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친위대

 



1. 개요
2. 창설
3. 확대와 질 저하
4. 전쟁범죄
5. 몰락
6. 전후
7. 무장친위대 소속 부대


1. 개요


Waffen Schutzstaffel (바펜 슈츠슈타펠), 슈츠슈타펠 산하의 전투부대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주요 군사 조직 중 하나다.
행정적으로는 SS 소속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독일 국방군(특히 육군)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전투 효율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나치 돌격대 시절처럼 SS가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견제책으로서, 무장SS만은 국방군최고사령부(OKW)의 전투 지휘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2. 창설


1933년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는 전통적인 우익의 본산이었던 독일 국방군육군 장교단을 항상 경계하였다. 특히 육군의 주류였던 프로이센 융커 귀족 출신 장교들의 쿠데타[1]를 우려해서, 유사시에 오직 히틀러 자신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군사집단을 만들고자 하였다.[2]
이에 따라 자신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슈츠슈타펠(SS)을 키워 독일 국방군을 견제할려는 목적으로 SS 산하에 전투부대인 "SS 페어퓌궁스트루펜(Schutzstaffel Verfügungstruppen)"을 창설했다. 그리고 1935년부터 도이칠란트/게르마니아/데어 퓌러 연대를 창설(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 3개 연대를 모아서 다스 라이히 사단을 창설했다.)하고 SS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친위대 장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전의 전통적인 친위대들은 일반친위대(Algemeine Schutzstaffel)라고 구분되었다. 흔히 알려진 무장친위대(Waffen SS)의 호칭은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에 통용되기 시작한 명칭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친위대 전투부대가 만들어지는 이념적 배경이 독일 좌파지식인들이 찬양하던 "민중을 탄압하는 상비군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 시민군" 개념이라는 것이다. 돌격대가 국방군을 흡수하려는 것도 바로 이 시민군 개념에서 나온 것이고, 한때 돌격대에 소속되어 있던 하인리히 힘러도 당연히 이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친위대 전투부대를 만든 것이다. 친위대 전투부대의 초기 주임무는 바로 국방군의 쿠데타를 진압하는 것이다. 이는 독일 전국에서 나치 이념에 충실하다고 인정되어 선발된 장병들로 구성된 육군 내의 나치당 전투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도 마찬가지였다.[3]

