현이 아닌 가고시마현 소속이 되어 있다. 다만, 이에 대해 류큐 왕국이 억울하다고 보는 건 무리다. 원래 아마미 군도는 류큐 문화권이 아닌 일본 문화권에 속해있었는데, 1522년에 류큐 왕국에게 정복당하여 류큐의 땅이 된 것이다. 당시 류큐인들의 지배는 매우 가혹하여 아마미 제도의 주민들에게 강제로 류큐식으로 창씨개명하라고 시키는 등, 이 지역을 완전히 류큐 문화권으로 동화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동화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현재도 이곳의 언어는 오키나와어와 다소 유사한 편인데, 문제는 문화적으로만 동화됐을 뿐이지 역사적인 앙금이 어디 가는건 아니라서, 아마미 제도오키나와현의 주민들끼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안 좋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오늘날 일본 정부 내에서 도도부현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행정구역 체계를 도주제로 전환하려는 논의가 이뤄지자, 오키나와현 측에서는 자기들의 전신인 류큐 왕국의 잃어버린 땅이라는 이유로 아마미 제도를 도주제 도입 시에 신설될 류큐주에 편입시켜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아마미 제도 주민들이 이에 발끈하면서 가고시마현 잔류를 외치기도 했다.
사쓰마는 류큐에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였다. 또 류큐 수도 슈리 인근의 항구 도시인 나하시[18]에 류큐재번봉행(琉球在番奉行)이라는 관리를 두어 류큐를 감시하였다. 이 당시 엄청난 조공액을 감당하기 위해 류큐 왕국에서는 야에야마 등지의 먼 섬에 무거운 인두세를 부과하였다. 세금은 전부 로 받았는데, 섬마다 경작가능한 농지는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남자들은 말라리아가 도는 무인도까지 배를 타고 건너가 땅을 일궈 벼를 재배해야 했고, 여자들은 상포 공납을 위해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종인 베틀에 앉아 직물을 짜야했다. 인두세를 내지 못한 사람들은 나고(名子)라고 부르는 노예농민이 되었고 그 수가 3천에 이르렀다.[19] 각 섬들은 생존을 위해 아예 인구를 조절하기에 이르는데, 무인도 개척을 핑계로 일부 인원을 다른 섬으로 보내는 것은 매우 얌전한 편에 속했다. 이것이 불가능한 지역들은 낙태영아살해, 심한 경우 병약자나 노인들을 죽여서 세금을 줄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노력이 이어졌다. 17세기에는 쇼 쇼켄(向象賢)[20], 18세기에는 사이온(蔡温)[21]이라는 명재상들이 등장하여 나라를 안정시켜 나갔다. 마헤이코(麻平衡)[22]는 중국에서 고구마설탕 제조법을, 일본에서 목화를 들여와 오키나와의 경제 발달에 기여하였다. 또 이 즈음 명나라가 멸망하자 잠시 우왕좌왕하다 결국 청나라에 입조했는데, 만주족의 관복을 채택한 청나라가 제후국의 관복에 특별히 간섭하지 않는 틈을 타 슬그머니 류큐 왕이 명나라로부터 받아 쓰던 피변관(皮弁冠)[23]에 다는 옥의 개수를 늘려 옛 명나라 황제보다 격식이 더 높게 바꾸기도 했다. 본래 명나라는 류큐 왕을 군왕(郡王)급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류큐 왕은 군왕의 격식에 맞는 관복을 입었었다. 그러다가 명나라가 망한 뒤 피변관에 다는 옥의 줄 수를 기존의 7줄에서 12줄로 늘려 명나라 황제와 동일하게 했고 옥 전체 개수는 명나라 황제가 쓰던 것보다 더 많이 달게 되었다. 류큐 역사에 몇 안 되는 외왕내제라고 볼 수 있겠다.
1853년에는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에도 막부에 개항을 요구하러 가는 길에(흑선내항) 류큐에 내항하여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이듬해 유미수호조약(琉美修好条約)을 맺었다. 이후 1855년에 프랑스, 1859년에 네덜란드, 1860년에 이탈리아와도 수호조약을 맺었다.

