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여운형
呂運亨 | Lyuh Woon-hyung[1]'''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리(묘골)
(現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사망'''
1947년 7월 19일 (향년 61세)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혜화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본관'''
함양 여씨(咸陽 呂氏)[2]
'''자'''
회숙(會叔)
'''호'''
몽양(夢陽)
'''학력'''
배재학당
남경대학교
'''직업'''
독립운동가, 저술가, 정치인
'''종교'''
개신교 (장로회)
'''정치노선'''
좌파 ~ 중도좌파
'''이념'''
사회민주주의, 민족주의
'''수훈'''
건국훈장 추서[3]
1. 개요
3. 정치인으로서의 여운형
3.1. 정세 판단력
3.2. 지도자로서의 평가
4. 가족 관계와 가정 생활
5. 사망
6. 여담
6.1. 인기 많은 호남아
6.2.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여부 관련 논란
6.3. 기타
7. 어록
8. 대중 매체에서
8.1. 관련 서적
8.2. 영상물에서의 등장
8.3. 웹툰
8.4. 기타
9. 관련 단체
10.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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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7년 5월. 원구단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여운형의 모습.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리(묘골) 출생이며[4] 몽양(夢陽)이라는 아호로도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참여했고 언론 활동, 민족 문화 사업, 체육 활동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지던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구성하여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를 시도하였으며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혼란 정국을 예방하였으나 건준이 박헌영 등의 활동으로 좌경화되고 미군정이 활동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미군정기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에 미군정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반대하고 조선 민족이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세력 모두가 공평하게 참여한 연대를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치 성향은 중도 좌파로 김규식, 안재홍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주장한 김구나 중도 세력에 비우호적이었던 박헌영[5],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의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오래 전부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한 지식인이었기에 민중들 사이에서 인기는 높았으나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에는 좌우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 세력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1947년 7월 19일 극우파로 추정되는 한지근이라는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경력상으로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신한청년당 당수, 근로인민당 당수,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6] 등을 역임하였다. 소속 단체로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
훤칠한 키에 미남이었고 스포츠도 잘 하는데다가 패션 감각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어질고 친구도 잘 사귀었다고 한다.[7] 때문에 당시에도 대중적 인기가 상당했으며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다만 당시 독립운동가라면 대부분 일본어와 중국어에도 능통했고 이에 더해 영어나 러시아어에 능통한 경우도 많았기에 여운형의 언어 능력이 특출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조선의용대에 대한 중국 측의 증언으로 알 수 있지만 당시 한인 독립군은 말단 병사라도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에 모두 능통했다고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여운형만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도 없다. 진취적인 민족운동가였다고 찬양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기회주의자였다고 폄하하는 쪽도 있다. 그런가 하면 모호하고 실속없는 팔방미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평가는 좋은 편이다. 특히 체육 활성화에 힘쓰는 등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이 부각되며 그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은 좌우합작운동 등 해방 이후의 활동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그의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 통일 노력을 높게 평가한다. 특히 남북을 오가면서 좌우 합작을 시도했다는 점이 중요한데 김일성조만식소련 군정의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5번이나 38선을 넘어다녔다. 김일성의 행보를 떠나서 당시 북한을 이끄는 정치인이었던만큼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정치인들과도 대화하고 소통할 필요가 있었는데 여운형만이 그것을 실천한 것이다.[8] 비록 현실적으로 실현되지는 못 했지만 그가 추진한 남북을 아우르는 좌우 합작을 통한 정부 수립은 분단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민족이 가야할 가장 이상적인 방향이었다. 또한 기독교 신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로서 통일 정부가 계급 독재 국가가 되는 것에는 분명히 반대했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그의 좌우 합작이 좌익에게 이용당한 것이며 그가 추진하던대로 통일 정부가 수립되었더라도 결국 소련과 김일성의 의도에 따라 공산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9]

2. 일생




3. 정치인으로서의 여운형



3.1. 정세 판단력


1933년 1월호 《신동아》의 인터뷰가 아래.

질문: (중국에서) 장개석 독재가 실현될까?

답: 장개석 독재는 한마디로 불가능이라고 말합니다. 독재 정권이 현하 중국 정세에 적절치 않을 뿐 아니라, 장씨의 세력이 미치는 지방이 강소성, 절강성의 2성과 기타 안휘성, 호북성, 강서성 등, 성의 일부분씩 합하여 전국의 6분의 1에 지나지 못하고, 반(反) 장개석 운동이 전국에 편만하였는데 어찌 현실성이 있겠습니까? 만일 장씨가 그 독재 정책을 고집한다면 자기와 가까운 동지와 부하까지 떠나버릴 위험성이 있음으로 장씨가 지혜로운 자라면 그 독재의 몽상을 버릴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실패하고 말 것임으로 그 정책은 실현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1931년 10월에 만주사변이 신문 기사에 뜨자 이를 보고 '이제 일본은 틀림없이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고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이 중국을 도발하면 자원도 없고 인구도 없는 좁은 섬 나라가 중국의 넓은 땅과 많은 인구를 상대하는 것이므로 분산된 군인들이 곳곳에서 장기전을 치르는 소모적인 전투를 하게 될 것이고,[10] 그 와중에 중국 인구 시장을 노리고 있는 서양, 특히 미국이 일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측근 이만규에게 먼저 그렇게 말했고 일본의 군사부 장관에게 전쟁을 그만두고 조선을 독립시키라고 설득했을 때도 이러한 논리를 펼쳤다.

3.2. 지도자로서의 평가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후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지지율
33%
21%
18%
16%
12%
후보
김일성
최현배
김규식
서재필
홍남표
지지율
9%
7%
6%
5%
5%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만식
김일성
사법부장
문교부장
경제부장
교통부장
노동부장
허헌
안재홍
백남운
최용달
박헌영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통일 임시 정부의 수상 후보는 여운형이다."

1946년 3월 소련 정보 보고서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리처드 로빈슨, 미군정 관리로 근무

개요에서 말했듯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리지만, 양심적 지도자이면서도 당대 정치 선동가로 꼽히긴 했어도 당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해방 직후 한국 정치 상황은 극단 세력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또한 무자비했기 때문에, 권모술수와 당략에 익숙해야 1인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런 면에서 엄청난 재능과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했고, 당시 조선 사람들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 설문 조사에 따라 가장 이상적인 내각을 구성한 것에 따르면, 대통령 이승만, 외무부 장관 여운형, 내무부 장관 김구, 노동부 장관 박헌영, 군사부 장관 김일성이었다. 목록을 보면 각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11] 그런데 그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남들과 타협하여 남들 말에 따라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해서 자신의 성향을 확실히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독히 냉정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고, 이상주의자였던 김구 등과는 극한 대립을 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의 이상은 그저 자기 말이 옳으니 모두가 따를 거라고 생각한 어린애 같은 생각이라고 일축하는 비판도 있다. 김구는 이상주의자였지만, 그 실현을 위해 무장 투쟁을 한 반면, 그는 국내에서 언론 위주의 활동을 벌이며 일본 조선 모두에게 존중받은 독립 운동의 경험의 차이가 컸으리라.
실제로 김용기 장로[12]는 그에게 "믿음을 확실히 하고(여운형은 기독교인이다) 정치를 그만 두든지, 정치를 하려면 좌든 우든 명확히 하라"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죽음을 맞았다고 말하였다. 사실 여운형도 좌우 합작이 안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 스스로도 정치에 손 떼고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는데, 그게 생각대로 안 된다고 강원용 목사에게 털어놓은 적 있다. 게다가 여운형 성격이 애초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적대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란 씨는, 그의 태도나 능력으로 볼 때 그는 대통령도 아니고 사회주의 지도자도 아니요, 요즘과 같은 부자 세상에서 스테이크 썰고 외국인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것에 적합한 사람이므로 태평성대나 이보단 못해도 국내 활동을 할 거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어 극심한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된 사회에서 태어났어야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단번에 파악하는데 뛰어난 센스를 지녔고 상대방에게 자신이 원하는 사항을 단 하나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그들을 수긍시키는 데에 남다른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외교관이 적합한 것 같다고 했다. 여운형과 로마넨코의 회담록
그는 사상을 뛰어넘어 중도적 실용의 좋은 모델로 평가받아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참고로 현재 진보진영은 여운형 및 조봉암, 장건상, 조소앙과 더불어 진보 진영의 기원을 찾으려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라고 평하며 그밖에 '''다재다능하며 소통을 중시하고 현실주의적 감각을 지닌 여운형이 위인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는 중이다. '''남한과 북한에서 동시에 존경받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말도 있는데, "남한에서는 색깔론[13], 북한에서는 자기 사상에 끼워 맞추는 괴이쩍은 평가 기준"이 있어서... 이건 비단 여운형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인이 평가받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라 하겠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인민 본위의 정치를 옹호하였으나 권력을 잡지 못하였고, 좌우 양쪽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쑨원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중국어 논문 중에 여운형과 손중산을 비교 연구한 논문도 있다.

4. 가족 관계와 가정 생활


가정 생활은 심히 '''막장이다'''. 이하에서는 간략히 나오지만, 여운형의 사생아 문제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는 떡밥덩어리며, 양파 껍질처럼 끝이 없다고 한다. 비판자들 입장에서는 도덕성 문제로 커지지만, 옹호자 측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고, 사생활보다는 공적인 기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실드치기도 한다. 이하의 내용에 대한 판단은 개인이 알아서.
먼저 14살에 집안의 권고에 따라 결혼(조혼)하지만 17세 무렵 아내가 임신 6개월 만에 사망한다. 그 뒤로 일시적으로 어린 기생을 가까이 한 적 있었는데 재미있게 놀고 나니 기분이 찜찜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아버지한테 다 털어놓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편 위독한 병중이었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다며 혼사를 정해버렸고 몽양은 19세에 자기보다 1살 많은, 학력이 없는 평범한 여자(진상하 氏)와 재혼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뻥이 아니고, 삼천리 제7권 제11호(1935년 12월 1일)에 실린 인터뷰 기사[14]와 여운형 측근의 아들이고 실제 그를 알고 지냈던 이란 씨의 회고에 근거해 적어놓은 것이다.
조선 말기에는 여운형도 그렇고 거의 다 집 안에서 혼사를 정해서 멋모르고 구식 결혼을 했는데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잘 될 턱이 없었다.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여운형은 아무리 당시 시대가 시대였다고 하지만 스스로 연애 결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과 앙금이 쌓였던 모양이다. 집을 다녀간 박헌영에게 돈으로 쓰라고 은수저 몰래 준 걸 알아채지 못하고 은수저 어디 갔나, 한참 찾아다니는 아내가 미련하다고 한 얘기에서도 그랬고 내조해주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아내가 순순한 곰같이 행동한 게 미련해보인다고 싫어한 듯하다.
'''결국 제대로 사고를 쳐 버렸다'''. 결혼 2년차 21세의 나이에 홀연히 강원도 강릉으로 떠나서 초당 의숙의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시국이 안 되니 소학교 교사 때려 치고 평양에 있는 예수회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한 뒤 중국 금릉 대학에 입학하고 해서 수년간 아내, 자식 간 사실상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아내는 자식 부양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못 참겠어서 맏아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상하이로 떠버렸다. 이렇게 해서 몽양이 중국으로 건너 간지 8년 만에 가족이 상봉하게 되었다.
그 후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기 이전까지 상하이에서 2년~3년 정도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여운형은 인터뷰에서 '''"부부간의 참사랑이란 것도 그때부터야 비로소 알게 되었구려. 또 그곳에서 지금 있는 아이들 넷을 또 낳았지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깨달음이 그렇게 깊지 못했던 모양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가장으로서는 형편없었다.''' 사방팔방 분주하게 돌아다녔고 적들에게 쫓기다보니 몇날 며칠 집을 안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고 아내 진씨는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이하 인터뷰 중 진씨의 회상.

