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신라 병부령
이사부
異斯夫'''

[image]
이사부 국가표준영정[1].
<colbgcolor=#004098> '''이름'''
김이사부(金異斯夫, 《삼국사기》)
김태종(金苔宗, 《삼국사기》)
이질부례(伊叱夫禮, 《일본서기》) [2]
박이종(朴伊宗, 《삼국유사》)
''''''
(金) / 박(朴)(?)
'''생몰년도'''
480년경 - 562년 이후
'''골품'''
진골
'''관등'''
이찬(伊飡)
'''직위'''
실직주(悉直州, 현 강원도 삼척시) 군주
아슬라주(阿瑟羅州, 현 강원도 강릉시) 군주[3]
병부령(兵部令, 국방장관)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이사부'''
1. 개요
2. 이름
3. 생애
3.1. 탄생
3.2. 최초 가야 일대 공격
3.4. 금관가야 공격
3.5. 병부령에 임명
3.6. 진흥왕의 한반도 정복사업 시기
3.7. 가야멸망전 지휘와 말년
4. 평가
5.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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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장군, 수군 제독, 진흥왕 재위기의 병부령(兵部令)[4].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군사 전략에 통달한 신라 전반기 최고의 명장으로, 신라 지증왕에서 진흥왕 시기인 6세기 초중반 시기에 활동하였으며 신라군을 지휘하여 전성기영토 확장을 이룩한 공신이다. 상대등 거칠부(居柒夫), 대각간 구진(仇珍) 등과 함께 백제, 고구려를 공략하였으며 경상도 지역의 소국이었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한반도 중심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동해로 진출하여 우산국을 합병함에 따라 신라는 당시 삼국 가운데 가장 넓은 해양 주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본가야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특히 가야인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던 인물로 이사부의 손에 가야군이 여러번 격파당했고 결국에는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끈 대가야를 함락시키면서 가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2. 이름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은 김(金)씨이며 이름은 이사부(異斯夫)이다. 혹운(或云) 태종(苔宗)이라고 하여 '이사부'를 '태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고대 한국어신라어는 오늘날의 일본어처럼 음(소리)과 훈(뜻)으로 쓰고 읽는 두 가지의 방법이 존재했으므로 같은 고유어 이름을 하나는 음차, 하나는 훈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태(苔)'는 이끼를 뜻하므로 고대에 이것을 음이 아니라 훈으로 읽었을 때는 대략 '잇/is/'으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되며 종(宗)은 '부(夫, 남자)'에 대응하는 말이다. 고로 널리 알려진 이사부는 신라어의 음을 따서 쓴 이름이고 태종은 신라어의 뜻을 따서 쓴 이름이 된다. 의미는 울보, 먹보와 같은 '이끼보'. 성이 김(金)씨이므로 본명은 '김잇부'라고 읽고 쓸 때는 '김이사부' 또는 '김태종'이라고 한자를 빌려서 쓰는 셈이다. 비슷한 예로 박금천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질부례(伊叱夫禮), 정확히는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라는 긴 명칭으로 기록했다. 일본식 만요가나를 적용한 발음은 '이시부레치칸키(イシブレチカンキ)'다. 이를 분석해 보면 신라어와 가야어 어휘에서 지(智)는 존칭 '님'을 말하는 것이고 간기(干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이름은 '이질부례'가 되는 것이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바에 따르면 상고한어에서 伊는 /*ʔij/ '이', 夫는 /*p(r)a/ '파/프라', 禮는 /*[r\]ˤijʔ/ '리'로 발음되었으며, 고대 한반도에서의 한자 발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叱는 받침 /s/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으므로 伊叱夫禮의 발음을 굳이 복원한다면 /*ʔis.p(r)a.[r\]ˤijʔ/ '잇파리'가 되겠다. 기본적으로 '이질부례(이시부레)'와 '이사부'는 음운의 유사성으로 보아 같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문제는 《삼국유사》이다. 여기서는 성을 박(朴)씨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름은 이종(伊宗)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품계, 직위, 행적이 같으므로 '박이종'이라는 사람이 '김이사부'와 동일인임은 확실하다. 이종(伊宗)의 '이(伊)'는 전형적인 /i/ 음차이고 태종(苔宗)의 '태(苔)'는 '밸 태(台)'라고 쓸 경우 '나 이(台)'로 맞춰볼 가능성이 있지만 그래도 결국 성씨를 전혀 다르게 썼기 때문에 이사부의 진짜 이름이 '김이사부'인지 '박이사부'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성씨를 제외하고 이름인 '이사부'만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李)씨의 존재 때문에 이사부의 성이 '이'고 이름이 '사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비슷한 사례로 이차돈이 있는데 이차돈 역시 이름이 '이차돈'이고 성은 따로 있다. 둘 다 이씨가 아니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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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록에서 나타나는 이사부의 주요 활동 지역. 여기에 남아있는 금석문일본 기록에 있는 몇몇 전공을 추가로 알 수 있다.