2.6. 류큐 처분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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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최후의 왕 쇼타이(尚泰)를 묘사한 그림. 오른쪽 왕자는 차남 쇼인(尚寅).
메이지 유신이 이뤄져 폐번치현 등으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시작한 일본 신정부는 1872년 류큐를 번으로 강등하고 '유구국 중산왕' 쇼 타이(尚泰·상태)를 '유구번왕(琉球藩王)'으로 만듦으로서 류큐가 일본의 속령임을 확실히 선언했다. 이것을 '제1차 류큐 처분'이라고 한다.[24] 쇼 타이는 이 조치에 반발하여 청나라에 계속 '유구국 중산왕'의 명의로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 왔는데,[25] 그러다가 대만 섬에 상륙한 류큐인들이 현지 원주민들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청나라를 떠보기 위해 1874년 대만 섬에 출병하였다. 청나라는 자기 영토인 대만 섬에 일본군이 상륙하였으니 반발하긴 했으나 류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일본은 이로써 청나라가 류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합병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끝냈다.
1879년, 일본 정부는 5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류큐 번을 없애고 가고시마 현에 잠시 편입시켰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했다. 이와 동시에 쇼 타이 왕을 도쿄에 압송하였다. 이를 '제2차 류큐 처분'이라 부른다. 쇼 타이는 강등돼서 후작에 봉해졌다. 이로써 1429년 오키나와 섬 통일 이래 450년에 이르는 류큐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당시 세계여행 중이던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이 소식을 접하고 '''일본의 해양력이 강화되어 향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으로 판단''', 즉시 청나라로 가서 조정 내 실력자인 이홍장을 만나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일본의 류큐 병합을 막으라고 조언했으나 정작 이홍장은 시큰둥했다고 하며, 그랜트가 계속 설득하자 "정 그렇다면 당신이 한 번 일본과의 교섭을 주선해 보시구려"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반대로 일본은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나선 것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아직 국력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나라와의 무력 충돌이 있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중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그랜트가 주선한 청일 간 교섭 과정에서 다음 제안이 있었다.
  • 류큐 3분안(그랜트의 중재안)
류큐를 셋으로 쪼개서 서남부의 미야코와 야에야마 제도는 청이 먹고, 동쪽의 아마미 군도는 일본이 먹은 다음에(어차피 아마미 군도는 이미 일본이 실질 통치해 온 지 오래였다), 중부의 오키나와 본섬은 류큐 왕국을 부활시켜 독립을 회복시키되 청·일간 공동 관리 하에 두자는 제안이었다.
  • 류큐 2분안(이토 히로부미의 제안)
류큐를 둘로 쪼개서 서남부는 청이 먹고 나머지는 일본이 먹는 방안.
그러나 3분안은 그랜트가 직접 복위할 것을 설득했음에도 발전된 도쿄 생활에 만족한 쇼 타이 왕이 낙후된 오키나와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아(...) 실현이 불가능해졌으며, 2분안은 청나라의 소극적인 태도로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오키나와 군도는 그대로 일본 영토로 확정되고 말았다. 당시 청나라가 해양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류큐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상세한 내용은 이 기고문에서 볼 수 있다.[26]
그래도 어쨌든 일본의 류큐 병합은 청나라가 조선에 보다 적극적으로 내정간섭을 하게 된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1876년에 일본 대표단이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을 방문하여 강화도조약의 '조선은 자주국'(제1조) 조항을 보여주자, 총리각국사무아문 측은 조선은 본래부터 그런 나라였다면서 그 표현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중국에 의지했던 류큐가 한 방에 일본에 넘어가자 베트남이나 조선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류큐는 일제시대에 법률적으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內地), 즉 본토로 취급되었다.
류큐의 강제병합은 주변국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유운동(일본 유학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27]을 주도한 것으로 곧잘 언급되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반패주)는 '유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를 써서 류큐의 망국사를 언급하며 독립이 왜 중요한가를 자국민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고, 조선에서도 류큐가 강제병합되어 일본의 한 현으로 격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의 역사는 오키나와/역사/일본 제국을 참조할 것.