3. 확대와 질 저하


무장 SS 부대는 전쟁이 장기화 됨에 따라 급속도로 확충되었는데 초창기에는 전투경험이나 육군 같은 훈련교육 체계가 잡혀있지 않던 덕분에 전선에서 도망친다든가 적은 규모의 적과 싸우면서도 심한 뻘짓을 보여 욕을 먹기도 했다. 제1SS기갑사단(LSSAH)의 경우 많은 피해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졸전에 실망한 히틀러가 베를린으로 돌아와야 할 부대를 프라하로 보내는 바람에 분위기가 좋지 않아져서 1939년 성탄절에는 히틀러가 직접 프라하로 달려가서 성탄절 연회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친위대 전투부대 시절부터 편성된 고참이자 비킹 사단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올린 게르마니아 연대의 경우 폴란드전 당시 시가전에서 폴란드군의 역습에 밀리는 등 기대에 영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힘러의 적극 지원하에 최신장비와 전투경험이 있는 인원들이 계속 배속됨에 따라 점점 전투력이 올라간다. 특히, 초창기 3개 무장 SS 사단인 '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들은 최고의 인력, 장비 지원과 사망자가 속출하는 혹독한 실전훈련을 거듭하여 막강한 전투력을 쌓은 덕택에 전쟁 중후반쯤 되면 거의 전략예비대 성격으로 운용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의 전과를 다른 SS 사단들도 거둔 것으로 판단하기 쉬운데 문제는 전쟁이 생각보다 대규모로 길어졌다는데 있었다.
병력소모가 급속도로 올라가고 전장은 날이 갈수록 넓어지자 무장 SS도 꾸준히 확장된다. 그러나 갈수록 병력부족이 심각해져 결국 SS의 인종적 우월성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점령지인 프랑스나 동유럽 등지에서도 독일인이 피가 조금 섞여있으면 징집하고, 일반 육군부대도 전속요청을 통해 SS로 만드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독소전쟁 개전 후에는 그마저도 극심하게 소모가 올라가, 나중에는 영국 등의 식민지배에 반발하는 아프리카인, 영국군 포로, 심지어는 소련군 포로조차 원하는 사람이면 SS로 받아들였다. 영화 레지스탕스에서도 SS 영국의용군에 속한 중사가 꽤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한다.
게다가 중요한 무장 SS 전투부대 중 하나였던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는 말 그대로 '히틀러 소년단' 출신의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전투부대였던 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말기에는 사단이나 군단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실제 규모는 수백명인 부대도 많아서 실제로 꾸준히 전투력을 보여준 사단은 초창기의 3개 사단, 잘 봐줘야 제12SS기갑사단까지의 11개 사단 정도다.[4][5] 대전 초 프랑스 전선에서 잡힌 영국군 포로로만 이루어진 부대, 영국 자유군단의 병력 수는 백여명을 간신히 넘겼다.
한편 독소전 발발 전 지원한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SS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그 잘난 이데올로기조차 버리고 무슬림들까지 받아들였으며 이런 식으로 급하게 징집한 병력이 점점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6]
이때 다민족 부대들을 만들게 된 공식적인 이유에 하인리히 히믈러의 개인적인 믿음의 영향도 있었는데, 이 양반은 유럽에 퍼져있는 여러 민족들 피에 사실 아리안 핏줄이 어느정도 있다는 우생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들은 소위 하위 아리안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이 영혼을 끄집어내 다시 순수 아리안 영혼으로 만들기 위해선 이 하위 아리안 핏줄들을 끌여들여 전쟁에 싸워 죽도록 해야 된다고 믿은것이다. 즉, 나치 이데올로기에 어느정도 기반을 두고 만든 부대들이긴 하다. 물론 현실은 이러한 비과학적인 우생학 궤변을 붙이든 말든 초창기의 숙련된 병력에 비해 낮은 기준의 병력을 마구 모으기 시작해 전투력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명성과는 달리 다른 국방군과 별반 다를바 없거나 이름 뿐인 사단들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힘러 자신도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 공공연히 충성을 밝혔지만, 사실 전쟁 말기에는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기라고 뒤통수를 치는가 하면 요제프 디트리히가 자신보다 히틀러에 대해서 더 충성함을 알고 멀찌감치 전선으로 쫓아보내기는 등 정치적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어, 이는 전쟁에서의 여러 폐단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무장 집단이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육군 사단에 비해 각 부대 지휘관들의 사병집단적 요소가 강해져갔다. 한때 초창기부터 편성되어 높은 전과를 올렸던 3대 사단들도 최초 사단장인 요제프 디트리히/파울 하우서/테오도어 아이케 장군영지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전쟁 초반에는 나름대로 육군 같은 타군의 눈치를 보던 친위대가 전쟁 말기에 이르면서 제멋대로 행동해서 국방군과의 갈등이 더 깊어졌다. 원래 친위대가 창설된 초창기에는 히틀러가 친위대를 돌격대같이 비대한 크기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고, 독일군의 반발 때문에 각종 중장비 공급에서 친위대가 육군에 우선권이 밀려서 노획장비를 적지 않게 운용해야 했다. 초창기 3개 사단 중에서도 2SS, 3SS기갑사단은 T-34를 1943년 시점에도 20대 이상 운용(2SS기갑사단은 아예 대대급)하고 있었을 정도로 장비 지급에 밀렸다.
그러나 1943년 후반기에 이르면 독일 육군의 위상 하락과 함께 히틀러의 지원과 힘러의 빽으로 무장 SS는 최신예 무기를 육군보다 더 먼저, 더 많이 지급받는데다가 이들이 아돌프 히틀러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면서 이들에 대한 육군의 평가는 "건방진데다가 인간 같지 않은 양아치들이 총통 빽 믿고 잘난체한다"로 굳어졌다. 실제로 전쟁 당시 무장 SS와 육군 사이에서는 항상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했다고 한다. 그나마 전쟁이 잘 풀리던 초중반에는 조용한 편이지만 서로 상대방을 깔보는 경향은 현저했었다. 전 무장친위대 중사였던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회고에 의하면, 데미얀스크 포위전과 하르코프 전투에서 무장친위대와 육군이 서로 욕을 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45년 전쟁이 후반으로 치닫으면서 독일 국력 자체가 누구에게 특별대우를 해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부대를 해체하고 소속에 상관 없이 재편성하는 과정이 지속되면서 앞서 말한 분위기도 사라지게 된다.
전쟁 중반에도 무장친위대의 특별대우에 많은 장병들이 불만을 품기에 이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히틀러도 이 문제에 관해서 매우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으나 힘러 때문에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나중에 힘러와 만난 오토 카리우스 육군 기갑중위도 이러한 문제에 불만을 품고 이의를 제기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4. 전쟁범죄


