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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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호는 벽초(碧初)[2] 이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알려진[3][4] 인물로 실제로 셋은 죽마고우였으나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5]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 이광수가 납북되자 신변을 보호해주었으며 이광수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2. 생애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출생으로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다니다가 한일합방이라는 비보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보고 왔으며[6]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굵직한 항일 운동들을 전개해 나간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할아버지 홍승목이 친일파[7] 였다는 거다.
우리에게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소설 《임꺽정》(林巨正)이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일제 치하에서 수감된 문인들 중 유일하게 옥중 집필이 허용된 작가가 홍명희였다. 홍명희가 수감된 이후 임꺽정 연재가 중단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조차 임꺽정에 맛들려서 제정신을 못차렸던 상황. 옥중에서 임꺽정 집필이 완료되면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먼저 읽고 조선일보에 넘겼다고 한다.
1928년 11월 21일 연재되기 시작된 <임꺽정>은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이 소설은 토속어 구사가 뛰어나서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 사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소설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연재 기간의 연장으로는 세계적으로 최고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훗날 손자 홍석중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었으므로 대를 이어서 창작한 셈이다. 홍석중 씨가 완결을 발표하기 전에는 미완성 작품이라서 홍명희가 북한에서 소설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었는데 홍석중의 발언에 따르면 홍명희는 '소설의 결말은 독자들의 생각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임꺽정을 완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밖에도 신간회 운동을 주도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위당 정인보와는 사돈 지간으로 홍명희의 며느리가 정인보의 차녀 정경완 씨이다. 정경완 씨는 광복 뒤 홍명희의 뒤를 따라 북한에 남았고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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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뒤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했고 여운형 암살 후 지도자가 되기도 했으나 환경과 리더십의 부족으로 실패했으며 결국 이후 월북했다. 월북 계기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한 제정당ㆍ사회단체 연석회의’에 김구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미군정 치하 남한의 경제 상태가 미군정의 개판인 통치력으로 인해 경제 정상화에 실패하자[8] 나쁜 상태인데 반해서 북한은 빠르게 경제 정상화에 성공해서 적어도 경제적으로 북한의 미래가 밝았다는 점도 큰 요인이기는 했을 것이다.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 정치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1명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북한 부총리에 선출되었고 1968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대부분 월북 인사들이 숙청당한 것에 비해 홍명희는 성공한 삶을 누렸다고 볼 수 있으며 김일성·김정일 부자와도 개인적으로 친하였는데 김일성은 홍명희를 존경하고 예우했다. 홍명희의 계모는 홍명희를 따라가지 않고 고향의 집을 지키다가 한국전쟁 중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는데 북한군이 후퇴하는 급박한 와중에도 시신의 수습을 명령했을 정도였다.
1968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사후 북한의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홍명희의 생가는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보전하고 있다.
3. 월북
한때 남한에서는 김일성과 친했던 점, 북한에서 죽을 때까지 잘 대우받은 점 때문에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1990년대 중순부터에서야 서서히 알려졌는데, 그의 이름을 재발굴하려던 국내 학자들도 홍명희와 더불어 이태준이라든지 여러 월북 작가와 더불어 꽤 여러가지 골치아픈 문제를 겪은 바 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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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직접 찍은[9] ''' 김일성과 홍명희. 1958년 국제노동자절 행사가 끝난 후 함께 뱃놀이를 하다가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북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홍명희 선생과 민족의 화해와 대단합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 동지'라고 하는데 56년 8월 종파사건 직후 이기에 벽초의 모습이 왠지 어색하다. 그런데 홍기문이 김덕홍에게[10] 귀띔한 바로는 꽤 추악한 이면이 있다 한다. 1956년 김성애의 비서로 일하던 홍명희의 딸인 홍귀원이 김일성과 간통을 하다가 덜컥 임신을 했는데 아버지를 볼 낯이 없다고 죄책감에 시름시름 앓으며 아버지를 끝내 찾아보지 못하다가 아이를 낳던 중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홍명희가 딸을 잃은 충격으로 맛이 가자 김일성이 홍명희를 위로해주겠다고 석암호수[11] 로 데리고 나갔을 때 찍은 사진이라는 것이다.
그의 아들 홍기문은 리조실록을 완역한 사람이자 북한 향가 연구의 대가인[12] 유명 국학자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조평통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손자인 석형은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함경북도당 책임비서를 역임하다 2011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형의 동생 석중은 <황진이>를 쓴 유명 소설가이며, 북한 작가로서는 최초로 2004년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4. 여담
소설 '임꺽정'과 홍명희 연구와 관련한 최고의 권위자인 상명대학교 국어교육과 강영주 교수가 2006년 '벽초 홍명희 평전'을 냈다. 현재까지 홍명희를 다룬 유일한 평전이다.