3.1. 탄생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사부는 왕족의 피를 타고난 인물로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라고 한다. 그 외에 이사부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가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지증왕 역시 내물 마립간의 증손이므로 상당히 가까운 혈연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박씨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혹자는 경주 김씨김부식이 삼국사기 편찬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사부를 박씨가 아닌 김씨라고 썼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지나친 음모론이다. 한때 삼국사기에 대한 음모론이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과 일본 사서들과의 교차 검증 결과 삼국사기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뢰성이 높은 사서로 인정받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이름이 다른 경우로는 신라 충신의 대명사로 알려진 박제상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박씨라고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김씨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같은 인물의 성씨가 서로 다르게 전해지는 것은 일연이 참고한 고서의 내용부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이사부가 정말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었다면 박씨였을 가능성은 더욱 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신라 왕족들이 서로를 김씨, 석씨, 박씨 등으로 구분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야기된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5][6]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미실의 남편 김세종은 이사부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종(노리부)은 이사부는커녕 김유신의 큰할아버지라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화랑세기 사본이 역사서가 아니라 개인의 창작이라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로 쓰이고 있다.
이사부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사부가 지증왕 때인 505년에 실직군주에 임명된 이래로 법흥왕진흥왕 시기를 걸쳐서 수십 년 동안 활동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에는 적어도 20대 정도의 나이는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사부가 금수저 출신이라지만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인 실직성은 고구려로부터 다시 수복[7]한지 얼마 안 된 땅이고 신라에게 아주 민감한 최전방인데 그런 곳의 군권을 통솔하는 지위낙하산 인사로 아무 것도 잘 모르는 어린애를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아무나 앉혔다기보다는 최소한 청년의 나이에 나름대로 검증된 지휘 능력재능이 있으니까 맡겼다고 봐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을 찾아보면 사다함 열전에서 사다함이 15~16세일 때 전쟁에 참가하려 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해서 왕이 허락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다. 신라 시대에도 전장에 나설 만한 어린 나이의 기준은 최소한 20세 정도였을 테니 이사부는 늦어도 대략 485년경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위와 같은 이유로 이사부가 소지 마립간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지 마립간의 2번째 아내는 날이군(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이고 아들을 낳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어린 나이에 최전방에 배치된 것(모계로 소백산맥 일대의 호족 가문을 잇고 있기 때문)과 소지 마립간 사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선혜부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미사흔계가 지지하지 않음)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벽화부인혼인한 것은 사금갑 사건 직후인 488년으로 추정되므로 위에서 언급된 추정 출생년도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이 경우 내물 마립간의 5세손이 되지만 이사부가 지증왕~진흥왕 때까지 계속 활동하는 점, 정말 4세손이라면 그냥 증손자라고 쓴다는 점 때문에 삼국사기가 4대손을 4세손으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3.2. 최초 가야 일대 공격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지도로왕(智度路王) 때 변경 관리가 되어 거도(居道)의 계략을 모방하여 말놀이로써 가야(加耶)【혹은 가라(加羅)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