"...가슴이 타고 하로밤에 검은 머리 다 희여지는 듯 속을 썩인 적도 여러 번이지만 상해 있슬 적에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은 늘 잊혀 아니집데다. 「바깥어른」이 한창 몸을 피해서 다니시든 철인데 장개석을 반대하는 운동이라든지요. 그런 운동에 주야 불분하고 돌아다니실 때 일인데요. 그래서 며칠에 한 번씩 잠깐 잠깐씩 번개같이 집에 다녀오시고 가시고 하던 철인데 하루는 며칠을 어데 나가시어 집에라곤 소식조차 알 수 없더니 새벽녘에 들어오셨지요. 매우 초조하고 긴장한 얼굴빛을 지으시면서 "밥을 좀 달라"고 말씀하기에 얼른 진지 상을 차려드렸더니 황겁하게 마구 잡수실 적에 불시에 어디서 나왔는지 총과 칼을 한 무장한 중국 군대들이 휙-몰려와서 포위를 하려들지요. 그때 주인은 얼는 눈치채이고 밥 숟가락을 그냥 던지고선 그냥 날 새게 뒷 담장을 뛰어너머 어대로인지 종적을 감추셨는데 그 뒤 사오일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셧구려. 내 마음이 얼마나 탓겠어요. 그럴 때면 나는 밤마다 이슬을 마저 가며 뒷문박에 서서 행여나 오시는 가고 긴긴밤을 서서 새엇지요."

여운형은 이걸 듣고 옆에서 '''"그런 일도 있었나?"'''하면서 허허허 웃었고 부인은 '''"그것뿐이겠어요?"'''라고 쏘아붙였다.
게다가 여운형은 '''밥돌이'''였다. 그가 야자 이만규 씨의 집에 오랫동안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만규 씨 집에서 그의 별명은 '''밥 많이 먹는 손님'''이었다고 한다. 어떤 책에서는 이만규가 소식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운형이 많이 먹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별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고 썼으나... 먹성에 대해서는 본인도 인정하였다.

(중략)... 나는 실로 그때 내 건강이 남부럽잖게 상당했더니 만치, 그리고, 기운이 세여서 중국인 2인, 3인을 넘어뜨리고 남을 만했기 때문에 밥 잘 먹기로 또 유명했지요. 한 끼에 여섯 공기, 일곱 공기씩 밥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았으며, 그 밥 분량이 중국 학생이 먹는 분량의 2배, 3배였으니 유명하지 않을 리가 있나요. - 敎授로 大學生으로 支那 諸大學 時代의 回想, 南京金陵大學 留學時代(呂運亨)

...과장이 아니라면 그저 충공깽.
애초에 체격이 장대하고[15]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게 습관인데다가 연설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독립 운동이고 뭐고 사실상 밥만 축내고 벌어오는 돈은 형편없는데 애는 계속 만드는 최악의 남편이었다...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고서는 상하이 유학 중인 장남 빼고 온 가족이 거처를 조선의 계동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장남 봉구가 1933년에 상하이 복단 대학에 재학 중 장티푸스에 걸려 1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했을 당시 여운형은 가출옥된지 몇 달 안 되어 형기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로 갈 수도 없었고 아버지로서 아무 조처도 할 수 없었다. 차남 홍구는 1940년에 일본의 법정 대학 예과 2년에 유학중 파상풍으로 사망,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을 먼저 떠나보냈다. 먼저 떠난 장남과 차남까지 합하면 진씨 아래로 딸 다섯과 아들 셋이다. 딸 여순구가 1942년생 늦둥이로 가족 중 가장 막내고, 본처 외의 여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 둘까지 합하면 실제로 키운 자식만 총 10명이다.
그의 개방적인 성향 때문인지 당시 조선 평균 남자들과 비교해볼 때 여자들과 어울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던 편이다. 그의 여성관이나 그가 여자를 후렸을 때 사용했을 법한 미사여구를 볼 수 있는 글은 당시 조선 내의 유명 인사들 글을 모은 학해(學海)라는 책에 기고한 《신춘(新春)을 맞이하는 젊은 여성들》이라는 글보러가기(17쪽부터)인데, 이 글은 기본적으로 고등 보통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여 사회에 진출할 여학생들을 상대로 계몽적인 의도로 쓴 글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 문어체의 수준을 고려한다고 해도 '나의 사랑하는 어린 새들', '귀여운 조선의 어린 새들', '학교의 나무 아래에서 높고 먼 이상에 가슴을 태우며 배회하던 젊은 여인의 맑은 눈동자' 같은 표현에서 그의 성향을 다분히 알 수 있다.
외간 여자와 바람난 적이 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 몽양이 데려온 아들만 따져서 2번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해방될 때까지 주변 사람들끼리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유부남의 몸으로 일본 여자[16]를 만나 1936년에 막내 아들(붕구)을 낳은 것이다. 그 때문에 해방 이후 좌우 갈등으로 여운형이 대차게 까일 때 '''저명한 독립 운동가가 처자식을 놔두고 일본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는 얘기가 거대 떡밥이 되어 반대편 진영에 두고두고 씹히게 되었다.
2번째는 1940년대에 도쿄를 들락날락했을 적에 일본에서 조선 미인이라고 소문난 재일 여대생 진옥출과 연애를 한 사건. 차남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17] 그것도 너무 열애를 한 나머지 '''임신'''시켜버려서 옥출이 딸(효기)을 낳자 자신이 책임지고 맡아 키우겠다며 조선에 데리고 가서 애를 아내한테 맡겨버렸다. 그 증언으로 아버지가 여운형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이란 씨의 회고에 의하면, 여운형이 재일 유학생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도쿄를 수시로 오갈 때 아는 학생들 학비가 필요하다고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께 수시로 돈을 부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가 광산이 잘 안되자 광산을 팔고 도쿄로 가려고 여권을 신청했더니 때마침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이란 씨의 누나가 편지로 밀고하길 '''선생님께 돈 드려봤자 연애 자금 드리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했다고... 여운형 신봉자였던 아버지는 이 글을 읽고 "이것이 무슨 말이냐. 이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하다니!"하면서 펄쩍 뛰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연애 한 번 못해보고 결혼한 것에 대해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격이 체면 차리는 걸 싫어하는데다가 몸을 가만히 두는 걸 '''절대''' 못 견뎌했다(못 움직이게 가둬놓으면 신경통에 걸렸다). 그리고 1940년대 초 도쿄를 오갔을 때는 여운형 인생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공무적으로 할 일이 없었던 기간이었다,''' 이는 일본 정치인, 특히 군부 쪽 생각은 대중국 전쟁으로 확고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여운형의 말을 듣지도 않았기 때문. 말하자면 일본에 체류했던 이 기간은 여운형 인생 처음으로 온,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고 동료가 광산업을 해서 돈까지 대줬다. 거기에 예쁜 여대생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놀라운 건 진옥출과 연애했을 때 '''여운형은 유부남에 50대 후반이었는데 진옥출은 미혼의 20대 초반 여대생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 사나이들에게 불었던 연애 열풍 탓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서 이란 씨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은 후에 유학생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재일 유학생들이 진옥출의 임신 소식을 듣자 그녀가 들락날락한 곳이 여경구(여운형의 오촌 조카)의 집이었으므로 여경구를 의심했는데 애 아빠가 여운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노인한테 아까운 미인을 빼앗겼다며 내심 부러워하면서 투덜거렸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여운형의 이러한 행보는 '''한국 근대의 연애사와 일맥상통한다.''' 연애의 사건으로 돌아본 한국 근대사를 조명한 책#을 참고하면 구한 말 남성들은 대개 가정의 권유로 바라지 않는 조혼을 한 뒤 성욕에 눈 뜨면 보다 화끈한 연애 대상(좀 더 진전되면 첩으로 들이기도 했지만)으로 기생을 찾았으며, 사회가 근대화되면서 기생들은 매춘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연애를 권장하는 풍조가 급격히 깔리자 너도 나도(남자라면 신분 고하, 연령을 막론하고 심지어 결혼 여부를 막론하고) 연애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당시 연애 대상은 연애에 개방적인 고보 졸, 대재, 대졸의 신여성(속칭 모던 걸)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청소년들을 계도하는 성격을 지닌 글에서 "히야까시(ひやかし: '놀리다'라는 뜻의 일본어로 여성에게 수작을 걸거나 하는 것으로 일종의 희롱이라고 볼 수 있다)" 행위를 유난히 불건전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행보는 본처인 진씨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웬수'''이며 당시의 모던 걸 열풍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일반적인 성도덕과는 엇갈리는 것이었다. 그나마 진씨가 이른바 '구식 여인'으로서 자신은 무식쟁이니 잘난 남편의 활동에 대해 그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용히 내조하는 걸 미덕으로 삼아서 그나마 여운형이 무사했지, 그녀가 여운형 어머니같이 드센 여자였으면 집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화려한 편력 때문에 사생활이 비교적 깨끗한 이승만과 비교당하는 식으로 열심히 까이게 되었다.[18]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이 먼저 떠나버리고 자식 농사가 늦어졌는데 교육비를 댈 형편이 못 되었다. 게다가 후에는 지속적인 테러 위협에까지 시달리자, 자식들이 죽거나 납치당할까봐 몇몇 딸들과 막내 아들을 북한김일성한테 보냈다. 여운형이 북한에 건너가서 김일성과 대담을 나눌 때 김일성이 자식들을 자신에게 맡기면 다 해결해주겠다고 했다는데 김일성 머리가 보통내기가 아닌 것은 틀림없다(...). 김일성은 여운형 자식들을 잘 돌봐주었고 모스크바로 유학까지 보내줘서 그들은 고위급 정치인이 되었다. 덕분에 자신들도 권력 투쟁에 패배 시 관대한 처분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 북한의 다른 권력자들은, 6.25 이후의 북한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처절하게 집안이 멸족당한다. 어찌 보면 이것도 남한에서 여운형이 평가가 절하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운형 입장에서 자식을 살리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그런 위협은 이승만 정권 성립 및 6.25 이후의 일이라서, 당시만 해도 지지도 1위를 달리던 여운형이 그런 문제를 걱정할 리는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여운형이 직면했던 숱한 백색테러들을 상기해본다면 그가 느꼈을 위협감은 상당했을 것이라 추론 가능하다.
남동생으로 여운홍이 있었다. 여운홍은 형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활동을 했으나, 일제 강점기 후반 독립 운동에 희망을 잃고 서서히 친일 활동으로 선회했다.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전쟁 협력자 7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동생도 2명이 있었다고 한다.
자식이 9명으로, 4남 5녀다. 다만 장남과 차남은 병으로 일찍 떠나보냈고, 여운형이 죽을 때까지 7명의 자식이 살아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자녀들의 이름은 다 九자 돌림인데, 앞 글자는 모두 새(鳥)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장남 봉구(鳳九 : 봉황), 차남 홍구(鴻九 : 기러기), 3남 영구(鸋九 : 부엉이), 4남 붕구(鵬九 : ), 장녀 난구(鸞九 : 난새 -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차녀 연구(鷰九 : 제비), 3녀 원구(鴛九 : 원앙), 4녀 형구(鶑九 : 꾀꼬리), 5녀 순구(鶉九 : 메추라기)인데 여기에서도 어린이와 청년들을 어린 새들로 생각했던 그 분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측근들이 진옥출과의 관계로 낳은 아이의 이름은 '효기'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출생년도로 볼 때 효기는 여순구인 듯하다.
장녀 난구와 차녀 연구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닌 걸 보면 공부를 잘 한 듯하다. 난구의 경우 심장병으로 다니던 이화여전을 중퇴했다고 한다. 월북한 난구, 연구는 북한 고위 정치인이 되었고 순구, 붕구도 나름대로 직위가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 차녀 연구는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출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차녀와 3녀는 남한을 방문하여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간 적 있다. 북한에는 약 30여 명의 유족이 있다고 추정된다.