특히 무장친위대 산하의 36 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카민스키 여단은 동유럽에서 학살, 강간 등 온갖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것으로 악명높다.[7] 현대 네오 나치들 조차 이들의 만행에 대해 언급을 안할 정도이다.
동부전선 초기에는 의외로 진짜 전투부대는 주로 전투에 집중했고 전쟁범죄 면도 비교적 덜 했다고 한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독일군은 진격 속도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1941년 키예프에서 일어난 바비야르 학살을 보더라도 언제까지나 비교적 덜 했다는 주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일군이 계속 승리하면서 이런 부대가 새 전장으로 가고 그 자리를 중앙에서 파견나온 사람이 차지하며 36 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 카민스키 여단 같은 놈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바르샤바 봉기에서의 폴란드인 학살,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등의 만행들을 저지르면서 지옥도를 그렸다.
토텐코프 사단 같은 경우 프랑스 침공 당시부터 포로학살을 밥 먹듯 했으며 상기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은 여러 무장친위대 사단 중에서도 최정예 초엘리트 다스라이히가 저지른 범죄이다.[8]

5. 몰락


이렇게 아돌프 히틀러를 위해서라면 영혼까지 팔 만큼 충성을 다했지만 1945년 3월 봄의 새싹 작전이 실패하자 분노한 히틀러[9]는 무장 SS 사단들에게 사단 이름이 적힌 소매 띠를 떼라고 명령했고 이는 히틀러를 따르던 무장 SS 대원들에게 적잖은 치욕을 가져왔다. 요제프 디트리히 같은 이들은 이에 분노해서 반납한 수장을 요강에 담아서 보내는 식으로 항의를 하기도 했다.[10]
그러나 이미 기운 전황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고 막장으로 치닫던 상황이었기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게다가 이미 무장친위대에 대해 널리 알게 된 연합군에게는 설령 투항하거나 포로가 되더라도 어떻게 될지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종전이 된 5월 9일 이후에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련군과 전투를 벌인 사단들도 있었을 정도로 악착같이 싸웠다. 예시로 베를린 전투 당시 노르트란트 사단 소속 1개 소대의 무장 SS 대원들은 제국의사당을 향한 소련군 1개 연대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12시간이 넘도록 저지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6. 전후