이사부의 행적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사건. 삼국사기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열전에서만 나오는 사건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사부가 최전방 실직성(삼척시)의 책임자라는 중요한 자리에 오르는 것은 적어도 20세는 되어야 가능했을 테니, 그 이전의 일인 이것은 적어도 10대 후반~20대 초반경의 일이었을 것이다. 서술 순서상 여기에서 실적을 냈으니 다음에 더 중요한 자리로 보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사부가 모방했다는 거도는 신라 초기의 인물이다. 경주 주변 작은 나라들[8]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함부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간 주변 나라들 정찰에 걸려 방어를 굳힐 테니 거도는 속임수를 썼다. 신라에는 매년 한 번씩 말들을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노는 정기적 행사 마숙(馬叔)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도는 이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위장했고 주변 나라들은 이번에도 마숙 행사라 착각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 거도는 이 기병을 이용해 두 나라를 기습 공격해 멸하였다. 사실 이는 병법 삼십육계 중 승전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에 해당한다. 즉 병법의 기본. 중국에서는 삼국지태사자가 이 책략을 사용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빼앗은 가야가 어디인지 명확하진 않다. 현대에는 가야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실제로는 여러 작은 나라가 따로 있었던 게 가야기 때문이다. 단국대 전덕재 교수는 '이사부 가계와 정치적 위상'이라는 논문에서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에 있었던 가야계 소국 다라국이라고 추정했다.

3.3. 우산국(울릉도) 복속


동해바다에 외따로 떨어진 울릉도가 최초로 한반도 왕조의 영역에 포함된 사건.[9] 단순한 무력 정복이 아니라 가짜 맹수를 이용한 책략을 사용해 항복시켰다는 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505년 2월에 지증왕은 신라에 주, 군, 현의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 오늘날의 강원도 삼척시)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지증왕은 이사부를 실직주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사부가 역사 기록 속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 군주라는 직위의 명칭이 이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사부는 50여 년이 지난 562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는데 이사부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지만 그가 평균 수명을 크게 웃돌지 않았다면 아무리 관대하게 계산해도 아직 새파란 젊은이의 나이로 한 지역의 군주직을 맡은 셈이다.
7년 뒤인 지증왕 13년(512)에 실직주 근처인 하슬라주(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시) 군주로 임명받았고 우산국 정벌을 개시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환했다. 정벌 과정은 삼국시대의 양대 역사책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다.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여름 6월'''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10]

이다.】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이라고 한다.】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여 말하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지철로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나머지 내용에 큰 차이가 없는데 하슬라 군주가 된 것이 우산국 정복 전이나 후냐는 순서 차이만 난다. 삼국사기는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가 된 다음에 우산국을 정벌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우산국을 정벌한 상으로 이사부를 아슬라(하슬라)에 부임시켰다고 써 있다. 이 때문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하기 위해 출항한 곳이 어디냐를 놓고 강릉시삼척시가 다투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삼척시 출항설을 지지하는 편인데 삼국사기 기록대로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가 먼저 됐다고 해도 강릉에 가자마자 대규모 선단을 꾸리기는 어려웠을 거고 실직 군주 시절부터 원정을 준비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리고 삼척시에서 울릉도는 동쪽으로 쭉 가면 되기 때문에 항해 방향을 잡기도 쉬운 편이기 때문이다. 손승철 교수는 나중에 고려시대조선시대 기록을 참고해 봐도 동해 바다와 울릉도 관리는 삼척시가 제일 수월하고 최적의 출항지라고 주장했다.
우산국 정복에 사자 목상을 사용했다는 점 덕분에 현재 강원도 삼척에는 '이사부 사자공원'이 있고 지역 축제 때도 나무사자를 깎는 행사를 한다.
신라 사람이던 이사부가 먼 서역에 가서나 볼 수 있는 사자를 알았던 것은 신라에 뒤늦게 들어온[11] 불교의 경전에 사자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물론 사자를 직접 본 적은 없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전설 속의 동물로만 알았을 가능성이 크나 한반도에 사자의 존재가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져 영향을 끼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은 신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신라 문화에 동화되었다. 1957년과 1963년 두 번에 걸친 국립박물관 연구팀이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 발굴한 결과 우산국에 존재하는 다수 고분이 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우산국의 역사는 신라의 진출 이전에 시작되기는 했지만 신라에 복속된 뒤 동해안 지방에서 문화가 유입된 뒤 울릉도에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축조할만큼 문화가 융성하고 국가 형태로 존재할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신라 때부터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독도를 최초로 점령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이사부 관련 이미지를 검색해 보면 아예 이사부가 울릉도가 아니라 '''독도에 나무사자를 데려가서 협박하는 듯한 일러스트'''까지 나온다. 아마 '독도는 우리땅' 가사에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로 등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인식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독도도로명주소로 '독도이사부길'이 있다.
하지만 이사부의 군대가 실제로 독도에 도달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또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등 중세 이전 사서에서 우산국의 어떤 부속 도서를 묘사한 내용도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단, 당시 우산국의 주민들이 울릉도 성인봉의 정상에서 독도를 관측할 수 있었음은 자명하며 독도를 '우산국의 일부(영해)'로 간주하는 관점은 존재한다. 즉, 독도는 우산국의 주민들이 인식할 수 있는 거리 내에 있고 어로 등 경제 활동을 실시하는 반경 내의 바위섬이었으며 우산국은 신라에 복속되었으니 곧 한국의 전통적 영유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독도 관련 연구소 및 재단에서 근거를 채집하는 방향은 이 쪽이다. 무주지 논쟁 및 역사적 선점 사실에 대해 논쟁할 때 이사부의 기록을 정황적 증거로 인용할 수 있다.