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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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 19일, 서울특별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19]이라는 청년에 의해 암살당했다. 총격 후 범인은 곧바로 도주했다. 경호원이 범인을 추격하였지만 갑자기 등장한 경찰에 의해 오히려 범인으로 몰려 시간만 지체되고 말았다. 이후 경찰은 이 청년을 체포한 후, 사건을 그의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한지근은 '''미성년자라고 나이를 속여''' 사형을 면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일어난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끌려간 뒤 그의 생사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운형 암살사건의 진상은 여운형이 사망한 지 27년 후인 1974년이 되어서야,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가담한 4명이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밝힘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은, 한지근과 자신들이 어떻게 여운형을 암살했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한지근 등 여운형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1945년 12월 30일 발생한 송진우 암살사건의 주범 한현우(韓賢宇)의 집에서, ‘격몽의숙’ 관련자들과 교유하며 극우적인 사고를 키워나갔다. 여기서 이들은 당시 극우 테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혁신탐정단’의 양근환(梁謹煥), ‘백의사’의 염동진(廉東鎭)과 접촉하며 테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리고 여운형이 ‘민족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근환과 염동진은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다. 1974년에 나온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의 주장은 사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곧 그 신빙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나온 직후 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에 따르면, 이들의 설명이 여운형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가깝게 들어맞았다고 증언하였다.

6. 여담



6.1. 인기 많은 호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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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중반, 서상천 체육관 앞에서
찍은 사진(48세)#
KBS 영상 실록에 등장한 여운형. 챙 넓은 모자에 원형 선글라스를 착용하였다.
해방 직후니까 당시 나이가 '''60세'''였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셔츠 핏에서 남다른 피지컬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잘생겼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풍채가 우람한 데다가 운동을 좋아해서 근육이 장난 아니었다. 유학하던 시절에 80kg의 거구였고 카이저 수염까지 멋지게 길렀기 때문에 별명이 '터키 청년'이었다고 한다(그의 카이저 수염). '만국부인 잡지'에서도 여운형의 수염이 호남아의 조건으로 선정된 걸 보면 그의 수염은 유명했던 모양이다.# 수염 관련 일화도 있다. 난징 금릉 대학 시절에 카이저 수염을 기르고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학생과 교수들이 붙여준 별명이 콧수염 씨(Mr. Moustache). 나중에 운동 경기를 하면서 다른 학교에 그가 알려져서 편지가 왔는데 이름을 모르므로 Moustache라는 이름 앞으로 왔고, 사람들은 그 편지가 여운형에게 오는 줄 알고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기본이 받쳐주는 데다가 옷차림에도 매우 신경을 썼는데,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고위급 외교관들이 옷을 맞춘다는 양장점에서 옷을 빼입었고[21] 패션 센스도 뛰어나서 어느 곳이든지(그곳이 일본이라도) 길을 지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가 양복을 빼입고 모자 쓰고 지팡이를 돌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흡사 할리우드 중년 배우를 연상하게 했다고 한다. 대화하는 태도에서도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대화를 경청하는 자세가 갖춰져 있고 타인 입장에 서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능력을 지녀서 심지어 그를 욕하던 사람들도 그와 대화하고 나면 내가 왜 그를 욕하고 다녔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대표적인 사례가 강원용 목사). 말하자면 한국 근현대사의 몇 안 되는 '''미중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와 목욕을 함께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던 강원용 목사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비록 몽양의 노선은 내가 따를 수 없는 다른 길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우선 그는 로맨틱한 사람이었고, 한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모두 뛰어난 남자였다'''. 나는 그의 외모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던지 그는 정치인으로는 예외적으로 광고 모델로도 가끔 등장했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렇게 잘생긴 사람도 썩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던 만큼, 내가 떠올린 생각도 그런 것이었다. 하도 잘생긴 사람이라 언젠가 한번 그와 얘기를 나누다 어디 못생긴 데가 없나 하고 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본 적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봐도 역시 흠잡을 데 없는 수려한 용모였다. 그의 외모에 대한 나의 열등감이었는지, 나는 결국 작은 흠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약간 들어간 콧구멍이었다."

우가키 총독의 사위 야노는 이러한 여운형에게 아주 반해버려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몽양 여운형 선생과 꼭 결혼했을 것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여운형 선생과 결혼할 텐데 불행하게도 남자로 태어났다."'''[22]

남자들이 이렇게 인정했을 정도였으니 그에게 반해버린 여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참모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여운형은 한국 정치인 중 타인이 따르지 못할 정치인으로서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는 누구보다 잘생겼다'''. 둘째로, 그는 뛰어난 웅변가다. 셋째로, 그는 강한 감화력과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말과 글 실력도 탁월하였다. 언변에서 당시 신문 환담 코너에서도 말 잘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늘 꼽혔다. 무엇보다 그는 연설하기를 좋아했고 유명 인사의 연설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직접 시현하는 데에 능력이 있어서, 흡입력 있고 호소력 있는 언변으로 많은 명언들을 만들었다(목차에서 '그의 어록'을 참고). 그의 연설을 모은 연설집까지 출판되었을 정도. 외모가 출중하고 목소리가 우렁차며 활발한 제스처를 사용하여 청중을 빨려들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그가 연설하면 사람들이 왁자하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의 선동 능력은 가히 신기에 가까워서, 기록상으로 그의 선동은 청년 시절 한일 합방 무렵 이를 비판하는 연설을 한 것이 처음이었지만 '''일진회 소속 군수를 울게 만들었다'''... 스스로 연설에 대한 강박이 있었는지 어느 날에는 꿈속에서 연설하다가 손으로 책상을 탕탕 치고 발을 구르며 "여러분! 여러분은..."을 외쳤더니 침상을 두드리면서 잠꼬대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글씨도 잘 써서 일제 강점기 잡지에서 유명 인사의 글씨체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코너에 따르면 "그의 글씨체는 창달하며 영어는 더욱 잘 쓰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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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마 신사 방명록에 남긴 친필
"혈농어수(血濃於水 : 피는 물보다 진하다)"
활발하고 능동적인 성격을 반영하듯 악수에서도 그 기운이(?) 느껴졌는지 동시대 인물인 소설가 이태준악수의 효과를 거론하는 글에서는 '맹인이라도 몽양 선생의 악수는 악수만으로도 몽양일 줄 알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의 영어 실력을 말하자면, 필리핀 지역에서 민족과 계급 해방에 대해 역설하면서 '''1시간 내내 영어로 열변을 토하며 연설'''했으며, 심지어 하와이안 잉글리시 쪽이었던 이승만보다 영어 발음과 문법이 더 정확했다고 한다, 라고 알려질 정도였지만, 사실 미국 유수의 대학(조지 워싱턴 학사, 하바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에서 학위 받고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가 베스트셀러에도 오른 이승만과 영어 실력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로 생각되고 그만큼 영어도 잘했다는 뜻으로 봐야 할 듯. 영어 말고도 중국어는 당연히 할 줄 알았고 일본어도 할 줄 알았다. 여운형이 일본어를 말하지 않고 통역을 대동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일본어를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해방 다음날에 밝혀졌다. 여운형 측근 중 한명의 회고인데, 그날 여운형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죄수들을 풀어주러 갔는데 일본인 간수가 일본이 패망한 줄 알고 울자 여운형은 일본어로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あまり悲しまないで下さい)"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현대 한국인의 눈으로 봐도 파격적일 정도로 개방적이어서 당시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다. 강원용 목사는 여운형을 '''첫째로 자유주의자, 둘째로 민족주의자, 셋째로 사회주의자'''로 평가한 적이 있는데 스스로 이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암울하고 극단적인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너무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행동을 한 것이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기 때문에 말년에 불행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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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25년 중국 상하이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앞줄 맨 오른쪽)이 코치로 있던 야구팀이 단체 기념 촬영하는 모습.
그의 개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가 스포츠인데, YMCA 야구단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이를 먹어서도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고 다방면의 운동 경기에 능하였으며, 스포츠를 적극 장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기고문을 냈다. 각종 스포츠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여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다.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고, 청년들과 투포환 던지는 경기를 했는데 1등을 했는가 하면, 경기를 나갈까 망설였던 손기정 선수의 출전을 장려하였고, 각종 스포츠 경기의 심판을 했다. 특히 수영을 잘해서 물놀이 하다 물에 빠진 세 사람을 모두 구출한 적도 있다. 그렇게 스포츠계에서 워낙 유명해져서 광복 후 초대 조선 체육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스포츠가 대중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포츠 보급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23]
40대 후반에 각종 화려하고 무거운 직함을 달고 있어 체면 차릴 법도 한데 철봉 운동을 보급한다고 '''웃통을 벗고 현대 철봉 운동법이라는 책의 모델이 되어 철봉 운동으로 다져진 튼튼한 근육을 보여주었다'''.
또한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어린이날에 환갑의 나이로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미래이므로 잘 자라달라면서 연설 단상에서 최경례의 절을 올려 구경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미소 양측 대표와 함께 참여하는 행사에서 외국 대표들이 어린 아이한테 꽃다발을 받고 관례적으로 인사를 하였으나 그 혼자 꽃다발을 받지 않고 어린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 청중들에게로 걸어갔고, 청중들은 이를 열렬히 환호하여 남산이 울릴 정도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자유 분방함 때문에 유쾌하고 장난기 어린 행동도 많이 했다고 한다. 높은 직함이 있음에도 야구 경기를 관람하면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고 있으면 양손을 번쩍 들고 왁자하게 응원하거나, 업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을 등에 업고 말 흉내를 내어 말 타기 놀이를 하거나, 새벽 중에 오랜 친구인 야자(也自) 이만규를 만나러 만규 집에 들렀는데 귀신 소리를 내서 만규를 놀라게 하거나, "까꿍 나 여기 있다''"# 등.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숨기는 성격이 아니고 초면인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솔직해서, 말하기 좀 민망할 법한 얘기도 그냥 다 털어놓았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총독부 관련자들이 자신과 면담하기 위해 찾아왔는데 겉으론 태연한 척 했으나 언제 날 죽일지 모르는 상황이라 너무 긴장해서 땀을 많이 흘렸는데 면담 끝나고 소변을 봤더니 오줌이 싯누렇더라는 얘기를 본인이 했고, 생전 처음 보는 기자와 인터뷰하는데 아내를 옆에 두고서 아무것도 모르고 구식 결혼한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만규라거나 이란 같이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는 '''볼 거 못 볼 거 다 보여주는 사이'''였다. 강원용 목사가 이만규에게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는데 다 벗은 것도 봤느냐?"고 물었더니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잘생겼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객관적인 지표 측면의 인기로 보자면, 조선에 거주하는 대다수 민중들 입장에서 타지에 멀리 떨어져 있는 독립 운동가보다 국내에서 독립 운동 및 사회 정비 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에 더 호감이 가는 것이 당연했다. 실로 그의 인기는 높았는데,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어 발간된 우익 언론지 선구에서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설문에서 여운형이 33%(1위)를 차지하였다. 2위는 이승만(21%), 3위는 김구(18%). 참고로 당시의 언론지 설문 조사 결과가 그렇듯이 일반 민중이라기보다는 글을 읽을 수 있고, 실생활과 무관한 잡지류를 사서 구독할 여건이 되는 이들의 의견이었다. 뭐 그렇다 치더라도 언론지를 읽을 수 있던 지식인들에게 이 정도 지지를 받은 건 흠좀무.