현재 무장친위대는 법률적으로 군대도, 의용군공무원도 아닌 순수한 범죄단체로 취급되고 있다.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는 별개이므로 국제법상으로는 무장친위대는 군대가 아니라 '무장한 민간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만 나치 독일의 그 어떤 법률도 나치당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정의해두지 않았으며 당연히 나치당의 일부인 친위대나 무장친위대도 군대와는 달리 명확한 법률적 지위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법리적으로는) 준군사조직으로 보기에도 부적합하고 법적인 지위는 엄밀히 말하면 히틀러의 사병이라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실제로는 군대의 체계를 모두 갖춘 준군사조직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비준 여부와 관계없이 관습법으로 적용되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교전권이 있는 의용병 대접 정도는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SS 본인들이 바로 그 제네바 협약에서 규정하는 중대한 위반 행위(grave breaches)를 횟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위반한 덕분에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 단순 전쟁범죄 조직으로 분류되었다. 게다가 전쟁에 나선 사유도 방어전이 아니라 타국을 침략하기 위한 것이고, 이들이 한 각종 만행으로 인하여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무장친위대를 범죄단체로 정의하고 실제 전쟁 범죄에 가담하여 적극 임무를 수행한 장병들을 단죄하였다. 따라서 소련군, 미군과 점령지인들로부터 보복성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SS 포로 수용소에서 테러사보타주가 만연했는데도 연합군은 이걸 상당히 오랜 기간 무시하다가 너무 심각하다 싶자 그제서야 관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전후 SS포로들의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 유겐트 소속의 아이들이 이불 1장이 없어서 얼어죽어가는데도 연합군 헌병들은 비웃으며 지나갈 정도라고 했으니...[11] 그나마 미군이나 영국군에게 잡힌 SS 포로들은 그래도 공정하게 재판하고 나서 처벌해야 한다고 봤는지 포로 대우 자체는 해줬지만[12] 소련군에게 잡힌 SS 포로들은 전후 NKVD가 군인들의 복수 행각을 막고자 군을 직접 통제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자신들의 손으로 인해 만들어진 악마들 사이로 떨어진 셈.[13]
당시 참전자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렇지 않아도 독일군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SS라면 더욱 험한 꼴을 봤다는 증언들이 많다. 한 소련군 출신 참전자의 수기를 보면 전투가 끝난 후 SS 포로들만 모아둔 뒤 쏴 죽였다는 기록도 있으며 미군 조차도 SS 포로들만 따로 모아서 만든 포로수용소를 운영하며 가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소련군 못지않게 연합군 측에서는 특히 자유 프랑스군과 자유 폴란드군이 이들을 심하게 대우했는데 심지어 독일군으로 전향한 프랑스 식민지 출신 병사들에게도 죽는 게 더 나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막장으로 대하고 모욕을 주었다. 물론 전후 프랑스는 이를 부정하며 독일의 선전이라 주장하고 있다.
오토 카리우스도 자신이 미군 부대와 항복교섭을 하러 갔는데(이때 오토 카리우스는 서부전선 독일 B집단군이 포위되어 항복했던 그 루르 지역에 있었고 그의 부대도 결국 항복했다.) SS는 모두 피에 굶주린 살인마들이라고 생각하던 미군들이 육군 전차 승무원복 칼라의 해골 마크[14]를 보고 경계하는 태도를 보여서 '우리 육군 기갑 병과는 SS가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해골 마크를 부대 표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라고 해명해야 했다.[15] 말메디 학살 이후 SS에 대한 증오감정은 서부전선에서 극도로 팽배했기 때문에 SS로 판단되면 협상이고 뭐고 사살당하거나 험한 꼴 볼 가능성이 높았다. 무장친위대 부대원들이 괜히 전쟁 끝나고 나서야 대거 항복한 것이 아니다.