3.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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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류큐 왕국의 건국 직후에는 동남아시아, 일본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에는 조공을 바치고 왕의 책봉을 받았다. 특히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류큐의 중요한 밥줄 가운데 하나였다. 명나라에서도 류큐를 우대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베트남은 3년에 1회, 일본(무로마치 막부)는 10년에 1회 조공을 바칠 수 있었는데, 류큐는 2년에 1회씩이었다. 1470년대 이전까지는 1년에 1회씩이었으나 이후부터는 2년에 1회씩으로 제한된다.[28] 이는 명나라에 매년 4회씩의 조공 무역을 한 조선 다음으로 잦은 횟수이다. 류큐는 조공을 바친 대가로 명나라와의 무역 독점권을 획득하였으며 명나라의 상품을 수입하여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수출하였고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물산을 수입하여 명나라에 수출함으로써 해상중개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의 해양의 요충지에 위치한 류큐는 지정학적 우위를 살려 활발한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찬란한 번영을 누렸다.
15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위협이 커져서 조선과 교류하기 힘들어지자, 류큐국은 방침을 바꾸어 일본의 상인을 통한 간접 무역으로 조선과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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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북단과 남단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16세기까지 아시아 지역의 해양 중심지 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도 교류할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류큐국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슈리성 만국진량의 종(1458년)에 적힌 명문(銘文)이 있다. 만국진량의 뜻 자체가 '세계의 여러나라를 잇는 가교'라는 뜻. 이 명문엔 주변의 나라들에 빗대 류큐를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흥미롭게도 삼한(三韓), 즉 조선을 명나라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 명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류큐의 주요한 무역 상품 가운데 토산품으로는 , 나각(螺角, 소라껍질)[29], 해파(海巴, 조개껍질)[30], 소가죽, 유황[31], 파초포(芭草布, 파초 잎 섬유로 만든 천)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본도구리,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아, 주석, 향신료 등을 가져와서 중개무역을 펼쳤다. 일본 홋카이도산 말린 다시마는 약재로서[32] 중국에 많이 팔렸다. 17세기 이후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면서 흑설탕 매매는 류큐 왕실의 돈줄을 책임지는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울금도 돈이 꽤 되었다는 듯. 물소도 길러서 물소뿔도 생산되었는데 조선에서 각궁을 만드는 데 쓰였다. 한편 왜구가 납치한 조선인들을 사고 파는 노예시장이 나하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하시의 쿠메촌(久米村)에는 쿠메삼십육성(久米三十六姓)이라 불리는 복건성 계통의 도래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은 류큐의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6세기에 들어서, 포르투갈스페인 제국이 동아시아에 진출하고, 일본의 상인들이 직접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한데다, 명나라의 국력이 쇠락하여 류큐의 해외무역도 힘을 잃고 만다. 류큐와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는 1570년 시암(태국)으로 배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조공 무역과 일본과의 무역은 계속되어 류큐를 먹여 살렸다.

3.1. 에도노보리


사쓰마의 침입 이후, 류큐에서 에도 막부로 보내던 사절단을 에도노보리(江戸上り) 또는 류큐사절(琉球使節)이라고 한다. 1634년부터 1850년까지 18회 보내졌다. 류큐 국왕 즉위시 보내는 사은사(謝恩使)와 새로운 쇼군 습직시 보내는 경하사(慶賀使)로 나뉜다.
당시 야마토(일본 본토)에서는 류큐를 다른 나라로 여기고 있었으며, 류큐에서 올라온 에도노보리의 행렬은 조선통신사에 버금갈 정도로 굉장한 관심을 끌었다. 또 일본의 지식인들 가운데 류큐를 통해 중국의 사정을 듣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일본에선 류큐의 사신단을 공물을 바치러 온 조공단으로 선전하여 권위를 널리 높였다.