6.2.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여부 관련 논란


여운형이 일제시대 내내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근거로 여운형을 친일파, 혹은 일제에 부역한 여타 자치론자들과 동일선상에 두자는 주장이 있다. 여운형이 조선인들로 하여금 황군에 지원하라는 권유 기사를 쓴 것 자체는 사실이나,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 총독부의 숱한 노력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주변인의 증언이 있다. #
2009년 후반부에 여운형이 학도병 지원을 권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언론들끼리 물고 뜯고 싸운 적이 있다.(#1, #2). '여운형 친일반민족행위자설'이 객관적으로 처음 제기되었던 게 1980년대 친일파 연구 권위자인 임종국 선생이 처음이었다. 당시 임종국 경우, '했다고 하면 지나친 지적이 아닐까?'라면서 '어쨌든 한건 한 거다'이런 식으로 제기한 정도다. 이에 대해 직접 '역사 문제 연구소'에서 해명에 나섰다.역사 비평 출판사, <바로 잡아야할 우리 역사 37 장면> 위의 기사에 나와 있 이에 대해서 여운형은 명의 도용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친일 의혹설과 반론에 대해서는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 출판부 출간)책(p465 ~ p482)과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정병준 교수가 쓴 단행본(1995년), 위키 백과#,변은진의 《1932~1945년 여운형의 국내활동과 건국준비 = Activities in the Country and Preparation for Nation-building by Lyuh-Woonhyung, 1932~1945》(한국인물사연구, Vol.21 No.-, [2014])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러한 사설이 작성되고 의혹들이 제기된 것이 얼마 뒤 나올 친일인명사전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했고, 2009년 11월 초, 친일 인명 사전이 발간되자 뉴데일리를 비롯한 일부 극우파들은 목록 안에 박정희는 있고 여운형이 없다는 사실을 빌미로 친일인명사전과 그 편찬 위원회를 공격하고 있다. 기사가 나오자, 일부 보수 세력들은 '여운형은 친일파' → '여운형은 좌파' 이렇게 몰아가면서 '친일좌파'이라는 논리가 결여된 3단 논법을 세우며 일방적으로 몰아가면서 '골수 친일 좌빨 여운형은 건국 훈장을 치탈하라'라고 꾸준히 억지를 부리고 있다.
유의해야할 점은 여운형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 주장하는 뒷받침이 되는 증언자들이 대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 & 한국민주당 출신들'''이다. 여운형은 1945년 안 팎으로, 당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일부 미군들과 소련군들도 고평가하면서 여운형은 대중적으로도 인기 많은 지도자였다. 이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전적이 있던 극좌/극우[24] 세력들은 여운형의 입지를 줄이는 것에 혈안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을 '애국자'라 주장했다. 그 외에 일부에서 '공산당 노획 문서'를 근거로 들고 있는데, 이 문서는 언제 작성되었는지도 시기 불명으로, 타당성이 부족한 글이다. 참고
일제 말기 국내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1943년부터 계획하던 걸 직접 실천에 옮겨 1944년 8월에 건국동맹 같은 비밀 지하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하면서 독립 운동한 지도자는 여운형 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사실상 마지막 독립 운동으로 운위되는 것이 1930년대 말 박헌영이 활동한 경성콤그룹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성콤그룹은 1941년 즈음가면서 와해된다. 국내에 남았던 '우파' 세력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가장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물은 안재홍 정도였다. 일제 말기 당시 좌파고 우파고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총독부로부터 저항하는 방법이 칩거 생활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일제 말기는 엄청 살벌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수구 진영에서는 '순정 우파' 노선을 지향한 안재홍 조차도 '빨갱이'로 몰고, 그를 여운형과 같이 친일 행위 벌였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인 안재홍 조차도 일제 말 지하 조직을 결성할 생각조차 하지도 못하고 칩거 생활 지내면서 역사서 저술하고 지낸 판국. 1944년이면 당시 국내에 독립 운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4분 40초부터 볼 것.)
1945년 미군이 입성했을 때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한국 민주당 인사들이 '여운형은 친일 좌파'이라고 주장하면서 1945년 9월 12일, 미군이 한반도 입성하자마자 작성한 보고서에 '여운형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친일파이며 총독부로부터 2천만 엔 금전수수를 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 내용이 있다. 그러나 1946년 8월 미군정 버치 중위 장교가 '일본에 건너가 前 조선 총독부 고관들을 심문해서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수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사령관 존 하지에게 제안했었는데, 사령관 하지는 '일리 있는 말이다. 나는 그(여운형)의 약점을 잡고 싶다.'면서 찰스 오리오단 미군정 외무부 소속의 소령을 일본으로 조사단을 보내 과거 총독부 고관 출신 인사들 찾아가 '여운형이 친일파냐?' 여부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 결과 1947년 3월, 미군정 보고서 결과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of Lyuh's Japanese connections in Japan by Charles 0'Riordan was negative. Not a scrap of supporting evidence. Most of the people 0'Riordan interviewed seemed amazed that any question had come up. They considered him one of the outstanding Korean patriots. Robinson.

찰스 오리오단에 의한 일본에서 시행한 여운형의 친일 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는 '아니오'였습니다. 한 조각의 증거도 없었습니다. 오리오단이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의문이 나온 점에 대해 놀라했습니다. 그들은 그(여운형)를 한국의 애국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로빈슨(미군정 대령).#

