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홍
[clearfix]
1. 개요
구한 말의 교육인이자 외교관,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래 독립운동가였으나 1940년대 일제의 회유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2] 본관은 함양으로 29세손 '운(運)'자 항렬이고, 아호는 근농(勤農).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의 친동생이다.
2. 상세
한때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1917년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자 윌슨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소개장을 얻은 뒤 11월 15일 백악관을 찾아 윌슨 대통령을 만나려 했지만 윌슨의 비서가 면담을 거부해 성과 없이 되돌아왔다. 이후에는 김규식과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고 상하이로 넘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상하이 인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을 했으나, 1940년대에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시국강연을 하고 친일 논문을 쓰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1946년부터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이후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에 참여했지만 박헌영의 노선에 반발해 조선인민당을 탈당한 뒤 사회민주당 당수 등을 재임했고,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한 여운홍은 평양을 방문해 발언권을 요구했지만 박헌영의 위협을 받았다. 결국 협상을 포기하고 되돌아왔다.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제2대 민의원, 제5대 참의원 등을 지냈다. 그밖에 자유당의 선전부장과 민주공화당 선거대책위원장, 공화당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3. 생애
1891년 경기도 양근군(현 양평군)에서 태어났다. 한성부 경신학교, 미국 우스터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1920년 상하이 인성 학교 교장 등을 지내고 귀국했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시국 강연 참석과 친일 논문 저술 등을 하며 변절하였다.
1945년 8월 형 여운형이 준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8.15 광복 뒤에는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한편 조선인민당, 근로인민당에 참여했으나 1946년 박헌영의 노선에 반발하여 조선 인민당을 탈당하여 사회민주당 당수 등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양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대한국민당 류래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였고 장건상과 함께 북한군의 감시를 받다 가까스로 탈출하여 납북은 면했지만 북한을 지지하는 국회의원 연판장에 서명한 것이 적발되어 몇달간 의원직이 정지됐었다. 1952년경 자유당에 입당하여 선전 부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자유민주당에 있다가 자유 민주당을 탈당하여 민주 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민주공화당에서 선거 대책 위원장, 상임 고문 등을 지냈다.
말년에는 형 여운형의 일대기를 담은 몽양 여운형이라는 책을 출간해냈다. 그러다 1973년에 82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사망한다.
일제 강점기 말기의 친일 행적 때문에 사후 한국독립당 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 수록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 1994년 2월 13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배우 양영준이 연기했다.
- 대탈출/백 투 더 경성편에서 등장한 독립운동가인 여호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6. 선거 이력
[1] 29세손 '운(運)'자 항렬[2]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는 포함되지 않았다.[3] 최린이 왜 취소선이 쳐졌는지는 문서 참조[4] 양평군[5] 중구 을[6] 8인을 뽑는 대선거구였다.[7] 당시 참의원 선거 방식은 해당 참의원 선거구 정원의 반까지 기표할 수 있는 구조였다. 예컨대 8명의 참의원을 배정받은 경기도의 유권자는 4명의 후보에게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8] 당시 여운홍은 경기도 참의원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으므로 경기도 제1부 참의원이 됐다. 제2공화국 헌법 부칙은 각 참의원 선거구의 당선자 중 득표 상위 50%는 제1부, 하위 50%는 제2부 참의원이 되게 해서 제1부 참의원은 임기 6년, 제2부 참의원은 임기 3년으로 차등을 두었다.[9]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국회 해산으로 의원직 상실[10] 종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