3.2. 조선과의 관계




3.3. 청나라와의 관계




4. 종교


류큐에서는 전통적으로 류큐의 전통 신앙인 류큐 신토를 믿어왔다. 류큐 왕국 정부는 신녀인 노로(ノロ)의 조직을 관리하였으며, 최상위 노로인 키코에오오키미(聞得大君)는 왕족 여성이 임명되었다. 노로 이외에도 개인이나 마을을 위해 일하는 무당인 유타(ユタ), 남성 점쟁이인 토키(トキ)도 있었다. 17세기 무렵에는 유타 및 토키가 반란을 일으키자 류큐 왕국에서 탄압하였다.
불교는 13세기에 전해졌으며, 슈리성 옆의 엔가쿠지(円覚寺)에서는 조선에서 받아온 팔만대장경 인본을 보관하고 있었으나[33] 사쓰마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일본 본토의 신토 또한 건너왔는데, 신사가 절 옆에 부속되어 지어진다던가 하는 영향을 주었다. 일부 신토의 신들은 오키나와의 신들과 동일시 되기도 했다. 류큐 왕국 시절에 세워진 여덟개의 주요한 신사를 류큐팔사(琉球八社)라고 한다.
유교는 왕실에서의 영향력이 있었다. 나하시에는 시세이뵤(至聖廟)가 세워져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메이린토(明倫堂)에서 유교 경전을 교육했다.
도교는 정확히 전해지는 시기를 알 수 없지만 18세기에 부뚜막 축제를 열리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류큐 토착 민간 신앙과 융합하여 부녀자 사이에서 널리 믿기도 했다.

5. 문화


17세기에 편찬이 완료된 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는 류큐에 전해지던 신가(神歌)들을 모은 가요집이며 1554수가 수록되어있다.
류큐 왕국에서는 류큐어로 짓는 정형시류카(시)가 유행하였다. 현재에도 많은 류카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본토에서 전해진 와카도 유행하였으며, 특히 이름난 오키나와의 와카 시인들을 모아 오키나와 삼십육가선(沖縄三十六歌仙)이라 부른다. 또 한시도 지어졌다.
류큐의 궁정음악으로는 실내악인 우자가쿠(御座楽)와 행진에 쓰인 루지가쿠(路次楽)가 있다. 류큐의 전통악기로는 산신(악기)이 유명하다.
류큐의 전통 연극으로는 쿠미오도리(組踊)가 전해진다. 17세기에 타마구스쿠 웨카타 쵸쿤(玉城親方朝薫)이 일본 본토의 , 가부키등을 참고하여 만들었으며, 중국의 책봉사를 위한 연회에서 상연되었다. 타마구스쿠가 만든 다섯 개의 쿠미오도리 작품은 쵸쿤고반(朝薫五番)이라고 불린다. 쿠미오도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되었고, 지금도 우라소에 시의 국립극장오키나와에서 공연되고 있다.

5.1. 관련 문서



6.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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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어로 류큐의 왕을 이르는 칭호는 우슈가나시(御主加那志) 또는 수이틴가나시(首里天加那志, 슈리의 임금님)였다. 가나시(加那志, がなし)는 '님'에 해당하는 존칭인데 구개음화로 인해 쟈나시(じゃなし)로 발음되기도 한다. 한문으로 써진 역사서 구양(球陽)에서는 주상(主上), 왕상(王上), 성상(聖上) 등의 칭호도 쓰였다. 대외 외교에 있어서는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을 사용했다.