그리고 1949년 반민 특위 조사에서 친일 자본가 박흥식의 조사 과정에서 '여운형이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했다'는 소리를 한 것을 근거로 일부에서는 '여운형이 친일파' 근거로 주장한다. 이는 거짓된 주장이다. 반민 특위를 '망민법'이라고 까대다가 체포된 악질 친일파 이종형 조사 문서에는 ''''그는 ≪大東新聞(대동신문)≫ 사장으로 앉아 큰소리를 첬고 故(고) 呂運亨(여운형) 先生(선생)이 學兵(학병) 勸誘(권유)를 했다는 거짓말을 大書特筆(대서특필)하여 덤벼들었고''''라는 문장이 있다. 실제 이종형은 해방 후 자신이 운영하던 '대동신문'에 여운형의 전향 문을 그대로 실었을 뿐만 아니라 이종형 자신이 친일 시 한편을 짓고, 그것이 여운형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소개까지 했다.#이종형에 대한 자세한 행적. #
여기서 '학병 권유 유세를 했다는 거짓말을 대서 특필하여 덤벼들었고..'라는 문장은 1946년 2월 10일 대동신문 2면에 실린 동판 기사와 1946년 2월 17일,18일에 쓴 기사를 말한다. 여기에 1948년 김승학이 펴낸 '친일파 군상'에서도 '新聞記者(주로 京日) 會見 等에서 是非를 드러내지 않고 큰 支障이 없을 程度의 技術的 談話 發表를 한 것이 紙上에는 自己 意思와 다르게 發表되었으나 訂正을 要求할 수 없어서 그대로 放任한 者. 例) 呂運亨, 安在鴻 等.' 문장이 나와 있다. 즉 '''여운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다'''가 1947년 미군정 보고서 조사와 1949년 반민 특위 조사로 통해 끝난 떡밥이었던 거다.
2009년 11월 , 조선일보동아일보 등 보수 우익 세력에서 민족 문제 연구소에 여운형이 친일파 명단에 실리지 않았음을 '정치 사상의 형평성' 문제를 근거로 항의하였다. 사실 이것도 '''헛소리'''다. 친일 인명 사전 내용을 보면 공산당 핵심 간부 가운데 한명이었던 안준 이라던가 강영석(이쪽은 독립 유공자까지 받았다), 주련, 김한경 등이 수록되어있고, 북한에서 고위 장관을 역임한 총독부 중추원 출신 장헌근, 북한에서 언론인으로 지낸 김정제, 박팔양, 북한에서 농림부 장관을 맡은 인정식 등등 여러 좌익 계열 친일파들이 수록되었다.
보수 언론들은 "민간 단체(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 인명 사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 기관(친일진상규명위)의 '친일파' 평가에 대해서 후손들은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한다. 또 공정하게 평가했다고 하더라도 여운형 등 좌익 사회주의 계열은 어디에도 없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라고 친일 진상 규명위에 항의했다.
이에 친일 진상 규명위에서 여운형의 친일 행위를 조사했었다. 친일 진상 규명위 위원장은 "여운형의 친일 자료는 단 1건이 있었지만,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 동맹(농민 동맹과 건국 동맹)을 만들어 활동을 했고, 이를 11명의 위원들이 논의해 (보고서에 명단을 넣지 않는) 결론을 내렸다."고 입장을 밝혔다. 참고로 친일 진상 규명위는 우익 계열의 학자들과 심지어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자세한 자료 그리고 친일 인명 사전에서는 '반일 후 친일은 기록하지만 친일 후 반일은 다른 문제다'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일부는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1910년대의 토지 헌납을 하사받았다는 문서가지고 또 물고 늘어지기도 한다. 여운형이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에 투신한 건 1910년대 중후반이고, 일제 합병 직전 까지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조선의 식자층이 일본을 모델로 삼고 있었으니 여운형의 경력과 연대기 내에서 생각하면 논리 자체가 안 맞는다. 토지 868평을 총독부에 헌납하고 목배(木杯)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은 그 앞에 오는 문장 다이쇼(大正) 2년 5월 도로부지로서 토지를 기부하고 그 증표로 목배를 하사받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친일을 해서 토지를 기부한 것이 아니고, 당시 총독부의 도시 계획에 따라 해당 땅을 징발하면서 기부 형식으로 받고 그 형식적인 감사의 표시로 목배 같은 것을 주었던 것이지, 여운형이 무슨 친일을 해서 기부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운형 집안 소유의 땅을 강제 징발한 것을 그렇게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얘기다. 더구나 대정 4년이면 1915년인데, 이때 여운형은 일생의 동지인 조동호와 중국 난징 금릉 대학교에 유학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즉 여운형반민족자설을 주장하는 단체들의 사료들은 '''진위성이 불분명한 거의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한국논단 경우가 있다. 이쪽은 아예 지어내는 소리를 막 남발하고 있다. 또한, 그에 반박하는 쪽은 '''보수 쪽의 사학자들도 대거 포함'''하고 있으며 반박의 논점과 참고하는 사료 또한 폭넓다. 대표적인 인물이 국사 편찬 위원회에 몸담고 있는 정병준 교수와 이정식 교수, 이현희 교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이정식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해야한다'는 등 이승만을 열렬 찬양하는 대표적인 우파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심지어 조갑제조차도 '박정희가 여운형 계열 건국 동맹에서 활동했다!' 이런 글 쓴 게 엄청 많다. 전문적으로 사료 들고 입씨름 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수사학적 측면에서만 봐도 친일 쪽의 주장은 그 반대에 비하면 미약하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가 있다.
결론적으로 여운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되기에 '''사료가 너무나도 부족하고, 있는 사료도 타당성과 정확성이 부족하다.''' 여운형이 '친일파'라고 규정지으려면 적어도 2가지 자료가 제시되어야 한다. 하나는 1940년 ~ 1945년 기간 동안 중국 난징에 가서 왕정위나 천공보, 저우포하이 등의 난징 괴뢰 정부 고위 인사들을 만나서 중일 전쟁 화평 공작을 했다는 자료와, 그 협력의 대가로 반대 급부를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한 자료, 이 두 가지를 말이다. 신한청년당 시절 여운형의 밑에 있던 이광수나 장덕수만 해도 일제는 이들을 극대화로 이용했다. 또한, 이들의 친일 행적 역시 엄청나다. 여운형 밑에 일했던 이들이 이 정도로 친일 행적을 남겼는데, 신한 청년당 당수였던 여운형이라면 이광수, 장덕수하고는 비교조차도 안 될 정도의 규모로 엄청나게 이용했을 거다. 그러나 폄훼론자들이 제기하는 주장들은 거의 '학병 권유문을 작성했다'/'어용 단체에 가입했다!'라거나 이런 주장들이 전부다. 일제는 성공적인 민족성을 말살하는 통치를 위해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지사들 명의를 도용해서 각종 단체에 집어넣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무렵 여운형은 1942년 ~ 1943년경부터 항일 단체 결성에 준비하고 있었고, 1944년에 조선 건국 동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는 사료들은 타당성이 뚜렷하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지명도가 높았던 여운형에 대하여 당시 일제측 인사들은 그를 끌어오기 위해 숱한 회유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단 한번도 숱한 회유와 교류 속에서도 뚜렷한 친일반민족행위를 남긴 바가 없다.

6.3. 기타


  • 그가 1933년부터 1947년 사망 전까지 14년간 살던 서울 계동 자택은 현대그룹 사옥 근처에 있었는데, 1989년 서울시 측의 도로 확장공사로 반토막이 난 후 그 자리에 '안동손칼국수'가 들어섰다. 2005년에야 표지석이 세워졌으나 건물 앞이 아닌 건너편에 제막됐고, 해당 건물은 2013년에 화재로 소실돼 또 개수됐다.

7. 어록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나라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이 다스리는 민주공화국이다."

- 1919년 11월 27일 일본 도쿄 제국 호텔에서의 연설 중

"노동자, 농민, 일반 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겠다. 노동 대중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 만일 우익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 이론을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26]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생존권은 신성한 것이다. 시대의 조류는 조만간 인간 세계의 여러 모순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 리 과거의 껍데기를 벗지 못하면 국가도 개인도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세계는 약소 민족 해방, 부인 해방, 노동자 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 1919년 11월 27일 일본 도쿄 제국 호텔에서의 연설 중

원래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 없으면[27]

하등 위협이 없다. 설혹 어떤 불행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가의 실력은 족히 외타(外他)의 보호를 의뢰치 않고 자립하여 발전할 것이다. 열대의 초목을 한 대에 옮겨 유리창 수증기 속에서 억지로 그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자. 그것은 벌써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잃은 것이다. 자연 공기 속에서 우로(雨露)의 혜택을 받을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없으니, 차라리 한풍냉설 속에 십사일생(十死一生)의 곤란을 받아가며 사는 것이, 타인의 보호를 받아 자기 생존의 의의를 잃고 구차하게 기생적 생활을 하는 데 비하여 어느 것이 즐겁겠는가?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엄정 중립을 지킨다. 우리가 통일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이지 어떤 이론이 아니다. 이념은 자주 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

우리가 미소 공동 위원회를 환영하는 것은 배외적 노예 근성에서가 아니고 우리 문화 민족이 연합국과 어깨를 같이 하려는 국제적 협조 정신에서입니다. 우리가 덕수궁 석조전에 전하여 둘말은 우리의 옷은 우리 몸에 맞도록 하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독립도 모든 생활상의 곤란도 우리 정부가 수립되는 데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의 지하 운동 시대를 생각해 보자.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더듬더듬 걷다가 탁 부딪힌 후에 "너는 누구냐?"고 묻고 보면 "나는 공산주의자다." "나는 민주주의자다." 말하며 껴안고 어쩔 줄을 모르던 혁명 투사들 간에는 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은 공상이 되고, 이상이 없는 현실은 사물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실제적 세밀을 필요로 하는 것이요, 공상적 개괄을 허하지 않는다.'''

'''나는 연합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즉 만났으니 "하우 두 유 두(How do you do)"라고 인사할 것이고, 둘째 번에는 "땡큐(Thank you)"라고 감사의 뜻을 표해야할 것이고, 셋째로는 "굿 바이(Good bye)"가 있을 뿐이다. 절대로 멀리서 온 연합군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또 잘 모르는 국내 사정을 호소 의뢰해서도 안 된다.[28]

외래 세력 의뢰심은 우리의 결점의 하나였다. 사대주의와 배외(拜外) 사상은 절대로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열해 있는 것은 소위 지도자뿐이요, 민중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민중인데 주인의 심부름꾼인 지도자들이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분열만 일삼으면 주인이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왕년에 필리핀에 갈 때 여객선 항해 실에 들어가서 나침반을 자세히 구경한 일이 있소. 파도가 심한 밤이었는데 나침반을 보니 북쪽을 가리키고 있어야 할 바늘이 쉴 새 없이 움직이더란 말이오. 그때 내가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소. 정작 움직인 것은 나침반이 아니라 파도에 흔들리는 배였소. 배가 전 후 좌우로 움직이니까 북쪽을 고수하기 위해 나침반이 쉴 새 없이 움직이더군.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더러 왜 변덕이 죽 끓듯 하는가하고 손가락질하는 모양이나, 만일 배가 요동하는데 나침반이 계속 한곳에 멈춰 있다면 그 바늘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마오. 지금 파도처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오히려 나는 내 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하기 위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오. 바로 이러한 이치로 내가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것이오.

참다운 민주주의란 근로 대중의 복지 실현에 있다. 민주주의 가면을 쓰고 민중을 우롱하는 파쇼 권력은 그 위선과 가면을 폭로시켜야 한다.

'''벌거벗은 나사렛 예수의 골고다 희생 정신을 부활시키지 않으면 조선 기독교의 존재는 사회에 해독만 줄 것이다.'''[29]

의리를 지키려면 불리할 때에 지키는 것이다. 유리할 때에는 의리를 말하고 불리할 때는 배반하는 것은 불가하다.

조선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조선 민족은 없애지는 못한다. 조선 인민은 친일 주구 몇 놈 때문에 일시적 치욕을 당하고 있으나 우리 인민은 영웅들을 무수히 낳고 우리 힘으로 치욕을 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다. 나의 목을 일초에 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 명의 혼까지도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나의 마음까지를 벨 수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죽어도 이 길을 가야 한다.

- 5번째 테러를 당하고 나서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평하든지 거기에 대해 기뻐하거나 노여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정당한 사람이면 사람들이 나를 악평해도 내가 정당할 것이요, 내가 참으로 정당치 못한 사람이면 사람들이 나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찬양할지라도 사실은 내가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 사람 됨됨이에 대해 참으로 알고자 한다면 나를 평하는 그 사람의 사람됨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라. 나 자신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이지 참새 떼들의 입방아는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 1945년 8월 16일 휘문고보 연설 중에서

만일 자기의 공만을 내세우고 자기의 주장만 고집하여 독선적 배타적으로 한다면 민족 통일은 절대로 불가능하고 이 기회를 놓쳐 천추의 한을 우리 나라 역사에 남기게 될 것이니 이점을 절대로 삼가야 될 것이다.

겁쟁이들이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말려들 수 있는 대담성이 있어야 통일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민족 통일의 대도를 위해서라면 정치적으로 먹고 먹히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안 된다. 작은 이익을 버리고 큰 이익, 민족적 이익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미 늙었다. 그러니 나는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이미 썩은 기둥을 너희들의 손으로 뽑아 버리고 조선의 소나무를 정성껏 다듬어 청년들이 바라는 새 조선의 집을 지어라. 모든 영예, 모든 직위가 청년들의 것이니 내 한 줌 거름이 되어 조선의 소나무를 살찌운들 무슨 한이 있으랴.

