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마리 안 브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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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llaume Marie Anne Brune (1763.3.13 ~ 1815.8.2)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브륀 백작.[1]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군인이 되고자 한 사람이 아니었다.
코레제의 브리브라가야르드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브륀은 파리로 상경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파리에서 변호사인 아버지처럼 사법을 공부했고, 나중에는 정치 언론인이 되었다.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파리의 정치결사인 코르들리에[2] 에 입단했고, 거기서 조르주 당통과 친해지게 되었다. 1793년 여단장에 올랐고, 1795년 10월 5일에 왕당파 반란군이 들고 일어난 방데마르의 13일 반란을 진압했다.
1796년에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쟁에 참가했고, 그 후 사단장이 되었다. 그는 1798년에 군대를 지휘하여 스위스를 점령, 헬베티아 공화국을 세우게 했다. 이듬해 1799년에는 프랑스와 자매공화국 바타비아 공화국 연합군의 장군으로써 암스테르담 방어전을 지휘했고, 카스트리쿰 전투에서 이곳을 쳐들어 온 영국-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1799~1801년 사이 진행된 제2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브륀은 포촐로의 전투에서 승리에 공헌했다.
1802년 나폴레옹에 의해 오스만 제국에 대사로 파견되었고, 그곳에 나가 있던 2년 동안 프랑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관계를 맺게 하는데 주력했다.
2년 뒤 1804년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브륀은 나폴레옹으로부터 원수로 임명되었고, 제4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싸움에서 브륀은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로 향했다. 그곳에서 원하던 목적은 성취했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레옹의 의심을 받게 되고, 그 후 다시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되었다. 브륀은 골수 공화주의자였고, 그 때문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 어느정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안그래도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판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 4세와 만난 일이 걸렸고, 그걸 이유로 결국 잘린 것.
...일 줄 알았으나 1815년 백일 천하 당시 바 강 유역 방면군의 사령관을 맡게 되었고, 오스트리아군에 맞서 남프랑스를 방어했다. 그렇지만 결국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고 다시 퇴위당하자 그도 항복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같은 해, 제2차 백색테러로 인해 브륀은 왕당파 암살자에 의해 8월 2일 아비뇽에서 살해당했다. 그를 살해한 왕당파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론 강에 던졌지만 나중에 발견되어 수습되어진 뒤 생주스트소바주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