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부흥운동

 


1. 개요
2. 배경
3. 목록
3.3. 경주 별초군의 난
3.4. 1204년의 신라 부흥 모의
4. 유사사례
5. 평가


1. 개요


935년신라고려에 항복한 이후, 고려 때 옛 신라 지역인 경상도강원도 일대에서 벌어졌던, 신라를 되살린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난들을 일컫는 용어.
신라와 같은 삼국, 남북국시대에 병존했던 고구려/백제/발해부흥운동 등과 달리 교육과정에서 큰 비중을 두지는 않는다. 신라의 멸망 과정이 외침(당나라, 거란)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백제/발해와 반대로 지속적 압박과 평화적인 투항으로 막을 내렸고 3개국에 비해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2. 배경


935년에 후삼국시대의 패권이 고려 쪽으로 흘러가자, 신라는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했다. 당시 신라 조정 내에서는 마의태자 등 신라의 고려 병합을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으나 이미 국운이 다한 상황에서 이들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 이후에도 1000년 간 국체를 존속한 신라를 하루아침에 없앤 데에 대한 이런저런 반발이 있었고 옛 신라 지역이었던 경상도 지역에선 고려에 대항하는 일부 계층들의 반란들도 있었지만, 신라의 국가적 역량은 견훤의 서라벌 함락 후에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망가져 있었다. 게다가 왕건은 이미 이런 일을 아주 일찍부터 예상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요소요소에 정예 부대를 배치했었고, 때문에 소소한 소요 사태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경순왕의 평화적 항복으로 신라는 고려에 흡수되었지만 고려신라를 그대로 계승한 나라는 아니었다. 또한, 그 전에도 신라는 고려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사신을 교환하고 있었기에 신라의 모든 구성원이 이런 통합에 찬성할 수는 없었고,[1] 따라서 부흥운동의 불씨는 남아있었다. 가령 고려 초기 김치양이 자신과 천추태후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한 것을 신라부흥 시도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일단 동주(洞州) 출신으로 기록되어 서흥 김씨인 김치양은 신라계 성씨가 맞고, 고려사에서는 김치양의 김씨 아들을 목종 다음 왕위에 올리려 계획한 것까지는 사실이나 거기에 그 목적(신라 부흥)까지는 적혀있지 않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도 이 설을 받아들여 마의태자 이야기까지 붙여서 각색했다.
신라 진골 중 다수는 일찍부터 고려에 투항한 6두품이나 호족에게 '''망한 나라 신하''' 취급을 당해야 했고, 특히 골품제를 고수하던 진골 귀족들 같은 경우, 고려시대에 일단 경상도 일대의 향리로서 나름대로의 기득권은 보장받을 수 있었으나, 시류를 약간 잘 타서 조금 일찍 고려의 관리가 된 자들 앞에서는 대단히 입장이 깎이는 수모를 참아야 했다.
물론 고려 사회는 신분 이동의 폐쇄성이 신라보다는 낮았기에 비록 신라 진골이라도 노력을 열심히 하면 고려의 중앙 관계에 진출할 수는 있었으나, 누구나 김부식 형제처럼 과거로 출세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상당수는 지방 향리가 되어 기득권이 이전보다 확실히 못한 상태로 떨어진다. 때문에 적어도 옛 금성 일대의 이런 부류들은 고려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다른 부류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 왕실의 일원이자, 귀족의 최고점으로 어딜가나 대접받으며 수도에서 떵떵거리던 진골 귀족들이, 이젠 고려 3경이라고는 해도 지방의 대도시 정도로 격하된 경주에서, 대접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개경 중앙 귀족의 눈치를 봐야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경주에서 이 정도면 다른 지방에 갔을 땐 그보다도 못했을 건 분명하다. 가만히 앉아서 혈통빨로 높은 벼슬을 하던 시절은 옛날옛적에 끝났고. 그들이 당시 이런 상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선 남은 자료가 없어서 추측해볼 수밖에 없으나,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결국 이들의 이러한 불만은 고려왕조의 통치력이 쇠퇴하는 무신정권 시대에 신라부흥운동으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3. 목록


김보당의 난무신정권 시기 경주 지역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는데, 신라 부흥의 기치를 내건 기록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3.1. 김사미 · 효심의 난



김사미, 효심이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이자 십팔자위왕 소문에 의거해 왕좌를 노리고 있었던 경주 출신 이의민과 내통하여 일어난 반란. 한편 이의민이 내통하여 일어났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최충헌과 그 일파가 경주 지역에서 발생한 난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이의민에게 뒤집어씌웠다고 보기도 한다.

3.2. 동경의 반란(동경민란)



동경에서 6, 7차례에 걸쳐 일어난 반란으로 주도자는 이비, 패좌 등이 알려져 있다.

3.3. 경주 별초군의 난


1202년 10월 경주 지역의 야별초군이 운문 일대의 반란군과 부인사, 동화사의 승려를 끌어들여 경북 영주 일대를 공격한 사건. 영주 공격은 영주 사람 이극인, 견수 등에게 패했고, ‘신라부흥’을 표방하고 장군 석성주(石成柱)를 신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석성주는 일단 그 자리에서는 기뻐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군수에 밀고해 실패하였다.