'''때려눕히는 자는 힘이 세지만 일어서는 자는 더 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억센 풀대는 거센 바람 앞에서 알아본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야 어떻게 내가 반일(反日)을 하겠는가. 이 길에서 이미 많은 조선 사람들이 생명을 바쳤거늘, 앞으로도 독립이 이룩될 때까지 민족의 넋을 지켜 죽은 사람들이 끝없이 늘어갈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지도자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남더러 이리 가라 저리가라 손가락질만 하구 있어. 그나마 그릇된 방향으로 마치 수탉이 세차게 싸우노라 돌진해 나가다가 서로 방향 감각을 잃고 저만치 빗나가버리는 것과 같거든. 몸소 사람들 선두에 서서 살 길을 찾아 내달리는 지도자, 바로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단 말이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근방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정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울 때를 기다렸다가 때가 되어서 우는 것이오. 남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發作)된 것이 한국의 독립 운동이요. 결코 민족 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그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이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렸다. 그래서 닭 울음소리가 들리면 힘이 나곤 했다.

범은 산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고기는 깊은 물을 무서워하지 않아. 머리를 짓눌리느니 차라리 다리를 꺾이는 편이 낫지.

나는 지식 계급에 득죄할지언정 결단코 노동 대중에게는 득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 건준 집행 위원 격려 연설에서

이제 당장 해방의 날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하던 그 날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어, 불씨에서 산불이 난다는 말이 있지 않나. 우리는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대하의 흐름에 합세해 나가세.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면 빙산을 만나 조난당한 배가 구조를 호소하는 SOS의 소리와 같이 각자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으리라. 어떤 사람들처럼 제 일신의 이익이나 한 가정의 안락만을 생각지 말고 우리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고 희망하는 바를 성실히 생각하며 실현할 의욕과 정열을 가져야 한다.

'''잘 싸워라, 싸워서 꼭 이겨라. 이 나라는 어두워도 가슴속에는 광명을 안아라. 역사는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

조선 체육회 회장으로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환송파티를 열어주었을때, 선수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한 말.

'''내 집 안에서 내가 윗방으로 가든 아랫방으로 가든 객이 웬 상관이냐'''

자신의 방북을 미군정이 반대하자 한 말.

'''참담한 심경이다. 나를 비롯해 지도층을 자칭하는 이들이 총퇴각을 할 때라 생각한다. 우리 같은 지도자들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성공했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제1차 시험에서 전부 낙제다.'''

4당 코뮤니케가 하루 만에 무산된 뒤 1946년 1월 14일 기자회견에서.

'''조국... 조선...'''

피격 직후 단말마처럼 내뱉은 최후의 유언. 그만큼 죽을 때까지 화합된 민족과 통일된 조국을 염원했다. 그러나...


8. 대중 매체에서



8.1. 관련 서적


아쉽게도 여기 나온 책들 대부분이 현재 절판된 상황이다.
'''《여운형 평전1 - 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운동》(강덕상 지음 / 김광열 옮김, 역사 비평사 출간)'''
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 운동 부분이 두꺼운 책 한 권이다. 여운형의 삶을 유례없이 치밀한 사료 조사(옛날 신문에 여운형 이름 나온 기사는 죄다 긁어모은 듯하다. 정확히 말하면 신문만...)를 통해 추적한 점에서 후덜덜한 책. 서술 태도도 다른 여운형 관련 서적에 비해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어 연구용으로 적합하다는 평가가 있다. 저자가 재일 동포이며, 전 3권 기획에 현재(2009년 11월) 2권까지 일본에서 출판 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무소식이다. 출판사 측 말로는 일본에서 완결이 되는 즉시 번역, 판매할 계획이라고 한다.
'''《몽양여운형전집 1,2,3》(몽양 여운형 전집 발간 위원회 지음, 한울 아카데미 출간)'''
서간문, 기고문, 선전문, 연설문, 정치 강령, 판결문, 기사, 장례식 추도문, 여운형에 대해 연구 논문 등 여운형과 관련된 글을 죄다 실은 책. 여운형 성격이 김구같이 꼼꼼한 학자풍이 아니어서 일기 같이 혼자서 글을 따로 써둔 게 거의 없기 때문에 기초 사료의 성격으로 볼 때 이 책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자료도 사실 부족한 게, 여운형이 일본 등지에서 연설하고 모임 다니던 것을 생각하면 사진이라거나 영상 자료, 글 자료가 턱없이 모자란 편이라고 한다. 원문을 그대로 싣다보니 한자가 너무 많고 옛날 말이 많아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절판되었다는 것이다. 도서관 열람을 권한다. 단 1권 부분의 연설문, 기고문은 범우 출판사에서 나온 《조선독립의 당위성(외)》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어려운 한자 투 말들을 알기 쉽게 한글로 바꿔놓았다.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 출판부 출간)'''
분량이 총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두께가 사람을 압도하는 책이라, 방대한 양만큼 내용이 많지만 저자가 여운형에 대한 빠심으로 여운형을 밀어붙인 나머지 객관성이 떨어져서 곳곳에서 까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디씨에서도 애널서킹(…)이라고 까인 적이 있고 일부 블로그에서도 진 시황 후손 운운하는 판타지스러운 찬양을 한다고 까였다. 자료도 객관적인 자료보다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본 자료를 발췌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란(독립 유공자) 씨와 인터뷰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여운형의 현대적 의미를 성찰하는 부분도 독특한 부분이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상당히 엇갈리는 책으로 볼 수 있는데, 객관적인 측면을 더 중시하는 사람은 이 책을 보고 연구를 빙자해 빠심을 발산한다고 비판할 수 있고 주관적인 측면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혈농어수(血濃於水) 상, 중, 하》(강준식 지음, 아름다운책 출간)'''
1990년도에 한길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적과 동지》라는 소설을 여운형 사망 60주기를 앞두고 여운형이 고마신사 방명록에 남긴 친필 혈농어수(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제목으로 삼아 3권으로 묶어 출간한 정치 소설이다. 분량을 보니 묶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을 잘라냈다. 하지만 그동안 새로 발굴된 사료에 근거해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마신사 방명록의 "혈농어수" 부분이라거나 진옥출에게 낚이는 과정(...)은 적과 동지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혈농어수 필체가 발견된 건 2004년이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을 중심 인물로 설정해두고 일제 말기부터 여운형 암살 직후까지 당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여운형의 삶을 조명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권력을 둘러싼 암투, 비운의 민족 역사를 다루는 것이 주요 테마이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점에서 강단 사학자에서는 참고 자료로 취급된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암울한 편이고 애국적 민족주의 성격이 강해서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분위기가 난다. 특히 미군정과 일본에 대한 음모론적 요소가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애초에 출판사가 처음으로 상업성을 노리고 출간한 책이었기 때문에 목차의 제목들이 상당히 도발적이고, 내용도 좀 심각하게 거시기하다. 야한 장면이 심심할 무렵에 나타난다. 상권 초반부터 일경이 조선 여자를 성고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생각보다 빨리 자백해서(...) 흥미가 적다는 평도 있다. 야한 장면에는 대부분은 작중 가상 인물인 홍사공과 엮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박인 부분은 유부남 여운형이 여대생 진옥출에게 낚여서 그녀가 딸을 낳을 때까지 열애하게 되는 부분인데, 역설적이게도 다른 야한 장면은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 인물 주도로 이루어져서 다 뻥이지만 이 부분만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극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안 팔리자 몇 달 안 되어 깔끔하게 관광타고 절판 크리 먹었고 얼마 전에 다시 내놓았다. 역사 왜곡 소설이라고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정국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성격을 요약하자면 '''삼국지 (feat. 한반도)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근데 이 책도 남다른 가치가 있는 게, 작가의 주관이 일정 부분 개입되어있고 떡밥성이 있어서 욕을 먹긴 하지만 '''자료 조사 측면에서는 감히 이 작가의 덕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 몇 년간 여운형의 행로를 추적하여 일본도 가고 중국도 가서 갖가지 조사를 하고 지인들 말도 수집하고 다녔다고 한다. 작가의 엄청난 덕력과 개근성에 경의를 표하자. 심지어 여운형을 연구하는 공식 학계에마저 영향을 미칠 수준의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기까지 했다. 흠좀무.
단 아쉬운 점이라면 여운형이 태어난 뒤부터 조선 광복 이전 기간, 즉 여운형이 독립 운동가로 한창 잘 활약하던 기간에 대한 서술이 미약하고 엄청 대충대충 넘어 간다는 것. 그래서 내용은 해방 직전부터 여운형이 암살당할 때까지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여운형이 어떻게 좌우 틈바구니 사이에서 처참하게 몰락해 가는지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현시창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취향에 따라서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도 있는 편향적인 묘사도 포함되어있다. 아무래도 여운형이 중심 인물이다 보니 주인공 보정으로 인해 극좌나 극우 세력에 대해 대체로 좋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여운형의 한계를 지적하는 등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편이다. 김구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을 보이지만 송진우에 대해서는 로대로 긍정적으로 묘사한 편이고, 박헌영이 밉상으로(라고 쓰고 얀데레같이) 나온다. 박헌영 측근인 이승엽이 여운형을 음해하는 데에 앞장서는 걸로 부각시켰고, 이승만이야 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이 소설에서도 은근히 이승만이 여운형 암살을 종용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은 드라마 서울1945 와 비슷하다. 그리고 고하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가 친일파와 내통했다는 식으로 나온 걸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진옥출이 무정의 연안 독립 동맹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와세다 대학 출신인 재일 유학생 허갑과 만나 결혼했으나 허갑이 일본에서 보낸 밀정이라고 총 쏴서 SALHAE하는 참극이 일어났다는 내용도 여기서 나왔다. 이 소식을 듣고 이만규가 성질 있는 여자라면서 은근히 여운형을 놀리는 대목도 나온다.(...)
참고로, 저자 강준식은 현재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 사무 총장이다.
'''《(산하어린이155) 나뉘면 넘어지고 합하면 반드시 일어난다 - 몽양 여운형》(전상봉 글. 이상권 그림, 도서 출판 산하 출간)'''
어린이 위인전. 2009년 11월 16일에 초판을 발행했다. 기념 사업회 추천 도서라는데 단순한 어린이 위인전을 초월해서 여운형 위인전 중에서 실증적인 고증에 가장 충실하며 삽화 또한 질이 좋고 고증도 훌륭하다(대표적으로 여운형이 암살당한 부분 삽화). 구성도 특이한데, 서두에는 해방의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그 다음에는 여운형의 생애를 순차적으로 서술한뒤 결말에서 딸 여연구가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러 온 이야기가 나온다. 부록으로 기념 사업회에서 제공한 사진 자료도 실려 있다. 여운형을 알고 싶은데 두꺼운 평전이 부담스럽다면 입문 격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다.
'''《나의 아버지 여운형》(여연구 지음, 신준영 편집, 김영사 출간)'''
여운형의 차녀이자 북한 고위급 정치인인 여연구가 저술한 아버지 일대기. 주요 특징이라면 공인이 아닌 개인, 아버지로서의 여운형을 조명한다는 점이 있다. 이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들도 간간이 섞여있다. 철봉 운동을 하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삐었는데 밤새도록 얼음 찜질을 해주었다거나, 언니의 코트를 물려 입는 게 못마땅하여 코트를 안 입고 학교에 갔더니 아버지가 그날 코트를 사준다고 귓속말을 해주고서 그 다음날에 언니 것보다 더 예쁜 코트를 사주셨고, 그걸 안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바가지를 긁었다는 등의 일화가 있다. 한편 여연구 여사의 공적 지위나 성장 환경 상 자신을 키워준 김일성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고 김일성 라이벌이었던 박헌영, 미국, 이승만은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김구도 제법 까인다. 이거만 보면 김구가 듣보잡 일 거 같은 비중이긴 한데. 무려 이 책은 여운형이 쇼와 천황과 만나서 조선 독립에 대해서 설파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30] 흠좀무
'''《여운형 투쟁사》(이만규 지음)'''
여운형의 평생 동료인 이만규가 지은 책으로, 여운형 환갑 잔치 때 여운형에게 원고를 헌정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 총문각에서 출간되었고, 1947년에 민주 문화사에서 《여운형선생투쟁사》라는 이름으로 재발간 되었다. 객관성은 의심되나 지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여운형 평전》(이기형 지음, 실천 문학사 출간)'''
원로 시인이자 몽양 여운형의 제자이기도한 이기형 시인이 저술한 평전. 사실 평전이라기보다는 인물 사나 회고록 성격이 강하다. 여운형 생애에 대한 웬만한 자료는 다 있다. 분량은 한 500페이지 정도 된다.
'''《여운형을 말한다》(이정식·최상용·조영건 외 지음, 이규현 펴냄, 아름다운책 출간)'''
몽양 학술 심포지엄 논문 자료집. (사)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가 지난 2007년 7월 19일 몽양 선생 사망 60주기를 기념하여 서울 역사 박물관 강당에서 가진 몽양 추모 학술 심포지엄의 결과물을 수록한 것이다. 논문 뒤에 몽양 여운형의 생각과 행적을 보여주는 글과 자료들을 연도별로 실어 연구자들의 참고 자료가 되도록 했다.
''' 《여운형 평전》(김삼웅지음, 채륜 출간)'''
김대중, 노무현, 함석헌, 이승만, 조봉암, 김원봉 등의 평전을 쓴 전 독립 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책이다. 2015년 7월 20일에 나온 평전으로써 굉장히 최근에 나온 책이다. 여운형 평전이 기존에 꽤 많이 나왔지만 대개는 너무 학술적이거나 대개는 해방 전후사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여운형 평전을 다시썼다한다. 저자가 현대사 인물 평전을 많이 쓴 사람이기에 여운형 평전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아주 잘 썻다.
''' 《건국투쟁》(박명수 지음, 백년동안 출간)'''
뉴라이트 계열 학자인 박명수가 쓴 책이다. 출판사 백년동안에서 출간했다. 여운형 관련 서적이라기 보단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의 성향 답게 건국준비위원회를 반공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조명하며 친일파의 집합체인 한민당 계열을 마치 독립운동을 계승한 집단처럼 왜곡하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31] 단, 여운형 친일론은 확실하게 부정한다. 뉴라이트 계열에서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는 책이기에 주의하여 읽어야 한다.
박명수 주장 중 의아한 건 건국동맹의 성격인데 그의 논문에 의하면 건국동맹에는 "소위 명망있는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참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임시정부 계열의 이유필이 어째서 명망있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 《여운형》(변은진 지음, 역사공간 출간)'''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기획한 독립운동가 시리즈 교양 서적이다.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박병엽 지음, 선인 출간)'''