6.1. 류큐 왕가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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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류큐 처분(1879) 이후 쇼타이 왕은 일본의 후작이 되었는데, 기존 다이묘들의 고쿠다카(石高)와 비교하면 쇼 왕조의 세력은 백작 정도에 불과하지만 국왕에 대한 예우로 한 등급 올려주었다 카더라. 이후 1947년에 귀족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쇼 타이의 후손들이 후작 작위를 세습했고,[34] 이후에는 작위 없이 계승하고 있다.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옛 황제의 후계자를 지정해 옛 전통과 문중 재산을 계승하는 것과 같다. 현재 제2 쇼 씨 왕조의 계승자는 쇼 타이 왕의 고손자(현손)인 1950년생 쇼 마모루(尚衞·상위)# 씨이다.
한편 제2차 류큐 처분 당시 류큐의 왕족인 우둔(御殿)[35]은 총 28개 가문(왕자(王子, 직계왕족) 가문 2, 아지(按司, 방계왕족) 가문 26)이 있었다. 일본은 왕자 가문이던 나키진우둔(今帰仁御殿)의 당주(쇼타이 왕의 동생 쵸부(朝敷))와 오랜 세습 가문인 이에우둔(伊江御殿)의 당주에게 남작 작위를 주었고, 쇼타이 왕의 차남 쇼인(尚寅)[36]과 4남 쇼준(尚順)에게도 남작 작위를 주었다. 하지만 아지 가문들에게는 사족(士族)으로 지정했을 뿐 작위를 주지는 않았다.

7. 언어


류큐 왕국은 류큐어를 써왔다. 하지만 류큐어는 지역별로 편차가 커서 오키나와어, 쿠니가미어, 미야코어 등의 방언 혹은 개별 언어들로 나뉜다. 이 가운데 류큐 왕국의 표준어의 역할을 한 것은 오키나와 섬 중부 및 남부에서 쓰인 오키나와어, 그 가운데에서도 슈리에서 사용된 슈리 방언이었다.
중국 측에서는 류큐와 중국의 민족적, 언어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 환구시보는 "과거 오키나와 주민 대부분은 중국 대륙의 푸젠 성, 저장 성, 대만 섬 출신이며, 언어와 제도도 중국대륙과 같았다"는 중국의 연구자의 주장을 싣기도 했다.[37] 류큐의 지정학적 위치상 역사적 중국에서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고 많은 인적 교류가 있던 것[38]은 사실이지만 류큐 민족의 주류일본계와 근연관계로써 중국계와는 비교적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고고학적 발굴과도 맞지 않는 것인데, 중국대륙이나 대만과 언어적으로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는 시기는 선사시대~고중세 뿐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의 선조가 선사시대에 중국 남부에서 대만으로 건너간 후 태평양 곳곳으로 퍼져 나갈 때에 오키나와에도 진출한 적이 있기는 한데, 이 시기의 중국 남부-대만-오키나와의 공통점이나 유사성은 현재 중국 대륙의 해당 지역에 있는 한족이나 비오스트로네시아계 소수 민족과는 관련이 적다. 이는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남부에 살던 오스트로네시아계 종족들이 죄다 한족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류큐에는 중국 쪽에서 건너간 것 이상으로 일본에서 건너간 사람들도 많다. 만약 문화적 영향력 그 이상의, 민족적 동질성을 나타낼 수준의 강력한 교류가 있었다면 중국 대륙과 가까운 사키시마나 그보다 더 대륙과 가까운 대만 섬에는 이미 중세 이전부터 왕성한 문명 활동이 있어야 했겠지만 현실은 없었다. 그래서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영토 분쟁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8. 류큐의 상징들


오키나와현의 상징이나 류큐 독립 운동의 상징은 여기에 수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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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가의 문장인 휘쟈이구문(左御文). 히다리 미츠도모에(左三つ巴)의 일종이다.
19세기 중에 제정돼 1875년까지 사용된 류큐왕국(유구국)→류큐번의 기.
1875~79년에 사용된 류큐번의 기.

9. 창작물에서


  • Europa Universalis IV - 류큐로 세계정복을 하라는 도전 과제는 이 게임을 해본 사람은 못해도 한 번은 이걸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는 같은 회사 게임은 아니지만 동시대를 다루고 있는 문명의 시대 2 유저들간에도 떡밥으로 존재하고, 실제로 실현시킨 사례도 많다.