3.4. 금관가야 공격


법흥왕 16년(529) 신라가 가야 방면 확장을 위해 금관가야를 압박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인근 국가 아라가야는 왜국에 지원 요청을 했고 오미노 케누(近江毛野臣)가 이끄는 왜군이 도착했는데 이에 이사부는 3천의 군대를 이끌고 왜군을 쳐부순 뒤 복귀하는 과정에서 금관가야 백성들을 대거 포로로 끌고 갔다.
이사부의 금관가야 정벌에 대해서는 국내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사료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언급이 없다. 장수 이름에 대한 언급은 없고 법흥왕이 했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532년에 멸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연도 차이도 있다. 일본서기에서만 기록하고 있는데, 학계는 대체로 이 내용에 대해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12]

3.5. 병부령에 임명


진흥왕 2년(541년) 국방장관 격인 병부령(兵部令)에 취임해 명실상부한 군부의 정점에 올랐다. 7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성년인 18세(551년)가 될 때까지 약 11년간 어머니 지소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따라서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한 인물도 실질적으로 지소태후였다. 병부령은 법흥왕 3년(516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법흥왕대에는 법흥왕 본인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서인지 병부령이 공석인 때가 많았다. 법흥왕 사후 진흥왕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인 지소태후는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명장 이사부를 병부령에 앉혀 국방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진흥왕의 섭정 시기 동안 이사부는 군권을 바탕으로 국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 척경비에 '과인(진흥왕)이 어릴 때 왕위에 올라 정치를 보필하는 신하에게 맡겼다'고 기록된 것에도 이같은 상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지소태후는 조정에서 이사부의 권력이 너무나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544년 병부령을 2명으로 늘린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사부는 여전히 중용되었으며, 도살성, 금현성 전투 등 진흥왕이 친정을 행사하기 전까지 국방에서 커다란 업적을 여럿 남긴다.
진흥왕 6년, 이사부는 왕에게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건의했는데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편찬을 명했고[13] 거칠부가 쓴 게 신라 최초의 정사(正史) 국사(國史)다.[14]

