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

 


'''이름'''
권진규
'''출생'''
1922년 4월 7일
'''사망'''
1973년 5월 4일
'''학력'''
함흥보통학교
춘천공립중학교
무사시노 미술대학
'''소속'''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
1. 개요
2. 생애
2.1. 사후


1. 개요


대한민국테라코타 조각가였다. 생전 천재 조각가라 일컬었다.

2. 생애


1922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공기 좋은 곳에서 공부하라는 부모 뜻에 따라 춘천으로 옮겨와, 17살인 1938년 4월 춘천공립중학교(현 춘천고)에 진학했다. 1943년 3월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유명 미술대학무사시노 미술대학으로 유학갔고, 1950년에는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천재'로 불리게 되었다. 이 때 대학에서 일본인 '도모'와 결혼해, 6년간 결혼생활을 했으나 1959년 부친상으로 귀국한 후, 다시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해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다.[1]
귀국 후 1959년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직접 설계한 작업실인 '아틀리에'에서 1973년 생을 마감할때까지 작품을 남겼다. 작품은 대부분 석조와 테라코타, 건칠(옻칠 기법)을 사용한 초상과 자소상을 남겼다. 작품에서 본뜬 인물상은 모두 지인이나 연인을 모델로 했다. 작품 제목도 '지원의 얼굴'을 비롯해 '혜정' '상경' '선자' 등 실명을 붙였다.
미술계에서는 권진규 작품들이 개인의 초상이라기보다 인간 근원의 원형과 순수함을 탐구하고자 한 작가정신의 기록에 가깝다는 평가다. 하지만 생전 당시 조각계는 추상미술이 대세를 이루던 시대라 사실주의 인물상을 선보였던 권진규의 작업은 냉대를 받았고, 시대와의 불화는 이내 그를 불안정한 삶과 생활고로 내몰아았다.
1973년 5월 4일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권진규는 고려대학교박물관으로 향해 자신이 기증한 작품 '자소상'과 '비구니상'을 둘러본 후 작업실인 '아틀리에'로 가서

"인생은 '공(空)'이고 '파멸'이다."

라는 문구를 담은 유서를 쓴 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그의 나이 52살이었다.

2.1. 사후


생 마감한 후에야 생전 '천재'라 불렸던 명성에 걸맞게, 뒤늦게나마 다시 그의 작품이 재평가되었고, 사후 15주기인 1988년 호암갤러리에서, 2009년에는 덕수궁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또한 2006년 동선동에 그의 작업실 '권진규 아틀리에'가 2004년에 국가등록문화재 제134호로 등록되었다.
권진규의 작품을 모아왔고 미술 애호가인 같은 고등학교 후배에 의해 그가 고등학교를 다닌 춘천에서도 2016년 그를 기리는 미술관인 '달아실 박물관(aka 권진규 미술관)'이 건립됐다.
[1] 당시는 한일간에 외교관계가 없어서 왕래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왜 그런 줄 알면서도 혼자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