일화로 벽초가 어느날 집으로 오다가 그의 선산에서 몰래 벌목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벽초는 평소에 다니던 길을 내버려두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후에 이르기를, 그 사람 눈에 자신이 띄면 미안해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외에도 아들 홍기문과 함께 맞담배를 피운 개방적인 일화로도 유명하다.
야사에서는 이광수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홍명희는 이광수의 집 대문 앞에 음식상을 차리곤 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이광수가 나와서 연유를 묻자 홍명희는 "내 친구 춘원(이광수의 호)이 그만 죽고 말아서 이렇게 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소."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3]
한용운과도 사이가 돈독하여 이광수, 최린, 최남선 등의 창씨개명 소식을 듣자 한용운을 찾아가 "여보게, 만해. 이런 개같은 놈들을 봤는가?"하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한용운은 "이보게, 벽초. 그놈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닐세."라고 대답했고 무슨 소리냐고 따져묻는 홍명희에게 "개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 '''저놈들은 개만도 못한 놈들이 아닌가? 개가 자네 말을 들었으면 무척이나 섭섭해했을 걸세."'''라고 했다. 이에 벽초도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다.
한용운이 홍명희보다 9살이나 많음에도 저렇게 서로 격의가 없는 것이 좀 의아할 수도 있을텐데, 지금은 1, 2년 차이로도 형동생이 나뉘지만 당시에는 위아래로 10년 정도는 그냥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14] 그런데 홍명희의 장남 홍기문은 아버지와 열다섯 살 차이가 났기 때문에 자기 친구가 알고보니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 행사 때 아버지 친구이자 자기 친구인 사람이 오면 대하기가 꽤 곤란했다고 한다.
괴산군에서 그의 생가와 업적을 조명하려 하자 주민들이 월북한 빨갱이가 뭐가 위인이냐고 격렬히 반발하기도 했다.#
참고로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시인 김소월이 사위이다. 당시 홍명희와 김소월의 아버지는 친구였고 둘이 의견이 맞아 홍명희가 딸을 김소월네로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1] 23세 희(憙) 항렬.[2] 뜻은 "푸른빛(碧)의 말을 처음으로(初) 배운 한국인". 에스페란토를 상징하는 색이 초록색이라 그렇다.[3] 이 3대 천재라는 것은 대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 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 등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였고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 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단순히 명칭만 보고 "왜 세종대왕이나 정약용 대신에 이런 인물들이 있느냐"는 비판을 하면 곤란하다.[4] 이 3대 천재라는 말은 전부 홍명희 관련으로 나왔다. 현대에 이 언급을 한 것도 홍명희 평전이었고 조선삼재 이야기도 홍명희와 현상윤이 나눈 1940년대 인터뷰에서 나왔다.[5] 사실 홍명희도 친일 의혹이 있다. 일제 연간에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와 1945년 언론보국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건 당시 지도층 인사들의 인칭 도용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는데 이런 사례는 조만식, 안재홍, 여운형 같은 사람들도 당한 바 있다.[6] 이때 이광수와 친해졌는데 홍명희는 이광수에게 톨스토이의 책을 권했다고 한다.[7] 사실 이것도 홍승목의 시절에 친일파라 함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외교적 파트너로써의 친러, 친청, 친일의 의미가 강하다고 보면 된다.[8] 경제 정상화는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 이루어졌지만 얼마 안가서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초토화되었고 이러한 후유증을 극복할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9] 김정일은 사진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관련 이론에 대한 책을 직접 쓰기도 했다.[10] 북한의 군 출신 정치가로 황장엽과 같이 망명한 탈북인사.[11]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저수지, 지금은 견룡저수지라고 불린다고 한다.[12] 북한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향가 전체를 해독한 사람이다. 어찌나 해독을 잘 했는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향가를 해독한 양주동 선생도 홍기문의 향가 해독을 칭찬했었다고.[13]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다. 최남선과 정인보, 최남선과 정인보의 스승인 승려 석전 박한영, 만해 한용운 간에도 있다. 최남선이 변절한 뒤 정인보(또는 스승 박한영, 또는 만해 한용운) 를 만나자 "나에게 최남선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오."하고 헤어졌다는 야사.[14] 年長以倍(연장이배) 則父事之(즉부사지) - 나이가 배나 더 많은 사람에게는 아버지 섬기듯 하고, 十年以長(십년이장) 則兄事之(즉형사지) - 십년이 더 많으면 형님 섬기듯 하며, 五年以長(오년이장) 則肩隨之(즉견수지) - 오년이 더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되 조금 뒤서서 따라간다. 群居五人(군거오인) 則長者必異席(즉장자필이석) - 다섯 사람이 한데 모여 있을 때는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반드시 자리를 따로 하는 것이다. - 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