8.2. 영상물에서의 등장


1973년작 조긍하 감독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대배우 남궁원이 해당 인물을 맡았고, MBC 제1공화국의 여운형은 '''김길호'''가 맡아 제법 높은 싱크로율과 연기력으로 호평받았다. 그는 1989년작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KBS 드라마에선 원로배우 박병호가 여운형 전문 배우였다. 머리 벗겨진 것도 그렇고 의외로 비슷하게 생겼다. 그가 나온 것 중 대표적인 작품은 1985년작 대하드라마 <새벽>과 1990년작 <여명의 그날>, 1994년 2월 6~13일자 <다큐멘터리극장> 등이다. 다만 1982년작 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에선 문오장이 연기했다.
2002년 SBS 야인시대 1부에서는 성우 조동희가 맡았으며 조선중앙일보의 사장 역할로 초반에 잠깐 나왔다. 김두한이 유치장에 끌려갔을 때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후 2부에서는 배우 김윤형[32]이 맡았다. 건준에서의 활동과 좌우 합작 운동 등이 그대로 나오나, 이로 인해 김두한의 테러의 표적이 되고 마는 비운을 겪고, 이 와중에 김두한의 추격을 피하다가 급경사에서 굴러떨어지며 갈비뼈가 두 대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러나 김두한의 소행임을 확신한 워태커 소령이 병원에 김두한의 사진을 들고 와서 증언을 얻어내려 하였음에도 민족의 지도자라는 내가 철없는 젊은이들을 고발하겠느냐며 일부러 모르겠다고 증언하는 대인군자다운 모습도 보인다.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신구[33]가 역할을 맡았다. 여운형 vs 이승만으로 나오는 대표적 작품이므로 실질적인 주인공. 드라마 18화에서 1945년 2월 주인공 최운혁이 동북 항일 연군 잔존 세력의 일원으로써 광복군 국내 탈환 적전을 위해 조선건국동맹의 지도자 몽양 여운형을 만나는 것 부터 등장한다. 1937년 일본이 중일 전쟁을 일으킨 시점부터 패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국제 정세를 보는 시각이 현명하다. 감화력이 매우 대단해서, 해방 이후 서울로 내려와 대학 교수가 된 최운혁을 조선 인민당에 입당시켜 좌우 혼란기 좌우 합작 운동에 헌신하게 만든 인물로 나온다.조국 통일과 좌주합작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 인공 최운혁이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 초 까지 통일 정부 수립의 희망을 심어준 인물이기도......
2012년 KBS2 미니시리즈 각시탈에서는 동진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이 인물이 여운형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배우는 박성웅. 작중에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후에 중국에서 광복군을 이끌고 있는 양백선생과 손을 잡고 공동 투쟁을 하게 되는데, 양백이 여운형의 앙숙이었던 김구를 모티브로 했다는 걸 생각하면 다소 의미심장한 부분.
2018년 영화 박열에서는 잠깐 언급된다. 다름아닌 박열 패거리가 장덕수를 붙잡아다 "여운형 선생과 제국호텔에서 거시기했다고 자기들을 무시하는 거냐"며 돈을 내놓으라고 두들겨 패는(...) 장면이다.

8.3. 웹툰


EBS와 성남문화재단이 함께 주관한 "독립운동가 웹툰" 시리즈[34] 중 여운형 선생에 대한 웹툰이 있다. 2020년 8월 15일 광복절부터 동년 12월 28일까지 연재되었으며 제목은 '독립의 방법'이고 작가는 최훈. 제법 유익하고 재미있다. 보러 가기.

8.4. 기타


대탈출/백 투 더 경성편에서 등장한 독립청년단 회장인 여웅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9. 관련 단체