독일 정부로부터도 국방군과 똑같이 군인연금을 납부했지만 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범죄가 없었는데도 전후에 일시적으로나마 연금수혜를 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들을 받았다. 그나마 나중에 연금혜택은 전범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되면[16] 인정되긴 했지만 그래봐야 사실상 국방군이나 SS나 다를 거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동정론이 일어난 결과일 뿐.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들이 전쟁 중에 세운 전공은 국방군의 기록과 달리 현재 독일군의 전공으로 인정되지 않는다.[17] 예를 들면 미하엘 비트만의 경우 그의 소속이 SS인 관계로 국방군 출신이던 오토 카리우스의 기록과 달리 그의 전공은 공식적으로는 없는 것 취급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강제로 SS에 편입된 전 국방군 출신이나 전쟁 말기 강제 징집된 자들인데, 즉 자의에 따라 SS에 들어가지 않은 군인들인데 이들은 전공이 인정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소속만 SS지 사실상 독일 국방군이나 다름없는 자들이거나 아니면 강제 징집되어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끌려간 이들이기 때문에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사실상 흑역사 취급, 이런 것을 인정하면 독일 정부도 이들을 군인으로 인정하는 셈이 되는데 한마디로 제3제국 정권의 사병들이 독일군의 일원이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것. 즉 군대가 국민이 아닌 정권을 위해 충성하는 게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어쨌건 정상적인 국민국가를 자부하는 독일 입장에서는 과거사 부정 여부와는 무관하게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독일이 과거사 청산을 철저히 한다는 근거로 쓰이지만 사실 독일의 후대 정권이 일본처럼 구 기득권층으로 구성되었더라도 SS에 대한 태도는 동일했을 거라는 게 중론. 전후에 파울 하우서, 요제프 디트리히, 빌헬름 비트리히 등이 만든 무장친위대의 전우회HIAG가 서독 정부의 지속적 감시에 의해 해체된 것을 본다면 이는 당연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얼마 전 독일에서 아직까지 살아있는 SS 참전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그당시 그들이 여러 만행을 저지른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반대로 히틀러와 나치당에 대해선 별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아직도 히틀러와 나치당을 미화하거나 추종하는 것은 아니긴 하다. 애초에 SS 출신자들이 다 전쟁범죄자나 광신 추종자는 아니었고, 인간을 포기한 자들도 있지만 그냥 좀 더 특별한 엘리트 처우를 기대하고 입대한 자들도 많았다. 뒤늦은 연금 수혜도 실제로는 후자의 SS대원들에 대한 동정여론 때문이다.[18]
사실 이러한 미온적인 태도는 친위대 참전자들 뿐만 아니라 육군, 해군, 공군의 국방군 출신들도 이와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그들이 아직도 히틀러와 나치스에 대해서 향수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보단 전후에 참전자들과 그 시대 자체를 부정하는 독일 사회에 대한 반발심에서 촉발된 현상이란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이건 붙잡혀 오는 고령의 나치 전범들 대부분이 해당된다. 오히려 주요 전범 중 1명이었던 한스 프랑크는 사형당하기 전 용서를 빌었지만 정작 직접 학살을 담당한 나치 전범들은 잡혀온 뒤에도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거나 유대인 학살은 당대에는 당연한 일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죽을 때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한때 소련이 '미국이 일부러 무장친위대를 살려서 써먹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급하게 참전하느라 켈로부대에게 따로 군복을 만들어 줄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뭔가 주긴 줘야겠다 싶어서 노획한 피복들을 쟁여둔 창고를 뒤적이다 발견한, 무장친위대용 위장전투복 더미를 발견하고 꺼내서 지급한 것이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모르는 군복을 봤으니 자료를 수집해서 소련에 문의를 했는데, 소련군은 단박에 이 물건이 지난 동부전선의 무장친위대 군복임을 알아챘다. 상당수의 피복은 부착물까지 일부 그대로 달려 있었다. 당연히 미국이 독일군을 한국 전선에 동원했다고 항의가 들어갔고, 나중에 켈로부대라는 게 밝혀진 뒤에는 문제삼지 않았다. [19]