3.6. 진흥왕의 한반도 정복사업 시기


이 후로도 신라의 정복 전쟁 일선에서 계속 활약했는데 진흥왕 11년(550) 백제와 고구려가 지금의 충청북도인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서로 치고받아 싸우다 지친 틈을 타 이사부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두 나라 군대를 어부지리로 모두 쳐부수고 두 성을 차지했다. 이후 고구려가 병력을 보내 금현성을 쳤다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자 신라군은 이들을 추격하면서 그대로 북진하여 남한강 상류 유역을 차지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로서 신라가 영남을 넘어 남한강 유역에 영토를 걸치게 됐다. 이 때 세워진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이사부의 이름이 나와서, 고구려 영역이었던 단양 지역을 현지 주민 야이차의 도움과 희생으로 평정하는 데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듯 하다. 단양 적성비의 참전장수 명단에서 첫머리에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원정군에서 서열이 가장 높았고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을 기획하고 총지휘한 것이 이사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반도 중부 공략전 초반에는 이사부가 참여했지만 정작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신라가 가장 급격하게 세력을 넓히는 데 성공한 551년의 거칠부를 비롯한 아홉 장군의 북한강 상류 정벌 ~ 한강 하류 차지 ~ 554년의 관산성 전투까지의 과정에서는 딱히 이사부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게 되고, 대신 거칠부김세종, 김무력 같이 이전에 항복한 가야계 인물들이 대신 신라군의 주력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 젊은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한 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이사부를 견제하기 위해 실각시킨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상술한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 이사부가 나제동맹 관계인 백제군까지 공격했는데, 곧 깨지기 직전이긴 했지만 아직은 동맹이 깨진 게 아니었으므로 이사부가 책임을 지고 잠깐 물러났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사부는 10년 뒤 다시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미 이때 60대 후반의 고령이었다.[15]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더이상 현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활발히 수행할만한 나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단양 적성비의 내용을 고려할 때, 고령이었던 이사부는 새로 점령한 단양 ~ 충주 지역에 남아 신라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병부로 돌아가 왜구 등 후방의 침입을 대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이사부는 아래 단락에도 나오듯이 562년 대가야 정복 때 다시 등장하는데, 당시 대가야의 완전 정복은 어느정도 대세가 결정된 상황에서 커다란 무력 충돌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령의 이사부가 직접 출병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친정을 시작하자 마자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던 진흥왕의 성격상 친정 시작되기 얼마 전에 있었던 독성산성 전투 및 도살성-금현성 전투에서도 소년 진흥왕의 의견이 개진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당연히 병부령 이사부와도 의견 조율이 있었을 것이다. 진흥왕 섭정기에 지소태후가 이사부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면서도 끝까지 이사부를 신뢰했던 것을 보면 섭정기부터 진흥왕과 이사부 역시 신뢰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3.7. 가야멸망전 지휘와 말년


기록에 나오는 마지막 업적은 진흥왕 23년(562)에 있었던 대가야 정복이다.[16] 가야는 이미 앞서 금관국은 진작에 망했고 안라회의의 결렬, 독성산성 전투 등으로 안라국도 크게 약화되면서 반파국(대가야)만이 마지막 구심점으로 남아 있었다. 신라의 후방에 걸림돌이 될 세력(백제, 가야, 일본)을 관산성 전투에서 모조리 정리한 뒤인 562년에 진흥왕의 명에 따라 병부령 이사부가 군대를 이끌어 대가야로 진격했고 부장으로는 유명한 화랑 사다함이 참전했으며, 반파국 도설지왕의 항복을 받고, 반파국을 도우러 왔던 왜군도 격파하고 왜장들을 포로로 잡아 모욕하는 등 반파국 정복은 성공리에 끝나고 가야는 마침내 완전히 멸망해 전역이 신라 땅이 되었다. 이 때 이사부의 나이는 대충 잡아도 70대였다.
이후의 행적은 묘연하며 죽고 어디에 묻혔는지 흔적조차 제대로 없어서 진흥왕 왕권 강화 과정에서 말년 실각설이 있기도 하다. 위 내용과 같이 적어도 3대 왕을 섬기면서 평생에 걸쳐 업적이 상당히 많은데도 김유신 등의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도 기록이 너무 부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사부 관련 기록이 줄어드는 시점부터 슬슬 금관국 왕족 계통 김무력, 김서현 등의 활동이 대폭 잦아지는 것도 진흥왕이 이사부를 견제하기 위해 신흥세력인 가야계를 등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4. 평가


