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신라)

 


1. 개요
2. 전문
3. 기타


1. 개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이 진흥왕 6년(545년) 이사부가 편찬을 건의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펼쳐낸 역사책.
거칠부는 어릴 때부터 승려였으므로, 외국에서 들여온 불경을 읽으려면 중국식 한문 해독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1] 당시 신라에서 손꼽히는 한문 능력을 익혔던 사람이므로,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 이곳저곳을 유람하면서 명사들과 교류해 학식과 경험, 인맥을 쌓은 인물이므로 전국 각지의 문사(文士)들을 널리 모아 역사책을 편찬하는 일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2. 전문


六年 秋七月 伊飡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飡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

6년(서기 545)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아뢰어 말하였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임금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널리 모아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 제3 진흥왕(卷4 新羅本記 第3 眞興王)


3. 기타


삼국유사에도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서 인용한 글들로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뿐 아니라 주변 다양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인듯 보인다.[2] 이를 보아 고려시대 후반 원간섭기까지는 국사의 원본이 존재했으나 이후에 실전되어 현존하진 않고 다만 추측해보건데 실전된 이유는 전쟁 중에 불탔거나[3] 누군가가 갖고 있거나 땅에 묻혀있거나 외국에 있거나라는 추측을 한다.


[1] 그래서 역사시대 내내, 특히 고대에는 승려는 지식인 계층으로 대우받았다.[2] 물론 구삼국사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3] 3자 여몽전쟁 외에도 견훤의 서라벌 함락, 신라부흥운동, 동여진 해적이나 왜구들을 비롯해 임진왜란 등의 사건들에서 경주 역시 함락되거나 휘말린 적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