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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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권집(權輯)
생년월일
1984년 2월 13일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출신학교
동북고등학교
포지션
브로커
프로입단

소속팀






1. 개요
2. 축구 선수 시절
4. 관련 문서


1. 개요


깔끔한 공수 조율과 창의적인 공격 전개, 예술적인 패스로 인하여 지휘자를 뜻하는 '마에스트로(Maestro)'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지금은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의 브로커이자 한국프로축구계의 암적인 존재.'''

2. 축구 선수 시절


유소년 시절은 엘리트였다. 이미 중학교부터 프로행 제의를 받았고,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차원이 다른 축구를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북고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쾰른 U-19 팀에 입단한다.[1] 이후 쾰른 U-23 팀으로 승격하나, 계약에서 서로 이견 차이로 인해 결별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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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자유계약이 된 권집에게 K리그의 많은 팀들이 오퍼를 넣었는데, 권집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택했다. 2003년에 수원에서 데뷔하였으나, 2004년 팀의 성적 부진으로 김호 감독에서 차범근 감독 체제로 전환되면서 거의 출전하지 못하였다. 실제로도 그 당시 권집의 경기력은 썩 좋진 않았던 편. 아무래도 나이가 젊다보니 경기력의 기복이 보였던 편이었다.
결국 2005년 타 팀으로의 이적을 추진하여 전북 현대 모터스로의 이적이 확실시되었으나 고창현과 함께 안효연과의 맞트레이드로 부산 아이파크로 이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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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구단으로 이적하게 되자 훈련을 잘 이행하지 않는 등의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이적을 요구하였다. 결국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전남 드래곤즈로 옮겼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고, 단 두 경기를 출전한 뒤인 3월 말, 전북 현대 모터스로 다시 이적하였다.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한 후 2006년 AFC 챔피언스리그우승에 공헌하여, 2006년 K리그 최초로 팀을 FIFA 클럽 월드컵에 진출시키는데 공헌하였다. 2008년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였으나, 그 해 김형일과의 맞트레이드로 대전 시티즌으로 다시 이적하였다. 후술할 특유의 플레이스타일과 기복이라는 단점이 있었지만 2000년대 중반에는 아직 국가대표에 승선하지는 못해 대중적 인지도는 낮지만, 향후 k리그를 이끌어나갈 것으로 기대되는 영건 중 한 명이었다. 비슷한 평가를 받은 선수로는 이종민, 김치우, 오장은, 오범석, 정성룡 등이 있다. 이들은 잘 성장할 경우에는 국가대표급 선수로, 여러가지 이유로 국가대표로 승선하지는 못해도 k리그에서는 국가대표 선수들보다 더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로[3]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는 유망주들이었다. 실제로 저 선수들 중에는 국가대표로서 오랫동안 활약한 선수들도 있고 대부분이 2019년 현재 k리그에서 베테랑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커리어를 권집은 스스로 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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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FA로 풀리자, 대전과의 재계약을 포기한 은 1년 계약을 맺고 톈진 터다로 이적한다.
그가 이처럼 팀을 자주 옮긴 이유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청소년 대표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며 권지단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명해졌다. 그는 지단처럼 플레이 하긴 했으나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감독들이 공격형미드필더로 쓰기에는 공격력의 날카로움이 부족했고 수비형미드필더로 쓰기에는 수비력이 모자랐다. 그의 포지션은 중앙미드필더라고 할 수 있으나 어느포지션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못한 계륵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가능성을 보고 좋게 생각하는 감독들이 있었으나 그 기대에 충족되지 못해 이팀저팀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 뒤...'''

3. 승부조작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이 본격화되면서 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7월 8일, 검찰 측의 발표를 통해 대전 시절 3300만원을 받고 승부조작을 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브로커 역할을 수행했음이 밝혀졌다.최성국·권집 등 승부조작 47명, 축구계 영구 퇴출 결국 그는 영구제명으로 K리그 선수 및 지도자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4. 관련 문서


[1] 당시 과 함께 쾰른에 있던 선수는 윤원일이였다. 이후 같이 수원으로 간다.[2] 당시 의 쾰른행을 추천했던 김호 감독은 이 K리그에서 1-2년은 뛰고 갔다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했다.[3]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선수가 이관우이다. 이관우는 k리그에서는 어지간한 국가대표급 선수들보다 강한 파과력을 보였으나 활동량과 측면돌파에 집중하는 당시 국가대표 팀의 특성상 국가대표팀에 많은 부름을 받지 못했다. 다른 선수로는 백지훈이 있다. 백지훈은 기량은 좋으나 기복이 심하고 기술이 좋아서 아시아 대회에서는 엄청닌 무기가 되지만 이란, 일본, 호주 수준의 아시아 탑 클래스팀이나 유럽, 남미 팀을 상대로 하기에는 기량이 억근 아쉬웠기 때문에 국가대표와 큰 인연이 없었다. 이관우와 마찬가지로 속도와 돌파력이특출난 편이 아니라 윙을 담당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는 중앙 미드필더라는 점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