신라 역사상 최고의 명장 가운데 한 명으로, '정복전쟁의 영웅'이라는 점에서 왕과 신하라는 차이만 빼면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라 할만하다. 신라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 젖히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지는데 앞장선 장군으로, 백제고구려의 양면 공격에 시달리는 신라를 지켜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김유신을 제외하면 그 어떤 장군도 이사부 위에 놓일 수 없다.
활동 기간이 굉장히 긴데 서기 500년 초에서 560년대까지 활약하고 있으니 최소 50~6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전장을 누빈 사람이다. 620년대에서 660년대 후반까지 40여년 간 활약했던 김유신보다도 훨씬 더 긴 활동연도를 자랑한다. 신라 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 보더라도 이사부만큼 긴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고, 그때마다 전공을 올린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강원도 영동 지역과 여러 인연이 있는 위인이기 때문에 강원도 지방자치단체가 많이 내세우는 콘텐츠가 이사부다. 삼척시에서는 이사부광장, 이사부사자공원 등의 관련 지명과 이사부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나무사자를 깎는 행사 등을 한다. 이사부 초상화도 곳곳에 걸려 있다. 강릉시에서도 이사부 크루즈를 운항한다. 그리고 삼척시에서 이사부를 주인공으로한 영화를 제작한다고 한다.
2006년 5월 이달의 호국인물에 선정되었으며, 2015년 진수한 5000톤급 해양과학조사선의 이름으로 채용되었다.
이름을 딴 장소들도 많다.

  • 삼척시에도 이사부길이 있다.
  • 동해 해저의 해산 이름이 이사부 해산이다.

