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인민당

 


勤勞人民黨. 약칭으로 근민당이라고도 한다.
여운형이 1946년 12월에 정계은퇴선언과 동시에 남로당을 탈당하고 난 이후 1947년 5월 24일, 제2 차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여운형은 남부지방을 순회하면서 연설을 하였고 정치동향을 조사하였는데, 조사 결과 과거 인민당의 절반 정도가 남로당에 들어갔지만 아직 10만여 명의 지지자가 있다고 보고 이를 기반으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다.[1] 당수는 여운형, 부당수는 장건상[2].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대구부 달성공원에서 여운형의 연설이 있었을 때 달성공원이 꽉 찼고, 연설을 듣고 감흥을 받아 근민당에 가입한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직접 겪은 사람의 증언
그러다가 당수 여운형이 7월 19일, '''창당 두 달도 안 되어 암살당하면서''' 몰락하였다. 여운형은 이와 동시에 좌우합작운동에서 가장 구심점과도 같은 역할을 한 인물이라 좌우합작운동은 여운형 암살 이후 진전이 없어지게 되었고, 결국 12월 말에 해체된다.
여운형 암살 이후에는 홍명희가 당수가 되었으나 홍명희의 인기는 여운형에 댈 것이 못 되었다. 홍명희는 소설가, 문학가로 정평이 나 있지 정치적 입지로는 어울리지 못했다. 그 뒤에 장건상이 당수가 됐다.
게다가 장건상이 남북협상에서 근민당 당수 자격으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할 때 일부는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아예 북한에 잔류하면서 몰락하였다.[3] 그 뒤에 장건상여운형의 친동생 여운홍을 따라 자유당에 입당했다. 측근인 조동호는 여운형 암살 이후 아예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낙향했다. 안습.
또한 김두한의 자서전에 따르면, 1947년에는 당사를 우익 청년단에게 빼앗긴 적도 있다고 한다. 김두한이 2천명의 대한민청 청년단원을 동원해 근로인민당 본부를 습격해, 간판과 서류를 불사르고 당사를 '전국학련'에 넘겨 주었다고 한다.[4]

[1]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통해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당시 여운형은 정계은퇴를 했다고 해도 좌우합작운동을 통한 통일임시정부 수립노선은 분명하게 고집하였다.[2] 장택상이 아니다. 유의하자. 참고로 장건상은 장택상의 먼 친척 뻘로(같은 항렬, 정확하게는 12촌이다.), 서로 형님-아우 하며 지냈다고 한다.[3] 장건상도 말실수로 감금됐다가 겨우 풀려났다.[4] 출처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 1』(메트로신문사, 2002), p191.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p248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