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교도사단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육군의 기갑사단이다.
전선이 밀리고 인적 자원의 감소로 인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1943년, 독일 각지의 기갑학교에서 부대를 모아 편성한 교도사단이다.
당시 독일의 상황으로 볼 때 육군 최강의 전투력으로 평가되었다. 240여대 가량의 전차 및 돌격포, 사단 예하 보병연대 4개 장갑척탄병 대대가 전원 기계화로 완편된 독일 국방군 전체를 통틀어 보기 드문 정예 전력이었다. 당시 독일군의 정예부대는 대부분 무장친위대 부대들이었고, 육군의 정예부대라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외엔 거의 없었기 때문.
하지만 이 부대의 역사를 보면 제공권을 상실한 상황하에서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어 패주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강력한 기갑전력인 것은 맞지만 기갑교도사단의 출현 자체가 독일의 패망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기갑교도사단의 전투병들은 대부분이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실전을 거치고 훈장까지 받은 역전의 용사들이었고, 새로이 편성될 기갑부대의 교육을 위해 본토에 남아있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로 사단을 꾸렸으니 전투력이야 뛰어나겠지만 새로운 기갑부대를 훈련시킬 고급 교관 인적 자원들이 다수 사라져 버렸다. 사실 이 이유 때문에 다른 국가에선 이렇게 훈련 임무를 맡을 위치와 능력을 가진 교관, 조교들을 전투부대로 편성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43년에서 44년이면 히틀러 본인이 전군의 지휘권을 쥐고 있었고 기갑교도사단은 전략예비대로 히틀러가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투입이 안되는 탓에 정작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한 첫날에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등 뻘짓이 많았다.
기갑교도사단(機甲敎徒師團, Panzer-Lehr-Division)은 전선이 밀리고 인적 자원의 감소로 인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1943년, 독일 각지의 기갑학교에서 부대를 모아 편성한 교도사단이다.
당시 독일의 상황으로 볼 때 육군 최강의 전투력으로 평가되었다. 240여대 가량의 전차 및 돌격포, 사단 예하 보병연대 4개 장갑척탄병 대대가 전원 기계화로 완편된 독일 국방군 전체를 통틀어 보기 드문 정예 전력이었다. 당시 독일군의 정예부대는 대부분 무장친위대 부대들이었고, 육군의 정예부대라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외엔 거의 없었기 때문.
하지만 이 부대의 역사를 보면 제공권을 상실한 상황하에서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어 패주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강력한 기갑전력인 것은 맞지만 기갑교도사단의 출현 자체가 독일의 패망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기갑교도사단의 전투병들은 대부분이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실전을 거치고 훈장까지 받은 역전의 용사들이었고, 새로이 편성될 기갑부대의 교육을 위해 본토에 남아있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로 사단을 꾸렸으니 전투력이야 뛰어나겠지만 새로운 기갑부대를 훈련시킬 고급 교관 인적 자원들이 다수 사라져 버렸다. 사실 이 이유 때문에 다른 국가에선 이렇게 훈련 임무를 맡을 위치와 능력을 가진 교관, 조교들을 전투부대로 편성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43년에서 44년이면 히틀러 본인이 전군의 지휘권을 쥐고 있었고 기갑교도사단은 전략예비대로 히틀러가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투입이 안되는 탓에 정작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한 첫날에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등 뻘짓이 많았다.
[1] 이때 미하일 비트만의 빌레르-보카주 전투로 한 숨 돌리는데에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