3.4. 1204년의 신라 부흥 모의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1204년 동경 사람이 "신라가 다시 융성할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리고 상주, 청주, 충주, 원주 등에 격문을 뿌리며 반역행동을 꾸몄다는 이유로 경주의 행정구역을 강등했다.

4. 유사사례



5. 평가


대체적으로 고려시대에 있었던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신라부흥운동은 고구려/백제/발해의 부흥 운동들과 반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고구려/백제/발해의 부흥 운동들은 이전 국가의 지배 계층이 일으켰고,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기에 역사를 잘 모르는 대중의 입장에서 봐도 부흥 운동임이 명백해 보인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갔던 대조영발해 건국도 고구려부흥운동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주장은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어보인다.[2]
이유야 어떻든 신라의 부흥운동은 신라 자체가 어쨌든 평화적 교섭을 통해 고려에 흡수되었고, 또 해당 부흥운동은 신라의 원영역 내의 주민에게 어느 정도 광범위하고 일관된 지지를 받지 못한 측면에서, 고구려나 백제, 발해 등 삼국, 남북국시대의 타 왕조들의 부흥운동들보다 더 쳐지는 측면이 명확하기에, 금방 생생하게 감이 오진 않는다. 당장 보면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북도 내에서 이 부흥군에게 반대하는 자발적인 근왕군들도 조직되었을 정도였다. 여기서 고려와 신라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체제에 충성하는 지방민을 조직적으로 육성했기에 진압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신라는 정권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골품제 유지를 위해선 태생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방민들이 쉽게 이탈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서는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조차도 그 부흥을 명분으로 내건 반란이 일어났고 그 기치 아래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속해 있었던 지역 주민들이 이들의 반란에 공감대를 얻었기에, 부흥 운동으로 보기에 결코 손색이 없다. 망한 나라의 복국 운동은 꼭 해당 망한 나라의 왕족이 참여해야 하고, 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야 하며, 민란이나 지방반란의 요소가 없어야 한다는 일각의 인식은 아예 전제부터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 해당 조건들을 다 지키고 성공하는 복국-독립 운동은 성공 사례가 거의 없으며, 애초에 망한 나라를 접수하는 국가부터도 이런 조건들이 불가능하게 철저히 관리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근세 조선 왕족들이 일제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잘 생각해보라. 왕족들을 철저하게 감시해서 독립운동과 연계가 전혀 불가능하게 하지 않았던가? 조선은 고려 왕족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고려 또한 겉으로는 경순왕을 우대해준 것 같아도 경주에 묻히지도 못하게 조치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게다가, 당장 후삼국시대후고구려후백제 역시 제 국가들이 멸망한지 벌써 230년이 넘은 고구려, 백제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지역 호족과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수립에 성공한 케이스들이었다. 특히 후고구려의 경우는 바로 북쪽 만주 지역에 고구려의 계승국을 자처하는 발해가 있었음에도.[3]
이는 고려가 후삼국이 통일된 이후, 고려인이라는 단일민족의식이 자리 잡은 뒤에도 한반도 각 지역에는 옛 삼국 유민 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비-패좌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과 같은 고려시대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앞세운 경상도 일대의 반란들이 고려 정부군에 의해 토벌된 뒤에도 꾸준히 옛 경상도 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앞세운 반란들이 끓임없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고 전국토가 갈려나가면서 신라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 등의 옛 삼국 유민 의식 또한 갈려나가 단일민족의식이 생겨나 결국 고려 내부에서 신라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1] 하지만 신라는 한반도 정통왕조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정통국가가 되기 위해선 신라를 멸망시키고 병합할 수 밖에 없었다.[2]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들어선 기준으로 하면 30년이고 그에 반해 신라가 망하고 고려 시기에 김사미, 효심의 난, 동경민란과 같은 경상도 일대의 신라부흥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와 비교하면 시기, 연대적으로 200년도 더 넘어 발해 건국과는 연대적으로 차이가 난다. 발해는 일단 발해 왕조의 개국 군주인 대조영부터가 즉위시 나이를 40세로만 쳐도 명백히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고구려 시기를 경험한 1.5세대 유민이고 대조영 이전에 유민들을 이끌었다고 기록된 걸걸중상은 빼도박도 못하는 고구려인이지만 김사미, 효심의 난, 동경 민란 같은 고려 왕조 때 일어난 신라부흥운동의 경우 이를 주도했던 주도 세력들이 대강 1160년대 태생들로만 잡아도 신라 멸망으로부터 족히 7~8세대는 지나 신라 시기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발해부흥운동의 경우는 발해 멸망 후 거의 2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3] 그러나 발해는 국력과는 별도로, 당과 신라의 위신 탓에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로 자처하지 못하였다. 당도 당고종 본인은 썩 뛰어나지 않은 군주였음에도 어쨌든 백제와 고구려, 특히 전조 수나라가 100만대군으로도 도모하지 못하고 오히려 망했던 그 '''고려'''를 멸망시켰다는 업적이 상당히 들어가서 '고종'이라는 격 높은 묘호를 받았고, 신라도 무열왕과 문무왕의 '''삼한일통''' 업적으로 왕권이 확 올라갔는데, 그 '''고려'''가 부활했다고는 차마 인정할 수 없었기 떄문이다.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다름아닌 왕건의 고려 이 두 나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