7. 무장친위대 소속 부대


무장친위대/부대일람 문서 참조.

[1] 실제 1940년 프랑스 침공 직전까지 여러번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 그리고 대전 말기 패색이 짙어지자 쿠데타를 준비했던 멤버들이 다시 결집해서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를 일으킨다.[2] 동시에 육군 내부에서 융커 출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민 출신 장교들을 고속진급 시켜서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인맥을 형성하려 애썼다. 이 계열의 1번주자가 바로 에르빈 롬멜이다. 같은 국방군이라도 해군은 워낙 수가 적어 정치적인 영향력이 미비한데다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 우려할 필요가 없었고, 공군은 그 총수가 히틀러 다음 가는 2인자 헤르만 괴링이니만큼 충성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3] 무장친위대와 그로스도이칠란트의 훈련은 매 기수마다 사망자가 1~4명에 부상자가 수십명이 나올만큼 혹독했다.[4] 정확한 사단 명을 적어보자면 제1 장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제2 장갑사단 다스라이히,제3 장갑사단 토텐코프 제5장갑사단 비킹.이쪽 4개는 그로스도이칠란트와 더불어 대전기간 최고의 사단이며 제4 경찰척탄사단 폴리짜이 제6 산악사단 노르트 제8 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 제9 장갑사단 호엔슈타우펜 제10 장갑사단 프룬쯔베르크 제 11 의용척탄사단 노르트란드 제12 장갑사단 히틀러 유겐트 정도가 정예 SS 라 부를만하다.[5] 제7 의용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은 전쟁범죄가 심각해서 제외했다.토텐코프,폴리짜이 이상이였다.오죽하면 가는곳마다 시체가 널부러져있다는 말이 나오겠는가.[6] 이들은 정예라는 부심에 가득하던 당시의 기존 무장친위대 병력들의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전후에 상황이 바뀌어 하우서 등 무장친위대 장성들은 무장친위대 무오설을 주장하는 회고록들을 간행하면서 이걸 "무장친위대는 다민족 반공의용군"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써먹었다.[7] 물론 일반친위대도 만행이라면 이들에게 뒤지지 않아서 디를레방어, 카민스키 여단을 뛰어넘는 아인자츠그루펜이 일반친위대 산하에 있었다.[8] 추가적으로 당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의 주범이자 다스라이히의 사단장인 하이츠 라메르딩은 토텐코프 투울레연대를 지위했던 전력이 있으며 이들 부대는 항복한 소련군들을 자주 학살했다.이랬던 그는 전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편히 여생을 마감했다.이로 미루어보건데 초기 SS의 악명과 전과에 기여한 장교 및 장성들은 대부분 처벌을 받지 않거나 구금당하는 정도의 형량으로 끝났을것이며 유명한 친위대 장교,장성들의 이름들을 검색해보면 대부분 천수를 누린것을 알수있다.물론 영국군 포로를 학살했던 프리츠 크뇌흘라인 SS중령같은 경우는 학살 상대가 상대인지라 교수형에 처해졌다.무장친위대 뿐만이 아니라 동부전선에서 학살을 행한 국방군들은 아예 처벌을 안받은 이들이 거의 99%이고 아인자츠크루펜도 4명만 사형당했으니 솔직히 할 말 없다.[9] 사실 현지 사수명령을 씹었다는 것에 더 분노했다.[10] 사실 이는 요식행위였으므로 디트리히 등 일부만 대표로 수장을 떼어 반납했고 나머지 장병들은 대개 그냥 수장을 달고 다녔으며 반납한 이들도 히틀러 눈 밖에선 잘만 달고 다녔다.[11] 케바케라고 영미군 중엔 유겐트 소속이거나 나이가 어린 포로들은 '범죄자'라기보다는 잘못된 길에 들어선 교정해야할 청소년으로 보아 가혹하게 처우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2] 다만 이것도 케바케로,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발견하고 목격한 영국군 부대 중 일부는 그 이후로 무장친위대의 포로를 받지 않았다.[13] 여기서 씁쓸한 부분은 영관, 장성급 장교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렸다. 구글에 유명한 엘리트 대원들 검색해 보면 대부분 잘 살다갔다.[14] SS 전차병 승무원복은 해골 마크 대신 SS 문장을 달았고, 육군 전차병과 같은 검은색 군복이지만 카라 형태가 조금 달랐다.[15] 마켄젠원수의 복장에서 알 수 있듯이 프로이센의 후사르가 해골마크와 검정 제복으로 유명했고, 이를 기병의 임무를 승계한 병과인 독일의 전차승무원들이 그대로 계승했었다.[16] 무장친위대 가입 자체만으로는 전범 취급을 받지 않았다.[17] 다만 국방군의 전공도 단순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인정할 뿐 명예같은 것으로 인정해주진 않는다. 받았던 훈장들을 계속 소지/패용하는 정도는 인정됐는데, 하켄크로이츠가 들어간 훈장은 1957년부터 제정된 법령에 따라 반납한 인원에 한해 하켄크로이츠를 제거한 동일한 형태의 훈장으로 바꿔 주었다.[18] 한마디 더 적어보자면 SS는 나치당 가입이 의무가 아니였다.물론 SS 연대지도자(대령급) 이상의 계급,즉 장성급 계급들은 대부분 가입되어있다.[19] 반대로 한국 측에서는 독일 육군 원수인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소련 편에 서서 북한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적이 있다. 다행히 둘 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사실 패전한 추축국의 재무장, 전쟁참여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몹시 민감한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