5. 미디어에서


김훈의 장편소설인 현의 노래에서는 가야에서 신라로 망명해온 악공 우륵이 주인공이다보니, 그에 걸맞게 "칼"을 상징하는 냉혹한 군인로서의 모습이 강조되는 편이다. 우륵과의 접점은 적지만, 사실상 제2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비중이 높다. 사다함과 도설지 등과 함께 대가야를 멸망케하였으나, 진중에서 잠을 자던 중 갑자기 발병한 노환으로 쓸쓸히 급사한다. 2007년에 제작이 예정되었다는 영화판에서는 배우 안성기가 이사부 역으로 캐스팅 되었으나 정확한 제작 일정이나 개봉 일자는 현재까지도 감감무소식이다. 아마 영화화 계획 자체는 물건너간 듯.
이사부의 주 활동 시대가 선덕여왕보다는 한두 세대 앞이라 초반부에만 노년의 모습으로 문노가 화랑 비재를 주관할 때 미실의 회상에서 특별 출연했다. 세종의 아버지이며 진흥왕, 노리부와 함께 지증왕부터 내려온 불가능한 꿈, 즉 망라사방(網羅四方)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지왕이 진흥왕의 업적을 잃고 주색에 빠졌을 때는 노환 및 병으로 상태가 좋지 않아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진지왕 폐위에는 적극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노리부 및 거칠부와 만나 미실을 황후로 올리는 것까지만 힘써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이유가 "미실은 단지 황후가 되고 싶을 뿐이며 황후만 되면 누구보다도 성심껏 을 섬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17] 이후 사망했는지 더 이상의 등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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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 진흥태왕의 패에 속하는 고대 무장으로 본래 플레이어블로 등장할 예정이었다가 제작진이 한국사 고대무장이 출시되면 능력치 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결국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아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표준영정을 그대로 그린 듯 한 일러스트인데, 중기병스런 갑주로 중무장하고 있지만 내부 데이터상 병종은 우산국 정벌을 감안한 듯 수군이다. 데이터상의 장수 특성은 수전 보조/방어력 보조 13%이다. 주태와 비슷한 특성인데 이대로 나왔으면 대견고 버프와 귀면문 보조구를 이용해 아군을 호위로 지키는 방어형 수군으로서 섬멸전이나 경쟁전에서도 상당히 쓸만했을 것으로 보인다. 스탯도 무력 86, 지력 77, 통솔 93, 민첩 84, 행운 81의 능력치로 감녕과 더불어 수군계 통솔 공동 1위.
[1] 상상도이지만 우수한 복식 고증을 자랑하는 공식 영정 중 하나로, 삼국시대에 널리 쓰이던 목가리개가 달린 찰갑의 형태와 환두대도의 모습을 잘 구현하였다. 당장 광개토대왕 항목에 실린 영정을 봐도 고증이 영 아니다.[2] 신라어를 음차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당대에 가까운 발음일 수도 있다[3] 여담으로 몇몇 환빠들은 아슬라주를 알래스카와 동일시해 신라가 알래스카까지 뻗어있었다(...)고도 한다.[4] 병부의 재상. 현 대한민국국방부 장관과 같다.[5]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는 신라에서 국초부터 박씨, 석씨, 김씨 등의 3가지 성씨와 그외의 여섯 가지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전하지만 정작 신라의 금석문이나 중국, 일본 등의 기록을 교차 검증해 보면 신라인들이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한 시기는 빨라도 진평왕 이후이다. 이전의 법흥왕 같은 경우에 아예 중국 쪽에서는 "모즉"이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졌을 뿐이었는데 진평왕 대에 이르러서야 신라의 왕들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김씨를 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6] 김부식이 삼국 중 가장 늦은 신라의 역사를 고무줄처럼 늘렸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애당초 김부식이 참고한 자료는 고려 건국 이전에 신라인들의 손에 의해 한 번 필터링을 거친 문헌일 가능성이 높다. 김부식은 다만 전해지는 문헌을 충실히 옮겼을 수도 있고 이는 일연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김부식은 엄연히 따져서 삼국사기 편찬의 총책임자였지, 혼자서 모든 부분을 일일히 집필하거나 편찬하지는 않았다는 점 또한 명심할 필요가 있다.[7] 삼척 지역은 내물 마립간 때 점령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겼다가 재수복한 지역이다.[8] 우시산국거칠산국. 지금의 울산광역시부산광역시.[9] 울릉도에 대한 언급 자체는 더 이전의 중국 기록에서도 간략하게 등장한다.[10] 강릉시 일대.[11] 지증왕 당시니까 아직 국교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지 마립간의 '사금갑'을 비롯해 불교 자체는 법흥왕 이전에도 알려지고 신라 사회에 스며들고는 있었다.[12]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정설로 따르는 현행 한국사 교과서나 시험 등에서는 장수인 이사부가 아니라 왕인 법흥왕으로 되어있다. 후술되는 대가야 정벌에 대해서는 장수인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이 쓰여있는 것과 대조된다.[13] 거칠부는 한문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승려 경력이 있고 소싯적에 신라와 고구려 등 이곳저곳을 유람하며 많은 문사들과 인맥을 쌓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역사서 편찬에는 이사부 본인이나 다른 자들보다 적임자였다.[14] 다만 이 책의 제목이 정말로 "국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논란은 백제에서 근초고왕 때에 박사 고흥이 지었다는 "서기"에도 적용된다. 원문에는 단순히 "국사를 짓도록 하였다", 즉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는 식으로 풀이해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연이 삼국유사 편찬 당시에 인용했다고 전하는 "국사(國史)"라는 문헌 또한 실상은 "구삼국사"나 "삼국사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므로,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지었다는 "국사"와는 별개의 책일 가능성이 높다.[15] 활동년도를 감안했을 때 실직 군주에 임명될 때 20세였다고 쳐도 금현성, 도살성 전투 때는 이미 환갑도 넘은 65세다.[16] 대가야 정복 1년 전인 561년에 새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하필 최고위 직책을 보유한 인물 리스트가 써 있던 부분이 마멸이 심해 읽을 수 없는데, 여기에 이사부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7] 때문에 초창기에 유독 노리부와 화백회의가 계속해서 미실을 황후로 올리려고 했던 까닭이 설명된다. 하지만 결국 문노가 납치되었다가 강 속에 던져진 마야부인을 살린 뒤, 무사 귀환하면서 다 어그러져 버렸고 황후의 꿈이 날아간 미실은 결국 그 꿈을 포기하고 대소 귀족들을 규합해 자신의 파벌을 이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