10. 관련 인물


  • 안창호: 여운형은 청년 시절에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비록 출신 지역이 달랐지만, 상해 임시 정부 시절에 여운형은 안창호를 따랐으며 도산이 국내에 압송된 뒤 옥바라지를 하였고 가출옥되자 마중을 나가고 도산이 죽을 때까지 함께했다.
  • 이승만: 해방 후에 라이벌이 되지만, 여운형과 이승만은 황성 기독교 청년회에서 같이 활동한적 있었다. 심지어 이승만과 찬송가를 합창한 모습까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성격 차이, 활동 무대 차이로 인해 친해질 수가 없었다. 특히 이승만과 안창호는 다툼이 심하였을 때 여운형은 안창호를 따랐고, 이승만은 자기 비서가 여운형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비서에게 안창호 똘마니와 어울려 다니지 말라는 식으로 꾸중했다고 한다.
  • 조만식: 여운형과 함께 안창호를 옥바라지 하였고, 건국 준비 위원회 활동을 했다.
  • 김규식: 상해 시절에 여운형과 만나고 형님 아우님 하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신한 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만큼 빠져서는 곤란하다. 여운형처럼 개조파 입장에 섰다가 임정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다만 여운형은 야구 경기 구경하다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된 후 국내 활동을 하였고, 김규식은 체포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다시 들어와 활동했다는 점에서 갈리게 되었다. 해방 후 여운형과 좌우 합작을 하였고, 여운형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한다.
  • 장건상: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으나 귀국 후, 임정을 탈퇴하고 민주주의 민족 전선에 가담한 이래 여운형과 정치 활동을 같이 했다. 사로당 창당과 근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근로 인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여운형 사후 근민당 총수가 됐다. 남북 협상 때는 김구, 김규식에게 수반급이니 북행은 위험하다며 만류하기도 했다. 남북 협상 중 우리가 근로 인민당 활동을 하는 것은 다 같이 행복하게 잘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폭력 노선을 추종하려는 게 아니라며 항의했다가 연금되기도 했다. 김두봉, 박헌영, 홍명희와의 인연으로 겨우 풀려나 귀환했다.
  • 조동호, 이만규: 여운형과 조동호는 중국으로 유학가기 전에 개성에 있는 이만규의 집에 머물렀는데 이때 셋은 서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고 평생 친구가 되었다. 이만규는 국어 학자이자 교육자로 여운형, 조동호와의 만남을 도원 3결에 빗대었으며 <<여운형 선생 투쟁사>>를 저술하기도 했고, 국내에서 국어와 고전 역사 부분 연구 활동을 주로 하였고 해방 후 근로 인민당 조직 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한편 조동호는 여운형과 평생을 가까이 한 동지로 금릉 대학(다만 영문학과가 아닌 중문학과), 상해 임시 정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민주주의 민족 전선, 근로 인민당의 루트를 거쳤다. 여운형 암살 이후로 이만규는 북으로 건너가 1급 사회 과학 고전 연구사가 되었고, 조동호는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하였다.
  • 조봉암: 여운형이 상해 협화 서국에서 일할 적에 그의 집에 찾아가서 조선 공산당이 제 3 인터내셔널의 승인을 얻어야하니 모스크바로 가는 여권을 교부해 달라 부탁했던 적 있고, 이것이 1차 조선 공산당 사건과 맞물려 물의를 일으켜 여운형이 국내에 압송된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가 출소 했을 때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로 마중 나갔고, 조봉암은 남로당,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활동하고 좌우 합작 운동을 지지하는 등 여운형과 밀접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박헌영 비판 서한이 우익 측의 선전용으로 사용되자 우익으로 전향하여 남한 단독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상 여운형의 정치적 후계자.
  • 박헌영: 여운형과 더불어 고려 공산당 멤버였고, 국내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여운형 집에 들러 여운형이 준 은수저를 받아가고 1946년 열린 여운형의 환갑잔치에도 참석하는 등 여운형과 친분이 있었으나 여운형이 공산당 활동을 민족 해방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다면 박헌영은 철저한 공산주의 이론가로, 해방 후에도 공산 혁명을 고집하면서 여운형과 노선을 달리하여 좌우 합작에 반대하고 라이벌이 되었다. 강준식의 소설에서는 좌우 합작 운동을 하는 여운형을 납치해 좌우 합작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나 여운형이 말을 듣지 않고 서로 대판 싸우고, 부하들을 시켜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버리는 장면도 나온다.
  • 고경흠: 조선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였고 여운형이 1940년도에 일본을 방문했을 적에 비서 역할을 했다. 해방 후 박헌영 중심의 3당 합당 개편과 남로당을 비판하고 근로 인민당에 참여하였으며 여운형의 경호원, 최측근 역할을 하였다. 여운형이 한지근에게 암살당했을 때 바로 옆에 타고 있었다. 월북하여 고위 정치인이 되었으나 종파 사건 때 숙청되었다.
  • 이기형: 해방 후 여운형을 찾아가 그와 가까이 지냈다. 타칭 여운형의 비서. 하지만 시인은 비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서 따라다녔을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여운형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여운형 평전을 저술하였고, 여운형 생가 터 비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92세인 2005년 열 번째 시집인 '절정의 노래'를 썼으며, 2013년 6월 13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이란: 여운형의 제자라고 하는데, 맞긴 맞는데 정확하게는 아버지 이임수 씨가 여운형과 친분이 있었다. 이임수는 관동 의원을 개업하는 한편, 텅스텐 광산을 운영하면서 여운형과 여운형을 따르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여운형은 관동 의원 2층에서 이란의 동창생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강연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란은 동창생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서 3년간 인천 소년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손치웅: 학생 시절에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청취하여 일본의 패전 상황을 여운형에게 보고하였고, 여운형의 밀서를 들고 평양에 가서 조만식에게 전달해주기도 하였다. 이만규의 《여운형투쟁사》에서 손웅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자세한 인터뷰 내용
  • 여운홍: 여운형의 친동생. 미국유학 후 김규식을 따라 파리 강화 회의에 참가했으나 실패, 구미 위원부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임정에 참여한다. 그뒤 형이 체포되어 송환되자 귀국, 장사와 식당 지배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는다. 하지만 해방 직전 형과 달리 친일 행위를 했다. 그뒤 건국 동맹, 건준에 참여하고 미군정 진주 때는 건준과 여운형의 대리인으로 하지 사령관을 면담, 거절당했다. 그 뒤 조봉암이 조선 공산당을 탈당하여 박헌영의 영향에 치명타를 줄때, 그는 근로 인민당을 탈당하여 여운형의 영향력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후에 자유당에 입당했다가 민주공화당으로 이동했다.
  • 김일성: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며 북한의 지도자들과도 합작해야 된다고 생각해 5번이나 38선을 넘나들며 김일성을 만났는데 이때의 김일성은 중도세력까지 끌어들이는 통일전선으로 남한 좌익의 세를 불려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박헌영보다는 여운형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경우가 많았다.[35] 실제로 여운형이 자식들 중 일부를 김일성에게 맡겼다는 사실만 봐도 둘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운형의 자식들은 북한에서 고위 관료를 지냈으며 김일성은 여운형 사후에도 여운형에 대해서 줄곧 높게 평가했다. 물론 여운형은 1947년에 암살당했기 때문에 이후의 김일성의 행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 김구: 현재는 둘의 지지자가 어느정도 겹치는 것과 달리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찬탁과 반탁에서 입장이 극명하게 갈린 것도 있었지만 그 전에도 김구는 여운형을 무지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임정 법통 문제 때문. 여운형은 한 때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만큼 임시정부에 법통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많은 독립운동 단체 중 하나로만 보았다. 김구는 그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에 대해 임시정부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고 귀국 후 여운형이 경교장으로 자신을 만나러 왔을 때 아예 만나주지도 않고 무시했을 정도다.
  • 김원봉: 해방 이전부터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등 인연이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여운형을 존경해 그의 정치적 노선을 줄곧 따랐고 테러 위협을 받는 여운형의 경호에 나서기도 했다.
[1] 또는 Yo Un-hyung[2] 29세손 '운(運)'자 항렬[3] 2005년 3월 1일 대통령장, 2008년 2월 21일 대한민국장 추서.[4] 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실제로 중앙선 신원역 근처에 여운형 선생의 생가가 있으며 향하는 길에 있는 굴다리에는 여운형 선생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5] 원래는 친했으나 후에 알력이 생김.[6] 당시 조선인민공화국은 박헌영이 주도하는 공산당 재선 세력이 임의로 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1945년 9월 만든 것으로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취임을 거부하였다.[7] 그를 싫어하던 우파는 물론이거니와 일본인이나 친일파도 사람 여운형은 좋게 평가하고 있다.[8] 김구와 김규식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된 1948년에야 뒤늦게 시도한다.[9] 냉정히 말해 김일성의 북쪽 세력이 여운형에게 공감하여 협업을 추진하려고 했어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90% 이상이다. 당시 국제 정세는 냉전화가 가속화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한반도는 그 특성상 냉전 구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었다.[10]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아주 정확한 평가였다.[11] 단, 당시 설문 조사 대상은 38도선 이남 한정.[12] 그는 여운형이 설립한 광동학교 학생이었고, 후에 가나안 농군 학교를 설립하여 농업 사회 발전에 공헌을 하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13] 주로 뉴라이트 계열에서 몽양 여운형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매도한다. 국정 교과서를 추진했던 교수 권희영은 몽양 여운형은 '''스탈린의 선택을 받아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라며 몽양 여운형을 색깔론으로 몰기까지 했다.[14] 제목은 夫婦座談會:二十年만에 新婚 氣分나신다는 呂運亨氏 夫妻. 물론 예나 지금이나 기사 제목은 낚시를 위한 떡밥이다.[15] 상하이 시절 그의 몸무게가 80kg이었다.[16] 옹호하는 측에서는 기생이라는 설을 들고, 우파 측이나 일본 측 자료에서는 미인계 차원에서 일본에서 보낸 밀정이라는 설도 나오곤 한다.[17] 이것도 패륜적이라고 대차게 까였다.[18] 이승만도 임영신 전 중앙대 총장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긴 하다. 독신이던 이승만이 유학생 임영신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하고 이후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는 썰, 둘이 모종의 관계였으나 결혼까진 가지 못했다는 썰,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에 임영신이 고백했으나 이승만이 거절했다는 썰 등등 자료에 따라서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이승만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한 이유는 없다. 그냥 잘 안풀린 남녀 관계 정도. 반면에 여운형은 누가 봐도 여자 관계는 막장이라서(...).[19] 1927년생. 본명 이필형(李弼炯).[20] 서울역(당시 경성역)그릴에서 보이로 시작해 열차식당 웨이터등을 거쳐 해방후 미장그릴이란 양식집을 열고 구 서울시청사에서 양식당을 운영한 사람이다.[21] 그럴 돈이 어디서 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몽양 평전"에서는 사실 옷을 살 돈이 없었는데 양장점 하는 친구가 돈 안 받고 그냥 대줬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비판자들에게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 한편 한국 양식 역사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는 이중일[20] 씨가 회고한 바로는 돈도 없는 양반이 서울역 그릴 주빈석에서 앉아서 노상 칼질을 하기에 이사해서 알아보니 당시 장안의 거부였던 배석환 씨가 1년 내내 서울역 그릴 주빈석을 예약해 놓다시피 대소 연회를 베풀었기 때문에 배 씨의 양해 아래 몽양 선생은 한쪽 자리를 거저 차지하고 큰 기침을 하면서 칼질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양복도 마찬가지였을 듯하다.[22] 출처는 《한국 현대사의 라이벌》 중 "여운형과 이승만" 부분.[23] 그런데 홈페이지에 올려진 그의 프로필을 보면 1914년 '''경남''' 금릉대에서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난징(南京)의 오류.[24]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거나 변형된 공산주의 사상을 주장하는 등, 해방 이후에 가장 많던 유형의 공산주의자라고 보기엔 어려운 사람이다. 해방 이후 초기에는 좌익들이 여운형에겐 호의적이었으나 이로인해 이후 여운형은 극좌/극우 모두의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되었다.[25] 영상에서 39분 44초 부분에서부터 들을 수 있다.[26] 기독교휴머니즘에 기반을 둔 중도좌파적 성향인 여운형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당시 한반도에서 일어난 좌우익의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 그로 인해 국민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사상을 포장하는 곡학아세를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27] 그는 소련, 중국, 미국 등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미소에 의해 분단되고 중국의 개입으로 눈앞에서 통일에 실패한 채 오늘날까지 주변 세력에게 고통받고 있는 실제 역사를 떠올리며 씁쓸해하는 의견도 많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틀린 식견은 아니다. 일본은 작은 섬나라였기에 제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자원·생산력·입지 모두가 필요했고, 따라서 반드시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해야만 했다. 그러나 미국이나 소련은 자원이든 인구든 영토든 충분한 강대국들인지라 '한반도'가 필요한게 아니라 세력균형의 일환으로 친미 내지는 친소를 유지해 줄 '저울추'가 필요할 뿐이다. 즉, 외교적 해결의 여지가 있는 영역이다. 중국도 당장 지금 미국G2를 두고 자웅을 겨루는 것처럼 한국을 내버려두면 뒤통수가 찝찝하긴 해도 일본처럼 패권국으로의 도약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거기다 여운형 시대의 중화민국은 옆 나라에 눈독들이기는커녕 분열된 자국부터 정리하고 발전시켜야 했던 처지였기도 하고.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에서 일본이 큰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독자적인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미국에 종속되는 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28] 그러나 여운형을 포함해서 이 말을 지킨 국내 운동가는 하나도 없다고 봐도 된다. 최종적인 승리자인 김일성과 이승만도 결국 이들의 협조 내지는 방관 하에서 자리를 굳혔다.[29] 기독교에서 터지는 부패 사건 관련 기사에 요즘도 가끔씩 댓글로 달리는 말이기도 한다.[30]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축지법 을 쓴다는 내용도 나와서 읽는 이에게 충격과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31] 이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좌파단체로 보고 해석한 것인데,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는 좌우익을 총망라한 단체다 따라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좌파단체로만 보는 시각은 사실왜곡이다.[32] 같은 작가가 쓴 드라마 태조왕건에서는 신라 말의 반란군 우두머리였던 기훤 역으로 나왔다.[33] 나름 멋있고 닮게 나왔다. [34] 독립 운동의 의의를 알리는 공공, 공익적 작품들이기에 성남문화재단의 요청에 따라 별도의 로그인 절차 없이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35] 물론 모든 부분에서 둘의 의견이 일치한건 아니었다. 일례로 여운형은 북한만의 토지개혁이 남북의 이질화를 심화시켜 분단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고 김일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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