10. 같이보기



[1] 위 지도에서 아마미, 오키나와, 미야코, 야에야마 도서군(島嶼群)이 류큐 왕국의 영토였다. 이 중 아마미 군도(현 가고시마현 소속)는 1609년 일본의 사쓰마 번에 빼앗겨, 대외적으로만 류큐 영토인 척을 하고 실질적으로는 에도 막부사쓰마 번이 지배하는 땅이 된다.[2] 지금의 나하시 동부[3] 류큐 '왕국'과 같은 표기는 현대의 명칭이다.[4] 류큐 왕국이 명나라에 의해 공인되기 이전에는 어원 불명의 유구(流求)로 기록되었으나, 이 표기가 쓰였던 당시에는 현재의 오키나와가 아니라 대만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는 게 다수설이다. 중국인들의 지리 인식이 빈약하여 대만과 오키나와를 구분하지 못하다가 명나라 초기에 유구(流求)(흐를 유, 구할 구)의 표기를 좀 더 그럴 듯하게 고친 유구(琉球)(유리 유, 공 구. )를 오키나와 일대의 왕국의 이름으로 공인하게 되었다.[5] 국명과 정치체제를 붙여 불르는 것은 서양에서 유래한 현대의 표기. 당대에는 '왕국'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6] 옛 표기법으로는 りうきうこく[7] 옛 표기법으로는 りうきうわうこく[8] Ryukyu의 과거 표기로는 Lewchew, Lew Chew, Loochoo 등이 있는데, 표준중국어 발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9] 슈리성의 정문인 슈레이몬(守禮門)의 현판에 적힌 글귀이다.[10] 슈리성 정전 중앙에 걸린 현판에 적힌 글귀이다.[11] 이외에 요노누시(世の主, '세상의 주인'), 테다(てだ, '태양')라고 불리는 지배자들도 있었다.[12] 지금의 난죠 시에 있다[13] 按司, 구스쿠를 다스린 류큐의 호족들[14] 아이치 현의 대도시 나고야에 있는 성이 아니라, 사가현 가라쓰시에 있는 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중심 후방 거점이었다.[15] 島津忠恒. 사실 1606년에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로 이름을 고쳤는데, 숙부 시마즈 이에히사와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아서 헷갈리기 쉽다.[16] 류큐 왕국 사람들은 류큐/일본식 이름인 야마토나(大和名)와 중국식 이름인 카라나(唐名)를 함께 사용했다. 쟈나 웨카타 리잔의 카라나는 테이도(鄭迵)였다.[17] 쟈나 리잔의 후손 중엔 각본가 우에하라 쇼조가 있다.[18] 현 오키나와현 현청 소재지. 옛 수도인 슈리도 현재는 행정적으로 나하의 일부로 흡수되어 있다.[19] 1749년 류큐왕국의 인구가 2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이는 엄청난 수치다.[20] 야마토나는 하네지 아지 쵸슈(羽地按司朝秀)[21] 야마토나는 구시챤 웨카타 분쟈쿠(具志頭親方文若)였다.[22] 야마토나는 기마 웨카타 신죠(儀間親方真常)[23] 류큐 왕을 그린 각종 영정에서 왕이 쓰고 있는 모자가 피변관이다. 조선 왕은 주로 익선관을 썼는데 반해 류큐 왕은 주로 피변관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24] 이전까지 유구국(琉球國)이라는 이름은 외국의 이름이었고 발음을 전부 음독(音讀)으로 읽어서 류큐코쿠(りゅうきゅうこく,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こく)라고 읽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일본인들이 유구국(琉球國)을 '류큐 번' 일대에 설치된 일본 국내의 쿠니(國)처럼 간주하게 되었다. 쿠니는 고대에 율령제가 도입될 때 일본 전국에 설치된 행정구역인데, 당시에는 형식화된 행정구역이었다(실질 행정구역은 '번'이었는데, 본토는 폐번치현을 실시한 뒤 번 대신 '현'으로 대체). 이때부터 유구국(琉球國)은 이전처럼 '류큐코쿠'로 읽지 않고, 마지막 부분은 훈독(訓讀)으로 바꿔서 '류큐노쿠니(りゅうきゅうのくに,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のくに)'라고 부르기도 했다. 