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성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관성은 1890년생이며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진남포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뒤 장명환, 이춘산(李春山) 등과 함께 북간도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한족회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한족회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한족회 내부의 소장파인 현정경, 현익철, 이시열(李時說)·이호원(李浩源)·김석선(金錫善)·홍원경(洪元京) 등과 함께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였다.
1920년 7월, 김관성은 박민희(朴敏熙)[1] , 이명환(李明煥) 등과 함께 평안남북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고, 1921년 11월 초에는 단장 이시열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한 결사모험대원 중 박정호(朴正鎬)·한일(韓一) 두 명과 함께 대한독립단의 궁인성과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평양의 자산가인 김진근(金鎭根)의 집에서 많은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11월 초순에는 이명환과 함께 결사모험대를 조직하여, 평양 시내 계리(鷄里) 북 금융조합 숙직실 안에 연락교통기관을 두고 지방조직, 군자금 모금 등을 전개했다.
1920년 12월에는 평안남도 경찰의 습격을 받아 교전 끝에 동지인 박문학은 전사하고 김관성은 부상을 입고 탈출하였다. 1922년 8월 30일 남만주 환인현 마권자에서 통군부(統軍府) 대표 등 71명이 참석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자, 김관성도 여기에 참여하여 검무감(檢務監)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정이형의 회고록 <나의 망명추억기>에 따르면, 어느날 전덕원이 이끄는 독립단 간부였던 김시영 소대장이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에 통의부 지도부는 그를 제대시키고 그 여자와 다시 관계하지 못하게 하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시켰다. 이후 김시영은 부대를 떠난 뒤 더이상 제재를 받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독립단 군인이 남편을 죽이고 그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소문이 돌자, 검무감 김관성이 검무원을 시켜서 김시영을 체포해 매를 난타하고 김시영을 따랐던 독립단 간부들을 모두 부대에서 내쫓게 했다.
전덕원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부하들이 모욕당했다고 여기고 복수할 기회를 엿봤다. 1922년 10월 14일, 그는 독립단 군인을 소집하여 이종성의 집에 머물고 있던 양기탁, 현정경, 김관성, 황동호 등 10여 명을 포박하고 조선총독부의 정탐으로 만주 독립군의 파괴공작을 한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살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가 사살되었고 양기탁과 현정경, 김관성, 황동호 등은 난타당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 주요한 목표였던 비서과장 고활산을 잡지 못하자 달아났다. 이후 전덕원은 통의부를 탈퇴하고 의군부를 수립했고, 김관성은 통의부에 남아서 의군부와 대립했다.
김관성은 통의부에서 활동하는 한편 지린성 회덕현 오가자에서 요하농장(遼河農場)을 경영하면서 변대우(邊大愚) 등과 함께 농민을 이주시키는 등 재만한인을 위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1923년경 장진환(張鎭煥)과 함께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관성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