율령제에 따라 설치된 행정구역으로서의 국(國)들은 국(國) 부분을 대개 '~노 쿠니(~のくに)'라고 읽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오키나와에 대해 류큐노쿠니라는 쿠니를 설치했다고 명시한 적이 없고,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례를 유추하여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쿠니를 사용하는 일이 사실상 없어지고 새로운 행정구역에 적응해서 큰 의미는 없다.[25] 일본의 관점에서는 류큐는 일개 번에 불과하니 류큐의 조공 무역이 '밀무역'으로 간주되었다(...).[26] 또한 일제 패배 후 연합군은 오키나와를 중국의 속령으로 간주하고 장개석에게 중화민국으로의 할양을 타진하였는데 장개석이 이를 사절하였다. 류큐가 청일 간에 분할되었거나 중화민국에 할양되었더라면 오키나와의 현 정세는 훨씬 복잡해졌을 것이다.[27] 이 운동은 결국 프랑스의 압력을 받은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났다.[28] 간혹 조공을 일방적으로 한쪽이 바치기만 하는 걸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조공을 받는 측에서 그와 맞먹거나 그보다 많은 하사품을 주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조공 무역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다.[29] 이게 무슨 토산품이냐고 하겠냐만, 야광조개를 가공해 만든 가공품들은 고대 신라, 가야 고분에서도 출토된다. 신라 고분의 경우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 등의 왕릉급에서, 가야고분도 마찬가지로 대가야 왕릉인 지산동44호분에서도 이 류큐열도 특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가 나왔다[30] 소라껍질과 마찬가지로 청자고둥 조개 껍데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청자고둥을 이용한 공예품은 수도없이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금관가야와 신라지역에 청자고동조개를 가공한 말 띠 장식 등이 출토된다[31] 오키나와 제도의 화산섬인 이오토리시마(硫黄鳥島)에서 채굴했다. 위치상으로는 아마미 군도에 더 가깝지만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차질이 갈 것을 고려하여 사쓰마 측에서 류큐의 영토로 남겨두었다.[32] 특히 갑상선 질환에 특효로 알려졌다.[33] 조선에서 불교가 푸대접받는 틈을 타 대장경 본판을 받아가려고도 했으나 무산되었던 듯하다.[34] 쇼타이(1885~1901) → 쇼텐(尚典, 1901~20) → 쇼쇼(尚昌, 1920~23) → 쇼 히로시(尚裕, 1923~47)[35] 원래는 류큐 왕족의 저택을 일컫는 말인데, 그 집 주인에 대한 존칭으로도 쓰였다.[36] 기노완우둔(宜野湾御殿)의 시조[37]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398786[38] 정확히 말하면 대만섬과 교류가 많았다. 19세기말 이전까지 일본보다 오히려 대만섬과 교류가 많았을 정도. 메이지덴노가 첫 대만침공을 했을때의 빌미도, 류큐어부세력과 대만어부세력 사이 충돌로 청나라가 개입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수백년간 일본 정부측에서 행정적 관리도 제대로 안하던 류큐어부들에 대해 갑자기 메이지덴노가 자국민 보호를 선언했는데, 청나라가 대만 어부에 유리한 행정처분을 하고 대만 영해 상습침범을 한 류큐어부를 사형시키자(류큐와 대만 사이 흔했던 일로 처음 있던 일은 아니다), 이 핑계로 대만에 쳐들어간 것. 그러나 대만 측에서 류큐로 이민정착 형태로 옮기는 경우는 오히려 일본에서 류큐로 이민정착하는 경우보다 더 적었다. 일본 본토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류큐로 도망치듯 망명한 일들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